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짐을 싸는 건 여러모로 귀찮은 일이다. 사무실에 울려퍼지는 박스 굴러다니는 소리와 비닐 테이프 잡아뜯는 소음을 듣자하니 마음이 더욱 심란하다. 그건 짐을 챙겨서 박스에 집어넣는 일의 고단함 때문이 아니다. 포장이사 시스템이 정착된 지금, 짐을 박스에 챙기는 정도가 무슨 일이나 되겠는가. 문제는 책상 구석이나 서랍 깊은 곳에 쑤셔넣어뒀던 물건들이 쏟아져 나온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아무렇게 방치했던 잡스러운 물건들을 놓고 다시 고민에 빠져야 하는데, 그게 참 못할 짓이란 말이다. 지금은 소용도 없는 수많은 명함, 언젠가 보겠지 하고 사두기만 했던 책, 외국에 다녀온 동료가 사준 (그러나 보존가치는 의심해볼 만한) 기념품, 먼저 회사를 떠난 동료의 ‘유물’, 그리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굴러들어왔는지 가물가물한 요상한 물건들(이를테면 발모제)까지 튀어나온다. 수년 동안 모아놓은 30여권의 취재수첩은 더 골칫거리다. 하도 갈겨써서 당시에 그 글자를 어떻게 알아
[에디토리얼] <씨네21> 충무로 간다
-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에 이어 이창동 감독의 <시>와 임상수 감독의 <하녀>가 5월13일 나란히 개봉된다. 칸영화제에 진출하는 한국 장편영화 4편 중 3편이 함께 극장에 걸리는 셈이다. 그동안 문제적 영화를 만들어왔던 한국 감독들의 신작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는 건 흔치 않은 기회다. 게다가 이들 영화 모두가 명불허전이라는 말에 걸맞은 이 시대의 문제작이니 5월의 극장가는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하다 할 수 있겠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공습이 본격화되는 터라 이들 영화가 스크린을 제대로 지킬 수 있을지 걱정도 되지만, 크고 세고 비싼 놈들에 질려버린 관객이 현명한 선택을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시>와 <하녀>를 보면서 두 영화를 관통하고 있는 어떤 무의식 또는 증후군 같은 것을 느꼈다. <시>의 첫 장면은 도도히 흐르는 강물의 이미지다. 그리고 한 소녀의 시체가 떠내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이야기
[에디토리얼] 5월, 극장가도 푸르구나
-
트위터를 통해 예고했던 ‘파격적인 에디션’의 실체는 바로 이것이다. 무려 홍상수 스페셜 에디션! 홍상수 감독의 열 번째 장편영화 <하하하> 개봉을 기념해서 60여 페이지를 털어 그와 그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 이번호는 스페셜 에디션답게 ‘스페셜 에디터’를 모셨다. 정한석 기자가 바로 문제의 스페셜한 편집장이다. 정 기자는, 아니 정 편집장은 수개월 전부터 예의 그 악필로 숱하게 메모를 하면서 이번 호를 준비했다. 그러니 스페셜 에디션의 각 꼭지가 어떻게 기획됐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정한석 에디터에게 듣는 게 맞을 것이다. 그의 에디토리얼은 홍상수 스페셜 에디션(이 잡지를 거꾸로 뒤집으면 나오는)의 첫머리에 실려 있다.
이번 스페셜 에디션은 1년 전부터 기획됐다. 그의 아홉 번째 장편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개봉을 앞두고 있을 즈음, 우리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세계를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특집을 생각했고 그러자면 책 한권을 터야 하지 않을까 하는
[에디토리얼] 무한도전!
