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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탤런트 이승연씨의 곤욕이 크다. 누드 상품을 만들면서 일제 종군위안부 컨셉을 차용하는 바람에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는 것이다. “연예인 생명은 끝장”이라는 말이 점잖은 언론에서도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으니 사고를 크게 치긴 친 모양이다. 일부 여성 연예인들이 승부수로 구사하는 누드 동영상은 육체를 엿보게 해주고 돈을 버는 오래된 책략이라는 측면과, 젊은 육체의 화사한 매력을 주저없이 내보이며 가볍게 향유하는 새로운 시대의 덕을 이중으로 보는 아이템이다. 거기에 누군가가 이런 머리를 보탰을 것이다. 대박 나는 영화를 보면 민족의 아픔을 이야기하잖아? 벗은 몸과 민족이라. 위안부가 딱이네. 역사의식이 가미된 엔터테인먼트!그런데 이 대목이 패착이다. <태극기 휘날리며>와 <실미도>가 전쟁과 분단 후유증, 부도덕한 군사정권 등 한국 현대사의 깊은 상처들을 건드리며 집단적인 해원을 유도하고 있긴 하나, 매우 영리하게 계산된 눈높이와 감성 코드를 유지하고 있다. 종군위
헛다리 짚은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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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영화계 풍경은 한 극장에서 대여섯개씩 스크린을 잡고 있는 <태극기 휘날리며> 때문에 입이 귀에 걸린 사람과 눈꼬리가 귀에 닿는 사람으로 나뉜다. 자잘하고 사랑스런 영화들은 태풍 <실미도>를 피해 2월이면 극장에 나서볼까 했다가 핵폭풍을 또 만나 한없이 표류하는 중이다. 봄기운이나 들어야 이들에게도 햇살이 들려나. 이런 판국을 보며 블록버스터는 나쁘다고 하자니 우습고 시장 논리니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단순하다. 하나마나한 모범답안으로 체면치레하자면, 우리는 지금 영화산업의 제2차 폭발기를 맞아 새로운 문제에 직면한 것이고 문제가 생겼으니 답을 찾아야 하고 답은 목마른 자가 우물 파는 심정으로 달려들고 옆에서 거들어야 한다.나는 요즘 우물을 파는 대신 틈만 나면 등짝을 바닥에 붙인 채 눈만 가자미처럼 옆으로 돌리고 누워 텔레비전을 보는 중이다. 그랬더니 재미있었다. <대장금>만 잘 만드는 게 아니라 몇몇 드라마, 오락, 다큐멘터리에 이르기까지
<귀여운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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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가인 고 이영일 선생은 한국전쟁, 우리 식으로 말해서 6·25사변이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말한 바 있다. 지표면의 모든 것이 깡그리 무너져서 새롭게 세워져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상상해본 이미지는 정말 놀랄 만했다.<태극기 휘날리며>를 보고 나서 선생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그때 무너진 “지표면의 모든 것”이란 산야와 도시와 건축물만이 아니었다. 우리 몸의 피와 살, 인간 정신을 유지시키는 정서와 믿음 체계, 삶의 기반으로서의 가족, 대의명분으로서의 국가 윤리, 이 모든 실존의 기반이 산산이 흩어졌던 듯하다. 한국의 근대는 혹시 전쟁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두려움과 증오, 죄의식과 그리움으로 뒤범벅된 남한과 북한의 괴물스러운 집단의식에 마음을 열고 접근할 수 있는 심리적인 기반을 영화로부터 선물받은 느낌이다.남동철 기자의 지적대로 <태극기 휘날리며>는 스펙터클과 가족멜로라는 장치를 대담하고 효과적으로 구사하면서 시
<태극기 휘날리며>의 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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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부쩍 눈에 띄게 늘어난 <씨네21>의 업무 중의 하나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찾아오는 출판계 인사를 만나는 일이다. 그들의 용무는 대부분 같다. 자국에서 인기있는 한류 스타의 사진과 기사를 제공해줄 수 있겠냐는 것이다.오늘 방문한 일본 손님들은 한국에서도 아직 개봉하지 않은 <태극기 휘날리며>의 장동건씨를 취재하러 왔다며, 일부 스타들의 경우 표지에 이름만 나와도 책이 팔리는 형편이라고 전했다. 개봉예정인 영화 목록에는 아직 우리 극장에 걸려 있는 작품도 눈에 띄었다. 이들은 방문 목적을 잊은 채 <오아시스>의 첫 장면에서 설경구씨가 두부를 먹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한국에서 나오는 영화는 무조건 사려고 하는 일본 영화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한국 문화를 제대로 반영하는 자막 번역을 해야 할 텐데 걱정이라는 등의 질문과 탄식을 쏟아놓았다. 영화가 국경을 넘을 때는 차이와 오인이 발생하는 법이니 일본 관객의 자유로운 이해에 맡겨두면 되지 않겠냐고
