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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얼굴의 주근깨투성이 소녀가 있다. 갓 스물이 됐을까. 미용실 보조로 일하는 그녀는 지난 여름 해변에서 이지적인 느낌의 대학생을 만나 파리에서 함께 살았더랬다. 출근하는 그녀를 침대로 끌고 와 안으며 속삭이던 남자에게 그녀는 모든 것을 의지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배운 적 없지만 그건 사랑이었고 그녀의 전부였다. 하지만 꿈같은 날은 가고 그녀가 출근하는 동안 남자는 자지 않으면서 자는 척한다. 그녀가 씹는 사과 소리가 거슬리고 변증법이 뭐냐고 묻는 그녀의 무식함이 부끄럽다. 여자는 눈물을 머금고 남자의 집을 나와 어머니와 살던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다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고 우연히 소식을 접한 남자가 병원으로 찾아온다. 넋이 나간 듯 더 창백하고 여윈 그녀를 만난 뒤 남자는 도망치듯 병원을 떠나고 자리로 돌아온 여자는 레이스를 뜨며 물끄러미 뒤돌아 쳐다본다. 아무것도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지만 모든 것을 보고 있는 듯한 그 눈동자. 슬프지만 슬퍼하지 않는 그 표정. 클로드
[편집장이 독자에게] 이자벨 위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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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충격적인 기사 하나를 봤다. 폐교 위기에 몰린 고등학교에 관한 이야기로 문제의 학교는 옥수동에 있는 동호정보공업고등학교다. 동호정보공고에 닥친 위기의 발단은 지역주민들이 ‘공고’를 싫어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지역 부유층에 해당하는 남산타운아파트에서 동호정보공고를 없애고 그 자리에 초등학교를 유치하고 싶어하고, 주변 부동산업자들은 그렇게 되면 집값이 10%는 더 오를 것이라고 전망했다고 한다. 애초에 편법을 써서 대규모 아파트에 주어질 학교용지 분담금을 내지 않았던 아파트 조합은 뒤늦게 초등학교가 필요하다며 나섰고 해마다 관청에 압력을 행사해 동호정보공고의 이전을 촉구했으며 2004년 동호고를 이전시킨다는 결정이 났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이전도 쉽지 않았다. 다른 지역에서도 실업계 고등학교가 이사오는 것을 반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서울시교육청은 오는 9월7일까지 동호교 폐교에 관한 의견을 듣고 교육위원회에서 폐교 여부를 최종결정한다고 한다. <
[편집장이 독자에게] 동호정보공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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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학교에서 가정환경조사라는 것을 했던 기억이 있다. 집에 자가용이 있는지, 월소득이 얼마인지, 부모님 직업은 무엇인지 등을 적어내는 것인데 공란으로 적어내면 다시 써오라는 꾸지람을 듣곤 했다. 가정환경조사를 하면 늘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부모님의 학력을 묻는 난이었는데 고졸, 중졸인 당신들은 항상 대졸, 고졸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학력을 기재하곤 하셨다. 그렇지 않다는 걸 뻔히 아는데 왜 꼭 거짓으로 학력을 높였을까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보진 못했다. 아마 궁색한 대답에 오히려 상처를 받지 않을까 싶었던 게 아닐지. 그러면서 자연스레 몸에 밴 것이 있다. 학력이 낮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 그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란 것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렸던 것 같다. 대학에 다닐 때,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친구들의 대화에서 아무개는 대입 시험 성적과 무관하게 어느 대학을 갔다는 얘기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운좋게(혹은 부정한 방법으로) 특기생으로 입학한
