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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에 재일동포 최양일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다 그가 “서울도 이제 다인종이 모여 사는 메트로폴리스가 아닌가. 다른 인종끼리의 러브스토리도 나오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라고 물었던 적이 있다. 최양일의 대표작 가운데 한편인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에 관해 대화하다가 나온 말이었다.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는 택시기사로 일하는 주인공과 접대부로 일하는 필리핀 여성 사이의 연애담을 축으로 택시회사에서 일하는 각양각색의 일본인들과 비일본인들의 캐리커처를 역동적으로 이어가는 영화였다. 자신의 출세작이 된 이 영화를 거론하며 최양일은 폭발적인 소재가 될 수 있는 다인종 사회의 면면이 왜 스크린에 옮겨지지 않는지를 의아하게 여겼다. 그 당시에는 과연 그럴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다수가 관심없는 소재를 상업영화권에서 영화화할 리가 만무했다.
몇년이 흐른 뒤 요즘 독립영화권에서 이런 소재로 영화를 만드는 것이 어떤 흐름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최근 개봉작들만
[김영진의 점프 컷] 선한 의지의 강박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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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영화관의 편안한 좌석에 앉아 앞에 있는 커다란 스크린을 보다보면 미소가 번지는 작은 기억이 떠오른다. 전방사단의 군사진병으로 아마도 제대를 6개월 남짓 남겨둔 시점이었을 것이다. 사단정훈과에 벨앤드하우얼사의 16mm 영사기와 영화 여러 편이 들어왔다.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군정책의 하나였으리라. 지금은 덜하지만 내가 가진 재능이나 기술을 자랑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여 말하지 않고는 견디질 못하던 젊은 시절이었다. 그날 나는 바로 사단의 영사기사가 되었다. 사단직할대대를 돌며 영화를 ‘돌리는’ 막강한 보직을 갖게 되었다. 다른 작업에서 열외가 되고 내무반에서 점호도 면제가 되니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말이다.
영화를 상영할 부대에 도착하면 식판에 방금 끊인 라면이 담겨져 나왔고 새 군복과 군화도 받았고 힘있는 부대에선 여러 편의 영화를 보기 위해 외박증도 발급해주었다. 여러 번 접은 흰색 천을 펼쳐서 운동장의 나무와 나무 사이에 연결하면 그런 대로 괜찮은 스크린이
[오픈칼럼] 시네마 운동장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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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적 공포가 있다. 어머니가 생명을 주었으니 그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으리라는 두려움. 남성적 불안의 원초적 예다. 이빨 달린 여성 성기가 그 이미지 중 하나다. 그런가 하면 파마콘(pharmakon)이 있다. 파마콘은 상반된 의미인 독약과 약을 동시에 의미한다. 파마콘의 치료적 측면은 독약의 면모가 드러나지 않을 때 가능한 것이다. 파마콘이 약이 되는 것은 또 다른 측면인 독이 배제될 때이다. 치료로서의 파마콘은 독약과 약의 차이가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마더(mother)와 머더(murder)의 차이. 약재를 다듬는 마더와 머더(살인)를 하는 마더, 엄마와 어머니의 변주.
마더와 머더라는 원초경
영화는 들판에서 춤추는 여자(김혜자) 위에 ‘마더’라는 자막을 띄운다. 이 지면, 전영객잔에 정한석과 허문영이 장고 끝 장문의 평문을 실었기 때문에 나는 짧게 몇 가지 점만 운을 띄우려 한다. 나는 예컨대 마더의 욕망이 무엇일까 생각한다. 그녀의 필요는 무엇일까? 부족함 혹은
[전영객잔] 그 무력함의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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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그 미 투 헬>의 오프닝 크레딧에 등장하는 유니버설 로고는 다소 낯설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극장에서 볼 수 없는 유니버설의 옛 로고이다. 샘 레이미가 유니버설의 옛 로고를 스크린에 복귀시킨 것은 자신을 매혹시켰던 그 시절의 악마주의 호러영화, 혹은 현재의 자신을 가능하게 했던 <이블 데드> 시리즈에 대한 향수와 애정의 징표였을 것이다. 실제로 샘 레이미는 주술사의 전사(前史)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유니버설의 옛 로고 이후 덧붙이고 있는데, 그 시대적 배경이 바로 1969년이다. 짧게 등장하는 1969년의 이야기는 한 소년이 악마 라미아에 의해 ‘지옥으로 끌려가는’ 내용이고, 이후 라미아는 시간의 비약과 함께 누군가의 저주로 인해 현재의 시간으로 되돌아온다. 그렇게 샘 레이미는 시들해진 악마주의 호러영화(또는 <이블 데드> 시리즈의 기본적 설정)를 현재의 시간에 복고적으로 되살려내려 한다.
