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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어 씨네21> 같습니다.
이번호 표지그림은 <벼랑 위의 포뇨>! 맑고 고운 동심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열장이 넘는 시안을 뽑았습니다, 라고 말할 순 없고요. 딱 와닿는 한장이 무엇인지 헷갈려 최대한 많이 컬러로 출력해보았습니다. 그림을 표지 전체에 가득 채우는 게 좋을지, 여백을 조금이라도 남기는 게 효과적일지부터 판단이 잘 안 섰습니다. 어떤 그림을 선택할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너무 익숙한 장면, 중요도가 떨어지는 풍경, 주인공인 포뇨가 도드라지지 않은 그림은 제외하면서 하나하나 후보를 좁혔습니다. 결국 마지막 하나를 골랐습니다.
밑의 그림들은 표지 탈락작(!)들입니다. 그럼에도 하나같이 깜찍하고 귀엽습니다. 쳐다보노라면 그저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마감날 기자들은 이 표지후보 그림들을 서로 가져가 책상 위에 붙이겠다며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왁자지껄 작은 소동이 벌어졌지요.
얼마 전 후배기자들과 밥을 먹다가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시
[편집장이 독자에게] 변덕 없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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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좀 색다른 독자엽서입니다. “넘넘 재미있어요. 이 잡지는 10년 100년 1000년이 지나도 계속 나와야 해요. 게다가 만화 000은 넘넘 재미있군요. 다른 만화도 다음 이야기가 궁금궁금해요. 10년, 아니 100년, 아니 1000년 지나도 나와주실 거죠?” 삐뚤삐뚤 연필글씨에, 내용은 횡설수설 아부 일색입니다. 주인공은 여덟살난 제 딸아이였습니다. <씨네21>에 부치려던 건 아닙니다. 집에서 정기구독하는 한 어린이만화잡지에 보내려고 적은 엽서였지요. 워낙 그 잡지의 팬이긴 했지만, 독자사은품을 노린 잔머리가 훤히 들여다보였습니다. 그래서 한참을 웃었습니다. 웃다가 퍼뜩 ‘10년 100년 1000년 뒤에도 나와달라’는 철없는 문장에 꽂혔습니다. 10년, 100년, 1000년이라….
어렸을 적 <소년중앙>이라는 만화잡지에 안달하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가 서점에 나가 최신호를 사다주면 한달 내내 아끼고 아끼면서 읽었습니다. 기대와 설렘 속에 새 잡지를 받
[편집장이 독자에게] 1000년 가는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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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만하면 언론에 등장하는 당신. 지만원 선생을 추억하면서 이 글을 씁니다. 아예 지만원 선생께 드리는 투로 편지를 써보겠습니다.
가끔 선생의 발언이 신문 지면이나 TV 화면을 장식할 때마다 기분이 야릇합니다. 마치 오랜 친구의 얼굴을 대하는 듯한 친근감마저 느껴집니다. 구면이기 때문이겠죠. 엄밀히 말하면 악연이었습니다. 2000년 5월경이었습니다. 저는 선생을 개혁 성향의 국방 전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베트남전에 관한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뭔가 얻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였습니다. 지면관계상 자세히 쓸 수 없으나, 선생에 대한 그 이미지는 저의 착각이었다는 사실이 곧 드러났습니다. 일련의 사건이 있었죠. 한달여쯤 지나서 자초지종을 묻기 위해 다시 전화를 했습니다. 선생은 언성을 높였고 저도 지지 않았습니다. 몇주 뒤 선생은 “기자에게 전화폭력을 당했노라”며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지요.
그로부터 몇 개월 뒤엔 베트남전 관련 토론회에서 같은 토론자로서 선생
[편집장이 독자에게] 너 오늘 여기 안 온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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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뒈져버려, 호모 새끼야.”