들끓는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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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년의 한국영화를 이리저리 가로질러보면 몇 가지 흥미로운 경향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지역성(locality)을 적극적으로 사유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사투리에 부여된 전형화된 이미지를 끌어다쓰는 예는 오래전부터 있어왔지만, 최근에는 특정 언어와 인물의 기질적인 특성을 단단히 결합시킴으로써 문화의 지역성 자체를 영화의 핵심으로 끌어올리는 방식이 두드러진다. 지역성이 곧 캐릭터인 셈이다.영화 <친구>가 잭팟을 터뜨리는 데에 한몫 단단히 했던 지역성은 <똥개> <황산벌>에서도 자의식적으로 추구되었다. 이만큼 선명하진 않을지라도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인사동 문화, 과 강남 아파트촌의 관계가 내게는 매우 의미있는 코드로 다가온다.우연하게도 서울의 남북을 각각 내세운 영화가 연달아 개봉한다. <말죽거리 잔혹사>가 강남 영화라면 <안녕! 유에프오>는 강북 영화라고 부를 만하다. 전자는 대한민국 수도서울 하고도 노른자위인 강남의
지역성의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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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영화계에서 제일 뜬 용어를 하나 꼽으라면 단연 ‘웰 메이드’일 것이다. 이를테면 <실미도>가 개봉영화 사상 최단기간에 관객 400만명을 돌파한 것은 웰 메이드 영화의 승리이며, 지난해 한국영화가 역사상 처음으로 국적별 관객동원 1위에 올라서면서 전체 영화산업이 흑자를 회복한 것 역시 <살인의 추억> <장화, 홍련>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황산벌> <올드보이> 같은 웰 메이드 영화에 대한 관객의 폭발적인 호응 때문이라는 등의 분석 기사가 많다.이에 따라 웰 메이드는 2004년 한국영화의 주요 흐름을 예측하는 키워드로 부상했다. 몇년째 고만고만한 코미디물이 장악했던 한국영화의 방향 전체를 바꾼 웰 메이드 영화의 추세가 올해 어떻게 이어지느냐가 영화계의 가장 큰 관심사라는 소식에 이어 영화인들은 올해 라인업을 죽 훑어보며 자신있어 한다는 반응도 첨부되어 있다.웰 메이드는 또한 블록버스터라는 문제적인 용어를 대체하고
¨웰 메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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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칼럼니스트인 김형태, 박민규 두분의 이름 옆에는 무규칙이종예술가 혹은 무규칙이종소설가라는 호칭이 적혀 있다. 특정 장르에 대한 기존의 규칙이나 고정관념에 구애받지 않고 서로 다른 종류의 문화예술 분야를 자유롭게 오가는 사람이라는 자기 호명일 것으로 짐작된다.지난 연말 그 무규칙이종예술가들이 주최하는 송년 모임에 참석했다. 해금과 색소폰, 기타가 즉석에서 어울린 모던한 연주가 참석자들의 환호성을 자아냈는데 여기서 기타리스트는 <씨네21>에 칼럼을 쓰면서 그림도 직접 그리는 김형태씨다. 이처럼 다양한 형태로 자신을 표현하고 즐기는 능력은 단지 몇몇 특출한 예술가들에 국한되기보다는 지금 이곳의 젊고 진취적인 세대 사이에 벌어지는 문화현상의 본질에 가깝다고 느낀다.영화계에서도 이런 현상을 지목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를 들면 이광모 감독은 최근 “<씨네21>이 드디어 시선을 다른 문화에도 적극 돌리는군요. 사실은 영화가 별것 아니잖아요?”라고 말한
