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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프로듀서를 꿈꾸다 포기했다는 이야기는 몇 차례 했지만 왜 포기했는지 자세히 털어놓은 적은 없었다. 이 기회에 잠깐 얘기하자면 모든 건 주차에서 비롯됐다. 원주에서 촬영을 하던 어느 날 우리 제작팀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야 했다. 촬영장소 인근에 주차된 차량을 ‘뽑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촬영 도중 차량이 들락날락하면 진행에도 걸림돌이 될 뿐 아니라 컷과 컷 사이의 연결도 맞지 않는다는 것. 그렇다면 이렇게 중요한 일을 왜 당일 새벽에 부랴부랴 하느냐는 질문에 나이는 어려도 관록은 든든했던 제작부장은 “어차피 전날 다 뽑아놓아도 밤새 다른 차가 주차하니까 소용없어요. 그냥 당일 새벽에 하는 게 나아요”라고 설명했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 새벽 6시에 걸려온 전화에서 “영화 촬영 때문에 차 좀…” 따위의 말이 흘러나온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버럭 호통을 치거나 욕설을 퍼붓지 않을까. 이미 서울에서 비슷한 상황을 겪기도 했다. 하나 어쩌랴. 어쨌거나 영화는 찍어야 하니. 말
[에디토리얼] 단순한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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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6일
애니메이션 <아이언 자이언트>와 <인크레더블>의 브래드 버드 감독이 연출한 <미션 임파서블4> 예고편을 보고, 한동안 잊고 지냈던 앤드루 스탠튼 감독의 신작 진도가 궁금해졌다. 제각기 잘난 픽사 작품 중에서도 특출한 <니모를 찾아서>와 <월·E>를 연출했던 스탠튼 감독은, 픽사의 보스인 디즈니사로 파견(?)나가 에드거 라이스 버로즈(<타잔>을 쓴) 원작 <화성의 공주>를 각색한 실사 SF판타지 <존 카터>를 만들고 있다. 브래드 버드와 앤드루 스탠튼의 행보는 애니메이션에서 주가가 천장을 쳤을 때 실사로 진출하겠다는 심산이냐는 쑥덕거림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건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의 위계에 관해 케케묵은 기준을 가진 호사가들의 객담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6월 중 <존 카터>의 제작 현장을 방문한 외신 기사를 일별해보니, 앤드루 스탠튼은 픽사에서 몸에 밴 버릇대로 블록버스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너무 많이 먹고 너무 적게 쓴다는 뉘우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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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 개그우먼 장도연이 발레리나 연습복을 입고 긴 팔다리를 흐느적거리더니 급기야 바닥에 드러누워 개구리처럼 다리를 죽죽 뻗으며 굼실댄다. KBS <개그콘서트>(이하 <개콘>)의 문을 여는 코너 ‘슈퍼스타 KBS'의 새 출연팀인 ‘가수를 사랑한 발레리나’의 한 장면이다. 평소 장도연의 장신을 이용한 사지개그를 보고 뒤집어지던 내가 보기에도 이번엔 뭔가 허술했다. 노래를 부르는 ‘가수’ 주위를 돌며 팔다리를 휘적거리는 ‘발레리나’는 연습복 빼곤 전혀 발레리나와 접점을 찾을 수 없다. 게다가 바닥에서 허우적대다가 타이츠 위로 치마가 말려올라가고 그 와중에 사회자의 발치에 머리를 부딪힌 장도연이 작게 비명을 지르고, 사회자는 연신 죄송하다고 말하며 장도연을 일으킨다. 뭔가 참 지리멸렬하다 싶은 감상에 젖어 있는데 현장 관객석의 리액션 장면들은 박수를 치고 응원하는 분위기네?
물론 웃을 준비를 하고 현장에 가서 눈앞에서 기예를 펼치는 사람들을 응원하는 관객과 방구석에
[유선주의 TVIEW] 감정의 호객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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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너무 좋았어요. 너무 많이 울었답니다.” 지난주까지 사무실에서 ‘전문분야실무수습’을 받았던 사법연수생이 <마당을 나온 암탉>을 본 직후 보내준 메시지 내용이다. 영화가 가져다준 흥분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약간은 호들갑스런 반응을 보면서 마음이 놓였다. 그동안 부진했던 한국 장편애니메이션이 어떤 성과를 거둔 듯했기 때문. 동료 기자들이나 영화계 인사들의 호평은 들어왔지만, ‘일반인’이라 할 수 있는 관객 또한 좋게 봤다니 이 치열한 여름시장에서 생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겼다.
