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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영화평론가 정성일씨와 인터뷰에서 지아장커는 <스틸 라이프>에 관해 “사라져가는 기억과 싸우는 영화”라고 말했다. 중국 인민폐 10위안에 새겨질 정도로 아름다운 산수로 유명한 싼샤가 거대한 댐 건설로 파괴되는 현장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할 광경을 펼쳐 보인다. 철거 중인 텅 빈 건물 한가운데 뻥 뚫린 창문 밖에서 거대한 건물 하나가 폭발로 순식간에 무너지는 데도 영화의 두 남녀는 동요하지 않는다. 지금껏 그들에게 주어진 삶이 어제까지 존재했던 모든 것이 사라져도 놀라지 말라고 가르쳤기 때문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16년 전 헤어졌던 아내를 찾아 나선 사내 한산밍이 싼샤에 도착하자마 경험한 일을 돌이켜보라. 마술을 보여줬으니 돈을 내라고 협박하는 자들에게 사내는 망설임없이 칼을 들이민다. 하루에도 2~3번씩 그런 협박을 받아본 적 있다는 투로 자연스런 한산밍의 동작은 지금 중국에서 벌어지는 충격적인 일들이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일상임을 알려
[편집장이 독자에게] <스틸 라이프>와 대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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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화차>는 신용사회의 냉혹한 이면을 충격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무척이나 편리한 시스템인 신용카드가 어떻게 개인에게 감당하지 못할 빚을 지게 하는지, 그래서 어떻게 가정이 망가지고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지를 추리소설의 틀을 빌려 증언한다. <화차>를 읽고 나서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대부업 광고를 떠올렸다. 신용카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여론의 집중포화가 대부업으로 완전히 옮겨갔다. 대부업이 과장광고를 하는 것이 문제인지, 대부업이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인지, 대부업의 이율이 너무 높다는 게 문제인지 헛갈리는데 아무튼 대부업만 두들겨맞는 걸 보니까 신용카드 회사나 은행은 좋겠다는 심술궂은 생각마저 들었다.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때로 신용카드 회사와 은행도 대부업과 별반 차이없는 이자놀음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신용카드 회사나 은행은 대부업에 쏟아지는 비난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
[편집장이 독자에게] 광고모델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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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어떻게 영화와 만나는가? 극장에 가서 만나거나 TV나 비디오로 만나는 것이 일반적인 경험이겠으나 그것만으로 영화와 만났다고 하기는 석연치 않다. 스크린에 명멸하는 빛의 스펙트럼은 극장을 나서는 순간 꿈을 깨듯 잊혀지기 십상이고 한번 본 영화도 정확히 기억하기란 쉽지 않아서 볼 때마다 새로운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사람들이 흔히 영화를 보고 나서 타인과 얘기를 나누거나 글을 쓰는 것은 그처럼 짧게 스쳐가는 인상을 붙잡기 위해서일 것이다. 과연 방금 본 것이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알고 싶다! 영화평론은 그래서 시작된 일일 것이다. ‘사진적 영상의 존재론’에 썼던 앙드레 바쟁의 표현을 빌리면 방부처리를 해서 미라로 만들어서라도 언젠가 혼이 찾아와 되살아나길 기원하는 것이다. 오늘날 영화평론이 철학, 심리학, 문화인류학 등 여러 갈래 학문과 교류를 맺으며 출발점을 알아보기 힘들게 변했다 해도 근본은 다르지 않다. 영화는 기록되고 연구되고 토론의 대상이 됨으로써 영
