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가 나오지 않으니까 애니메이션은 영화라는 느낌이 안 들어요.” 언젠가 김지운 감독이 이렇게 말했을 때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애니메이션을 볼 때는 극영화와 다른 자세를 취한다. 애니메이션과 극영화는 같은 만큼 다른 매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둘의 차이는 무엇보다 배우의 유무다. “디즈니는 좋겠다. 연기가 마음에 안 들면 찢어버리면 되니까.” 앨프리드 히치콕이 이렇게 말했다는데 그렇다고 히치콕이 애니메이션의 연기를 진짜 선망했을 거란 생각은 안 든다. 애니메이션과 달리 극영화는 좀더 복잡한 감정연기를 요구한다. 인물의 얼굴에 바짝 붙어 움직이는 다르덴 영화 속 배우들의 연기 같은 걸 애니메이션이 구현할 수 있을까? 그럴 필요도 그럴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애니메이션이 극영화보다 열등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상상으로 빚어낸 캐릭터의 개성이나 액션 혹은 판타지를 표현하는 영역에서 애니메이션은 극영화보다 효과적이다. 당연히 각각의 장점을 취하려는 이종교배의 시도가 생겨났다.
[편집장이 독자에게] <페르세폴리스>의 매력
-
시간을 1주일 단위로 쓰는 <씨네21>에선 계절 감각도 남다르게 느끼게 된다. 4월 창간기념호를 만들다보면 봄이 이렇게 가는구나 싶고, <아이언맨> <스피드 레이서>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 등 할리우드 대작이 몰려오면 벌써 여름이 왔구나 실감하게 된다. 계절이 바뀌는 신호는 영화제를 통해서도 확인한다. 여성영화제가 봄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면 전주영화제는 늦봄과 초여름이 교차하는 표지판 같고 부천영화제로 여름을 보내고 나면 가을은 부산영화제와 함께 찾아온다. 여성영화제가 끝나고 창간기념호도 만들어놓고 전주영화제를 기다리는 지금은 오랜만에 주위 풍경에 눈길을 돌리는 시기다. 벚꽃이 언제 피었다 졌는지 몰랐는데 나무들의 연둣빛이 눈부시게 반짝이는 계절이 왔다. 전주영화제가 살랑살랑 유혹하는 것 같다.
전주영화제는 <씨네21> 기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영화제다. 올해도 몇몇 기자들이 나를 전주에 보내달라고 편집장
[편집장이 독자에게] 전주영화제의 유혹
-
1년에 한 차례 꼭 피하고 싶은 일주일이 있다. 바로 창간 기념호를 만드는 주간이다. 분량만 따져도 2주치 책을 한꺼번에 만드는 셈인데 지면 개편까지 하다보니 눈이 침침하고 손발이 떨린다. 심은하 편집팀장이 오픈칼럼에 “죽을 뻔했다”고 표현한 대로다. 올해는 특히 부분적인 손질 대신 기초부터 다시 점검하고 손을 보는 작업을 했다. 13년간 튼튼히 받춰준 대들보지만 그냥 놔두면 수년 안에 문제가 생기겠다 싶은 나무는 교체했고 벽지만 새로 바르는 대신 벽지를 뜯고 벽돌을 다시 쌓았다. 그러다보니 여태 버텨준 게 용하다는 생각이 드는 자재도 있었고 그래도 처음 설계를 제대로 했네 싶어 고마운 것도 많다. 전통과 혁신, 둘 사이에 균형을 잡겠다고 생각해 나온 결과가 이번 창간 13주년 개편호다.
