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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서울살이를 접고 양양의 숲과 물속에서 지낸 김재화는 서울 한복판 스튜디오에 앉아서도 여전히 자연 속에서 꿈꾸듯 말했다. <밀수>와 <익스트림 페스티벌>의 현장을 회상할 때, <하모니>(2009)부터 쉬지 않고 일해온 치열한 커리어를 되짚을 때, 어느덧 찾아온 자기 의심과 재충전의 희망을 다질 때 김재화의 눈앞엔 정말로 어떤 풍경이 펼쳐지는 듯했다. 시골의 고요 속에서 근심을 비우고 사랑을 충전한 김재화는 여전히 배우의 운명을 믿으며, 그러나 한결 가뿐한 마음으로 다음을 기다린다.
- 대사보다 물에서 몸으로 소화하는 액션이 중요한 작품이었다. 처음 수영을 배운 배우들도 많았는데, 금방 적응했나.
= 난 원래 물개였다. 어릴 때 6월부터 9월까진 늘 물에서 살던. (웃음) 운동마다 잘 맞는 체격 조건 같은 게 있지 않나. 여자로 살면서 어떤 운동을 하든 내 몸이 잘 맞는다고 말해준 선생님이 없었다. 그래서 <밀수>에서 잠수를 가
[인터뷰] 연기라는 운명, ‘밀수’ 김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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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철의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연극원 연기과 전문사 졸업 논문 주제는 ‘영화의 매체적 특성에 따른 영화연기 연구-아메리칸 메소드 액팅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중심으로’였다(참고로 한예종 연극원 전문사가 생긴 이래 나온 첫 번째 논문이다). 메소드 연기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것처럼 치부하던 당시 연기 담론을 반박하며 새로운 대안을 제안한 논문이었다. 실제 조한철은 카메라와 편집, 영화의 사진성을 고민하며 캐릭터의 실존을 믿게끔 만드는 본질이 무엇인지 지금까지도 고민하는 배우다.
- <더 문>의 과기부 장관은 대부분 우주센터에 있다. 우주에 고립된 황선우 대원(도경수)을 귀환시키는 프로젝트에서 리액션을 하는 분량이 대다수다.
= 프리 비주얼 작업을 한 영상을 주로 보면서 수십명이 반응해야 했다. 각각의 상황마다 어느 정도 강도로 연기해야 하는지 감독님이 얘기해주긴 했지만, 이게 결과적으로 잘 붙을까 걱정하면서 연기했다. 가장 걱정했던 건 그래도 명색이 장관
[인터뷰] 나는 나의 길을 간다, ‘더 문’ 조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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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는 판 깔아주면 나가서 잠깐 미치고 나오면 되는데 판을 너무 잘 깔아줬다.” 2017년 드라마 <당신이 잠든 사이에>의 최담동 역으로 김원해가 SBS 연기대상 조연상을 거머쥐었을 때 남긴 말이다. 연출에 공을 돌리는 겸손한 소감이지만, 배우가 미치는 그 찰나의 순간을 위해 김원해는 여전히 프레임 밖의 디테일까지 촘촘히 구성한다. 관객 460만명을 돌파(8월17일 기준)한 <밀수>와 지난 7월 종영한 드라마 <악귀>에서 김원해는 극의 한축을 단단히 책임진다. 현재도 4개 이상의 작품을 동시에 준비·촬영하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 <밀수>의 ‘브로커 삼촌’은 해녀들이 거래를 시작할 수 있도록 물꼬를 틔우며 극을 환기한다.
= 내가 생각하는 브로커 삼촌의 출발점은 남들과 조금 달랐다. 극의 배경인 1970년대는 한창 반공 교육을 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는데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단점과 민주주의, 자본주의의 장점을
[인터뷰] 여전한 열망, ‘밀수’ 김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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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 극장가에서 김종수는 가장 바쁜 배우 중 한명이 됐다. <밀수>의 악당인 세관계장 이장춘과 <비공식작전>의 외무부 최 장관 모두 배우 김종수의 손길을 거쳐 태어났다. 앞서 그는 홈리스 출신의 축구부 에이스 김환동으로 <드림>에서도 활약했으니 2023년의 기대작에 줄줄이 이름을 올린 셈이다. 건달부터 대통령까지, 거치지 않은 직업과 지위가 없지만 다작 배우임에도 소모되지 않은 그의 저력은 “단 몇분, 몇신만 나온대도 그 인물에 매료되면 전부 내 작품이라고 생각한다”는 소신과 직업정신에서 나온다. <밀수>로 어느 때보다 안타고니스트적 존재감을 자랑하는 요즘,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 <화란>까지 줄줄이 예고된 그의 다음 행보도 기대감을 자아낸다.
