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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난과 동미는 오랜 친구다. 나난은 소심하고 귀엽다. 동미는 개방적이고 대범하다. 그런데 동미가 뜻하지 않게 임신을 했다. 문제의 남자와는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는데도 동미는 뜻밖에 아이를 낳겠다고 결심한다. “내 애니까”가 이유다. 기겁해서 “미쳤냐”고 뜯어말려도 동미는 끝내 듣지 않는다. 나난은 결국 이렇게 말한다. “그래, 낳아라, 이년아. 내가 애 아버지가 될게. 분윳값도 대주고.” 그리고 친구를 안아준다.다음주에 개봉하는 <싱글즈>의 한 대목이다. 내가 친구라면 동미를 두들겨패서라도 끝까지 말리겠다. 한국사회에서 미혼모가 된다는 건 100가지 시련을 자초하는 일이다. 더구나 동미는 순정파도 도덕주의자도 아니며, 갑자기 종교적 각성이 찾아온 것도 아니다. 동미는 그를 아끼는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말리고 싶은 길을 가려는 것이다.지난 5월 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된 홍기선 감독의 <선택>은 한국전쟁 때 포로로 잡혀 평생을 감옥에서 보낸 김선명씨의 옥살이를 그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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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회를 이런저런 일로 놓쳤다가 결국 비디오로 보게 되는 영화들이 종종 생긴다. <클래식>도 그런 영화 중의 하나였다. 이 영화는 비평적으로 크게 주목받진 못했다. 영화를 보니 그 이유를 알겠다. <클래식>은 신파다. 신파의 공식대로 절대 사랑이 절대 실패한다. 절대 사랑은 그 자체로는 완전하므로 그를 부정하는 외부의 힘이 절대적이어야 실패한다. 그래야 신파가 완성된다. 사랑도 절대적이고 실패를 초래하는 외부의 힘도 절대적이라야 한다면, 이야기는 과장과 비약을 피할 수 없다.<클래식>도 그렇다. 그러나 심금을 울렸다. 처음엔 영화의 시대와 공간이 불러일으키는 향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점이 있었을 것이다. 부잣집 아들이지만 정신적 저항력이 전혀 없는 꺽다리 친구는 자꾸 실신하며 나중엔 목을 맨다. 유년의 낙원에서 추방된 뒤로는 누구도 풍요롭지 않았고, 주위에선 무언가 자꾸만 사라져갔다. 새 것이 사라진 것의 자리를 채울 수 없었다. 이상향의 이미
두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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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상 TV를 자주 보지 못하지만, TV를 좋아한다. 슬플 때나 기쁠 때처럼 감정이 선명할 때 TV는 별 필요없다. 하지만, 우리의 감정은 대개 선명하지 않다. 짜증날 때, 괜히 울화가 치밀 때, TV는 도움이 된다. 그냥 켜놓고 아무거나 멍하게 쳐다보고 있으면, 혹은 켜놓고 딴 데 보고 있어도, 마음이 좀 편해진다. 때론 잠들기 위해 TV를 켠다. 그럴 때, TV는 내가 그를 돌보지 않아도 내게 아부하는 지상의 유일한 존재다.그러다 가끔 뜻밖의 즐거움도 얻는다. 아무 생각 없이 채널을 돌리다 <옥탑방 고양이>를 두어번 봤다. 나는 정다빈이나 김래원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지만, 둘 다 귀여웠다. 정다빈이 연기한 정은의 캐릭터가 특히 흥미로웠다. 당사자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정다빈이 밉게 생겼다고 느낀다. <명랑소녀 성공기>의 양순(장나라)은 전형적 미인은 아니지만 충분히 예쁘게 보이며 그렇게 보이도록 드라마가 도와줬다. 그러나 <옥탑방 고양이>의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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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봄, 서울 시내 곳곳에는 이런 플래카드가 나붙었다.'100년을 기다려온 그 잡지가 온다'이 호방하고 대담한 기치의 주인공은 <키노>였다.1995년은 영화 탄생 1백주년을 맞은 해였다. 세계 각국에선 기념 다큐멘터리가 제작됐고, 많은 영화 책과 이벤트가 쏟아졌으며, 한국에선 그 해 4월 두 영화 잡지가 동시에 창간됐다. 그 하나가 <키노>이고, 다른 하나가 <씨네21>이다.동갑내기지만, 두 잡지는 많이 달랐다. <키노>의 편집장은 영화광 1세대가 낳은 스타 평론가 정성일이었고, 그 잡지는 처음 내건 기치대로 영화사 100년의 무게를 기꺼이 짊어진 채 미학적 정치적 전위의 언어로 자신을 구축했다. <씨네21>의 편집장은 한겨레신문 영화기자였던 조선희였고, 이 잡지는 긴 동면을 마치고 깨어나기 시작한 한국영화와 영화산업에 집중하며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격려하고 함께 호흡하려 했다. 