-
검사와 스폰서의 관계를 다룬 <PD수첩>은 한마디로 대박이었다. 탄탄한 플롯과 풍성한 캐릭터, 그리고 생생한 리얼리티까지 이 프로그램은 대박영화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탄탄한 연기력(박 검사님, 음험한 대사 톤 최고예요!)과 빽빽한 긴장감(‘큰집’이 또 한번 ‘조인트’를 벼르는 거 아닌가 하는)까지 받쳐주니 감동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현실이 이처럼 박진감 넘치고 역동적이다보니 한국에서 현실풍자 영화를 만든다는 건 힘든 일이다. 과거 송능한 감독이 한국사회를 풍자하는 <38광땡>을 준비하다 포기한 것도 그즈음 터진 최규선 게이트 때문이었다. 당시 송 감독은 “현실이 내 상상력을 넘어선다”고 말하며 캐나다로 떠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니 한국에서 제대로 된 정치영화나 사회스릴러가 나오지 않는다며 영화인만 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도 스폰서의 실체를 본 적 있다. 일간지에 다니던 시절, 한 선배가 후배들에게 횟집에서 술을 사줬다. 그는 옆자리에
[에디토리얼] 스폰서를 찾습니다
-
-
지면개편은 활자매체의 숙명이다. 지면이 관성화됨에 따라 지루함을 느끼는 독자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활자매체들은 꽃단장을 한다. 개편은 거창한 목표들로 포장되지만 실상은 외양만 바뀔 뿐이다. 아무리 대폭 개편을 해도 <조선일보>가 <한겨레>로 바뀔 리 없고, (지금은 발행 중단 상태인) 월간 <말>이 월간 <경마>가 될 수는 없다. 소유권이 바뀐다거나 조직이 혁명적 변화를 겪지 않는 한 그 ‘알맹이’는 여전하다는 얘기다.
창간 15주년을 맞아 <씨네21>도 새 단장을 했다. 이번 개편의 모토는 ‘보다 친절하게, 보다 재미있게, 보다 깊이있게’다. ‘친절하게’는 그동안 독자들과 눈높이를 맞추지 못한 것을 반성하자는 취지다. 문화적 핫이슈를 발빠르게 전하는 ‘Must 10’이나 영화의 뒷이야기를 풀어보는 ‘무비딕’, 영화·영상쪽 진출을 꿈꾸는 분들을 위한 ‘프로페셔널’은 이런 차원에서 만들어진 지면이다. 굳이 취지에 대한 설명이
[에디토리얼] 봄단장을 마치고
-
영화감독이란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제3자의 눈으로 보기에는 제작비가 상당히 많은데도 부족하다고 툴툴대거나 엄청 오랫동안 찍는데도 시간이 없다고 불평하는 게 감독들이다. 그건 그들이 방종하거나 무능하기 때문이 아니라(간혹 그런 경우도 존재한다…) 영화라는 예술의 특성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게 맞을 듯싶다. 영화는 여러 사람들과의 협업을 전제로 하며 자본이라는 필요악을 끌어안아야만 성립 가능하다. 그런데 자본과 배우, 스탭 등의 요소는 감독의 운신에 명징한 선을 긋는다. 산업이라는 틀 안에서만 이야기하자면, 아무리 대단한 예술혼을 가진 감독이라 할지라도 일정한 제작비와 정해진 일정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돈과 시간에 대한 무한대의 욕망은 그러한 결핍감에서 비롯된다.
물론 성공작을 기반으로 돈과 시간의 사슬에서 자유로워지는 감독도 존재한다. 그 ‘자유’는 영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몇 가지 사례가 있다. <디어헌터>로 스타가 된 마이클 치미노는 (당시로
[에디토리얼] 자유와 한계
-
제임스 카메론이 한국에서 한국 자본으로 5D영화를 찍는다, 고 뻥을 치려 했다. 만우절을 기념해서 말이다. 해외 언론들처럼 아예 만우절 에디션을 만들면 어떨까 상상하니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남기남 감독의 200억원 규모 블록버스터영화 현장 방문기’라든가 ‘스케이트 액션영화 출연 결정한 김연아 인터뷰’ 같은 가슴 벅찬 기획부터 ‘영진위 사태 모두 해결, 조희문 위원장 영화계에 사과’, ‘충무로 다시 활황… 500만 관객 돌파 한국영화 벌써 10편’처럼 희망 섞인 뉴스 등등. 이걸 <싸네21>이라는 제호 아래 제작한다면…. ‘스파게티가 주렁주렁 열리는 나무가 있다’고 보도해 만우절 농담의 획을 그은 1957년의 <BBC>라든가 왼손잡이용 햄버거가 출시됐다는 버거킹 광고를 실은 1998년 <USA 투데이>, (부시와 이라크전을 비판했던) 영국 록밴드 콜드플레이의 크리스 마틴이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 당수를 지지하기로 했다고 보도한 <가디언> 등
[에디토리얼] 만우절 블루스
-
이가라시 유미코의 <캔디 캔디> 7권, 캔디는 스잔나가 입원한 병원을 찾아간다. 스잔나는 조명기가 떨어지는 사고에서 테리우스를 구하는 대신 자신의 다리를 잃었다. 캔디는 스잔나를 보면서 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간절한지 깨닫는다. 그때 테리우스가 나타난다. 테리우스는 도망치듯 계단을 내려가는 캔디를 와락 ‘백 허그’한다. 그 순간 캔디가 뇌까린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초등학교 5학년 때 문방구에서 샀던 <캔디 캔디>에는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다. 훗날 다시 출간된 버전에는 “그냥 이대로 시간이 정지해버렸으면 좋겠다”고 번역돼 있지만 감흥에선 많이 처진다. 30년이 지났는데도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이라는 구절이 생생한 것은 캔디의 그 뇌까림이 그만큼 절절하게 느껴졌기 때문인 듯하다.
