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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스틸이 없으면 비디오가게로 갔다.
1994년의 일이다. 당시 내가 일했던 매체에 영화평론가 정성일씨가 ‘숨은비디오찾기’라는 연재를 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를 소개하는 칼럼이었는데, 늘 사진자료가 문제였다. 찾다찾다 못 찾으면 서울 강남의 어느 유명한 비디오대여 체인점으로 달려갔다. 명작으로 분류되는 옛날 비디오를 많이 구비했던 곳이었다. 그곳 사장의 양해를 얻어 비디오재킷을 빌려와, 회사에서 스캔을 뜬 뒤 돌려주곤 했다. 순전히 그 비디오점과 집이 가깝다는 이유로 심부름을 도맡아했던 기억이 난다(퀵서비스도 없었으니까). 그 비디오체인점에선 영화 소식지도 정기적으로 냈다. 그러고보면 당시 영화문화의 중심엔 비디오점이 있었다.
요즘엔 아무리 동네 주변을 둘러봐도 ‘비디어대여점’ 간판이 없다. 주로 ‘책대여점’에서 비디오와 DVD까지 빌려준다. 무협지나 만화책이 메인으로 취급된다. 비디오와 DVD의 소장량도 적어, 이름이 조금만 낯설다 싶으면 구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간간이
[에디토리얼] 다운로드, 실크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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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시위 1주년 기념 영화.’
아무도 그런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다. 그냥 나 혼자 붙여보았다. 신동일 감독의 <반두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영화는 최근 개막된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이다. 아직 전주에 내려가지는 않았지만, 미리 볼 기회가 있었다. 영화의 표면을 구성하는 방글라데시 출신 이주노동자와 여고생의 만남은 MB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그 시대를 향한 감독의 경멸적 시선이 촛불을 떠올리게 했다. 더구나 주인공인 여고생 민서(백진희)는 영락없는 ‘촛불소녀’다.
신동일 감독은 한결같은 영화 노선을 고집한다. 그는 우직하면서도 직설적이다. 전작인 <방문자>와 <나의 친구, 그의 아내>를 보면 그렇다. <반두비>도 그 연장선이다. 곳곳에 정치적인 기호와 메시지가 장착됐다. 학교 앞으로 달려오는 원어민 영어학원 버스엔 ‘MB’라는 글자가 붙고, 편의점의 취객은 “명박이 믿고 뉴타운 믿다가 좆돼버렸다”며 행패를 부린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에디토리얼] 촛불소녀의 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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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다. 제목이 <꿈속의 미래>다. 재미있을까? 옆자리에 50대 서양인이 앉았다. 갑자기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영화 관람 중에 졸던 제천영화제 서양인 심사위원 말이다. 웬걸, 이 아저씨도 영화 시작 5분 만에 코를 곤다. 30여분간 아주 푹 주무신다. 신경이 쓰여 자꾸만 힐끗거렸다. 나중엔 자다 깨다를 반복하더니, 영화 후반쯤에야 정신을 차리고 스크린을 응시한다.
전주에서 4박5일을 보냈다. <씨네21>의 제10회 전주국제영화제 공식 일간지(데일리)를 만들었다. 낮에는 영화를 보고 밤에는 데일리를 편집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실은, 나도 영화를 볼 때마다 하품을 했다. 데일리 편집 마감이 밤 11시쯤 끝나는 터라(이후 뒤풀이는 새벽까지?) 잠이 충분하지 못했다. 물론 존 적은 없다. 그럼에도 내가 본 영화들은 대개 너무 진지해서 수면을 유혹했다. 순전히 우연이었지만, 분쟁국가의 암울한 현실이 투영된
[에디토리얼] 전주에서 빚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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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9월의 어느 날이었다. 안면이 있는 경남 진주시의 한 인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진주의 지역신문 편집국장 자리가 공석인데, 좋은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달라고 했다. 딱히 떠오르는 인물은 없었다. 잊고 지내다가, 일주일 뒤 어느 결혼식장에서 잘 아는 선배였던 그녀와 마주쳤다. 얼굴을 보자마자 진주에서 걸려온 그 전화가 퍼뜩 떠올랐다. 그녀의 고향이 진주였기 때문이다. 슬쩍 운을 띄웠다. 그녀는 마침 영화지 <프리미어> 편집장을 끝으로 직장생활을 정리한 직후였다. 그녀는 10초도 안돼 관심을 보였다. 한달 뒤, 거짓말처럼 그녀는 서울을 떠나 진주로 갔다.