달랐지만, 한가지 소망은 공유했다. 영화가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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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이 시위대의 맨앞에 서서 외친다. 무슨 소리인지 들리진 않으나, 시위대는 반전 평화의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곧이어 정우성은 두세명의 전경에게 들려간다. 그런데 정우성은 팔다리가 들려서도 웃는다. 웃으며 무언가를 계속 외친다. 외치면서 웃는다.최근 TV에 자주 나오는 한 의류 광고다. 한 후배는 이 광고가 기분 나쁘다고 했다. 그가 기분 나쁘다고 느낀 이유는 잘 이해된다. 지지난해라면 나도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제 더이상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그 광고가 기분 나쁘다면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고결한 이상주의를 물건파는 데 써먹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정우성이 속한 쇼 비즈니스 세상은 속되고 정치적 이상주의는 성스럽다는 암묵적 판단 때문이다.첫째 이유라면 나도 아직 벗어나지 못한다. <아침이슬>이 햄버거 광고에 쓰일 때 내 마음은 그것에 격렬히 저항한다. 그 곡의 사용을 허락했을 저작권자에 대한 원망까지 밀려온다. 두 번째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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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정성일씨를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이번 칸영화제에 가서 61편의 영화를 보았다. 하루에 6, 7편의 영화를 봤다는 말이다. 칸영화제가 고독하고 작가주의영화의 집결지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건 거의 자기 학대다. 타르코프스키의 <희생> 같은 영화를 그것도 영어자막으로 하루에 7편씩 본다고 상상해보라. 나도 영화잡지 만들어 먹고살지만, 이건 생각만 해도 얼굴이 일그러지는 일이다. 그리고 그는 그 와중에 총 200매의 원고를 보냈다. 끔찍한 일이다. (잠 많은 박은영이 열흘 동안 하루에 두세 시간씩 자며 전부 35편의 영화를 보고, 총 100매 정도의 원고를 보내는 가혹한 일정을 치러냈지만 너무 엄청난 강적이 옆에 버티고 있어 힘들다는 소리 한번 내지 못했다고 한다. 안됐다.)평론가를 비웃는 일이 이상하지 않는 세상이다. 평론가들은 별로 재미없는 영화에 거품 물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는 우습게 보는 사람이며, 쓸데없이 어려운 말로 사람들을 짜증나게 하는 사람으로 종종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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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욱은 방송사 PD다. 그것도, 일일시트콤이라는, 드라마보다 더 열등한 장르로 여겨지는 분야에서만 일해온 사람이다. 그가 5년 동안 만들어온 <순풍 산부인과>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똑바로 살아라>는 중학생도 웃길 수 있는 심심풀이용 코미디다. 김병욱 PD는 그런 목적으로 그 시리즈를 연출했고 결과적으로 그 목적을 이루었다.우리는 그를 작가라고 부르고 싶다. 여기서 작가는, ‘글 쓰는 사람’이란 일반적인 의미가 아니라 스타일과 세계관에서 독창성과 일관성을 지닌 소수의 감독을 일컫는 영화비평계의 용어로 썼다. 예술은 고뇌와 사색의 성에서 태어나기도 하지만 더러운 시장판에서도 태어난다. 문학과 연극이 그랬으며, 무엇보다 영화가 그랬다. 이창동 감독이 최근 한 문학잡지 좌담에서 영화를 창부의 자식으로 비유해 화제가 됐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창부의 자식이라 해도, 양갓집 규수의 옷을 입고 있다.(이창동 감독은 그 옷만을 칭송하는 소리를 듣
