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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보다 어딘가에>를 뒤늦게 봤다.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상영할 때부터 보고 싶었던 작품이었는데 어쩌다보니 이제야 보게 됐다. 영화를 보는 내내 주인공 수연과 동호의 일상에 지난 몇달간의 내 모습이 겹쳤다. 백수인 수연이 “이럴 때일수록 내게 투자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부모에게 대들 때 “돈 달라”는 말 한마디 꺼내기도 힘들었던 소심한 내 모습이 떠올랐고, 복학한 동호가 학교 식당에서 식판을 들고 두리번거릴 때는 후배들이 늘어난 낯선 교정을 하릴없이 걷던 생각이 났다. 그렇게 과거를 복구하다 보니 잊고 있던 장면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 올해 초, 얼굴이 아릴 정도로 바람이 세게 불던 날의 일이다.
시작은 문자 한통이었다. “오늘 볼까?” 친구 A의 한마디에 독서실에서 명상 중이던 나는 가방을 쌌다. 졸업이 한달 앞으로 다가왔는데 취업의 길은 요원했다. 시켜만 준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무도 내가 필요하지 않은 것 같았고, 당장 내일까지 끝내야 할
[오픈칼럼] 여기가 아닌 어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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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존 포드요. 웨스턴을 만듭니다. 미국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 방에서 세실 B. 드밀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어떻게 보여주는지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세실 B. 드밀을 바라보며) 그러나 나는 당신이 싫소. 당신이 지지하는 것도 싫소. 오늘밤 여기서 당신이 말한 것도 싫소.”
매카시즘이 불어닥칠 때 감독협회에서 존 포드가 행한 연설의 일부다. 당시 협회는 조셉 맨케비츠가 회장이었는데, 그는 일부로부터 친공산주의자라고 비판을 받았다. 이를 주도한 인물이 세실 B. 드밀이었다. 드밀과 그의 추종자들은 무려 4시간에 걸친 연설을 하며 매카시즘 전파의 선봉에 섰다. 드밀은 협회의 모든 감독들은 ‘충성맹세’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분위기를 압도했다. 이때 드밀에게 정면으로 반박한 인물이 바로 존 포드였다.
“나는 존 포드요. 웨스턴을 만듭니다”
연설에는 존 포드의 두 가지 특성이 드러나 있다. 우선 반골기질 혹은 아웃사이더로서의 비판
[걸작 오디세이] 웨스턴은 존 포드의 동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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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미스 페티그루의 어느 특별한 하루>를 본 건 순전히 프랜시스 맥도먼드와 에이미 애덤스 때문이지만, 중간에 짠하고 왕자님처럼 등장한 시아란 힌즈를 보고 반가워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전 늘 이 뚱한 외모의 중년 남자를 무척 로맨틱한 배우라고 생각해요. <미스 페티그루의…>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물론 연속극 왕자님처럼 화려한 외모와 언변을 과시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공허한 상류사회의 삶에 지쳐 우울해지고 배도 많이 나온 보통 부자 아저씨에 불과하죠. 여기서 그가 ‘왕자님’의 공식적인 기능을 수행하게 돕는 건 그의 재력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가 프랜시스 맥도먼드와 골목에 버려진 낡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지난 전쟁 때 죽은 친구들과 연인들을 회상하고 곧 닥칠 다음 전쟁에 대해 염려하면서 서로를 위로할 때, 전 이 영화의 로맨스가 완성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외모만 봐도 썩 잘 어울렸지요. 지금의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골격이 뚜렷하고 조금
[듀나의 배우스케치] 시아란 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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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고死: 피의 중간고사>와 <외톨이>의 스포일러가 대거 포함되어 있습니다.
갑갑하고 안타깝다. 올해 개봉한 단 두편의 한국 공포영화 <고死: 피의 중간고사>(이하 <고死>)와 <외톨이>를 보고 난 심정이 그렇다. 진정 기사회생의 돌파구는 없는 것일까.