이 모멸적 대사는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이하 <앤티크>)에 등장합니다. 고교 시절 진혁(주지훈)이, 사랑을 고백하는 동급생 선우(김재욱)를 치명적으로 모욕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선우는 ‘뒈지지 않고’ 잘 살아남아 진혁이 차린 케이크점에 10년 뒤 나타납니다. 게다가 자신이 ‘마성의 게이’임을 당당하게 자랑합니다. 참으로 밝게 자란 게이입니다.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도 그런가요? 사실 주변의 시선 때문에 ‘정말 뒈져버리고 싶은’ 게이들 엄청 많았을 거라 추정됩니다. 친구뿐 아니라 가족들도 ‘호모’를 감싸안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정신병원에 감금하면서까지 ‘전향’을 강요했던 사례도 있습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편견의 벽에 머리를 박다 자살을 택한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뒤늦게 이런 이들을 위로라도 해주려는 건지 게이 코드의 영화들이 쏟아집니다. <앤티크>를 포함하여 곧 개봉을 시작하는 <소년, 소년을 만
[편집장이 독자에게] 모멸적 대사, 그 피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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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냥이가 아닙니다.
장률 감독의 영화 <이리>(36~37쪽 참조)의 이름을 듣고 늑대를 떠올리는 분들도 많습니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인지 그런가 봅니다. 이리는 그 이리(wolf)가 아니지요.
독자 여러분이 이번호 <씨네21>을 받아들 때면 11월11일쯤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1이라는 숫자가 연속 네개나 붙은 행운의 날. 빼빼로데이나 가래떡데이라는 말도 생기기 전인 31년 전의 그날 밤 9시, 전라북도 이리시(지금은 익산시)에서는 행운과는 한참 거리가 먼 사건이 터집니다. 열차에 있던 다이너마이트용 화약 30톤이 폭발한 겁니다. 59명이 죽고 185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1천여명 넘게 다쳤습니다. 바로 영화 <이리>의 모티브입니다. 주인공은 그날 엄마 뱃속에서의 진동으로 인해 태어나면서부터 지적장애인이 된 진서입니다.
저에게 이리는 ‘작은 서울’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을 전라북도 익산군의 한 농촌마을에서 보냈기 때문입니다.
[편집장이 독자에게] 그 이리와 저 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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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을 내동댕이쳤답니다.
지난 여름, 한 언론사에서 새어나온 이야기입니다. 이명박 정부의 탄생을 적극 지지했던 언론사라는 정도로만 밝히겠습니다. 어느 날, 그곳의 보도 책임자가 말단 기자들에게 밥을 샀다고 합니다. 젊은 후배들의 허심탄회한 의견을 들어보겠다는 취지였지요. 한 기자가 에둘러 조심스럽게 말을 꺼냅니다. “우리가 촛불정국에서 너무 시민들의 미움을 샀다. 공권력만 대변한다는 지적을 받았는데 선량한 시민 독자들의 지지까지 잃는 건 아닌지 되돌아봐야 하는 거 아닌가.” 이 말이 나오자마자 그 보도 책임자는 찌개를 떠먹던 숟가락을 굉음이 나도록 상에 내동댕이칩니다. 그리고 이런 요지의 일장연설을 퍼부었다지요. “우리가 김대중, 노무현 시절 빨갱이새끼들한테 얼마나 탄압을 받았는데 그딴 소리를 하는 거야? 빨갱이 다 때려잡아야 하는 판국에 빨갱이들 지지가 왜 필요한데?”
상징적인 에피소드입니다. ‘잃어버린 10년’을 주창해온 이들의 정서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동안 ‘좌파정부
[편집장이 독자에게] 등불 또는 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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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팅인가요?
