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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경찰이 저희 집에 와서 남편의 죽음에 대해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살로 결론내렸죠. 한데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제가 남편을 12층에서 밀었으니까요.” 한 여자가 죄의식이라는 중력에 끌려 살인을 저지른 지 10년 만에 경찰서를 찾아가 자백한다. 다음날이면 공소시효 만료, 주말이 기다리는 퇴근 세 시간을 앞두고 난데없는 살인 자백을 듣게 된 경찰은 자칭 살인자와 이야기를 시작한다. 살인자는 체포되어 죄의식을 벗고자 하고, 경찰은 자정을 넘겨 공소시효 만료를 유도하고자 한다. 경찰이 공소시효 만료를 유도하는 까닭은 단순히 그 자신이 퇴근하고 주말을 즐기려는 욕망 때문만은 아니다.
<중력의 법칙>은 자백하는 범인과 만류하는 경찰의 대화로 이루어진다. 대화 속에서 과거의 범죄를 둘러싼 이야기가 점점 구체화된다. 과거와 현재가 대화로 중첩되는 이 책에서, 범인의 선량함과 경찰의 불량함이 대조를 이루는 것 역시 흥미롭다. 이미 14년 전에 끝난 사건을 흥미
범인의 자수를 만류하는 경찰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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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배수아가 번역한 독일 작가 마르틴 발저의 2006년작. 이 책의 원제 ‘앙스트블뤼테’는 전나무가 이듬해 자신이 죽게 될 것을 감지하면 그해 유난히 화려하고 풍성하게 꽃을 피워 올리는 현상을 가리킨다. 두려움으로 인한 만개. 노년에 찾아온, 존재를 뒤흔드는 사랑에 모든 것을 내준 한 남자의 이야기에 그보다 적합한 단어는 없을 것이다. 성공한 투자상담가인 71살인 카를은 아내 헬렌과 만족스럽게 살고 있다. 그는 투자를 원하는 영화감독과 여배우 요니를 만나게 되는데, 서른살의 요니와 사랑에 빠진다. 카를은 요니에게 극도의 집착을 보이지만 투자가 마무리되면서 그녀는 그에게서 멀어진다. 그의 아내 역시 그의 곁을 떠난다. 이 책이 보여주는 카를의 사랑은 비단 젊은 여자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투자상담가인 그는 투자의 효율을 극대화해 최고의 수익을 낳는 일에서도 만족을 느낀다. 아내 헬렌에게 쓴 카를의 편지는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 중 하나인데, 이 나이 든 남자가 자신의 욕망을
생의 최후에 가장 아름다운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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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안에게 베니스 황금사자상을 안겨준 <색, 계>는 50쪽이 겨우 넘는 단편소설이 원작이다. 영화가 왕치아즈와 리의 과거와 현재를 3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을 통해 탄탄하게 쌓아가는 반면, 장아이링의 원작은 상하이에서 재회한 둘의 관계에 주목한다. 짧은 분량임에도 줄거리는 물론 인물들의 심리까지 녹여, “영화적 감각이 살아 있는 소설”이라는 평과 문단에 발표한 뒤에도 30년에 걸쳐 고치고 다듬었다는 뒷이야기가 실감난다. 이 책에는 표제작 외에도 <망연기> <머나먼 여정> <해후의 기쁨> <못잊어> <재회> 등 단편 6편과 희곡 <연애는 전쟁처럼>이 실렸다. 장아이링의 작품은 대부분 여성이 주인공이다. 24살에 초혼에 실패하고 루머와 가십의 주인공이 되어 여자로서 또 작가로서 은둔하다 끝내 미국으로 떠났던 격정적인 개인사가 투영된 듯, 작중 캐릭터의 심리에 대한 통찰이 뛰어나다. 전쟁을 겪은 대륙과 홍콩의 공간적
리안의 능력을 재확인하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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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먼 제국, 한밤중 땅이 세번 흔들렸고 서쪽 하늘에 큰 별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왕이 예언자에게 물었다. 예언자 천신 운밀이 고하길, 하늘의 운명을 지닌 아이가 태어났고 그 아이는 왕후의 운명을 가졌으니 기다리면 언젠가는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온유하고 정의로운 율나라의 왕자 ‘기’, 명석하고 야망이 큰 휘나라의 왕자 ‘군’, 영리하나 질투가 많은 군의 후궁 ‘하’, 왕후를 흠모하는 휘나라의 청년귀족 ‘황현’, 왕후의 비밀무사 ‘일학’, 그리고 왕후의 운명으로 태어난 ‘공진향’. 이들을 둘러싼 권력과 사랑 이야기.