2007년에 개봉했던 공포영화들이 줄줄이 흥행에 고배를 마시면서 2008년에는 신작 한국 공포영화를 단 한편도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예년에 비해 확연히 줄어들었을지언정 올해도 두편의 한국 공포영화가 극장에 걸려 그 명맥을 유지했다. 한데 막상 영화를 보고난 뒤에는 또 다른 불안감이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이제 한국 공포영화가 ‘고사’(枯死) 위기에 처했으며 이대로 가다가는 이 땅에서 공포영화가 아무에게도 환대받지 못하는 ‘외톨이’ 장르로 전락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두 영화의 제목마저 한국 공포영화의 암울한
[영화읽기] 때깔과 눈물에 얽힌 편집증을 걷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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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하루>는 독특한 영화다. 연인이었던 남녀가 재회하여 하루 동안 함께 돌아다닌다는 설정에서 사랑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멜로물을 떠올렸거나 상반된 캐릭터의 남녀가 티격태격하다 키스로 끝맺는 로맨틱코미디를 기대했다면 맨송맨송한 결말에 ‘뭥미?’를 외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무미건조하진 않다. 로맨틱코미디 못지않은 웃음과 멜로영화와는 뒷맛이 다른 묘한 여운을 남기는데, 그 웃음과 여운은 바로 (하정우에 의해 완벽하게 구현된) 병운이라는 독창적인 캐릭터와 스산한 경제현실의 섬세한 묘사에 기인한다.
1. 이 남자가 사는 법-병운은 윤리적 인간인가?
<멋진 하루>는 철저하게 캐릭터에 의존한 영화이며, 그중에서도 병운 캐릭터가 절대적이다. 따라서 병운에 대한 가치판단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능청스러운 날건달’(<오마이뉴스> 박영신 기자, 이윤기 감독 대담)부터 ‘순수하고… 팅커벨 같은 존재’(<씨네21> 박혜명
[영화읽기] 쓸쓸히 무너져버린 중산층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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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기봉은 제의로서의 집단적 죽음이라는 결말에 종종 매혹되는 것 같다(<익사일> <미션> <대사건>). 하지만 그가 위가휘와 공동 연출한 <매드 디텍티브>만큼 그 제의적 결말에 모든 것을 거는 영화는 없었다. 난반사하는 거울 조각들, 잘못 쥐어진 권총들, 다성(多聲)과 다중 이미지의 중첩이 시청각을 교란하며 현란한 총격의 몽타주가 시작되면 이것이 죽음의 제의인데도 너무도 아름다워 혼돈의 군무처럼 느껴진다.
여기엔 <와일드 번치>류의 손상되는 신체에 대한 페티시즘 대신 모종의 종교적 엄숙함이 있다. 어두운 무표정이 표정의 전부였던 미친 형사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눈물을 머금은 채 힘없이 쓰러진다. 지금까지의 어지러운 사건들은 오직 이 순간의 한없는 숙연함을 위해 봉사한다. 물론 제의의 끝은 죽음이다. 그런데 한 사람이 살아 있다. 이 숭고한 제의로부터 이탈한 인물. 그는 당연히 알리바이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게 성립될까.
되짚어보
[전영객잔] 광기와 다중인격이 빚은 동정 없는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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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모던 보이> 모던선비 찰서 남기남
[정훈이 만화] <모던 보이> 모던선비 찰서 남기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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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 피곤한 남자다. 꿈만 꾸면 헤어진 연인이 나타나고, 깨어나면 란이라는 여인이 자신의 몽유병을 책임지라고 한다. 란도 피곤한 여자다. 눈만 감았다 하면 몸이 진의 꿈대로 움직이고, 경찰은 잠결의 행동을 증거 삼아 그녀를 채근한다. 꿈 때문에 피곤한 이 두 남녀가 김기덕 감독이 만든 <비몽>의 주인공이다. 김기덕은 피곤한 영화를 지향하는 감독이다. “쓰레기 더미를 헤치면 향기가 난다”, “눈뜬 세계보다 눈감은 세계에 심취해 있다”는 감독의 세계관은 이 영화에서도 명징한 줄거리보다 기호와 상징에 중점을 두고 있다. 쓰레기 더미를 헤치는 대신 꿈과 현실을 충돌시켜 그 파편에서 비장한 아름다움을 이끌어내는 것이 <비몽>이다.