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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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5월 칸영화제. 김혜리. 노트북 컴퓨터 분실.2000년 5월 칸영화제. 허문영. 취재수첩, 프레스카드, 녹음기 분실.2001년 9월 베니스영화제로 가는 도중, 프랑크푸르트 공항. 황혜림. 신용카드, 현금 3천달러가 든 지갑 분실.생각나는 대로 적어본 해외영화제 취재기자들의 사고다. 전부 영화제 전문 절도범들의 짓이다. 이럴 땐 어떡하면 좋은가. 그냥 몸으로 때운다. 김혜리는 울다가 영화사 직원의 노트북을 빌려서 송고했고, 돌아와서 회사에 150만원 변상했다. 영화제 4일 동안 취재한 모든 것과 프레스카드를 잃어버린 허문영은 하루 반 동안 공치며 쫓아다닌 끝에 프레스카드만 간신히 재발급받았다. 기사는 상당 부분 기억력에 의존해서 썼다. 무일푼으로 심야에 베니스에 내린 황혜림은 친절하지만 돈은 꾸어주지 않는 이탈리아 아저씨 도움으로 예약한 호텔에 도착했으나, 그 다음날이 휴일이어서 호텔방에 갇혀 하룻동안 굶으며 지냈다. 이튿날 한국영사관에 찾아가 300달러 꾸어서 민생고를 해
고진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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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 김봉두>가 좋은 영화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영화를 거부하기 힘들었다. 교사와 학생이 부둥켜안고 우는 장면에는 그게 어떤 작품에서 나오든 나는 무방비상태가 된다. 오래 전 전교조 교사들이 교단에서 무더기로 쫓겨날 때, 신문 한켠에 종종 소개된 스승과 학생의 이별장면은 언제나 눈물 범벅을 만들어냈다(전 편집장인 안정숙 선배에게는 불행한 아이가 우는 장면이 그런 작용을 했다고 한다).그렇지만, 나는 <선생 김봉두>를 믿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작품성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이 영화가 너무 착하기 때문이다. 선의가 승리하는 이야기는 가능하면 믿지 말아야 한다고 마음속에서 외친다. 그건 내가 결코 착한 사람이 아닌데도 그런 걸 보고 감동하는 건 가증스러운 짓이기 때문이며, 세상도 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착한 영화는 대개 판타지다. 착한 걸 믿지 않고 사는 건 못된 짓이지만, 그렇게 못되게 사는 게 그나마 세상을 좀더 정확히 보고, 무엇보다 내가 덜 다치는 길이라
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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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나이는 20대 중반부터 40대 초반에 걸쳐있다. 나는 40대 초반이다. 평소엔 그냥 어울린다. 어울리다 보면 그냥 친구 같고, 물리적 나이 차이가 별로 의식되지 않는다. 내 또래보다 20대와 훨씬 잘 통하고 더 가깝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소설가 김영하씨는 또래의 남자들과 어울리기 싫은데, 그 이유가 한국 남자들은 자기 또래의 낯선 남자들을 만나면 거의 본능적으로 기싸움을 걸거나 나이와 학연 지연 따위를 확인하려 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남자들이 그러는 건 그건 저 사람이 나의 적인지 동지인지 확인하기 위해 혹은 자기보다 위인지 아래인지 정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나도 그렇게 느낀다. 그러나 가끔 다른 생각이 든다.일 끝나고 밤 늦게 가진 술자리에서 한 20대 여자 후배에게 “세상이 좋아지려면 뭐가 바뀌면 좋겠냐”고 무심하게 물었다.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남자 친구하고 사이가 더 좋아지면 좋겠고, 엄마가 안 아프시면 좋겠고…” 당황했다.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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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8년이군요.1년전, 창간 7주년이라고 약간 들뜬 말투로 이 지면을 채우던 생각이 나는군요.그리고 1년 동안 우리에게도 세상에도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어떤 일에는 주체하기 힘들만큼 마음이 부풀었고, 또 어떤 일에는 꼭 세상이 끝날 것처럼 낙담하기도 했습니다.현자라면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았겠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해, 소심한 마음을 달래가며 전전긍긍 살아왔습니다.고백 한가지만 하지요.우리 온라인 사이트에 오른 글 하나 속에 ‘착한 씨네에게’라는 표현이 있더군요.그 글을 쓴 분은 얼마간 못마땅한 점을 말하신 것이었지만, 우린 그 표현에 마음이 뭉클해졌습니다.그건, 착한 우리를 알아봐 준다, 라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 아니라(당연히), 우리가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사로잡혀있다는 걸 확인하는 데서 오는 일종의 자기 연민 같은 것이었습니다.이렇게 덩치가 커져서, 또 이렇게 나이를 먹어서, 착할 수만은 없겠지요.우리가 무심결에 내뱉은 말이 어떤 이에겐 상처가 되고,우리가 조심하고 배려