[편집장이 독자에게] 학력 검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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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휴가를 갔다 와보니 난리가 났다. 1주일 자리를 비웠는데 사태를 파악하느라 그간 있었던 일들을 뒤쫓다보니 1년은 비운 느낌이 들었다. <디 워> 논란에 대해 내가 쓴 글에 달린 댓글은 편집장이 된 이래 처음 맛보는 흥분을 안겨줬다. 이렇게 많은 댓글은 경험해보지 못한 터라 나를 비판하는 글인데도 이런 관심 황송하다, 싶었다. 결정적으로 휴가 때문에 <100분 토론>을 놓쳤는데 인터넷에 오른 기사와 댓글을 살펴보니 <무릎팍도사>를 뛰어넘는 올해 최고의 토크쇼였던 모양이다. <디 워>가 그냥 한편의 영화가 아니라 사회현상이 되고 있다고 했던 예측이 들어맞은 셈이다. 물론 그간 <디 워> 논란만 화제가 된 건 아니었다. 남북이 정상회담을 한다는 놀라운 뉴스가 있었고 한국이 별안간 아열대기후로 둔갑했으며 학력 위조 사례가 연이어 적발되고 있었다. 오랜만에 ‘다이내믹 코리아’의 활기를 느끼면서 이것이야말로 내가 이 땅을 벗어났을 때 맛
[편집장이 독자에게] <디 워> 논란 2라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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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이 펼치는 말과, 그 말에 대한 말은 무섭다. 명분 앞세운 말이 스스로 그 명분을 죽이다 못해 그저 살고자 할 뿐인 생명까지 짓밟는 시간을 말로서 증언한다. 명분으로 말하고 행하는 자의 진심이 진심인 것이 공포스럽다. 말로 빌어먹고 사는 직업을 가진 덕에 행여 그런 누를 저지르지 않았나, 저지를까 공포가 일었다. 대의명분을 도약대 삼은 말들이 부쩍 의심스러워졌다.
‘<디 워> 현상’도 말의 전쟁이다. 그 기세가 공포스러운 건 위세를 부리는 말들이 요상한 명분으로 상대를 짓밟기 때문이다. 황우석 사태보다 고약한 건, 그때는 있다 없다를 가르는 기준점이 분명했지만 지금은 개인의 좋다 싫다를 놓고 심판할 절대기준이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한쪽에서 절대기준을 무자비하게 휘두르고 있으니, 공포스러워도 직업도의상 말로 끼어들지 않을 수 없는 형국이다.
이번호는 <디 워> 현상을 비판적으로 다룬 9쪽짜리 기획이 아니더라도 <디
[편집장이 독자에게] 말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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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랜드 엠파이어>를 보면서 오금이 저렸다. 이렇게 무서운 영화인데 왜 아무도 그런 말을 안 했을까 싶었다. 올해 나온 공포영화 가운데 <디센트>와 <기담>이 좋았지만 <인랜드 엠파이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귀신, 괴물, 연쇄살인마, 좀비, 흡혈귀, 그 어느 것도 나오지 않지만 3시간 내내 온 신경이 두려움과 불안에 꽁꽁 묶인 것 같았다. 일반적 의미의 장르영화가 전혀 아닌데 공포의 효과가 이토록 강력한 이유는 뭘까? 그 비밀은 영화의 줄거리로는 설명이 안 된다. 내게 이 기묘한 이야기의 매듭을 풀 능력도 없기도 하거니와 영화 전체가 그 매듭을 풀어보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이야기의 매듭을 풀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무시무시하다. <인랜드 엠파이어>는 영상이 재현하는 의미의 법칙을 전부 빨아들여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게 설계된 거대한 미궁이다.