소설이나 영화 시놉시스냐고? 아니다. ‘후’라는 LG생활건강의 화장품 브랜드 광고다. 화장품 광고 하면 떠오르는 유형의 광고들과 매우 다르다. ‘후’의 광고 캠페인은 드라마 타이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꾸며 그 속에 ‘왕실에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아름다움의 비법’이라는 브랜드 컨셉과 개별 제품의 특징을 교묘하게 녹인다. 가상의 스토리를 담고 있는
[CF] cf군과 스토리양의 이야기 한번 들어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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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 마니아에겐 지난 겨울이 악몽으로 기억될 것이다. 미국 작가협회 파업으로 인기 시리즈들이 줄줄이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를 목격했으니 말이다. 고난 끝에 다시 한국을 찾은 <그레이 아나토미 시즌4>가 더 반가운 이유다. 시애틀 그레이스 병원의 다섯 인턴들 중 네명은 이제 레지던트로 성장했다. 의사로 한 발짝 다가섰다는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잠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내달리는 그들의 일상은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다. 닥터 버크 역의 아이제이아 워싱턴이 지난 시즌을 끝으로 하차하면서 크리스티나와의 로맨스가 이어지지 않는 점은 아쉽다. 5월25일부터 매주 일요일 밤 11시25분에 KBS2를 통해 총 17회가 전파에 오른다.
[이주의 추천프로] 그레이스 병원, 다섯 인턴의 컴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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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연예인, 혹은 사건·사고 현장을 향한 ‘스포트라이트’가 180도 방향을 틀었다. 지난 5월14일부터 전파에 오른 MBC 수목드라마 <스포트라이트>는 사회의 파수꾼 ‘기자’를 지목했다.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SBS의 <온에어>에 이어 또 한번 대중매체 속 전문직을 그린 드라마가 열기를 이어갈지 관심사다.
‘스포트라이트’는 극중 GBS방송사의 대표 뉴스 프로그램 제목으로, 사회부 2진 서우진(손예진)이 서울시경 출입기자를 속칭하는 ‘캡’ 오태석(지진희)의 휘하에서 반듯한 기자로 성장하는 내용을 그린다. 경찰출입기자는 군대로 치면 야전부대와 같이 최전선에 위치한 기동취재팀으로, 놀랍도록 빡빡한 일상을 견뎌야 한다. 언론사에는 정치·경제·문화 등 다양한 분야가 있지만, 모든 기자들은 수습 때 같은 훈련을 거친다. 때문에 실제 기자들 역시 때론 삐딱한 시선으로, 때론 공감의 손뼉을 치며 <스포트라이트>를 주시하고 있다.
“‘마와리’ 돌고
[TV] 사회의 파수꾼, 스포트라이트를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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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출몰 지수 ★★★★
귀신 비주얼 지수 ★☆
반전 충격 지수 ★★
타이 공포영화는 이미 한국 관객에게 낯설지 않다. <셔터>(2005)와 <샴>(2007)은 말초적 자극에 질린 한국의 호러 팬들에게 신선한 자극이 됐다. 그 미덕은 “꼼꼼한 드라마투르기”(<씨네21> 509호, <셔터> 리뷰)와 충실한 기본기에 있었다. <바디>는 이 두 영화를 만들어 타이의 공포영화 붐을 주도한 제작사 GTH의 최근작으로, <셔터>와 <샴>의 후예를 자처한다. 초반 5분까지는 그 말이 맞다. 프리마돈나의 고혹적인 미성이 오페라 홀에 울려퍼지는 순간, 어두운 뒷골목에는 누군가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된 자의 토막 시체가 나뒹군다. 긴장과 공포, 슬픔과 공포를 적절히 섞을 줄 알았던 GTH의 두 영화를 떠올린다면, <바디>가 아름다움과 공포의 결합을 도모할 것이란 생각을 떨칠 수 없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간다. 영화
찰나의 공포만 선사하는 <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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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파치노 ‘노가다’ 지수 ★★★★
인명 경시 지수 ★★★
살인게임 지능지수 ★★