[편집장이 독자에게] 영화평론의 존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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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가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해도 달콤한 향기엔 변화가 없을 것을.”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 대사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가로막는 장벽이 그들의 이름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같은 상황이 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을 영화화한 <고>에 등장한다. 스기하라가 자신이 재일동포임을 고백하자 방금 전까지 사랑에 눈이 멀었던 여자는 온몸이 얼어버린다. 스스로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심연을 만드는 순간, 여기서 장미의 이름은 ‘조선이라는 국적’이다. 숀 펜과 다코타 패닝 주연의 <아이 엠 샘>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아빠, 아빠는 왜 다른 아빠들이랑 달라요?” 장애인 아버지는 아버지이기 전에 장애인이라 구분짓는 사회의 편견이 둘의 사이를 가로막는다. 이 영화는 아버지와 딸을 떼어놓는 장미의 이름으로 ‘장애’라는 조건을 들이민다. 브라이언 유즈나 감독의 공포물 <리빙데드3> 역시 <로미오와 줄리엣>을 영리하게 각색
[편집장이 독자에게] 이야기의 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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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28일 월요일 새벽 칸영화제 수상결과를 기다렸다. 월드컵 경기도 아니고 올림픽 금메달을 놓고 다투는 것도 아니건만 <밀양>이 상을 받을 것 같다는 소식을 접한 뒤로 궁금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여우주연상을 받았다는 결과를 접하자 휴우~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우울했던 영화계가 오랜만에 힘을 낼 수 있는 낭보였다. 어떻게 보면 영화를 놓고 1등, 2등을 논한다는 게 우스운 일이라 수상에 흥분하는 내가 촌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했다는 말을 떠올리며 그런 자신을 합리화했다. “영화는 상과 관계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젊은 나에게는 그 상이 필요했습니다. 그건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격려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상은 영화가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영화를 만들면서, 같은 동네에 살면서 서로 격려하는 것입니다.”
<밀양>의 전도연에 대한 칭찬은 차고 넘치게 많으니 더 보태지 않아도 좋을 듯싶다. 대
[편집장이 독자에게] 전도연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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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게. 그렇게 끔찍하진 않아. 사람들이 말하듯, 이탈리아에선 보르지아 치하 30년간 전쟁, 테러, 살육, 학살을 겪었지만, 미켈란젤로, 다 빈치, 르네상스를 만들었어. 형제애를 가진 스위스에선 500년간 민주주의와 평화를 가졌지. 그런데 그들은 뭘 만들었나? 뻐꾸기 시계라네. 잘 가게.” 캐럴 리드의 영화 <제3의 사나이>에서 오슨 웰스가 내뱉은 말이다. 곧잘 명대사로 인용되는 문구인데 오래전 머릿속에 새겨진 이후로 스위스 하면 뻐꾸기 시계를 연상하는 버릇이 생겼다. 스위스의 역사에 정통한 사람이라면 반발할 만한 내용이겠으나 외부에서 본 스위스의 이미지가 그렇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스위스가 뻐꾸기 시계라면, 홍콩은 누아르와 무술영화다. 청소년기를 홍콩영화의 세례를 받으며 자란 세대에겐 보편적인 일이다. 홍콩영화의 전성기가 끝났다고 알려졌지만 <무간도>나 <묵공> 같은 영화를 볼 때면 “썩어도 준치라더니”하며 감탄하게
[편집장이 독자에게] 한국영화 하면 무슨 장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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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되기 전에 인간이 돼야 한다.” 배우 인터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인데 배우에겐 연기 테크닉보다 인간적 수련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일 게다.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일 만한 말이지만 가끔 얼마나 맞는 얘기인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사생활의 영역에서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라는 평을 듣지 못하는 사람도 좋은 배우로 평가받는 사례를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선 반대 사례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성격적 결함이나 정신적 상처가 예술가의 동력이 되는 경우 말이다. 