<마당을 나온 암탉>에 대한 들뜬 반응이 반가운 또 다른 이유는 명필름 심재명 대표의 저력을 다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이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건 상당히 오래전이다. 그때 심 대표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통념을 깨고 싶다. 한국에서 잘 안된다는 영화들, 그러니까 스포츠영화나 가족영화를 만들어 성공시키겠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에디토리얼] ‘짬밥’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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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변두리 지역에 20년째 살고 있다. 사실 교통이나 위치는 그리 오지가 아닌데 어디 사냐는 질문에 대답할 때마다 상대가 ‘처음 듣는데… 도대체 어느 구석에 붙어 있는 동네야?’라는 표정으로 알쏭달쏭해하기 일쑤라 이젠 그냥 유명한 옆 동네 이름을 대며 “그 근처”라고 하게 되는 동네다. 심지어 오랜 주민인 L(32)씨가 과거 MBC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에서 재호(배용준)가 “나는 구로동이 싫어!”라고 외쳤을 때 못지않게 절박한 얼굴로 “내가 시집 못 가는 건 OO동에 살기 때문이야!”라고 부르짖기까지 한 그런 동네인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 L씨에게는 애인이 없다는 사소한 문제가 있지만 어쨌든 이 동네에 살면서 최고로 혹은 유일하게 자부심을 느꼈던 순간이 있으니 바로 90년대 후반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이경규가 간다>에 동네 버스 정류장 앞 구멍가게가 소개되었을 때다.
술이나 담배를 사려고 하는 청소년에게 주민등록증을 확인하고 성인이 아니면 판
[최지은의 TVIEW] 벌써부터 속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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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비만 주룩주룩 내리는 이 여름은 정말이지 여름답지 않다. 차라리 땀을 주룩주룩 흘릴 테니 햇살을 돌려달라고 외치고 싶기까지 하다. 세상의 여름이 이렇게 눅눅함과 퀴퀴함 속에 빠져 있는 와중, 극장가는 모처럼 여름다운 여름을 즐기고 있다. 크고 세고 정신없는 블록버스터영화들이 여름시장을 장악하고 있다는 말이다. <트랜스포머3>가 대박을 쳤고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2>도 ‘시리즈에서 최고’라는 평을 얻으면서 큰 흥행을 예고 중이다. 이후에도 <개구쟁이 스머프>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퍼스트 어벤저> <카우보이 & 에이리언> 같은 영화들이 줄 서 있으니, 비교적 조용하게 지나갔던 지난해에 비해 훨씬 시끌벅적한 여름이 될 분위기다.
올 여름시즌이 기대되는 진짜 이유는 한국 블록버스터영화 때문이다. 지난해 이맘 때 개봉했던 <이끼> <아저씨>
[에디토리얼] <고지전>과 <퀵> 다 좋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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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회사 점심시간이었다. 근처 식당에 앉아 밥술을 뜨는데 어디선가 ‘뚜뚜루뚜루뚜뚜’ 하는 노래 추임새가 들려왔다. 소리의 근원은 컴퓨터에 연결된 식당 스피커. 점점 더 급박한 호흡으로 달려가는 그 ‘뚜뚜루뚜루뚜뚜’에 정신이 팔려 밥을 대충 우겨넣고 사무실로 돌아와 인터넷 검색창을 열었다. 검색어는 당연히 ‘뚜뚜루뚜루뚜뚜’. 아 이게 장안의 화제라는 김범수 버전의 <님과 함께>로구나!
이소라의 <넘버원>도 식당에서 들을 노래는 아니긴 하다. 오늘도 한목숨 이어가자고 밥숟가락을 들었는데, 저승의 뭐라도 능히 소환할 수 있을 것 같은 ‘흐어으흐으흐’ 하는 노래 소리가 들려오면 괜히 국건더기를 뒤적이며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군가?’를 되묻게 된다. MBC <나는 가수다>(이하 <나가수>)를 생방송으로 보게 되면 누군가 탈락하게 되는 형식의 긴장감도 있고 무대에 도취된 가수와 관객의 영상이 있으니 감동을 주거나 얻기 쉬운 상황이겠지만 그런
[유선주의 TVIEW] 비장미라는 감수성에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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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우 작가의 <Seven Days> 연작 중 <Sunday Morning>(2010-11). 일요일 오전의 현금출납기. 작가는 장소와 상황에 대한 정보를 교묘히 지웠다. 그러니 이야기는 내 안에서 시작될밖에. 휴일 이른 아침, 나는 무엇 때문에 갑자기 돈이 필요해졌을까? 텅 빈 냉장고? 데이트? 전쟁?
