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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랜드 엠파이어>를 보면서 오금이 저렸다. 이렇게 무서운 영화인데 왜 아무도 그런 말을 안 했을까 싶었다. 올해 나온 공포영화 가운데 <디센트>와 <기담>이 좋았지만 <인랜드 엠파이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귀신, 괴물, 연쇄살인마, 좀비, 흡혈귀, 그 어느 것도 나오지 않지만 3시간 내내 온 신경이 두려움과 불안에 꽁꽁 묶인 것 같았다. 일반적 의미의 장르영화가 전혀 아닌데 공포의 효과가 이토록 강력한 이유는 뭘까? 그 비밀은 영화의 줄거리로는 설명이 안 된다. 내게 이 기묘한 이야기의 매듭을 풀 능력도 없기도 하거니와 영화 전체가 그 매듭을 풀어보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이야기의 매듭을 풀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무시무시하다. <인랜드 엠파이어>는 영상이 재현하는 의미의 법칙을 전부 빨아들여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게 설계된 거대한 미궁이다.
<인랜드 엠파이어>는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편집장이 독자에게] <인랜드 엠파이어>의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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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워>를 둘러싸고 말이 많다. 순수하게 영화적 성과를 논하는 것부터 심형래 감독의 학력 위조에 관한 입장까지. 한편의 오락영화일 뿐이니 재미있냐 없냐만 말하면 된다는 주장도 있지만 <디 워>는 이미 하나의 사회현상이 된 것처럼 보인다. 영화가 개봉하기 전이지만 인터넷을 뒤져보니 <디 워>와 심형래 감독을 둘러싼 다양한 입장을 접할 수 있었다. 간략하게 쟁점들을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1. 영화에 관한 평가는 ‘뛰어난 컴퓨터그래픽과 다소 허술한 이야기’라는 말로 축약되는 분위기지만 긍정적인 입장과 부정적인 입장 사이의 거리는 멀다. “이무기가 도심에서 벌이는 파괴 행위와 여의주를 둘러싸고 두 마리 이무기가 벌이는 박진감 넘치는 배틀은, 그 어떤 거대괴수영화에서도 보기 힘들었던 장관”이라고 말하는 호평이 있는 반면 “이야기의 구성에 아무런 개연성과 매력이 없다보니 이무기가 떼로 몰려와서 LA를 파괴하는 장면도 게임 신작 오프닝을 보는 정도로만 재미
[편집장이 독자에게] <디 워>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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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하드4.0>을 보고나니 대체 존 맥클레인의 매력이 뭘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흔히 말하는 것은 슈퍼히어로처럼 초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람보나 코만도 같은 근육덩어리도 아니며 007 제임스 본드처럼 멋지지도 않은, 보통 사람과 가장 가까운 액션영웅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의 매력을 설명하자니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예를 들면 <본 아이덴티티>의 제이슨 본도 그런 경우일 텐데 맥클레인과 많이 닮아 보이지 않는다. <하이눈>의 게리 쿠퍼처럼 홀로 악당들과 맞서는 서부극의 고독한 총잡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것도 개운치는 않다. 시대가 다르고 무대가 다른데다 서부극의 영웅들보다 훨씬 말도 많고 욕도 잘한다. 맥클레인의 거친 말투에 러닝셔츠를 입은 외모를 덧붙이면 블루컬러 계급의 전형적 이미지가 나온다. ‘블루컬러 액션영웅’이라는 정의는 그런 점에서 적절하지만 그런 계급 규정이 충분한 설명 같지도 않다. 그렇다고 악당들이 특별해서 맥클레인
[편집장이 독자에게] 관료제 사회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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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점이 밀집한 지역을 다니다보면 가끔 언제 이렇게 변했지, 싶을 때가 있다. 주로 강북에서 생활하다보니 종로, 신촌, 홍대 앞 등을 자주 들르게 되는데 얼마 전 홍대 앞에 고깃집이 밀집했던 지역을 지나다 깜짝 놀랐다. 야외에 불판을 내놓고 고기를 굽던 집들이 거의 없어져서다. 삼겹살 집이 없어진 자리에 들어선 것은 이자카야라 불리는 일식 주점들이다. 한집 건너 하나씩 비슷한 메뉴를 파는 이자카야가 빼곡히 들어섰다. 예전에 신촌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돼지갈비로 유명했던 골목이 어느 순간 모조리 닭꼬치집으로 변하더니 몇년 뒤엔 조개구이집으로, 다시 이듬해엔 찜닭집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물론 홍대 앞과 마찬가지로 이자카야가 우세종으로 자리잡았다. 전통을 고집하는 음식점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행에 따라 순식간에 바뀌는 식당들을 보노라면 사람들 입맛이 정말 그렇게 바뀌는지 의심스럽다. 지지난해엔 돼지갈비를 좋아하던 사람들이 지난해엔 찜닭만 찾고 올해는 이자카야를 선호하는