확실히 인간성 좋은 순서대로 좋은 배우로 평가받는 것은 아닐 텐데 가끔은 그럴지 모른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최근엔 <상성: 상처받은 도시>(이하 <상성>)의 양조위를 보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품이 배어나는 그의 눈빛은 아무리 봐도 연기 테크닉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서 형성된 것 같다. 그래서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양조위의 선한 본성은 카메라에 포착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편집장이 독자에게] 양조위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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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영화평론가 황진미씨에게 문자가 왔다. 딸을 낳았다는 소식이었다. 당분간 영화를 보러 가거나 영화평을 쓰는 일이 힘들겠지만 곧 몸을 추스르고 돌아오겠노라 전했다. 창간 12주년 기념호에서 정윤철 감독이 한 인터뷰를 읽어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황진미씨는 감독 입장에선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로 거침없는 비판을 하는 평론가이며 할 말을 참지 못하는 열정적인 논객이다. 당분간 황진미씨가 없어서 감독들 마음이 편하겠군 싶으면서도 뭔가 화끈한 게 없으니 허전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다 그가 김기덕의 <숨>을 보고 쓴 20자평이 눈에 띄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아동문학임을 증명하는 걸작.” 나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하 <우행시>)이 아동문학은 아니라고 보지만 <우행시>와 <숨>을 비교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에서 창조적 표현, 혹은 영화적 표현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편집장이 독자에게] <숨>과 <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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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맨 3>가 춘궁기에 허덕이던 극장가의 구세주가 되고 있다. 흔히 말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힘이겠으나 <스파이더맨 3>가 스펙터클만 요란한 영화는 아니다. 2편만큼 훌륭하진 않지만 3편 역시 시리즈 특유의 개성은 살아 있다. 이웃집 소년 같은 피터 파커의 성장담인 <스파이더 맨> 시리즈는 각각 주제를 함축하는 대사를 갖고 있다. 평범한 젊은이가 슈퍼히어로가 되는 운명에 관한 이야기인 1편은 전체 시리즈를 관통하는 선언이 나온다. “막강한 힘에는 막대한 책임감이 따른다.” 슈퍼히어로의 사랑과 고난에 관한 이야기인 2편에선 메리 제인의 대사를 들 수 있다. “난 늘 너의 문 앞에 있었어. 누군가 널 구할 때도 있어야 되지 않겠니?” 슈퍼히어로도 외롭고 힘들며 돌봐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3편도 이런 식으로 규정짓자면 용서에 대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벤 아저씨는 우리가 가슴속에 복수심을 품고 살아가길 원하진 않았을 게다. 복수
[편집장이 독자에게] <스파이더맨 3>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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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2주년 기념호를 읽은 독자 한분의 이메일을 받았다. 황은하라는 이름의 독자는 전주영화제에 갈 수 없는 설움과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책을 사서 봤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번호는 솔직히 영화제에 대한 위로 이상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잡지를 읽으면서도 도무지 불안하지 않았으며 늘어진 (영화에 대한) 애티튜드의 나사를, 헨리 제임스의 소설 제목처럼 회전시켜 조일 수 있었죠. 정윤철 감독이 만든 세 가지 특급 요리가 즐거웠습니다. 다시 영화가 하나의 특권으로 제게 배달될 것만 같습니다. 정확히 무엇이 현을 건드렸는지는 딱 짚어 말하지는 못하겠네요. 박신양씨처럼 도덕시간에 졸아 감사를 전할 수는 없고 대신 시를 씁니다.” 황은하씨는 <나쁜 교육> <별점에 대하여> <떨림에 대하여>라는 세편의 시를 선물로 보내왔다. 지면에 다 싣긴 힘들지만 마음에 와닿았던 <별점에 대하여>라는 시의 한 대목을 인용해본다.