6월27일
“이야기는 허술한데 비주얼은 뛰어나다.” 극장 출구를 나서면서 1년이면 줄잡아 마흔번은 듣는 말이다. 그리고 마이클 베이 감독의 <트랜스포머> 시리즈는 1편이 나온 2007년 이후 그런 부류 영화들의 종족 대표로 공인됐다. 3D로 만들어진 세 번째 <트랜스포머>까지 공개된 지금 나는 다만, “스토리는 별것 없지만 눈은 호강한다”는 우리의 입에 달라붙은 표현이 신중히 재고되길 바란다. <트랜스포머3>의 비주얼은 결코 뛰어나지 않다. 아니, 비주얼은 <트랜스포머3>의 가장 큰 약점이다. 무엇인가 눈앞에서 계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비주얼은 좋다고요? 확실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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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가게 되면 ‘영화 ○○○의 원작’이라고 쓰여 있는 책을 자주 집어든다. 직업적 의무감이 발동하는 까닭이기도 하겠지만, 책이라곤 별로 들춰보지 못하는(이라기보단 안 하는) 처지라 ‘그래도 영화로 만들 정도면 읽고 후회하기야 하겠어’ 하는 얄팍한 기대감을 갖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게 소설과 영화를 함께 보는 경우, 아무래도 두 가지 버전을 비교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빈치 코드>처럼 소설이나 영화나 할 것 없이 그렇고 그런 케이스가 있긴 하지만 소설과 영화 모두 훌륭한 경우는 많다. 이를테면 닉 혼비의 <하이 피델리티>와 이 소설의 영화판인 스티븐 프리어스의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를 보면 소설의 시니컬함이나 변태적인(?) 유머감각을 영화가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는 반면, 존 쿠색과 잭 블랙이라는 배우로 구현된 캐릭터들은 외려 영화판이 더 풍부하지 않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g
[에디토리얼] 읽고 보는 재미 쏠쏠하다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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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때 내 꿈은 은주처럼 사는 거였다. 매일 저녁 독서실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8시30분에 맞춰져 있었다. 저녁을 먹고 다시 독서실로 출발하기 전까지의 그 30분, MBC에서 <보고 또 보고>를 하는 시간이 나에겐 몇 안되는 삶의 낙이었다. 왜 하필 <보고 또 보고>였냐고 묻는다면 명확히 설명하긴 어렵다. 다만 그때, 고작 열여덟살에 불과했던 나는 인생에 피로감을 느끼는 첫 번째 단계에 있었던 것 같다. 매일 점수를 다퉈야 하는 일상이, 모의고사와 내신평가의 긴장감이, 불안한 대학 레벨이, 그리고 앞으로 평생 살아가야 할 모든 날이 두렵고 귀찮게만 느껴졌다.
은주(김지수)는 이 모든 구질구질함을 뛰어넘어 마침내 원하는 것을 쟁취한 승리자였다. 넉넉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나 언니 금주(윤해영)에 비해 온갖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하던 끝에 결국 부잣집 아들인 검사와 결혼하다니! 게다가 시댁의 온갖 반대와 구박마저 한식집에 가서 직접 음식을 배워 가족을 먹일
[최지은의 TVIEW] 욕하기도 지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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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훈씨를 처음 만난 건 1997년의 어느 날이었다. 그는 영화 무가지 <네가>를 막 창간한 상황이었고, 나는 일간지 문화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잡지를 홍보하기 위해 일간지 선배 기자와 인터뷰를 가졌던 터. 선배 옆자리에 앉아 있다는 이유로 엉거주춤 인사를 나누며 통성명한 게 그를 알게 된 계기라면 계기였다. 그는 이후 2000년 창간된 영화주간지 <필름2.0>에 기자로 입사했고 나 또한 2000년 10월 <씨네21>에 합류하면서 인연은 이어졌다. 시사회나 현장, 영화인과의 술자리 같은 데서 만날 때마다 그는 총총한 눈빛을 보내며 “어때요, 재밌어요?”라며 안부를 묻곤 했다.