[편집장이 독자에게] 여름 극장가 숨은 영화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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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양이 죽었다. 컴퓨터 모니터는 그의 부고를 짧게 전하며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굳은 표정이다. 한참을 멍하게 기사를 되풀이해 읽었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 인생을 3배 길게 사는 법을 가르쳐준 <하나 그리고 둘>을 남기고 에드워드 양 자신은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났다. 망연자실한 감정을 추스르기 앞서 부끄러움에 고개가 숙여졌다. 내가 본 그의 영화는 <하나 그리고 둘>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마 많은 사람이 그럴 것이다. 에드워드 양은 그만큼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고 세계적으로도 충분히 소개되지 않은 감독이다. 하지만 <하나 그리고 둘>과 <고령가 소년살인사건>을 본 사람들은 말한다. 에드워드 양은 대만영화뿐 아니라 현대영화에서 가장 뛰어난 감독 가운데 한명이라고. 부고를 접한 뒤 <고령가 소년살인사건>을 조악한 화질의 동영상 파일로 보면서 <씨네21> 창간 10주년 영화제 때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
[편집장이 독자에게] 고맙습니다. 에드워드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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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영화평론가 정성일씨와 인터뷰에서 지아장커는 <스틸 라이프>에 관해 “사라져가는 기억과 싸우는 영화”라고 말했다. 중국 인민폐 10위안에 새겨질 정도로 아름다운 산수로 유명한 싼샤가 거대한 댐 건설로 파괴되는 현장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할 광경을 펼쳐 보인다. 철거 중인 텅 빈 건물 한가운데 뻥 뚫린 창문 밖에서 거대한 건물 하나가 폭발로 순식간에 무너지는 데도 영화의 두 남녀는 동요하지 않는다. 지금껏 그들에게 주어진 삶이 어제까지 존재했던 모든 것이 사라져도 놀라지 말라고 가르쳤기 때문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16년 전 헤어졌던 아내를 찾아 나선 사내 한산밍이 싼샤에 도착하자마 경험한 일을 돌이켜보라. 마술을 보여줬으니 돈을 내라고 협박하는 자들에게 사내는 망설임없이 칼을 들이민다. 하루에도 2~3번씩 그런 협박을 받아본 적 있다는 투로 자연스런 한산밍의 동작은 지금 중국에서 벌어지는 충격적인 일들이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일상임을 알려
[편집장이 독자에게] <스틸 라이프>와 대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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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화차>는 신용사회의 냉혹한 이면을 충격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무척이나 편리한 시스템인 신용카드가 어떻게 개인에게 감당하지 못할 빚을 지게 하는지, 그래서 어떻게 가정이 망가지고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지를 추리소설의 틀을 빌려 증언한다. <화차>를 읽고 나서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대부업 광고를 떠올렸다. 신용카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여론의 집중포화가 대부업으로 완전히 옮겨갔다. 대부업이 과장광고를 하는 것이 문제인지, 대부업이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인지, 대부업의 이율이 너무 높다는 게 문제인지 헛갈리는데 아무튼 대부업만 두들겨맞는 걸 보니까 신용카드 회사나 은행은 좋겠다는 심술궂은 생각마저 들었다.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때로 신용카드 회사와 은행도 대부업과 별반 차이없는 이자놀음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신용카드 회사나 은행은 대부업에 쏟아지는 비난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