무규칙이종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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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있었던 <씨네21> 송년회 자리에 참석한 한 감독님이 농담 삼아 전하기를, "언론 때문에 가슴에 대못이 박힌 감독들끼리 모여서 '여섯 개의 눈알'이라는 옴니버스 영화를 만들자"는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여섯 개의 시선>이라는 인권 영화를 빗대어 발언권의 불균형을 야유하는 말일 터이다.저널이 운용하는 활자는 즉각 칼과 꿀로 변용될 수 있다. 정보를 사전에 접하는 필자들이 독자들에게 판단의 근거를 제공한다는 것이 이 메커니즘의 본질인 까닭이다. 특히 영화는 전달자의 취향과 안목이 큰 폭으로 개입하는 소재다.그런데 감독들의 비판적 농담과 관련하여 내 관심을 끄는 것은 안목과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도리어 어떤 영화가 내 취향이 아니고 보통 수준의 안목에 못 미친다는 판단과 중평이 나올 때, 바로 그때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태도와 방법에 관한 요청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나는 여기서 안목과 예의의 대립을 본다. 저널의 공정성이나 균형이란 어차피 신화에 불
안목과 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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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의 계절이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어떤 영화를 좋게 보았으며 훌륭한 영화인들은 누구냐고 묻는 질문지들이 날아왔다. 다른 것은 어물쩍 넘겼는데 <씨네21>의 이영진 기자에게는 꾀를 피워도 통하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숙제를 했다.스물여덟명이 참여한 설문 결과는,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작품들의 윤곽이 비교적 뚜렷한 가운데 개인의 취향을 반영하는 몇몇 상이한 응답들이 덧붙여져 있다. 특히 개성적인 목록과 선정자를 연결시켜 상상해보는 일이 내게는 흥미로웠는데, 소리없는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그런데, 아뿔싸! 숙제를 하는 동안 내가 원천적으로 빠뜨린 영화의 목록들이 발견되었다. 다시 적어보니 리스트는 금세 죽 늘어났다. 이리저리 분류를 해봐도 작업은 여전히 매끄럽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망각도 일종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며 ‘나만의 베스트 5’ 선정을 종료하기로 했다.건망증 덕분에 조금은 간단하게 마쳤지만, 한해 동안 이루어진 영화적 성과를 단칼에 평가하는 일이란 애초에
건망증이 즐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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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에 본 세편의 신작 영화는 특이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반지의 제왕> <아타나주아> <실미도>가 그 영화들인데 국적과 소재, 스타일 등 모든 것이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비슷한 면이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이었다.<반지의 제왕>은 19세기 음악사에서 달성되었던 바그너적 웅장함이 21세기 초두의 영화사 안에서 체험되는 분수령적인 사건이라고 여겨진다. 신화와 드라마, 음악과 무대디자인이 손발을 맞춘 거인적 풍모의 종합예술작품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거니와 중세에 대한 상상력, 천재적 낭만주의, 그리고 작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뉴질랜드 민족주의 열풍조차 바그너의 음악극이 당대 독일에서 불러일으킨 효과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어쨌거나 이 모든 체험은 하나로 귀결된다. 스펙터클이다.<반지의 제왕> 이후에 과연 어떤 새로운 스펙터클이 가능할까 의문스러워하며, 그리고 이 자극적인 시각 체험을 지워보겠다는 심산으로 <아타나주아>를
스펙터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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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왜 사냐건 웃지요”라는 글귀가 담긴 시를 펜으로 적어서 따로 가지고 다닌 적이 있다. 국어선생님 말씀이나 참고서의 해설이 아니더라도 이 말은 너무 멋졌다. 요즘 누군가가 내게 왜 사냐고 묻는다면 답은 역시 ‘웃지요’다. 이번엔 소녀 시절 특유의 도도한 몽환성 대신, 헷갈리거나 별 생각없으면서도 뭔가 있어 보이지 않으면 안 될 듯하여 어색하게 웃는 웃음일 것이다.그런데 방만한 자세로 TV를 힐끔거리다가 한 소식 깨치는 순간도 있다. 한국의 쌀 농사가 맞이한 절체절명의 위기와 이에 대응하려는 농부들의 노력을 말하는 다큐멘터리였는데 거기 나온 할머니가 툭 던진 말씀이, 선승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벼락 같았다.“1년만 묵히면 산 돼버린다. 배고파서가 아니라 보기 싫어서 해야 해.” 정별심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팔순의 여성 농부는, 인건비도 안 나오는 먼 산 다락논을 왜 포기하지 않고 해마다 경작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여기서 삶과 노동의 의미는 미학으로 수직 도약한다