만약 어떤 영화를 보고 벽에 머리를
[편집장이 독자에게] 선물로 받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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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왜 보냐고요? 아무래도… 가오가 살잖아요.” 지면 개편을 위해 독자 몇명을 불러 벌인 토론에서 나온 말이다. ‘가오’라는 표현이 바르진 않지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씨네21>이 가오가 있어야 돼, 라며. 가오라는 표현을 쓴 독자도, 고개를 끄덕인 나도 가오가 겉멋이나 허세라고 생각하진 않았으리라. 뭔가 있어 보이는 잡지, 아니 진짜 뭔가 특별한 게 있는 잡지. 창간 12주년을 맞으면서 “초심을 잃지 말라”는 독자들의 당부가 뜻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특별한 뭔가를 만들겠다는 다짐을 담은 이번호의 특집기사는 정윤철 감독이 만든 것이다. 늘 영화인을 취재대상으로 만나는 우리 입장과 반대로 영화인이 직접 영화기사를 만들면 재미있지 않을까 싶어 내놓은 아이디어였다. 정윤철 감독은 이 제안에 흔쾌히 응했고 평론가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 감독이 평론가에게 묻고 싶은 말이 많겠지, 아니, 항의하고 싶은 게
[편집장이 독자에게] 창간 12주년의 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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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서울여성영화제를 찾았던 관객이라면 <씨네21>에서 만든 영화제 일간지를 접했을 것이다. 그동안 부산, 전주, 부천 등 여러 영화제에서 이런 일간지를 만들었지만 올해 9회를 맞은 서울여성영화제의 일간지를 만든 건 처음이다. 짐작대로 영화제 일간지를 만드는 것은 고된 일이다. 매일 돌아오는 마감에 맞추려면 잠을 줄이고 끼니를 거르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극장을 찾은 관객들이 일제히 <씨네21> 일간지를 펼쳐 읽는 모습을 볼 때면 일의 보람을 느끼게 된다. 거기다 누군가 잘 읽었다는 한마디만 덧붙여주면 쌓인 피로도 잊곤 한다. 이번 여성영화제 일간지는 취재 박혜명, 최하나, 편집 심은하, 권은주, 사진 서지형, 디자인 김차인애, 객원기자 정김미은 등의 노력으로 만들어졌다. 마지막 일간지 마감을 마치고 몇 명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번 일간지에 대해 박혜명 기자는 “명품 데일리였다”고 말했다. 물론 웃으라고 한 말이지만 만드는 사람들이 자부심을 느끼며 일했다는 얘기
[편집장이 독자에게] 명품 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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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어떤 영화들은 자꾸 뒤를 돌아보게 만든다. 스쳐지나간 그곳에 흘린 것은 없는지, 놓쳐버린 것은 없는지, 잊은 것은 없는지. 기억을 헤집으면 아스라이 떠오르는 잔상들이 쓰지 않던 감각을 일깨운다. 오즈 야스지로, 나루세 미키오, 허우샤오시엔, 에드워드 양 등 이런 영화의 대가들은 노스탤지어에 투항하는 법이 없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되 향수에 머물지 않고 후회와 탄식의 눈물을 자아내는 경지를 보면서 사람들은 ‘거장’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곤 한다. 임권택의 <천년학>은 그런 영화다. <씨네21> 27쪽을 할애한 이번 특집은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를 기념하는 의례적인 기사가 아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감독 임권택에 대한 예의 이전에 <천년학>이 걸작이기 때문이다.
<천년학>은 사연 많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로도, 소리라는 사라진 예술에 관한 이야기로도, 인정사정 볼 것 없던 한국의 근대화에 대한 이
[편집장이 독자에게] 걸작 <천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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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에 <우아한 세계>와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봤다. 스타일이나 소재가 전혀 다른 영화지만 두 작품엔 공통점이 있다. 웃고 즐기며 보다가 예기치 못한 대목에서 눈물이 흐른다는 점, 그리고 곱씹어보면 겉보기와 달리 심각한 비극이라는 점. 먼저 <우아한 세계>에서 송강호가 연기하는 주인공 인구를 보자. 조폭 중간보스인 그의 꿈은 멋진 전원주택에서 아내와 딸을 데리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그는 이번 건만 잘 처리하면 그렇게 될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손에 피를 묻히고 밤잠을 설치며 등이 칼에 찔릴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한다. 부동산 중개업자가 보여준 근사한 고급 주택에서 인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집에 담고 싶은 모든 가치 힐스테이트? 모두가 꿈꾸는 그곳 자이? 숱한 아파트 CF가 유도한 대로 어떤 착각을 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좋은 집에 행복이 있다는 인구의 오해는 이중적인 방식으로 그를 불행으로 내몬다. 열심히 일할수록 조직도 그를
[편집장이 독자에게] 바보 같은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