하지만 두달이나 됐을까? 진주의 지역신문에 입성해 “조심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멋진 편집국장 인사말을 쓰고, 그걸 본 대선배가 어느 시사주간지에 “그래 조심하지 마라”는 칼럼으로 화답을 할 때쯤 그녀는 진주를 떠버렸다. 경남 하동의 청학동 골짜기 산중에 들어가 산다는 소문이 들렸고, 가끔 홀연히 거처를 옮긴다는 말
[에디토리얼] 그녀의 피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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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팸에 살짝 전율했다.
얼마 전 후배가 특이한 문자메시지를 받았다며 자신의 휴대폰을 보여주었다. “35세 주부입니다. 삶이 참 힘드네요. 시키는 것 다 할게요. 080XXXXXXX.” 발신번호로 미루어 음란통화를 유도하는 문자메시지였다. 고단수 낚시질인 줄 뻔히 알면서도 멈칫했다. 웬지 서글펐다. 얼굴도 모르는 ‘그녀’의 슬픔이 뭉클하게 다가와서가 아니다. 그 자포자기의 메시지가 누구나 공감할 만한 주변의 현실을 잘 웅변한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래, 삶이 참 힘들다. 이럴 땐 반드시 “글로벌 금융위기 어쩌고”를 등장시켜야 인과관계가 성립되겠지만 생략하자. 아무튼 그 여파는 한국영화산업에도 몰려왔다. 영화계가 ‘참 힘든’ 시간인 것만은 분명하다. <씨네21>이 창간 기념호 때마다 빼먹지 않던 ‘충무로 파워 50’ 특집을 처음으로 포기할 정도니 말이다(62쪽 참조). 이번호로 창간 14돌과 700호를 맞는 <씨네21>도 마찬가지다. 왜 갑자기 판형이 줄었냐고 묻는
[에디토리얼] 참 힘들죠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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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파리 좆나 솔직하게 날다.’
이번호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처음엔 이런 제목이 달렸다. 양익준 감독의 새 영화 <똥파리>를 소개하는 기사(92~95쪽)에서였다. 글을 쓴 기자가 마지막 문장을 영화 속에 등장하는 욕으로 버무렸고, 편집기자가 이를 과감하게 제목 문장으로 올려서였다. ‘졸라’도 아니고 ‘좆나’라…. 영화의 대사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원색적인 욕 천지인지라 기사 제목에 상징적인 욕 하나 넣는 게 어떠랴 싶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다른 제목 문장으로 바꿨다. 잡지에 큰 활자로 욕을 붙이는 건 부담스러웠다. 욕 먹기 십상이었다.
사실 그런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이들은 많다. 두세달여 전의 에피소드다. 주말 대낮의 한산한 전철 안에서였다. 모녀지간으로 보이는 두명이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엄마는 40대 중반으로 보였고, 딸아이는 중학생 교복을 입었다. 앳되고 예쁘게 생긴 딸의 입에선 이런 말이 나왔다. “엄마, 이 볼펜 좆나 예쁘지?” 뜻밖에도 엄마는
[에디토리얼] 욕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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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맥락없는 세 종류의 이야기다.
1. 한 여자 연예인이 집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조금씩 뜨던 여배우였다. 그녀는 죽기 전 기록을 남겼다. 지긋지긋하게 싫었으나 억지로 나가야 했던 술시중. 그 술시중을 해준 인물들의 명단을 종이에 적어놓았다. 술시중은 로비의 수단이었다. 기획사 대표는 업계에서 영향력을 지닌 인사들에게 줄을 대기 위해 그녀를 포함한 신인 연예인을 이용했다. 그녀는 끝내 죽음으로 반응했다. 그녀가 따라준 술을 마셨던, 그러니까 로비와 접대를 받았던 이들은 지금 벌벌 떤다.