조악한 요즘 공포영화들과 차원이 달라
은행에서 대출
[영화읽기] 어디가 지옥입니까, 여기가 지옥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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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만에 밟는 런던보다 3개월 만에 밟는 홍대가 더 낯설다. 언젠가부터 그렇게 됐다. 있던 식당이 없어지고, 자주 가던 카페 주인이 바뀌고, 단골 약속 장소던 편의점은 공사 중이다. 유흥가뿐 아니라 집 근처도 마찬가지다. 식당 하나가 아니라 건물 하나 단위로 부서지고 짓기를 반복한다. 동네 중국집은 무료 탕수육을 먹을 수 있을 만큼 쿠폰을 모으기도 전에 문을 닫고 새 집이 들어서기가 예사.
아베 야로의 <심야식당>을 읽다가 침을 삼킨 건 밤마다 등장하는 맛있어 보이는 메뉴 때문이 아니었다. 단골 많은 그 식당이 탐나서였다. 심야식당은 밤 12시에 문을 여는 동네 식당이다. 주인 겸 주방장인 마스터는 재료가 있는 한 손님이 해달라는 어떤 음식이건 해준다. 마스터가 먹으려고 해두었던 어제의 카레가 손님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기도 하고, 샌드위치를 원하는 손님이 빵을 사와 마스터에게 내밀며 주문을 하기도 한다. 밤에만 여는 식당이니 손님들도 예사롭지 않다. 동네 건달, 게이
[이다혜의 작업의 순간] 내 단골집 다 어디갔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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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어도 걸어도>의, 스포일러라면 스포일러일 수도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외국에서 오랫동안 지내본 경험은 지난해 겨울 유럽에서의 석달이 전부였지만 지난주 김연수씨의 충고는 깊이 새겨둘 만하다. 외국으로 여행 갔을 때 정색하면 지는 거다. 어떻게든 웃으면서 즐겨야 하고, 모든 것을 기쁜 마음으로 새롭게 받아들여야 한다. 당황하거나 외로워하거나 허둥지둥하면 지는 거다. 여행이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정색하지 않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가끔은 당황하거나 외로워하거나 허둥지둥하는 게 여행의 묘미이기도 하다.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일이 꼬였는데 말은 통하지 않을 때 느끼는 막막함이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외로움의 정수가 아닐까 싶다.
여행 준비를 할 때마다 제일 먼저 챙기는 것은 음악이다. 음악을 챙기는 이유는 간단하다. 외로울 때 듣기 위해서다. 영국 리버풀의 사람들 틈에 끼어 비틀스를 듣는다면 어떨까, 추운
[나의 친구 그의 영화] 남 신경 쓸 필요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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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88서울올림픽. 메달의 색깔을 결정하는 중요한 경기에서 역도선수 이지봉(이범수)은 오랜 지병이 도져 쓰러진다. 선수생활을 끝낼 수밖에 없었던 그는 나이트 삐끼로 일하던 중 전 코치의 배려로 보성여중의 역도 코치로 발령받는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역도를 떠난 지 오래. 그런 그를 탈바꿈시키는 건 천진한 시골 소녀들이다. 통짜 라인을 타고난 영자(조안)와 뚱뚱해도 가장 순정파인 현정(전보미), 엄마를 극진히 위하는 여순(최문경), 괴력의 소유자 보영(김민영), “FBI가 되는 게 인생 목표”인 수옥(이슬비), 역도복의 매력에 빠져든 민희(이윤회) 등 역도부 6인방이 바로 그들이다.