창간 13주년 특집으로 마련한 1995~2008 영화 베스트10은 그야말로 총력을 다한 기사다. 담당자였던 정한석 기자를 중심으로 취재팀 전원이 설문에 매달렸고 편집팀, 교열팀, 디자인팀 모두
[편집장이 독자에게] 창간 13주년
-
“침 좀 닦아라. 침을 질질 흘리면서 썼네.” 가끔 배우에 관한 개인적 호감이 넘쳐 연애편지를 방불케하는 기사를 쓰는 경우 농담삼아 하는 말이다. 그래서 고쳐 쓰라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틀린 근거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면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이번호 특집기사인 ‘<씨네21> 기자들의 추천 배우’는 말하자면 지면 곳곳에 침 흘린 자국이 가득한 기사다. 기자라는 작자들이 이렇게 개인적인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도 되나, 반감이 들 수도 있지만 이왕 하는 커밍아웃이라면 과감해지자고 판단했다. 물론 얼마간 망설임도 있었다. 배우로서 성취도나 연기력만 놓고 보면 이렇게 쓰는 게 지나친 과장이 될 수 있겠다는 싶어서다. 하지만 배우라는 존재가 혹은 연기라는 예술이 객관적 수치로 우열을 가릴 문제는 아니다. 서열을 매기기 전에 그동안 몰랐던 배우들의 특별한 매력을 소개하는 데 주력했다.
영화잡지를 만들면서 자주 부딪히는 문제는 객관성과 주관성의 조화를 어디서 구하느냐는 점이다
[편집장이 독자에게] 봄맞이 흥건한 특집
-
-
아파트는 한국에서 보편적인 주거형태다. 인구는 많고 땅은 좁으니 많은 사람이 작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점유하기에 적당한 방식이다. 여러모로 도시생활자의 편의를 고려해 설계한 집인데 그렇다고 아파트에 사는 각자의 필요를 모두 충족하는 것은 아니다. 2인 가구라면 왜 30평도 안 되는 아파트에 방을 3개나 만들었나 불만스럽고 5인 가구라면 좁더라도 방을 4개로 만들어주길 바랄 것이다. 가족 구성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불만사항이 다르지만 아파트는 각자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수 없다. 가장 많은 가족 형태를 모델로 평균치의 감각으로 만든 집이기 때문이다. 부동산에서 방 하나에 거실 넓은 30평 아파트를 찾아달라고 하면 면박당하기 십상이다. 현대사회에서 대량 생산, 대량 소비 시스템에 포섭되지 않는 욕망을 실현하는 일은 어렵다. 돈도 노력도 더 많이 들여야 한다. 아파트를 예로 들었지만 평균치 감각과 평균치 욕망을 원하는 것은 건설회사만이 아니다. 대형 마트에서, 커피 체인점에서, 브랜드 의류
[편집장이 독자에게] 틈새시장
-
영화의 기능 가운데 교육과 계몽의 힘을 일찍 깨달은 것은 구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였다. 레닌이 가장 중요한 예술로 영화를 꼽은 건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데 영화만큼 효과적인 매체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히틀러의 독일도 이 점에선 레닌의 소련과 다르지 않았다. 미학적 완성도를 자랑하는 레니 리펜슈탈의 영화가 지금껏 비난받는 이유는 나치의 선전도구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내용 면에서 레니 리펜슈탈의 반대편에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마이클 무어에게도 영화는 교육과 계몽의 수단이다. <식코>에서 구소련의 선전영화가 인용되는 모습을 보노라면 마이클 무어는 그 점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다. <피아니스트>의 미카엘 하네케 감독이 당신 영화의 메시지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메시지 같은 건 우체국에 가서 찾아라. 내 영화에 메시지 같은 건 없다”고 말하는 것과 상반된 태도다. 마이클 무어에겐 메시지가 중요하고 그의 영화는 메시지를 가장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
[편집장이 독자에게] <식코>의 힘
-
이번호에 정재혁 기자가 쓴 글을 보다 눈물이 날 뻔했다. 황윤 감독의 다큐멘터리 <작별>과 <어느 날 그 길에서>를 소개한 그의 기사는 지금 이 땅에서 야생동물들이 처한 위험천만한 상황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황윤의 다큐를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론 과연 보는 게 좋을지 걱정도 됐다. 야생동물들이 길을 건너다 차에 치여 죽는 로드킬의 참상을 전하며 “목장갑이나 대걸레 조각이 야생동물 시체로 착각하기에 가장 쉬울 정도로 야생동물들은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쓴 문장을 보니 비록 동물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없는 사람이지만 과연 화면으로 그걸 확인할 용기가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동물원의 실상을 전하는 <작별>의 경우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꺼림칙했다. 영화를 보고나면 동물원에서 맘 놓고 누리던 즐거움을 영영 잃어버리지 않을까 싶어서다. 분명한 것은 내가 피한다고 현실이 나아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두편의 다큐가 일깨우는 불편한