어색한 공기에 질식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 차가운 ‘얼음’을 깨야 할까요. 일대일 만남도 만만치 않을 텐데, 이건 아예 불특정 다수인 수만명 독자와 인사를 나누는 소개팅이군요. 부담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씨네21> 편집장을 맡아 처음으로 인사드립니다. 한달 전 편집장에 내정된 뒤 지인들에게 받은 질문은 마치 소개팅 자리의 그것과 같았습니다. 저를 잘 알거나 모르거나 한결같이 이렇게 물었으니까요. “영화 좋아하세요?” 정말 분위기 썰렁하고 할 말이 없을 때 그렇게 상투적으로 묻지 않습니까? 소개팅에도 안 나갔는데 그런 ‘클리셰’형 물음에 시달린 이유가 있습니다. 저에겐 영화 기자의 이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호 007 특집기사를 보니 <퀀텀 오브 솔러스>의 감독인 마크 포스터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역대 007 시리즈 감독 가운데 액션영화 연출 경력이 전무한 거의 유일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저는 역대 <씨네21> 편집장 가운
[편집장이 독자에게] 공식 소개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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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허문영 선배가 <씨네21> 편집장으로 마지막 마감을 하던 날이 기억난다. 편집장을 그만두겠다면 마지막 선물로 미래를 대비할 계책이 든 비단주머니 3개는 남기고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농반진반 투정을 부렸다. <삼국지>에서 제갈공명과 사마중달이 건곤일척의 싸움을 벌이던 중 제갈공명이 자신의 병이 위중해진 것을 알고 자신이 죽은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적어 비단주머니에 넣어 측근에게 줬다는 얘기를 떠올린 것이다. 귀신처럼 앞일을 내다본 제갈공명의 지혜를 칭송하는 옛날이야기일 텐데 어쩐지 편집장을 그만두는 사람도 제갈공명 같은 혜안을 전수해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너의 청이 정히 그렇다면 기획 아이템이 없을 때는 빨간 주머니를 풀어보고, 기사 첫 문장이 안 풀릴 땐 파란 주머니를 풀어보고, 기자 일을 아예 그만두고 싶을 때는 노란 주머니를 풀어봐라.” 뭐 그러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나 그런 건 소설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섭섭했다거나 그
[편집장이 독자에게] 비단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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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호에 부산국제영화제의 화제작을 소개하는 기획기사를 내보내면서 꼭 언급할 영화 한편이 빠져서 못내 아쉽다. 김소영 감독의 <민둥산>은 올해 부산에서 내가 본 최고의 한국영화였으나 감독 인터뷰가 성사되기 전에 감독이 출국했다는 비보를 접했다. 데뷔작 <방황의 날들>을 보지 못한 채 <민둥산>을 보고나자 조만간 <방황의 날들>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두 번째 장편영화인 <민둥산>은 별다른 장식없이 감정적 충만함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어떤 슬픈 선율도 덧붙이지 않은 연출로 인해 눈물없이 볼 수 없는 스토리가 흔한 신파에서 영화적 마술로 비약하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이야기는 아버지가 집을 나간 뒤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엄마와 어린 두딸에서 시작한다. 엄마는 두딸을 데리고 서울의 아파트를 떠나 시골 고모의 집으로 간다. 아이들을 고모의 집에 맡겨놓고 엄마 혼자 서울로 가버렸을 때 두딸은 자신들에게 닥친 고난이
[편집장이 독자에게] <민둥산>과 <로나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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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실의 죽음 앞에 망연자실하다. 뭔가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느낌에 모두가 우왕좌왕이다. 도대체 왜? 만나는 사람마다 죽음의 이유를 추측하며 비현실적인 사건과 현실 사이의 공백을 메우려 하지만 가당치 않다. 어딘가 발을 헛디딘 사람처럼 휘청거릴 뿐이다. 인터넷의 연예 저널리즘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죽음에 합리적 이유가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핑계일 가능성이 크다.
<마요네즈> 개봉을 앞두고 최진실 인터뷰를 하고 매니저로부터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나이가 있는데 계속 귀여운 이미지만 내세우면 곤란하지 않느냐,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는데 어떻게 할 거냐는 식의 질문에 최진실이 많이 속상했다는 내용이었다. 퇴물 취급을 받은 것 같아 화가 났다는 말에 그 정도 질문은 괜찮지 않냐며 반발했던 기억이 난다. 기자로선 당연한 질문을 했지만 개인적으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남에게 상처주는 말을 했다는 게 기분 좋을 리는 없었다. 그런 질문을 했던 건