- <밀수>의 세관계장 이장춘은 엄격한 공무원처럼 보이지만 후반부에 장르적 변곡점을 지닌다. 본색을 드러내는 인물의 포인트를 어떻게 준비했나.
[인터뷰] ‘고유한 연기의 결’, ‘밀수’, ‘비공식작전’ 배우 김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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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극장 스크린에서 마주한 얼굴이 드라마 속에서 다시 등장한다. 이 정도의 다작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싶은데 정작 질문을 받아든 배우들은 처음도 아니라는 듯 괜찮다고 답한다. 분량에 상관없이 자기 파트를 책임지고 완성하는 이들 덕에 작품의 완성도 또한 배가된다. 여름 성수기를 겨냥한 4편의 한국영화, <더 문> <밀수> <비공식작전>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도 반가운 배우들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 문>에서 과기부 장관으로 분한 배우 조한철, <밀수> <비공식작전>에 나란히 이름을 올린 김종수, <밀수>의 명암을 그려낸 배우 김원해·김재화, 황궁 아파트의 일원이 된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 배우 김도윤. 여름영화 BIG4의 빛나는 조연들을 만났다.
* 이어지는 기사에서 김종수, 김원해, 조한철, 김재화, 김도윤 배우와의 인터뷰가 계속됩니다.
[기획] ‘배우열전’ - 여름영화 속 빛나는 조연들, 김종수, 조한철, 김원해, 김재화, 김도윤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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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오펜하이머>의 원작인 J. 로버트 오펜하이머 평전이다. 전기 작가 카이 버드와 미국사 교수 마틴 셔윈이 썼다. 한국어판의 분량이 대략 1천장일 만큼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한다. 두 저자가 25년에 걸쳐 모은 오펜하이머의 개인 문서와 유품, FBI가 만든 수천쪽의 기록물과 녹취록, 그리고 100여명에 가까운 오펜하이머 주변인들의 인터뷰가 주된 자료다.
스팅의 <Russians>(1985)
냉전 시기 구소련 체제를 비판하며 불렀던 이 곡의 가사를 통해 크리스토퍼 놀런은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고 한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How can I save my little boy from Oppenheimer’s deadly toy?”(오펜하이머가 만든 죽음의 장난감으로부터 난 어떻게 내 아이를 지킬 수 있을까?) (오펜하이머가 개발하여 2차 세계대전 당시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무기의 이름 ‘littl
[기획] 데이비드 보위에서 안드레이 타르콥스키까지, ‘오펜하이머’에 영감을 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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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는 전기영화인가. 이상한 질문이다. 제목부터 실존 인물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이름에서 따왔으며, 영화의 내용 역시 오펜하이머의 역사적 행적을 따른다. 그러나 <오펜하이머>를 온전한 전기영화라 부르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적지 않다. 이것에 대한 의문과 해답을 차근차근 짚어가다 보면 크리스토퍼 놀런이 왜 그리고 어떻게 <오펜하이머>를 만들었는지, 그 결론이 놀런의 필모그래피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어림잡을 수 있다.