2. 그의 로비는 거침없었다. 워낙 통이 컸던 터라 ‘광폭’이라는 수식어까지 따라붙을 지경이었다. 그는 정·관계의 실력자들에게 돈과 선물을 마구 뿌렸다. 전 청와대 민정수석에게 1억원어치 백화점 상품권을 건네고,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 나서는 지역 인사에게 8억원을 정치자금으로 주었다는 혐의는 손톱만큼 작은 빙산의 일부란다. 그는 구속될 때 “내가 다 끌어안겠다”고 했지만, 검찰이 자신의 기
[에디토리얼] 트라이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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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았다고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보았다. 찌라시를 보았다. 여기서의 찌라시란 당연히 증권가 사설 정보지다. 얼마 전 자살한 탤런트 장자연씨의 죽음을 둘러싼 내용을 담은 것들이다. 기업인과 언론사 고위간부, 연예계 인사들의 명단이 담긴 이른바 ‘장자연 리스트’는 인터넷으로 빠르게 퍼지는 중이다. 장자연씨가 왜 이런 파국을 맞게 되었는지, 그 과정과 사실관계를 구체적으로 기술해놓은 것도 있다.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음모와 배신의 드라마 같다. 대중을 혹하게 할 만하다. 물론 신뢰할 수는 없다. 출처는 불분명하다. 실명의 인물은 나와도, 실명의 코멘트는 없다. 억측과 소문투성이다. 가끔 적중하지만, 찌라시는 무책임하다.
인터넷 연예뉴스들도 좀 그렇다. 지지난주에 발행된 <씨네21> 694호는 결과적으로 그들이 벌이는 낚시질의 원재료를 공급했다. 30여개 연예뉴스 매체가 ‘박중훈 스토리’의 일부 내용을 자의적으로 인용해서 보도했기 때문이다(20쪽 참조). 그 뒤 모델
[에디토리얼] 찌라시와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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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있다가 망했다.
지난주에 겪었던 어떤 낭패스러운 일에 관해서다. 한 공익재단에서 실시하는 언론인 지원사업 공모전에 참여하기 위해 그곳의 인터넷 사이트를 찾았다. 사업공모가 매년 초쯤 시작될 거라는 가물가물한 정보만 가진 채였다. ‘소식’란을 클릭해서 진행여부를 확인했더니 그만 끝나 있었다. 벌써 지원절차가 마감되고 참여자를 선정해 발표까지 한 상태였다. 황당했다. 내가 그 사이트를 마지막으로 들렀던 게 지난 1월 중순경. 그때는 일체의 관련내용이 없었던 걸로 기억난다. 공교롭게도 그 며칠 뒤부터 소식이 뜨기 시작하고, 다시 확인을 하기 직전인 3월 초에 마감을 한 모양이었다. “한달 반 동안 왜 넋놓고 있었을까” 스스로를 원망해봤자 허사였다. 버스는 떠났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그러지 말길 바란다. 이번호 <씨네21>에 ‘알림’이 워낙 많아서 드리는 말씀이다. 무려 네 가지나 돼 조금 어지럽다. <씨네21> 창간 14돌을 앞두고 열리는 다양한 빛깔의 공
[에디토리얼] 그대의 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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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달 전 이 지면에 ‘MB를 욕하지 말자’는 제목의 글을 썼다가 일부 독자로부터 욕을 먹었다. “이봐 자네 그러지 말고 영화 이야기나 제대로 쓰지?”라는 반응이야 그렇다 쳐도 “노무현과 MB를 동급으로 비교하냐”는 항의는 좀 뜬금없었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라는 옛 유행어를 MB와 결부시켜 노무현을 폄하했다는 요지였다. 해석은 자유니까 뭐라 덧붙일 말은 없다. 그런 이들이 들으면 속이 뒤집어질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전두환에 빗대 노무현을 깎아내리므로, 이건 더 지독한 모독이 되겠다.
내용은 단순하다. 고 김수환 추기경 장례 때 왜 조문을 오지 않았냐는 비난이다. 알다시피 추기경과 가장 악연을 맺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도 왔다. 기자들에게 곤혹스러운 질문세례를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다녀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끝내 명동성당에 발길을 들이지 않았다. 봉하마을이 너무 멀어서였을까? 친형의 구속 탓에 공개적인 행보가 부담스러웠을까? 아니면 대통령 재직 시절 다소 불편한 관계 때문
[에디토리얼] 할배좀짱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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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 놀랐다. 관람률이 80%라니….