[편집장이 독자에게] 최진실과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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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잡지 만드는 일을 시작했을 때 글을 쓰면 잡지는 저절로 나오는 줄 알았다. 글을 쓰고 싶어 시작한 일이었기에 그 글이 어떤 공정을 거쳐 어떻게 인쇄돼야 독자의 손에 가게 되는지에 관해선 사실 아무 관심도 없었다. 그러다 글쓰는 일이 잡지를 만드는 데 있어 무척 작은 영역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처음 일을 시작한 곳이 무척 영세한 잡지였기에 글을 쓰는 며칠보다 훨씬 많은 일이 글을 쓴 뒤에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을 찾거나 교열·교정을 하는 일은 물론이고 인쇄소에 가서 인쇄된 책을 규격에 맞게 자르고 포장한 뒤 트럭에 싣고 배달하는 일까지. 잡지가 독자의 손에 들어가기까지 어떤 노동이 들어가야 하는지 몸으로 배운 시기였다. 그렇게 일을 배워서인지 후배들한테도 인쇄소에 한번 가보길 권하는 편이다. 책상에 앉아 자판만 두드려서는 알 수 없는 세계가 그곳에 있고 나의 고뇌만큼 가치있는 땀이 거기 흐르기 때문이다. 인쇄된 종이만 보고 종이의 재질이 어떠하며 무게가
[편집장이 독자에게] 엔딩 크레딧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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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합본호를 만들고 1주일 쉬는 기간 캄보디아에 다녀왔다. 앙코르와트를 보러갔고 기대했던 대로 앙코르와트의 거대한 유적은 현기증을 일으킬 만큼 압도적이었다. <화양연화>의 엔딩이 왜 이곳에서 이뤄졌는지 한번 가보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800년 전 찬란한 문명을 자랑했던 석조건물이 허물어지는 틈 사이로 500년쯤 된 나무의 거대한 뿌리가 비집고 들어간 모습을 보노라면 누구라도 시간에 대한 상념에 사로잡히리다. 이곳은 정말 시간을 묻고 고개 숙여 경건한 기도를 드리기에 더없이 적당한 장소처럼 보인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화양연화>를 보고나서 앙코르와트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기 전에는 망설이는 마음이 있었다. 막 서울의 무더운 여름을 이겨내자마자 더 덥고 습한 곳으로 간다는 게 어딘지 손해보는 느낌이었고 몇 차례 동남아를 다녀온 기억이 좋지만은 않았다. 가난한 나라에서 우쭐대는 부자 나라 여행객의 추태를 본 적 있는데다
[편집장이 독자에게] 미지를 향한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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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탓에 불온서적에 관한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는 학교 앞 서점이 온통 사회과학서적으로 가득했고 사상을 선전하고 혁명을 선동하는 책자에 탐닉하는 대학생이 적지 않았다. 국가보안법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이라 가방에 넣고 다니다 검문에 걸릴까 가슴이 두근대기도 했다. 시위에 나섰다 경찰에 연행되기라도 하면 운동권 동료들은 재빨리 연행된 친구의 집에 가서 방을 정리했다. 혹시 경찰이 불온서적을 빌미로 국가보안법을 적용할까 싶어 문제가 될 만한 책을 모두 치우는 것이다. 나도 한번 연행된 적이 있는데 친구들이 찾아와 책을 치웠고 경찰서에서 돌아왔을 때 그 책들은 모조리 재가 되어 있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 염려한 할머니가 뒷산에 가져가 그 많은 책을 태워버린 것이다. 왜 태웠냐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국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느꼈을 붉은색에 대한 공포는 능히 짐작할 만했다.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는 책이 아닌데 그때는 사는 것만으로 스릴이 있었고 읽는 것이 일
[편집장이 독자에게] 불온 부추기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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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함께 여름이 사라졌다. 아침 잠을 깨우던 지겹던 매미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직 8월인데 하고 방심한 사이 가을이 시작된 것이다. 주간지를 만들다보면 계절을 앞질러야 할 때가 있다. 열대야에 시달리는 와중에 다음주엔 가을, 겨울영화를 소개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오면 한여름에 무슨 소린가 싶지만 몇주 뒤에 바뀐 계절을 실감하게 되면 일찍 준비하길 잘했다 싶다. 물론 이런 일을 자주 하게 되면 계절 타는 기획을 습관적으로 내놓게 되기도 한다. 경험이 가르쳐준 대로 따라하다 식상한 메뉴라는 평판을 듣고서 뜨끔해지는 것이다. 이번호 인터뷰 가운데 가수이자 <중경>의 배우 샤오허가 한 말이 인상적이다. “그동안 일관되게 생각해온 것 중 하나가 창작에 있어서 가장 큰 적이 경험이라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좀더 좋은 길로 가기 위해, 아니면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 경험들이 축적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경험의 결과 혹은 학습의 결과가 모방하거나
[편집장이 독자에게] 극장의 미래, 저예산 예술영화의 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