길가에 팬 물웅덩이에 빗물의 파장이 인다. 이 광경을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가 빤히 바라보고 있다. <오펜하이머>의 첫 장면이다. 관객은 오펜하이머가 어떠한 연유로 이토록 우수에 잠겨 있는지 파악할 정보를 얻을 수 없다. 이내 영화는 해당 장면과 영 무관해 보이는 시퀀스로 이동한다. 불꽃이 일렁이고 연소하는 일련의 폭발 과정인 듯한데, 아마 물웅덩이를 보고 있던 오펜하이머의 상상이 아닌가 싶다. 물과 불,
[기획] 오펜하이머라는 미지에서 놀런이 당도하려는 곳은 어디인가, <오펜하이머>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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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런이란 이름의 완성판이다. <오펜하이머>엔 그가 초기작 <미행>이나 <메멘토> 혹은 <덩케르크>에서 보여줬던 다수 시계열의 교차편집부터 <인터스텔라> <테넷> 등에서 채택했던 과학적 소재의 활용, <다크 나이트> 이후 꾸준히 애용해온 아이맥스 촬영의 형식미가 합쳐져 있다. 크리스토퍼 놀런 영화의 거의 모든 구성 요소가 총집합한 셈이다. <오펜하이머>는 ‘핵폭탄의 아버지’로 불렸던 실존 인물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삶을 그린다. 천재 물리학자로 이름을 떨치던 그가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핵무기 개발의 총책임자를 역임하고, 종전 후 국제 핵무기 규제에 힘썼던 일화가 중심이다. 비평적 성공과 함께 흥행도 순항 중이다. 개봉 4주차에 월드와이드 수익 6억5천만달러를 거두며 <인셉션>의 성적을 넘보고 있다. <다크 나이트>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제외하고 가
[기획] 크리스토퍼 놀런과 오펜하이머라는 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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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들의 우정은 영원하다!” 단짝 친구인 꼬마 꿀벌 마야와 윌리가 모험을 떠난다. 여왕에게 줄 소중한 물건을 찾아볼 요량이다. 그러던 중 둘은 한 개미를 우연히 만나고, 귀한 황금알을 ‘그린 리프’란 마을에 가져다줄 것을 부탁받는다. 원체 의협심이 강한 마야는 개미의 청을 받아들여 여행길에 오른다. 그런데 딱정벌레 무리가 나타나 황금알을 채가려 한다. 알고 보니 황금알에서 태어날 개미는 개미 군락의 대를 이을 공주였으며 딱정벌레들은 개미 군락을 지배하기 위해 공주를 납치하려던 것이다. 이 와중에 황금알에서 태어난 개미 공주는 윌리를 부모처럼 따르기 시작한다.
개미 군락을 점령하려는 딱정벌레들의 계획엔 약육강식이란 자연의 질서가 깃들어 있다. 그러나 마야와 친구들은 자신들을 쫓던 딱정벌레를 물가에서 살려주거나 우연히 맡았을 뿐인 타종의 공주를 자식처럼 대하며, 폭력에 박애로 대응한다. 이러한 마야의 태도는 딱정벌레 무리와 개미 군락의 전투를 노래로 막으려는 장면에서 극에 달한다.
[리뷰] ‘마야3: 숲속 왕국의 위기’, 비폭력주의로 분란을 해결하는 꿀벌들의 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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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메가로돈의 공존은 가능한 것일까. 전편에서 조나스(제이슨 스테이섬)의 활약으로 백악기 시대부터 활동했던 거대 상어 메가로돈의 존재가 세상에 밝혀지고, 이에 인간은 중국 하이난에 해양연구소를 설치해 본격적인 심해 탐구에 나선다. 그곳의 담당자 지우밍(오경)은 새끼 메가로돈을 포획해 조련을 시도하는데, 조나스를 비롯한 대원들이 심해 탐사를 떠난 날 메가로돈이 우리를 탈출함에 따라 대원들은 위기에 처하게 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해저 7000m에서, 조나스는 다시 한번 맨몸으로 메가로돈에 맞선다.
스티브 앨튼의 해양 호러 소설 <메그>를 원작으로 제작된 미·중 합작영화 <메가로돈> 시리즈의 속편이 나왔다. 전편에 이어 제이슨 스테이섬이 주연으로 출연하고, <레베카> <하이-라이즈> 등을 연출한 벤 휘틀리가 감독을 맡았다. 전편의 세계적인 흥행 성공에 힘입어 만들어진 속편인 만큼 <메가로돈2>는 크리처의 압도적 크기에 걸
[리뷰] ‘메가로돈2’, 살육을 위한 느닷없는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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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머물던 아만다(베네데타 포르카롤리)는 언니의 약국에서 일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이 자랐던 이탈리아의 도시로 돌아온다. 불행히도 아만다에게 이 유년의 공간은 통속적인 의미에서의 고향이 아니다. 파리와 마찬가지로 낯설기만 한 그 동네에서 아만다는 제대로 된 일을 찾지도, 친구를 사귀지도 못한다. 그는 그런 자신을 가족들이 창피해한다고 여기며 상처받지만, 그런 만큼 가족의 인정에 목말라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의 강권으로 아만다는 어린 시절에 어울렸던 레베카(갈라테아 벨루지)를 만난다. 엄마에 의하면 레베카는 번듯한 변호사가 될 계획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는 방에 스스로를 가두고 아만다와 마찬가지로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는 처지다. 아만다는 자신이 파리로 떠나면서 친구가 되어주었을 단 한 사람을 잃었던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친구를 되찾기 위해 레베카를 방 바깥으로 끌어내기로 마음먹는다.