존 애브넛 감독이라, 이름이 머릿속을 어른거릴 만하다. <레드 코너>(1997) 이후 제작에 열중하고 주로 TV무대에서 활동하다 무려 10년 만에 연출한 영화라 더 그렇다.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1991)가 데뷔작이었다고 말하면 무릎을 탁 칠 것이다. 이후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작은 전쟁>(1994)과 로버트 레드퍼드, 미셸 파이퍼 주연의 <업 클로즈 앤 퍼스널>(1996)에 이르기까지 만장일치의 작가적 평가를 얻은 건 아니지만 가족·멜로 장르에서 제법 솜씨 좋은 장인의 모습을 보여준 감독이다. 그에 비하면 R등급 수준의 묘사가 제법 포함된 범죄스릴러 <88분>은 전혀 의외의 선택이다. 그의 변화를 가늠해줄 수 있는 전조는 그가 연출한 TV영화 중에도 없었다. 게다가 영화는 88분이라는 꽉 짜인 시간 안에서 펼쳐지는 ‘예고 살인’의 스릴러
‘예고 살인’의 스릴러 <8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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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배우들의 몸고생 지수 ★★★★
그 고생을 바라보는 관객의 마음고생 지수 ★★★★
(의외의) 화장실 유머 시도 지수 ★★★★
박구(신구)는 이기적이고 퉁명스러우며 씩씩한 노인이다. 감옥과 가출을 밥먹듯 시도하는 아빠(김영호)가 간만에 선물한 방울 토마토 화분을 품고 잠이 드는 박구의 손녀 다성(김향기)의 되바라진 말투 역시 평범한 무구함과는 거리가 멀다. 다성의 아버지는 철거보상금이 담긴 통장과 함께 사라지고, 이웃들의 결사투쟁에도 불구하고 철거는 당연히 진행되며, 개발업자는 물론 이들의 항의에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박구와 다성은 이 개발업자의 집이 비었음을 확인하고 먹을 것이 가득한 저택을 안식처 삼는다. 이들의 안식이 짧고 불안할 것임은 예상 가능한 기정 사실. 날은 추워지고, 눈이 나쁜 다성이 넘어지는 횟수도 잦아지며, 할아버지와 손녀를 향한 우리 사회 불특정 다수의 인심은 무심하고 모질다.
그러니까 <방울 토마토>는 철거촌 빈민을 배경으로 가족애와 이웃
가족애와 이웃사랑을 강조하는 ‘착한 영화’ <방울 토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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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닝타임 대비 음악 나오는 시간 ★★★★
제작진의 밥 딜런 이해도 ★★★★
이 영화‘만’으로 밥 딜런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 ★★
밥 딜런을 아시나요. 기타 하나로 시대의 양심을 대변했던 음유시인? 일렉 기타를 집어들자 변절자 소리를 들어야 했던 록가수? 오토바이 사고 이후를 포함하여 50년 가까이 잠적을 반복했던 은둔자? 지면관계상 생략할 수밖에 없지만 모두 다른 정체성을 지닌 그 누군가들? 그의 대표곡(처럼 되어버렸으나 그가 평생 벗어나려 애썼을) <Blowin’ in the Wind> 속 한 구절로 진부하게 대답하자면, ‘친구여, 그건 바람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짧은 필모그래피 속 변덕으로 치자면 밥 딜런 뺨 칠 만한 토드 헤인즈의 생각은 좀 달랐다. 그 대답은 인간의 일생 혹은 인간 그 자체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조금만 달리하면 얼마든지 정답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그리고 그는 나이, 외모, 인종, 성별이 다른 여섯 배우를 동원하
밥 딜런에 대한 일곱개의 초상 <아임 낫 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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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시튼 커처 완소 지수 ★★★☆
과음 경각 지수 ★★★☆
영화적 사고력 지수 ★☆
“생각하는 것 빼곤 다 저질러라!”(Do it without thinking!) 시 차원의 슬로건처럼 라스베이거스는 ‘사건’이 일어나기 쉬운 곳이다. 라스베이거스에선 카지노의 대박 또는 쪽박을 맞을 수 있으며, 결혼과 이혼을 마음대로 할 수도 있다. <라스베가스에서만 생길 수 있는 일> 속 남녀 주인공은 결혼과 대박이라는 두 종류의 일을 동시에 겪게 된다. 보기에 따라 커다란 겹행운일 수도 있지만, 이들의 사정을 알아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월스트리트에서 숨가쁜 나날을 보내는 조이(카메론 디아즈)는 “넌 너무 숨막힌다”는 말을 들으며 공들여온 남자친구에게 잘리고, 아버지의 가구 제조업체에서 근무하며 느슨하게 살아온 잭(애시튼 커처)은 “넌 마음에 안 들면 포기해버리는 성격”이라면서 회사에서 잘린다. 인생의 중요한 끈을 잘린 남녀는 친구 한명씩 대동한 채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라스베이