[편집장이 독자에게] 광고모델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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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어떻게 영화와 만나는가? 극장에 가서 만나거나 TV나 비디오로 만나는 것이 일반적인 경험이겠으나 그것만으로 영화와 만났다고 하기는 석연치 않다. 스크린에 명멸하는 빛의 스펙트럼은 극장을 나서는 순간 꿈을 깨듯 잊혀지기 십상이고 한번 본 영화도 정확히 기억하기란 쉽지 않아서 볼 때마다 새로운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사람들이 흔히 영화를 보고 나서 타인과 얘기를 나누거나 글을 쓰는 것은 그처럼 짧게 스쳐가는 인상을 붙잡기 위해서일 것이다. 과연 방금 본 것이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알고 싶다! 영화평론은 그래서 시작된 일일 것이다. ‘사진적 영상의 존재론’에 썼던 앙드레 바쟁의 표현을 빌리면 방부처리를 해서 미라로 만들어서라도 언젠가 혼이 찾아와 되살아나길 기원하는 것이다. 오늘날 영화평론이 철학, 심리학, 문화인류학 등 여러 갈래 학문과 교류를 맺으며 출발점을 알아보기 힘들게 변했다 해도 근본은 다르지 않다. 영화는 기록되고 연구되고 토론의 대상이 됨으로써 영
[편집장이 독자에게] 영화평론의 존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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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가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해도 달콤한 향기엔 변화가 없을 것을.”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 대사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가로막는 장벽이 그들의 이름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같은 상황이 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을 영화화한 <고>에 등장한다. 스기하라가 자신이 재일동포임을 고백하자 방금 전까지 사랑에 눈이 멀었던 여자는 온몸이 얼어버린다. 스스로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심연을 만드는 순간, 여기서 장미의 이름은 ‘조선이라는 국적’이다. 숀 펜과 다코타 패닝 주연의 <아이 엠 샘>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아빠, 아빠는 왜 다른 아빠들이랑 달라요?” 장애인 아버지는 아버지이기 전에 장애인이라 구분짓는 사회의 편견이 둘의 사이를 가로막는다. 이 영화는 아버지와 딸을 떼어놓는 장미의 이름으로 ‘장애’라는 조건을 들이민다. 브라이언 유즈나 감독의 공포물 <리빙데드3> 역시 <로미오와 줄리엣>을 영리하게 각색
[편집장이 독자에게] 이야기의 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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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28일 월요일 새벽 칸영화제 수상결과를 기다렸다. 월드컵 경기도 아니고 올림픽 금메달을 놓고 다투는 것도 아니건만 <밀양>이 상을 받을 것 같다는 소식을 접한 뒤로 궁금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여우주연상을 받았다는 결과를 접하자 휴우~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우울했던 영화계가 오랜만에 힘을 낼 수 있는 낭보였다. 어떻게 보면 영화를 놓고 1등, 2등을 논한다는 게 우스운 일이라 수상에 흥분하는 내가 촌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했다는 말을 떠올리며 그런 자신을 합리화했다. “영화는 상과 관계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젊은 나에게는 그 상이 필요했습니다. 그건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격려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상은 영화가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영화를 만들면서, 같은 동네에 살면서 서로 격려하는 것입니다.”