“시간이 잠시 멈췄으면 좋겠어요”, <지붕 뚫고 하이킥!> 마지막회에서 세경이가 말했을 때 전율을 느꼈다. 시간이 멈추기를 바라는 세경의 바람은 김혜리가 적은
[에디토리얼]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
다큐멘터리의 시즌이라 할 만하다. 홍형숙 감독의 <경계도시2>가 이미 개봉했고 <아마존의 눈물>과 <예스맨 프로젝트>가 곧 극장에서 선보인다. 오스카 장편다큐멘터리상을 받은 <더 코브: 슬픈 돌고래의 진실>의 제작진도 뜬금없이 내한했다. 극장가 비수기와 관련있겠지만, 한국에서 극장용 다큐멘터리를 이렇게 한꺼번에 만나는 건 흔치 않은 기회다.
개인적으로 극장에서 처음 본 다큐멘터리는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1995)다(어쩌면 영화가 시작되기 전 우리를 지루하게 했던 <대한뉴스>가 첫 극장 다큐였는지도). 가깝지도 않은 동숭아트센터까지 굳이 찾아가 관람료를 내면서 이 영화를 봤던 건 워낙 화제를 모았던 까닭도 있지만, ‘극장에서 다큐멘터리를 본다’는 체험에 대한 호기심도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확실히 그 경험은 색달랐다. 극장이라는 어두운 동굴은 동공과 감각기관을 확장시켰다. 당시로선 무모했던 다큐멘터리의 극장
[에디토리얼] 다큐 한편 어떠세요?
-
올해 오스카상 시상식은 한국에서 생중계되지 않았다. 오랫동안 오스카 무대를 한국에 전달해온 OCN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중계를 포기했다. 지난해 얼핏 들은 말에 따르면 채산성이 맞지 않아서란다. 중계권 등 비용에 비해서 광고로 벌어들이는 수익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말일 거다. 하긴 월요일 오전 시간에 방바닥을 굴러다니면서 이 쇼를 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거란 생각도 든다.
직업상 보지 않을 수 없는 처지라 수소문해보니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를 볼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이 놀라운 테크놀로지의 신세계는 외국의 방송을 실시간으로, 그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화질로 접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근데 이 기술은 저만 처음 접한 겁니까?). 어렵사리 보게 된 오스카 시상식은 미국 언론과 블로거들이 투덜거린 것처럼 허점이 많았다. 스티브 마틴과 알렉 볼드윈의 진행은 평이한 편이었고(오프닝은 제외!), 남녀 주연상 후보를 소개하러 나온 인물들의 추천사는 다소 닭살스러웠으며, 호러영화에 대한 오
[에디토리얼] 역시 오스카로다
-
<경계도시2>를 보는 건 힘들었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가슴은 답답해졌고 머리 속은 복잡해졌으며 장탄식이 절로 나왔다. 극장 바깥으로 나오니 몸이 퉁퉁 부은 듯 멍한 느낌이었다. 정말이지 <경계도시2>는 가수 루시드 폴의 말처럼 “한편의 공포영화”였고 사진작가 이시우의 말마따나 “고통스러운 영화”였으며 이영진 기자가 적은 대로 “당혹스럽”게 하는 다큐멘터리였다. 살인자가 등 뒤에서 다가가는데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영화 속 인물을 보는 것보다 5만배는 답답했고, 엄마 없는 소녀가 아버지를 찾아가는 길에서 여비를 뺏기고 동생을 잃어버린 마당에 깡패들을 만나는 장면을 보는 것보다 10만배는 심란했다(홍형숙 감독님, 강석필 프로듀서에게 “104분 동안 마이크 타이슨에게 얻어터진 느낌”이라고 말한 게 저예요).