‘어른아이’들이 떨어대는 수선 <라스베가스에서만 생길 수 있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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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적 쾌감지수 ★★★
도시밤의 향락지수 ★★
조마조마 긴장지수 ★★★
제임스 그레이의 세 번째 작품 <위 오운 더 나잇>은 갱스터영화로 시작해서 경찰영화로 마무리짓는 작품이다. <리틀 오데사>(1994)와 <더 야드>(2000)에서부터 갱스터영화에 일가견이 있음을 보여줬던 제임스 그레이는 다시 한번 도시의 밤을 부유하는 남성들의 세계로 시선을 향하지만, 전작과 달리 그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갱과 경찰간의 도시 쟁탈전과 그 사이에서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주인공 바비(와킨 피닉스)의 심리적 혼란이다. 특히 와킨 피닉스는 도시의 밤을 만끽하는 활력에 찬 모습에서부터 표정이 거세된 무표정한 모습까지 폭넓은 연기를 보여준다. 1980년대 말 뉴욕 나이트클럽의 매니저로 있는 바비는 경찰 서장인 아버지와 촉망받는 뉴욕 경찰인 형 조셉(마크 월버그)이 부담스럽기만 하다. 가족과 거의 관계를 끊고 살아가던 바비는 아버지의 승진 파티에 초대받지만 가족과의 거
도시의 밤을 부유하는 남성들의 세계 <위 오운 더 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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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어린이에게 위인전을 많이 읽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린 시절 위인전을 읽어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배우며 자랐다. 위인전집은 당시 어린이가 있는 웬만한 집에 한질씩 꼭 있었고, 그러다보니 커서 어떤 사람이 될래라고 물으면 나오는 답도 그 집에 있는 위인전집의 인물 가운데 하나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만인이 칭송할 만한 인물의 모범적 삶을 닮았으면 하는 부모의 바람이 생각대로 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위인전에 없는 많은 사람을 알게 되고 나의 재능이 책 속의 인물들과 다른 것에 좌절하기도 하며 더러 위인전이 사기를 쳤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황우석 박사의 전기처럼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뒤통수를 맞았던 예는 극단적이지만 나폴레옹이나 칭기즈칸 같은 정복자를 찬양하는 경우도 관점에 따라 배신감을 갖게 만든다. 그런 사람도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정도라면 도움은 될 텐데 대체로 위인전이 노리는 바는 단순한 사실 전달만이 아니다. 위인을 닮고 싶게끔 교훈을 줘야 한다는
[편집장이 독자에게] <아임 낫 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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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장이 <아임 낫 데어> 재미있게 즐기는 법 ‘인물 참고 편’이라면 이 장은 ‘작품 참고편’이다. <리날도와 클라라>(1977), <하트 오브 파이어>(1987), <가장과 익명>(2003) 등 밥 딜런이 연출, 각본, 출연 등으로 참여한 극영화들이 있지만 <아임 낫 데어> 보기의 재미를 위해서라면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 밥 딜런 열성 팬에게만 추천한다. 극영화를 반드시 한편 보아야 한다면 <관계의 종말> 한편이면 무난하다.
다큐멘터리의 경우 D. A. 페니베이커가 밥 딜런의 1965년 영국 투어에 동행하여 촬영한 <돈 룩 백>(1967)이 최초다. 밥 딜런이 카메라 앞에 서서 종이에 쓴 가사를 한장씩 넘기는 장면으로 유명하다. 그때 화면의 후경(왼쪽)에서 앨런 긴즈버그가 어설프게 설정된 연기를 선보이는 광경을 놓치지 말 것. <아임 낫 데어>의 쥬드가 <돈 룩 백>의 이 장면을
<아임 낫 데어> 솔직한 밥 딜런을 만나기 위해 참고하면 좋을 작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