한국영화에서 찾자면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천하장사 마돈나>와 같은 핏줄이다. 뼈대는 실화를 토대로 여성 운동선수를 내세운 스포츠영화요, 내용은 그들의 성장통을 짚어내는 학원드라마에 가깝다. 특출난 면을 꼽자면 핸드볼만큼이나 비인기 종목인 역도를 풋풋한 소녀들에게
역도부 6인방의 성장담 <킹콩을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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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
창백한 얼굴의 이레나(크세니야 라포포트)는 허름한 행색이지만 주머니엔 돈다발이 두둑한, 베일에 싸인 여자다. 이레나가 우크라이나에서 이탈리아에 온 목적은 하나. 보석상인 아다처 부부의 집에 가정부로 들어가기 위해서다.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 사는 이레나는 부부의 집이 내려다보이는 아파트를 구하고, 부부가 사는 건물의 계단을 닦으며 천천히 그들에게 접근한다. 기존의 가정부를 계단에서 밀어 굴러뜨리면서까지 그 자리를 차지한 이레나는 부부의 어린 딸 테아(클라라 도세나)에게 이상할 정도로 집착을 보인다.
* 스포일러 있습니다.
<시네마 천국>의 감독 주세페 토르나토레와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가 협연한 <언노운 우먼>은, 어두운 과거를 피해 도망치는 여자 이레나의 기구한 인생을 중심에 놓은 스릴러다. 러시아 출신의 크세니야 라포포트는 부스스한 머리칼의 이레나와 염색한 금발의 조지아, 두 역할을 동시에 연기했다. 이레나는 한때 조지아라고 불
이레나의 기구한 인생 <언노운 우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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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30일(화)부터 7월12일(일)까지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와 주한스페인대사관이 공동주최하는 ‘스페인영화제’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2003년경부터 지속적으로 스페인영화제를 선보여왔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기존의 스페인영화를 대변해온 훌리오 메뎀, 페레 포르타베야, 하이메 로살레스를 위시하여 떠오르는 감독들인 호세 코르바초, 후안 크루즈, 라파 코르테스의 작품들을 상영한다. 이들 감독들이 연출한 2005년부터 2007년 사이의 근작 11편을 볼 수 있는 기회다.
개막작은 <북극의 연인들> <루시아> 등으로 유명한 훌리오 메뎀의 신작 <혼란스러운 아나>다. 아버지와 함께 동굴에서 생활하며 자유롭게 예술가의 꿈을 키우는 십대 소녀 아나가 어느 날 마드리드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마드리드에서 아나는 우연히 최면 상태를 경험하게 되고 최면에 빠진 아나는 자기의 무의식 속에서 어떤 여성들의 비극적 삶을 보게
<바흐 이전의 침묵> 꼭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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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드래그 미 투 헬> 내가 왜 지옥행이야?
[정훈이 만화] <드래그 미 투 헬> 내가 왜 지옥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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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이하 <트랜스포머2>)이 박스오피스 기록을 줄줄이 경신하며 슈퍼스타로 떠올랐다. 6월24일 수요일에 다른 신작들보다 이틀 앞서 개봉한 <트랜스포머2>는 수요일 하루만 6060만달러를 벌어들였으며, 주말 3일 동안 1억1200만달러, 개봉 첫주 누적수입은 2억120만달러에 달한다. 2009년 개봉작 중 최고개봉기록을 갱신했음은 물론이고, IMAX 스크린 수입으로도 최고다. 속편의 예고된 흥행질주는 전편의 기록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트랜스포머>가 2007년 7050만달러로 첫주를 마감했던 것, 첫편의 북미 수입이 3억1900만달러로 마감했던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수치다. 또 인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동시개봉한 결과 해외수입으로만 1억8580만달러를 거두어 5일동안 벌어들인 전세계수입은 3억8700만달러에 이르는데, 이는 전편의 총수입의 50%에 해당한다. 대학생이 된 샘 윗위키가 집을 떠나며 발견한 큐브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 2009년 최고 개봉기록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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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기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가 성적표를 받았다. 지난 6월19일,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2008년 공공기관 경영평가 결과에 따르면, 영진위는 기관장평가에서 ‘미흡’ 판정을, 기관평가에서는 최하위 등급인 E등급을 받았다. 그런데 다음에 잘하면 된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기획재정부는 미흡 판정을 받은 4명의 기관장에 대해 해임을 건의했다. 당연히 강한섭 위원장도 해임건의 대상 중 한명이다.