영화의 중반부, 아만다와 파티에서 우연히 마주친 남자가 도로에서 사슴을 본 적이 있다고 말
[리뷰] ‘아만다’, 떠날 생각도 없고, 떠나지도 않는 ‘레이디 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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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코노고프 대위(유리 보리소프)는 출근길에 동료의 투신을 목격한다. 소련의 정보기관 NKVD 소속인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다음 차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때는 1938년, 스탈린의 대숙청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다. 간첩·반역, 반소련 선전활동 등의 죄목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고문한 뒤 총살시키는 일을 자행했던 NKVD는, 이제 조직 내부에서까지 반동분자를 색출하기에 이르고, 그 분위기를 빠르게 감지한 볼코노고프는 한발 앞서 도주를 시작한다. 그런데 그 동선이 독특하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멀리 도망치는 대신, 볼코노고프는 그동안 자신이 사살했던 사람들의 유족을 찾아나선다. 그리고 그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그런 그의 뒤를 직속 상사 골로브냐 소령(티모페이 트리분체프)이 쫓는다.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는 스탈린 공포정치 시대의 소련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한 남자의 탈출극이다. 형식상으로는 쫓기는 주인공을 따라가는 액션 스릴러 장르영화의 성격을 지니지만
[리뷰]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부끄러움을 아는 자만이 선택할 수 있는 독특한 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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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작은 어촌에 과거가 알려지지 않은 비밀스러운 청년 야마다(마쓰야마 겐이치)가 이사를 온다. 오징어 공장에서 일을 시작한 그는 공장 사장의 소개로 알게 된 무코리타 공동주택에 입주한다. 인적이 드물어 평화로우면서도 무료한 이곳 마을에는 나름의 개성을 지닌 이웃들이 살고 있는데, 대뜸 찾아와 욕실을 빌려달라고 할 만큼 뻔뻔하고 능청스러운 옆집 남자 시마다(무로 쓰요시)가 대표적이다. 어느 날, 야마다는 시청의 사회복지 공무원으로부터 오래전 연이 끊긴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는다. 죽은 지 며칠 뒤에야 악취로 인해 이웃에게 발견되었다는 아버지의 마지막은 야마다에게 응어리진 감정을 떠올리게 한다.
장소(<카모메 식당>의 헬싱키, <안경>의 미야코지마섬)에서 대상(<고양이를 빌려드립니다>의 고양이,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의 성소수자와 대안가족)으로 초점을 옮겨가며 거칠고 공허한 현대인의 삶과 그 치유 가능성을 이야기해온 오기가미
[리뷰] ‘강변의 무코리타’, 무코리타‘들’이 모여 마주하는 어떤 힘 혹은 진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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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같은 기억(photographic memory). 흔히 기억력이 좋은 사람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무언가를 직접 보는 것 같은 기억력이라고 해서 ‘직관기억’(eidetic memory)이라는 좀더 전문적인 용어도 있다. 직관기억은 성인에게서는 보고되지 않는 특징이며, 아동기의 특정 사례에서도 무언가를 본 직후 아주 짧은 기간만 지속되는 것으로 관찰된다. 그에 반해 사진 같은 기억은 원한다면 언제든 다시 불러올 수 있다는 면에서 직관기억과는 구별된다. 스스로 ‘사진 같은 기억력’을 지녔다고 은근히 우쭐해하는 성인들을 만나는 것 역시 드물지 않다.
그런데 사진 같은 기억이든 직관기억이든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는 없다.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세부사항을 기억해내는 능력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다만 그런 기억력조차도 사진이나 직접관람에 해당할 정도의 정확성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는 게 현재까지의 과학적 결론이다. 음정을 정확히 짚어내는 ‘절대음감’과 음질 차이를 칼같이 짚어내
[정준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제멋대로의 기억을 감히 역사라 말하는 이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