얄궂게도,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건 다른 상가(喪家)에서였다. 42살의 젊음이, 다양한 재능을 가졌던 이가 스러졌다는 사실도 충격적이었지만, 마음이 이상하게 먹먹했던 건 어쩌면 그가 비슷한 연배의 ‘동업자’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간략하게나마 그의 삶을 돌이
[에디토리얼] 이지훈, 1969~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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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민망한)능력자들> 중 사막 복판에서 태양을 영접 중인 조지 클루니. 요가 선생님에게 개인적으로 문의한 결과 ‘전사 자세’의 일종인 ‘비라바드라 원 아사나’로 판명됐다. 그나저나 클루니 덕분에 장차 이 자세를 취하며 고른 호흡을 유지하긴 글렀다.
*<일루셔니스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6월12일
영화 <맨 인 블랙>이 마이클 잭슨, 실베스터 스탤론, 뉴트 깅그리치 같은 명사들을 지목해 지구인으로 위장 체류 중인 외계인입네 폭로(?)했을 때, 나는 어처구니없는 척 박장대소하면서도 속으로는 오랜 용의자인 감독 겸 배우 자크 타티(1909~82)를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영화사에 잠입한 외계인이 있다면 타티 말고 달리 누가 있겠는가? 육척이 훌쩍 넘는 거구에서 나온다고 믿기 어려운 깃털 같은 움직임, 그가 연기할 때면 합을 맞춘 상대 배우처럼 ‘협조’하는 소품들, 그리고 타티의 페르소나인 윌로씨가 걸어 들어가는 공간마다 인물과 사물의 궤적이 빚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환상에 대한 어떤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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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의 죽음.’ 며칠 전 받은 메일에는 이런 제목이 적혀 있었다. “한국영화계에서 10여년 동안 일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발신인은 “(한국영화계가) 공멸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생겨” 이 메일을 보낸다고 했다. 그는 짧지 않은 글을 통해 “한국영화판은 죽어가고 있다. 아니 이미 죽었는지도 모른다”는 자신의 논지를 설명했다.
그가 꼽은 한국영화계의 문제점들은 다음과 같다. 시나리오작가에 대한 홀대, 투자사의 횡포, 투자 시스템의 낙후성, 제작 시스템의 후진성, 배우들의 리허설이 진행되지 않은 채 진행되는 촬영, 배급 시스템의 왜곡. 이같은 문제는 꾸준히 제기돼왔던 것이긴 하지만 그의 주장이 유독 설득력있게 들리는 건 영화현장의 밑바닥 정서를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투자사가 투자진행비, 캐스팅 주선비, 공동제작 진행비 등을 챙기는 탓에 그는 “스탭들의 임금은 5~6년 전과 같은 수준을 유지하거나 오히려 감소하는 위기에 처해 있다. 조수들은 물론이고 헤드 스탭도
[에디토리얼] 한국영화가 죽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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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하는 얼굴을 들여다보길 좋아한다. 진짜 말고 드라마 주인공들의 절박한 거짓말에 한정해서. 일상생활의 거짓말은 대개 아무렇지도 않은 말간 얼굴로 저질러지기 때문에 거짓말의 스펙트럼을 펼치는 배우들의 얼굴에 매료되는지도 모르겠다. 훌륭한 거짓말 연기는 인간의 마음을 잠시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의 순간을 선사한다. 거짓말하는 연기는 인물의 내면을 숨기면서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배우가 가장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순간이 아닐까 한다. 물론 오열하는 연기의 함정과 마찬가지로 신체와 감정 통제가 안되면 그야말로 민망 대폭발이더라. 아무튼 요 근래 여주인공의 절박한 거짓말로 이야기를 꾸리는 드라마가 풍년이라 덕분에 그 얼굴들을 실컷 구경하는 중이다. <욕망의 불꽃> 윤나영(신은경)에 이어 <로열 패밀리>의 김인숙(염정아) 그리고 <미스 리플리>의 장미리(이다해)까지.
콤플렉스 덩어리 윤나영의 변검 같은 얼굴은 위선과 위악 사이의 진심을 파악하
[유선주의 TVIEW] 비천한 아름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