다락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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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년에 종종 누리는 쏠쏠한 재미 하나가 있는데, TV드라마나 CF, 연극에 나온 새 얼굴 중에서 ‘찜’했던 이들이 뒤에 유명스타나 역량있는 배우로 등장하는 것을 보는 일이다. 이런 경험이 시작된 것은 유오성씨가 나온 연극을 볼 때였다. 꽤 오래전 일로, 대학로의 어느 소극장이었던 것 같다. 마치 생고무로 만든 공이 마루 위에서 튀듯이, 온몸 가득 충전된 기를 무대 위에 팡팡 발산하는 한 배우가 있었다. <친구>의 준석을 볼 때 그 젊은이의 기가 문득 다시 떠올랐었다.이런 인연(?)으로 엮어진 나의 기억 파일 속 인물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TV에서 탄생하고 성장한 선남선녀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기원을 알 수 없는데다 다소 실례를 무릅쓰자면 그리 잘생기지 않은, 이팔청춘이기보다는 약간은 나이 든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자는 영화의 중량감과 흥행까지 좌지우지할 만큼 풍요로운 역량을 갖고 있다. 당연히 생명력도 길다. 그들은 도대체 어디
꿀벌과 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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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씨네21>에는 강한 남성들의 기가 흐른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순전히 영화를 통해서 아시아적인 의협에 매료되었다는데, 그가 만든 <킬 빌>은 마치 젓가락을 들고 현란한 손놀림을 하는 서양인을 보는 듯이 익숙하고도 낯선 느낌을 준다. 더구나 한점의 망설임도 없이 잔혹한 복수의 풍경을 나열해가는 기세는, 이런 유의 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마저도 그 과격한 오락의 장에 슬그머니 눌러앉힐 정도로 강하고 유려하다.기세로 말하자면 <올드보이>의 박찬욱 감독도 여기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아직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누지 못한 사이임에도 나는 그의 풍모에 관한 매우 뚜렷한 기억 하나를 가지고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초대되었을 때의 일이다. 국내외 기자들이 참석한 공식 기자회견장에서 박찬욱 감독은 오만함 일보 직전의 당당함과 얄미울 정도의 깔끔한 언변을 과시했다. 국제무대에 나선 인사들을 여러 차례 보아왔지만 드
신념의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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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성장한다는 것은 보는 눈이 입체적으로 된다는 말과 통할 성싶다. 내가 속한 세대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십대까지는 대부분 사물을 파편적인 지식으로 분절하는 법을 암기했고, 20대는 세상을 보는 전혀 다른 시선을 충격적으로 접하는 반역의 시기였으며, 그것조차도 단지 가능한 하나의 시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갈 무렵 우리의 청춘도 막을 내렸던 것 같다.그러고 나자 해체의 시대가 도래했다. 고정된 모든 질서와 경계가 의심받았으며 진실은 상대화되었다. <매트릭스>는 심지어 세계 전체의 존재방식에 이원론을 재도입했다(이 시리즈의 속편들은 전혀 다른 영화이지만).상대주의는 비단 거시적인 차원에만 해당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도 그러하다. 누군가의 확고한 믿음이 나에게는 도전해야만 하는 과제가 된다거나 나의 진실이 누군가에게는 의심스러운 대상일 수 있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내가 보는 법’이다.모든 가능성을 다 품고 있는 세상, 바라보는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