이 영화는 되새기고 싶지 않았던 기억들을 대책없이 끄집어낸다. 송두율 교수가 37년 만에 고국 땅을 밟은 2003년 9월부터 독일로 떠난 2004년 8월의
[에디토리얼] 이상한 나라의 송두율
-
존 휴스턴은 1987년 유작이 된 <죽은 자들>을 찍었다. 폐기종을 앓고 있던 그는 당시 산소호흡기 없이는 20분도 버틸 수 없는 상태였다. 산소통이 달린 휠체어에 앉아 연출에 임하던 그는 현장을 찾은 <시카고 트리뷴>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자유를 진정으로 구성하는 것이 무엇일까, 라는 오랜 물음에 대한 답을 아직 찾지 못했다. 나는 그저 튜브의 끝에 있다.” 젊은 날 혈기왕성했던 감독의 마지막 영화가 유독 우아하면서도 우울했던 이유는 그가 삶의 종점에서 만난 서글픈 진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2월24일 조명남 감독이 사망했다.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여러 차례 만난 적 있었고, 그의 지독한 불운을 알고 있던 던 터라 마음이 묵직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2002년이다. 당시 조명남 감독은 <미스터 레이디>라는 데뷔작을 만들고 있었는데, 제작사인 인디컴은 내 담당이었다. 흔치 않은 뮤지컬영화인데다 트랜스젠더를 소재로 삼았던 이 영화를
[에디토리얼] 조명남 감독을 기리며
-
정말이지 <지붕 뚫고 하이킥!>은 걸작이다. 그 이유를 굳이 상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나 싶지만, 그저 두루뭉술하게 말하자면 이 작품처럼 지금 이 시대, 그리고 여기의 삶을 예리하고 정확하게, 하지만 따뜻하고 섬세하게 그려내는 드라마나 영화가 요즘 있었나 싶기 때문이다. 최소한 난 최근 들어 인물들의 감정을 이토록 밀도있게 묘사한 멜로드라마를 만난 적이 없고, 이만큼 통쾌한 웃음을 주는 코미디를 접하지 못했으며, 세상의 단면을 이렇게 정교하게 도려낸 풍자극을 볼 수 없었다. 세경처럼 짠한 역할도, 정음처럼 사랑스런 인물도, 보석처럼 연민이 가는 캐릭터도 만나지 못했다. 그러니 <지붕 뚫고 하이킥!>을 김병욱 감독 작품세계의 최절정이라고만 말하는 건 야박하게 느껴진다. 나는 <지붕 뚫고 하이킥!>, 그리고 김병욱 감독과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을 행운으로 여긴다고 말하겠다. 설 합본호의 표지와 특집을 <지붕 뚫고 하이킥!>으로 꾸민 건 &l
[에디토리얼] 만세! 김병욱
-
<맨 온 와이어>는 매우 흥미로운 다큐멘터리다. 그 이유에 관해서는 장영엽 기자가 잘 정리해놓아 굳이 재론하고 싶지 않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가슴에 와닿았던 대목은 후반부에 등장하는 필리프 프티의 이야기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 도전에 성공한 뒤 경찰에 체포된 그는 빌딩 아래서 기다리던 기자들에게서 질문공세를 받는다. 왜 쌍둥이 빌딩 사이를 건넜냐고. 왜 그 위험한 행동을 했냐고. 왜 목숨을 걸고 줄타기를 하냐고. 프티는 관객에게 말한다. “내가 한 일은 거대하고 신비한 것이었는데 기자들의 질문은 그저 ‘왜’였어요. 하지만 내 일의 미덕은 ‘왜’라는 게 전혀 없다는 거죠.” 그 말은 프티가 어떤 대가를 바라거나 특별헌 주의주장을 펴기 위해 이 무모한 도전을 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정말이지 영화를 보노라면 그는 순전히 행위예술 차원에서 줄타기를 한 듯 느껴진다. 그리고 그 예술품에는 ‘산다는 게 다 줄타기 아니겠냐’는 뜻이 담긴 것 같고. <왕의 남자> 속 장생과
[에디토리얼] 줄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