<인랜드 엠파이어>는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편집장이 독자에게] <인랜드 엠파이어>의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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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워>를 둘러싸고 말이 많다. 순수하게 영화적 성과를 논하는 것부터 심형래 감독의 학력 위조에 관한 입장까지. 한편의 오락영화일 뿐이니 재미있냐 없냐만 말하면 된다는 주장도 있지만 <디 워>는 이미 하나의 사회현상이 된 것처럼 보인다. 영화가 개봉하기 전이지만 인터넷을 뒤져보니 <디 워>와 심형래 감독을 둘러싼 다양한 입장을 접할 수 있었다. 간략하게 쟁점들을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1. 영화에 관한 평가는 ‘뛰어난 컴퓨터그래픽과 다소 허술한 이야기’라는 말로 축약되는 분위기지만 긍정적인 입장과 부정적인 입장 사이의 거리는 멀다. “이무기가 도심에서 벌이는 파괴 행위와 여의주를 둘러싸고 두 마리 이무기가 벌이는 박진감 넘치는 배틀은, 그 어떤 거대괴수영화에서도 보기 힘들었던 장관”이라고 말하는 호평이 있는 반면 “이야기의 구성에 아무런 개연성과 매력이 없다보니 이무기가 떼로 몰려와서 LA를 파괴하는 장면도 게임 신작 오프닝을 보는 정도로만 재미
[편집장이 독자에게] <디 워>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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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하드4.0>을 보고나니 대체 존 맥클레인의 매력이 뭘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흔히 말하는 것은 슈퍼히어로처럼 초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람보나 코만도 같은 근육덩어리도 아니며 007 제임스 본드처럼 멋지지도 않은, 보통 사람과 가장 가까운 액션영웅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의 매력을 설명하자니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예를 들면 <본 아이덴티티>의 제이슨 본도 그런 경우일 텐데 맥클레인과 많이 닮아 보이지 않는다. <하이눈>의 게리 쿠퍼처럼 홀로 악당들과 맞서는 서부극의 고독한 총잡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것도 개운치는 않다. 시대가 다르고 무대가 다른데다 서부극의 영웅들보다 훨씬 말도 많고 욕도 잘한다. 맥클레인의 거친 말투에 러닝셔츠를 입은 외모를 덧붙이면 블루컬러 계급의 전형적 이미지가 나온다. ‘블루컬러 액션영웅’이라는 정의는 그런 점에서 적절하지만 그런 계급 규정이 충분한 설명 같지도 않다. 그렇다고 악당들이 특별해서 맥클레인
[편집장이 독자에게] 관료제 사회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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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점이 밀집한 지역을 다니다보면 가끔 언제 이렇게 변했지, 싶을 때가 있다. 주로 강북에서 생활하다보니 종로, 신촌, 홍대 앞 등을 자주 들르게 되는데 얼마 전 홍대 앞에 고깃집이 밀집했던 지역을 지나다 깜짝 놀랐다. 야외에 불판을 내놓고 고기를 굽던 집들이 거의 없어져서다. 삼겹살 집이 없어진 자리에 들어선 것은 이자카야라 불리는 일식 주점들이다. 한집 건너 하나씩 비슷한 메뉴를 파는 이자카야가 빼곡히 들어섰다. 예전에 신촌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돼지갈비로 유명했던 골목이 어느 순간 모조리 닭꼬치집으로 변하더니 몇년 뒤엔 조개구이집으로, 다시 이듬해엔 찜닭집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물론 홍대 앞과 마찬가지로 이자카야가 우세종으로 자리잡았다. 전통을 고집하는 음식점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행에 따라 순식간에 바뀌는 식당들을 보노라면 사람들 입맛이 정말 그렇게 바뀌는지 의심스럽다. 지지난해엔 돼지갈비를 좋아하던 사람들이 지난해엔 찜닭만 찾고 올해는 이자카야를 선호하는
[편집장이 독자에게] 여름 극장가 숨은 영화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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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양이 죽었다. 컴퓨터 모니터는 그의 부고를 짧게 전하며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굳은 표정이다. 한참을 멍하게 기사를 되풀이해 읽었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 인생을 3배 길게 사는 법을 가르쳐준 <하나 그리고 둘>을 남기고 에드워드 양 자신은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났다. 망연자실한 감정을 추스르기 앞서 부끄러움에 고개가 숙여졌다. 내가 본 그의 영화는 <하나 그리고 둘>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마 많은 사람이 그럴 것이다. 에드워드 양은 그만큼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고 세계적으로도 충분히 소개되지 않은 감독이다. 하지만 <하나 그리고 둘>과 <고령가 소년살인사건>을 본 사람들은 말한다. 에드워드 양은 대만영화뿐 아니라 현대영화에서 가장 뛰어난 감독 가운데 한명이라고. 부고를 접한 뒤 <고령가 소년살인사건>을 조악한 화질의 동영상 파일로 보면서 <씨네21> 창간 10주년 영화제 때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