영진위가 어떤 항목에서 어떤 이유로 최하위 점수를 받았는지는 아직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심지어 강한섭 위원장은 1차 경영평가를 끝낸 뒤, “100점 맞은 것 같다. 다음 경영평가 때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지도 알 것 같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강 위원장의 장담과는 다른 결과가 나오자 추측만 나돈다. 강한섭 위원장 취임 이후 있었던 영화계와 영진위의 갈등, 영진위 내부의 노사 갈등이 이유일 것이라는 관측이다. 다른 기관의 평가 결과와 비교해보면, 구체적인 평가 기
[포커스] 의도적인 영진위 흔들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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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에우르치네 극장에서 만난 다비드 토리(36)는 로마대학 인류학과 시간강사다. 그런데 시험기간이라 학교에 갔더니 시험을 보러 온 학생이 한명도 없어서 대신 로마 20개관에서 상영 중인 마르코 벨로치오의 <빈체레>(Vincere)를 보러 극장에 왔단다. 올해 칸영화제 경쟁작이기도 한 <빈체레>는 무솔리니의 아이를 가졌다고 주장하지만 결국 정신병자로 몰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던 무솔리니의 숨겨진 정부(情婦)에 대한 이야기다.
-학생이 시험에 응하지 않을 수도 있나? 그럼 낙제일 텐데.
=학생이라고 꼭 학교에 가야 하나? 학생이라고 꼭 시험에 응시해야 하나? 시험을 보지 않더라도 삶은 변함이 없다. 낙제를 한 학생은 다음 학기에 다시 수강하면 된다. 그래서 대학 졸업하는 데 8년씩 걸리기도 한다.
-기가 막히다. 한국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탈리아 사람인 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데 어련하겠나. (웃음) 학생들이 시험을 보지 않더라도
[세계의 관객을 만나다-로마] 현실이 영화보다 비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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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나는 랩가수들이 그렇게 하듯 이 칼럼을 내 영국인 친구 스티븐 크레민과 데릭 엘리에게 특별히 바친다. 내 나라 프랑스에 좀 미안하긴 하지만, 사실 프랑스의 시네필 세계에선 영국을 경멸하는 경향이 있다. 장 뤽 고다르는 <영화사>에서 “미국 사람들은 영화예술로 광고를 만들었는데 영국 사람들은 늘 그렇듯 영화예술에서 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어리석은 말을 한다. 또 트뤼포는 히치콕에게 감히 “영국이라는 단어와 영화라는 단어 사이에는 뭔가 불일치한 점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고까지 말했다.
세대가 바뀌면서 새로운 세대가 옛 세대를 꼭 닮지는 않는다는 것이 천만다행이다. 1980년대에 태어난 프랑스 세대들은 블러와 오아시스 같은 영국 브릿팝 밴드의 음악을 들으며 첫 여자친구를 사귀었고, 그녀가 떠나갔을 땐 라디오헤드를 들으며 울었다. 그리고 그녀와 한창 좋았던 시절엔 <트레인스포팅> <쉘로우 그레이브> <레이닝 스톤> 혹은 <네번의
[외신기자클럽] 프랑스인들은 영국영화를 좋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