팔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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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봄 <키노>가 보낸 설문 가운데 “현재 데뷔를 준비 중인 신인감독들 중 가장 주목하고 있는 감독이 있다면 누구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써보냈다.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 그의 단편 에서의 이야기꾼으로의 능력, 상상력, 기발한 유머감각을 떠올리면 왜 이 감독이 아직 데뷔를 안(못)하고 있는지 의아하다. 김지운에 버금가는 창의적인 장르영화 감독의 탄생이 기대된다.” 설문에 응했던 사람 중에 다른 두명도 같은 의견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정확히 1년 뒤, 그는 기대한 것보다 훨씬 뛰어난 데뷔작을 들고 나타났다. 영화 글로 먹고사는 사람으로선 이런 때보다 더 신나는 경우는 드물다. 시사회장을 나오면서 흥분을 감추기 힘들었다.개봉하자 그 영화는 흥행에서 참패했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뛰어난 데뷔작이 관객에게 외면당하는 일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더 많았다. 나를 포함한 많은 이 동네 사람들이 이 영화가 다수의 관객을 즐겁게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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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지리산에 풀어놓은 반달곰 반순이가 마침내 죽었다는 소식을 담은 TV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청승맞게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내 주변의 몇몇 사람들도 그랬다고 했다.지난주에 장국영이 죽었다. 홍콩에 다른 일로 취재갔다가 서울과의 전화로 그 소식을 알게 된 김현정은 전화 너머로 계속 훌쩍거렸다. 돌아와서 그에 대한 추모기사를 쓰면서 또 울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를 가슴에 품고 있던 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울었을 것이다. 내 가슴에도 스산한 바람이 스쳐갔지만, 그들과 함께 울지 않았다.시골의 한 고등학교 여학생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전자메일이 아닌, 우체부 아저씨 감사합니다, 라고 겉봉에 쓰인, 그리고 빼곡한 글씨로 채워진 4장의 편지지가 담긴, 우리가 알던 그 편지였다. 특강을 해달라는 간절한 사연을 담은 그 편지를 옆자리에 앉은 김소희에게 보여주자, 그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무엇이 그를 울게 했는지 막연한 짐작만 하며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전쟁이 끝났다. 그리고 많은 사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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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세상은 좋아질 것이다. 그 속도가 너무 느려서 느끼기 힘들 지경이라도. 10년 동안 그렇게 믿을 수 없었지만, 지난해부터 그렇게 생각했고, 대량학살자가 누구인지가 더욱더 분명해진 더러운 전쟁의 와중에서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내가 가장 믿는 사람들은 지식인도 검사도 (당연히) 정치지도자 같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고, 거리에 나가면 그냥 별 생각없이 왔다갔다하는 것처럼 보이는 보통 사람들이기 때문이다.그들은 아무 생각없이 영화나 보러 다니고, 심심하면 게임이나 하고, 하루종일 만화책이나 뒤지고, 인터넷 들어가서 치밀하지도 않은 주장을 늘어놓으며 괜히 흥분하고, 모이면 어제 본 TV프로의 연예인 스캔들 얘기로 수다 떨던 그런 사람들이다.그런 사람들이 맨 먼저 거리에 나서서 촛불을 들었고, 지금 가장 열렬히 반전과 평화를 외치고 있다. 영웅적 지도자 없이도 정교한 정치 노선과 세련된 이념과 조직 없이도, 지금 가장 당당하게 말하고 행동하고 있다. 지식과 전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