얼마 전 옛 대학선배들과 저녁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모두 40대 중반이었고, 남자들이었다. 영화는 그저 가끔 여가로 즐기는 수준이었다. 마니아들은 전혀 아니었다. 한데 신기하게도 <워낭소리>를 대부분 보았다고 했다. 4명의 선배 중 3명이었다. 나까지 포함하면 그 자리의 40대 남자들 중 4/5, 그러니까 80%가 관람한 셈이었다. <워낭소리>가 드디어 예매 점유율 1위를 차지하며 박스오피스 정상에 올랐음을 피부로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날의 화제는 단연 <워낭소리>였다. 한 시간여 동안 선배들은 영화 감상평을 쏟아냈다. 관람 막판에 눈물을 흘렸다는 이들은 꽤 됐다. 유감스럽게도 감동했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짜증이 났다”는 평이 대세였다. 선배들은 모두 농촌 출신이었다. 그중 한명은 대학 졸업 뒤 농민운동에 투신하여 5년간 직접 농사를 짓기도 했다. 그날 나온 험담의 요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에디토리얼] 구토와 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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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모메식당, 정말 고마웠습니다.”
지난주, 회사로 온 편지 한통을 받고 어리둥절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강의를 하며 알게 된 20대 중반의 여자후배였다. 서울에서 출판사를 다니는 줄 알았는데 편지의 발신지는 남쪽 지방의 도시였다. 함께 동봉한 책에는 올해 신춘문예에 입상한 자신의 희곡 작품도 실려 있었다. 한데 카모메식당이라니…. 편지를 읽으며 과거를 더듬자 새까맣게 잊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맞다. 내가 그 영화를 보라 했었지.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건 2007년 12월의 어느 토요일, 한 대형서점에서였다. 책을 사러 갔다가 우연히 마주쳤다. “커피나 한잔 하자”고 해서 30여분간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뭔가 서성이는 느낌이었다. 낮 12시경이었는데, 오후에 뭐할 거냐고 묻자 머뭇거렸다. 뚜렷한 스케줄이 없다고 했다. 나는 “혼자 처량하겠지만, 심심하면 극장에 가서 영화나 보라”고 반농담식으로 말했다. 그러면서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카모메식당>이 재미있다고
[에디토리얼] 예측불허의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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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는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동안 한편의 영화도 보지 않았다. 이 글을 쓰는 2월12일 저녁까지 공식적으로 확인된 관람 기록은 없다.
하지만 그가 정말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청와대 시사실에서 비공식적인 관람 일정이 있기 때문이다. MB는 영화를 좋아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오히려 부인 김윤옥씨가 영화를 더 즐긴다는 말도 들린다. 부부가 DVD를 감상하며 여가를 보내는지도 모른다.
MB는 대통령 후보와 당선자 시절에 몇편의 영화를 공개적으로 보았다. 2007년엔 <마파도2>와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2008년 1월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관람했다. <마파도2> 때문엔 설화도 입었다. 벤처기업협회 사무실에서 이런 말을 스스럼없이 해서다. “돈 적게 들이고 돈 버는 것, 이런 것이 벤처 아이디어지… 아마 공짜로 나오라고 해도 다 나올 배우들을 데리고 말이야.” 당사자인 노장 여배우들이 문제삼지 않아서 그냥
[에디토리얼] 왕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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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도 넘은 일이다. 예전에 다른 매체에서 함께 일하던 어느 편집장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마감날 저녁 가끔 심하게 술을 마셨다. 불콰해진 얼굴로 들어와 후배들의 기사를 데스킹했다. 게슴츠레하게 실눈을 뜨고 앉아 졸다가 깨다가 했다. 어느 순간부턴 침몰하는 배처럼 서서히 가라앉았다. 자신의 노트북에만 코를 박고 있던 후배들은 알 리가 없었다. 편집장의 부재를 알아차린 누군가가 낌새를 눈치채곤 소리쳤다. “어, 여기 있던 XX 선배 어디 갔지?” 사방을 둘러봐도 없던 그분은 바로 자신의 책상 아래 바닥에서 변사체처럼 발견됐다. 졸던 와중에 엉덩이가 서서히, 아주 서서히 의자에서 미끄러지다가 결국 드러누워 자기까지 했던 거다. 한두달에 한번씩 벌어지던 해프닝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지금의 난 바르게(!) 일하는 편이다. 마감날 무리하게 알코올을 섭취하지 않는다. 후배 기자들도 마찬가지다. 술기운에 기대 자판을 두드리는 이들을 한명도 본 적이 없다. <씨네21>엔 그런 음주
[에디토리얼] 밤술, 낮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