인기의 기본 조건인 근사한 외모는 물론, 폭넓은 작품 선택과 기행으로 한국인의 입에도 자주 오르내리는 일본 배우 오다기리 조가 ‘진’의 역할을 맡아 꿈과 환상 속을 헤맨다. 현해탄까지 건너와 이 몽중설몽의 한복판으로 뛰어든 속내가 궁금해지는
[오다기리 조] 김기덕은 기타노 다케시와 비교해도 개성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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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것’들은 공격의 대상이다. 백옥 같은 피부, 커다란 눈망울, 오똑한 코, 도톰한 입술. <미쓰 홍당무>의 러시아어 교사 ‘이유리’의 모든 것은 외모콤플렉스 덩어리 ‘양미숙’(공효진)을 미치게 한다. 양미숙과 함께 서 선생(이종혁)을 사랑하는 이유리는 양미숙 최대의 적. 그녀가 “전 가만히 있는데 자꾸 전화가 와요”라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할 때, “사랑하는 남자랑은 두손 꼭 잡고 잠만 자는 게 소원이에요”라며 눈을 동그랗게 뜰 때, 그 말을 들으며 붉으락푸르락 변하는 양미숙의 얼굴색은 세상 모든 여자들의 색깔을 대변한다. “어릴 적 예뻐서 지탄의 대상이 됐다”는 황우슬혜는 자신의 경험을 십분 발휘, 이토록 얄미운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낸다. “오디션 보는데 너무 이유리 같아서 소름끼쳤다”는 이경미 감독의 말처럼 그녀는 내로라하는 여배우들을 조금씩 따다놓은 듯 참 예쁘다. “어릴 땐 공주병이었지만, 지금은 털털해요. 감독님은 제 외모가 아니라 연기를 보시고 똑같다
[황우슬혜] 요조와 요염, 그 사이 어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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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진흥위원회의 영상투자조합 출자 사업이 국정감사 도마에 올랐지만 정작 영진위쪽에선 적극적인 해명이 나오지 않아 영화계 안팎의 의구심을 사고 있다. 10월6일 문화체육관광부에 대한 국회 국정감사에서 한나라당 진성호 의원은 영진위의 해당 사업에 공정성 시비를 제기했다. 진 의원은 “MK픽처스의 이모 대표가 ‘영화 다양성을 위한 전문 투자조합’ 심사위원장이었고, 그의 부인인 MK픽처스의 심모 이사가 영진위가 출자한 영상전문투자조합의 진단, 평가위원으로 활동했다며, “투자조합이 특정 관계조합원의 사금고로 전락될 여지가 있다”고 시정을 요구했다. 진 의원은 더 나아가 영진위가 2000년에서 2007년까지 출자한 32개 영상전문투자조합 중 현재 운용 중인 23개 조합의 수익률은 평균 -10.1%’에 불과하다며, 영진위 내부의 실책이 한국영화 침체를 불러왔다고 덧붙였다.
영진위는 이 사안에 대해 10월9일까지 어떠한 공식적인 입장도 발표하지 않은 상태다. 진 의원이 지목한 MK픽처스의 이은
[포커스] 강한섭 위원장과 영화계, 정면충돌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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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한 도덕성에 둘러싸인 현실을 보여주려 했다”
원작자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 각본가 윌리엄 모나한, 프로듀서 도널드 드 라인 인터뷰
-어떻게 이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되었나.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 원래 리들리 스콧과는 ‘The Invisible World’라는 기존의 시나리오 각색건으로 함께 작업하고 있었다. 이라크 전쟁을 취재 중인 여성 저널리스트가 현지의 이라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짐으로 둘 다 위험에 처해지는 내용인데 그 프로젝트 때문에 여기 도널드나 윌리엄 모두가 본격적으로 모이게 되었다.