[편집장이 독자에게] 황윤 다큐의 불편한 진실
-
3주간 진행한 ‘지금 미국영화’ 특집의 마무리는 김소영, 정성일, 허문영 세 평론가의 대담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데어 윌 비 블러드>를 중심으로 전개한 이번 대담에서 나의 주의를 끈 것은 ‘역사성과 정치성의 귀환’이라는 표현이었다. 정성일은 “지금 미국영화의 특별하고 이상한 엔딩은 주목해볼 만한 하나의 시대적인 존재방식”이라는 운을 뗐고, 허문영은 “전세계적으로 도덕적 명분이 없는데도 전쟁을 계속해야 하는 터무니없는 상황, 그런데 미국 대중은 그 전쟁 책임자를 재선시켰고, 그렇게 기본적 상식이 붕괴된 시점에서 영화를 만들고 보기 시작했을 때, 지금은 그들이 시장의 평가보다 중요하게 자기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자연스런 흐름이 만들어진 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한발 더 나아가 김소영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전시의 홈 시큐리티의 무용성”이 드러난다며 “홈 시큐리티 얘기를 하지만, 사실 그 홈 자체도 서브프라임으로 날아갔고, 그
[편집장이 독자에게] 지금 미국영화, 지금 한국영화
-
지난주 ‘전영객잔’ 코너에서 허문영 평론가는 <밤과 낮>에 관해 “나는 이 라스트신에서 밝고 귀여운 면을 더 많이 보는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고 썼다. 홍상수가 더 밝아졌고 가벼워졌다는 평이 많았던 터라 그의 지적은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는 말이었다. 나 역시 홍상수가 이번 영화에서 밝아졌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아니, 홍상수의 어떤 영화보다 어둡고 우울하다고 생각한다. 약간의 과장을 보탠다면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떠 있는 라스트신의 그림을 보면서 생지옥에 갇힌 것 같은 답답함을 느꼈다.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는 길 위에서 끝을 맺은 전작들과 달리 안온한 가정으로 복귀했을 때 맞이하는 폐쇄공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밤과 낮>을 보고 시간이 흐른 뒤에도 납덩이처럼 마음 깊은 곳에 가라앉는 질문이다.
<밤과 낮>이 무슨 얘기를 하는 영화인지 정리하는 건 불가능하다, 고 한다. 지금까지 홍상수 영화가 그래왔기 때문에 <밤과 낮>의
[편집장이 독자에게] <밤과 낮>의 운명론
-
웬 호들갑이냐는 말을 들을지 모르겠다. ‘지금 미국영화’라는 특집을 3주 연속 진행하기로 결정하면서 사태를 지나치게 과장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데어 윌 비 블러드>를 보고 난 뒤, 이런 특집을 해야 할 때라는 확신이 생겼다. 두 영화가 훌륭하다는 얘기는 들었을 테고 나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두 영화가 택한 엔딩 때문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고 나온 관객 사이에선 “이게 뭐냐?”는 웅성임이 있다는데 아마 <데어 윌 비 블러드>를 봐도 마찬가지 반응이 나올 것 같다. 꼭 해피엔딩이 아니어도 할리우드 엔딩이라 부를 만한 것이 있는데 두 영화는 그것을 배신한다. 아무리 비극이어도 있게 마련인 카타르시스가 없는 것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악당은 끝까지 살아남고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선언하듯 갑자기 끝난다.
[편집장이 독자에게] 지금 미국영화를 말하는 이유
-
<추격자>가 승승장구하는 분위기다. 개봉 1주 만에 100만명을 돌파한데다 잘 만든 영화이고 굉장히 센 영화라는 입소문이 관객을 부르는 모양이다. 화제가 되는 영화인 만큼 영화에 관해 궁금한 것도 많고 해석도 분분한데 <씨네21>은 이번호에 나홍진 감독을 모시고 Q&A 시간을 가졌다. 지면으로나마 어느 정도 궁금증이 해소됐길 기대하는데 그래도 100% 만족스럽지 않을 분들을 위해 진짜 Q&A 시간도 마련할 생각이다. 조만간 <씨네21> 홈페이지를 통해 공지가 나가면 신청해서 나홍진 감독과 만나는 기회를 잡으시길 바란다.