[편집장이 독자에게] 고맙습니다. 에드워드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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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영화평론가 정성일씨와 인터뷰에서 지아장커는 <스틸 라이프>에 관해 “사라져가는 기억과 싸우는 영화”라고 말했다. 중국 인민폐 10위안에 새겨질 정도로 아름다운 산수로 유명한 싼샤가 거대한 댐 건설로 파괴되는 현장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할 광경을 펼쳐 보인다. 철거 중인 텅 빈 건물 한가운데 뻥 뚫린 창문 밖에서 거대한 건물 하나가 폭발로 순식간에 무너지는 데도 영화의 두 남녀는 동요하지 않는다. 지금껏 그들에게 주어진 삶이 어제까지 존재했던 모든 것이 사라져도 놀라지 말라고 가르쳤기 때문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16년 전 헤어졌던 아내를 찾아 나선 사내 한산밍이 싼샤에 도착하자마 경험한 일을 돌이켜보라. 마술을 보여줬으니 돈을 내라고 협박하는 자들에게 사내는 망설임없이 칼을 들이민다. 하루에도 2~3번씩 그런 협박을 받아본 적 있다는 투로 자연스런 한산밍의 동작은 지금 중국에서 벌어지는 충격적인 일들이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일상임을 알려
[편집장이 독자에게] <스틸 라이프>와 대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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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화차>는 신용사회의 냉혹한 이면을 충격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무척이나 편리한 시스템인 신용카드가 어떻게 개인에게 감당하지 못할 빚을 지게 하는지, 그래서 어떻게 가정이 망가지고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지를 추리소설의 틀을 빌려 증언한다. <화차>를 읽고 나서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대부업 광고를 떠올렸다. 신용카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여론의 집중포화가 대부업으로 완전히 옮겨갔다. 대부업이 과장광고를 하는 것이 문제인지, 대부업이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인지, 대부업의 이율이 너무 높다는 게 문제인지 헛갈리는데 아무튼 대부업만 두들겨맞는 걸 보니까 신용카드 회사나 은행은 좋겠다는 심술궂은 생각마저 들었다.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때로 신용카드 회사와 은행도 대부업과 별반 차이없는 이자놀음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신용카드 회사나 은행은 대부업에 쏟아지는 비난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
[편집장이 독자에게] 광고모델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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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어떻게 영화와 만나는가? 극장에 가서 만나거나 TV나 비디오로 만나는 것이 일반적인 경험이겠으나 그것만으로 영화와 만났다고 하기는 석연치 않다. 스크린에 명멸하는 빛의 스펙트럼은 극장을 나서는 순간 꿈을 깨듯 잊혀지기 십상이고 한번 본 영화도 정확히 기억하기란 쉽지 않아서 볼 때마다 새로운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사람들이 흔히 영화를 보고 나서 타인과 얘기를 나누거나 글을 쓰는 것은 그처럼 짧게 스쳐가는 인상을 붙잡기 위해서일 것이다. 과연 방금 본 것이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알고 싶다! 영화평론은 그래서 시작된 일일 것이다. ‘사진적 영상의 존재론’에 썼던 앙드레 바쟁의 표현을 빌리면 방부처리를 해서 미라로 만들어서라도 언젠가 혼이 찾아와 되살아나길 기원하는 것이다. 오늘날 영화평론이 철학, 심리학, 문화인류학 등 여러 갈래 학문과 교류를 맺으며 출발점을 알아보기 힘들게 변했다 해도 근본은 다르지 않다. 영화는 기록되고 연구되고 토론의 대상이 됨으로써 영
[편집장이 독자에게] 영화평론의 존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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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가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해도 달콤한 향기엔 변화가 없을 것을.”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 대사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가로막는 장벽이 그들의 이름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같은 상황이 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을 영화화한 <고>에 등장한다. 스기하라가 자신이 재일동포임을 고백하자 방금 전까지 사랑에 눈이 멀었던 여자는 온몸이 얼어버린다. 스스로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심연을 만드는 순간, 여기서 장미의 이름은 ‘조선이라는 국적’이다. 숀 펜과 다코타 패닝 주연의 <아이 엠 샘>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아빠, 아빠는 왜 다른 아빠들이랑 달라요?” 장애인 아버지는 아버지이기 전에 장애인이라 구분짓는 사회의 편견이 둘의 사이를 가로막는다. 이 영화는 아버지와 딸을 떼어놓는 장미의 이름으로 ‘장애’라는 조건을 들이민다. 브라이언 유즈나 감독의 공포물 <리빙데드3> 역시 <로미오와 줄리엣>을 영리하게 각색
[편집장이 독자에게] 이야기의 원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