=윌리엄 모나한: ‘The Invisible World’로 이른바 데이비드가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는 셈이었으니까. (데이비드를 보고 씩 웃는다.) 그러다가 리들리가 데이비드의 <바디 오브 라이즈> 원고를 건네주더라. 정말 뛰어난 첩보물이었다. 이런 작품을 놓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소설이 처음으로 영화화된 셈인데 영화를 보니 어떤가.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
<바디 오브 라이즈> 인터뷰 - 리들리 스콧,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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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스트리트 저널>의 CIA 및 중동 지역 담당 베테랑 기자였던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바디 오브 라이즈>는 리들리 스콧이 감독을, <디파티드>의 윌리엄 모나한이 각색을 맡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러셀 크로가 CIA 요원으로 나란히 등장하는 스파이 스릴러물이다.
요르단의 암만.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믿어서도 안 된다는 <바디 오브 라이즈>의 세계에서는 같은 대상을 바라보지만 끊임없이 충돌하는 두 가지 시각이 있다.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CIA 요원 페리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긴박한 현실이 그 하나라면 나머지 하나는 수만 마일 떨어진 워싱턴에서 휴대폰으로 지시를 내리는 그의 독단적인 상관 호프만(러셀 크로)이 위성카메라로 바라보는 픽셀화된 현실의 이미지이다. 이 두 시각은 서로 대립하면서 동시에 서로 보완하고 있다. CIA라는 조직이 중동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를 묘사하고
<바디 오브 라이즈> 모든 인물들이 속고 속이는 스파이 스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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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가 비탄에 잠겼다. 지난 9월26일, 폴 뉴먼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향년 83살. 배우이자 감독이었고 제작자이면서 운동가, 성공한 사업가인 동시에 레이싱 경주를 즐기던 스크린의 전설은, 오랜 암투병 끝에 코네티컷의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1925년 오하이오에서 태어난 폴 뉴먼은 젊은 시절 인상적인 외모로 거친 반항아 또는 패배자를 연기해 캐릭터 배우로 입지를 확고히 했다.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허슬러> <허드> 같은 전성기 대표작을 통해 10번이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나중에 마틴 스코시즈가 감독한 <컬러 오브 머니>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2007년, 더이상 최고의 연기를 보여줄 수 없게 되었다며 은퇴했다. “내가 원하는 수준만큼 연기할 수 없게 됐다. 기억을 잃기 시작할 것이고, 자신감도 잃기 시작할 것이다. 창작에 대한 욕구도 그럴 것이다.” 외모와 연기력으
[폴 뉴먼] 메소드 스타의 죽음, 메소드 연기의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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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강아지, <베버리힐스 치와와>가 2주 연속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했다. 드류 배리모어와 앤디 가르시아, 플라시도 도밍고 등이 목소리를 빌려준 동물들이 출연하는 가족영화는, 개봉 첫주 가족관객을 사로잡은 데 이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러셀 크로가 출연한 <바디 오브 라이즈>, 데니스 퀘이드의 <익스프레스>를 제치고 연이어 왕좌를 지키는 데 성공했다. <베버리힐스 치와와>의 2주 째 수입은 1750만달러로, <AP>는 "심각하고 진중한 드라마가 넘치는 가운데, <베버리힐스 치와와>만이 유일하게 가벼운 영화"라는 디즈니 배급 담당의 말로 2주차 흥행요인 분석을 대신했다. 한편, 대규모 테러사건에 투입된 CIA요원 둘 사이의 긴장감 넘치는 두뇌싸움을 그려낸 리들리 스콧 감독의 신작 <바디 오브 라이즈>는 개봉 주말 1312만달러를 벌어들였으나 3위에 그쳐 정상을 탈환하는 데 실패했다.
2위는 공포영화
<베버리힐스 치와와>, 리들리 스콧 신작 이기고 2주 연속 1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