<밀양>의 전도연에 대한 칭찬은 차고 넘치게 많으니 더 보태지 않아도 좋을 듯싶다. 대
[편집장이 독자에게] 전도연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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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게. 그렇게 끔찍하진 않아. 사람들이 말하듯, 이탈리아에선 보르지아 치하 30년간 전쟁, 테러, 살육, 학살을 겪었지만, 미켈란젤로, 다 빈치, 르네상스를 만들었어. 형제애를 가진 스위스에선 500년간 민주주의와 평화를 가졌지. 그런데 그들은 뭘 만들었나? 뻐꾸기 시계라네. 잘 가게.” 캐럴 리드의 영화 <제3의 사나이>에서 오슨 웰스가 내뱉은 말이다. 곧잘 명대사로 인용되는 문구인데 오래전 머릿속에 새겨진 이후로 스위스 하면 뻐꾸기 시계를 연상하는 버릇이 생겼다. 스위스의 역사에 정통한 사람이라면 반발할 만한 내용이겠으나 외부에서 본 스위스의 이미지가 그렇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스위스가 뻐꾸기 시계라면, 홍콩은 누아르와 무술영화다. 청소년기를 홍콩영화의 세례를 받으며 자란 세대에겐 보편적인 일이다. 홍콩영화의 전성기가 끝났다고 알려졌지만 <무간도>나 <묵공> 같은 영화를 볼 때면 “썩어도 준치라더니”하며 감탄하게
[편집장이 독자에게] 한국영화 하면 무슨 장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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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되기 전에 인간이 돼야 한다.” 배우 인터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인데 배우에겐 연기 테크닉보다 인간적 수련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일 게다.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일 만한 말이지만 가끔 얼마나 맞는 얘기인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사생활의 영역에서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라는 평을 듣지 못하는 사람도 좋은 배우로 평가받는 사례를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선 반대 사례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성격적 결함이나 정신적 상처가 예술가의 동력이 되는 경우 말이다. 확실히 인간성 좋은 순서대로 좋은 배우로 평가받는 것은 아닐 텐데 가끔은 그럴지 모른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최근엔 <상성: 상처받은 도시>(이하 <상성>)의 양조위를 보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품이 배어나는 그의 눈빛은 아무리 봐도 연기 테크닉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서 형성된 것 같다. 그래서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양조위의 선한 본성은 카메라에 포착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편집장이 독자에게] 양조위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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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영화평론가 황진미씨에게 문자가 왔다. 딸을 낳았다는 소식이었다. 당분간 영화를 보러 가거나 영화평을 쓰는 일이 힘들겠지만 곧 몸을 추스르고 돌아오겠노라 전했다. 창간 12주년 기념호에서 정윤철 감독이 한 인터뷰를 읽어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황진미씨는 감독 입장에선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로 거침없는 비판을 하는 평론가이며 할 말을 참지 못하는 열정적인 논객이다. 당분간 황진미씨가 없어서 감독들 마음이 편하겠군 싶으면서도 뭔가 화끈한 게 없으니 허전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다 그가 김기덕의 <숨>을 보고 쓴 20자평이 눈에 띄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아동문학임을 증명하는 걸작.” 나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하 <우행시>)이 아동문학은 아니라고 보지만 <우행시>와 <숨>을 비교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에서 창조적 표현, 혹은 영화적 표현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편집장이 독자에게] <숨>과 <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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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맨 3>가 춘궁기에 허덕이던 극장가의 구세주가 되고 있다. 흔히 말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힘이겠으나 <스파이더맨 3>가 스펙터클만 요란한 영화는 아니다. 2편만큼 훌륭하진 않지만 3편 역시 시리즈 특유의 개성은 살아 있다. 이웃집 소년 같은 피터 파커의 성장담인 <스파이더 맨> 시리즈는 각각 주제를 함축하는 대사를 갖고 있다. 평범한 젊은이가 슈퍼히어로가 되는 운명에 관한 이야기인 1편은 전체 시리즈를 관통하는 선언이 나온다. “막강한 힘에는 막대한 책임감이 따른다.” 슈퍼히어로의 사랑과 고난에 관한 이야기인 2편에선 메리 제인의 대사를 들 수 있다. “난 늘 너의 문 앞에 있었어. 누군가 널 구할 때도 있어야 되지 않겠니?” 슈퍼히어로도 외롭고 힘들며 돌봐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3편도 이런 식으로 규정짓자면 용서에 대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벤 아저씨는 우리가 가슴속에 복수심을 품고 살아가길 원하진 않았을 게다. 복수
[편집장이 독자에게] <스파이더맨 3>의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