스릴러로서 <추격자>의 장점은 충분히 언급된 것 같다. 관객의 심장을 쥐락펴락하는 장치들이 영리하게 사용됐고 관객이 집중하지 않을 수 없게 에너지를 발휘하는 배우들도 칭찬받을 만하다. 이렇게 많이 얘기된 부분을 제외하고 내가 흥미롭게 본 것은 중호의 이중적 모습이다. 영화 초반부에 여관에서 두 남자가 한 여
[편집장이 독자에게] <추격자>
-
설연휴가 끝나고 1주일간 숭례문 때문에 난리가 났다. 어딜 가나 숭례문 화재가 화제가 됐고 입 달린 자는 모두 한마디씩 했다. 온 나라가 초상집 분위기인데 한국의 상가 어디서나 그러하듯 술 취한 친척들의 고함소리도 여기저기 터져나온다. “이게 다 놈현 때문”이라는 관용구가 있는가 하면 “이명박이 시장 하면서 개방한 거 아니냐”는 성토성 발언이 나오고, “대체 문화재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냐”는 짜증 섞인 목소리가 있는가 하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라는 한탄도 들려온다. 정치권에선 “국민 성금을 걷자”는 말을 했다 거센 반발에 휘말리는가 하면 인수위 정부조직개편안에 노 대통령 퇴임축하연까지 별 관계도 없는 일들이 일제히 숭례문 화재와 연관된 것처럼 들먹여지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숭례문 화재는 비극에서 희극으로 장르를 옮겨가는 느낌이다.
온 국민이 숭례문에 이토록 진한 애정을 갖고 있었는지 예전에 미처 몰랐다. 내가 어느 정도 냉소주의자여서 그런지 모르지만 숭례문 화재에
[편집장이 독자에게] 숭례문
-
정작 미국에선 작가조합의 파업 때문에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이 제대로 열릴 수 있을지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만 올해 오스카 후보 명단은 수상식 여부와 무관하게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구경꾼의 견해로 말하자면 아카데미가 이만큼 괜찮은 명단을 내놓은 적은 별로 없다는 생각이다. 흔히 아카데미 스타일이라 말하는 보수적인 취향을 드러내는 작품이 올해만큼은 거의 없어 보인다. 코언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폴 토머스 앤더슨의 <데어 윌 비 블러드>가 똑같이 8개 부문 후보에 오른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코언 형제는 칸영화제 감독상을 3번이나 탔고 폴 토머스 앤더슨은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과 칸영화제 감독상을 탔지만 모두 오스카와 별 인연이 없었다. <파고>가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은 것을 제외하면 번번이 후보 지명에 만족해야 했다. 아카데미가 지난해에야 뒤늦게 오스카를 거머쥔 스코시즈를 보고 반성한 것일까? 코언 형제와 폴 토머스 앤더슨이 경합을
[편집장이 독자에게] 할리우드영화에 생긴 일
-
한달 전쯤 박혜명 기자는 뭐라 말할지 난감한 상황에 처한 적이 있다. <내셔널 트레저: 비밀의 책> 홍보행사 참석차 도쿄를 방문했을 때 일인데 인터뷰 도중 존 터틀타웁 감독이 갑자기 불법복제에 관한 얘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을 해적판의 천국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농반진반 기자들에게 당신들도 불법복제를 하는 것 아니냐고 추궁했다고 한다. 듣기에 기분 좋은 얘기는 아니지만 다운로드받아서 영화 보는 일이 다반사인 게 국내 실정이다보니 뭐라 답할 말도 없었다는 것이다. 하긴 몇년 전부터 중국이나 동남아를 다녀온 이들이 이구동성 “거긴 해적판 천지”라고 했던 걸 떠올려보면 미국 감독의 그런 발언도 당연한 일이다. 중국에선 주로 VCD로, 한국에선 주로 인터넷으로 유통된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명장> 개봉을 앞두고 내한한 진가신 감독은 비교적 한국을 잘 아는 홍콩 감독이다. <명장> 시사회에서 무대 인사를 하던 그도 불법복제 얘기를 꺼냈다. 이미 불법
[편집장이 독자에게] 즐감 서비스 개봉박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