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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샛노랗게 물든 은행 한 그루를 보았다. 온산이 아직 푸른 중에 홀로 노랗게 변한 것을 마주하는 기분은 감탄보다 충격에 가까웠다. 그 나무는 내내 비로 지새는 늦여름을 견디지 못한 예민한 녀석이었을 것이다. 시인은 사회의 환부를 남보다 먼저 감지하는 몸을 지닌 존재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산속의 노란 시인!무언가를 미리 보는 눈에 대해 생각할 때면 에두아르 마네가 떠오른다. 그의 만년작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은 벨 에포크(좋은 시절)로 불리는 19세기 말 파리의 정경을 인상파 특유의 감각으로 전해준다. 그런데 이 그림의 핵심은 거울로 비치는 술집의 화려함이나 종류도 다양한 술병과 과일, 장식적인 옷차림으로 가득한 사교계의 생동감이 아니라, 홀을 내다보고 있는 어린 여급의 무표정한 얼굴이다.그림 속 소녀의 얼굴은 예언적이다. 그 상황과 표정은 이후로 백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세계 곳곳에서 보아왔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보게 될 종류의 것이다. 마네는 근대
예민한 나뭇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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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 동안 잡지를 만들면서 미리 본 영화 가운데 <오! 브라더스>가 며칠째 머리 속에 맴돌고 있다. 영악한 형이 조로증을 앓고 있는 어린 이복동생과 부득이한 동행을 하면서 벌어지는 상황을 주축으로 한 이 영화는, 대략 분류하자면 비평계보다는 대중관객의 취향을 더 많이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이럴 경우 효력이 검증된 흥행 장치에 의존하게 마련인데, <오! 브라더스> 역시 조폭영화로부터 변주되어 나온 양아치 캐릭터의 코믹 코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거기에 장애우와 이른바 ‘정상인’의 소통과 이해라는 휴먼드라마를 가미했고, 어린아이가 질서잡힌 세계에 들어와서 일으키는 무구한 혼란이 이른바 ‘어른’들에게는 공포일 수 있다는 관찰을 웃음의 원천으로 끌어들인다.상업영화로서 평범한 길을 가면서도 새로운 노력까지 조금 보태어 대중영화를 한뼘쯤 착실하게 갱신시키는 작품들을 만날 때, 한국영화가 균형있게 성장 중이라는 확신이 짙어진다. 그런데 이런 유의 확신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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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라고 불리는 한국의 주류 영화계 안에 30대의 역량있는 여성프로듀서들이 열한명이 넘는다는 소식, 그러니까 우리가 알 만한 유능한 여성프로듀서가 도합 20명쯤 된다는 사실은 정말 흥분되는 일이다(우리나라에서 연간 만들어지는 주류영화가 대략 60∼70여편 된다). 이와 관련해 함께 나눔직한 이야기들이 이번주 <씨네21> 특집 기사에 상당량 들어 있다. 나는 여기에 그분들이 살아내고 있는 길과 삶의 태도에 대한 존경의 인사를 덧붙이고 싶다.그리고 행복하게도 지난 한주 동안 어떤 영화에 사로잡혀 지냈다. 다큐멘터리 <영매>다. 한창 신명이 오른 무당이 그리도 서럽게 우는 모습과 함께 영화 만들기가 중반을 넘어서고야 그 이유를 알았다는 내레이션으로 대뜸 시작하는 이 다큐멘터리는, 서서히 호흡 조절한 끝에 급기야 관객도 울린다.카메라 앞에 선 무당, 그들이 중재하는 보이지 않는 어떤 세계, 화면 속 관중, 스크린을 바라보는 관객까지 꿰뚫어 소통시키는 박기복 감독의 역
경계를 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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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가을 소리가 들린다. 방사형으로 화사하게 꽂히는 햇살, 실로폰 채로 치면 또로롱 울릴 것 같은 투명한 공기, 부지런히 줄을 뜯는 가야금 연주자의 손가락처럼 살랑거리는 나뭇잎들이 가을 소나타의 서주를 연주하는 계절이다.이번주 <씨네21>은 가을영화의 행렬을 예고하고 있다. 짧지만 미려한 소개글들에 마음이 살짝 설레더니 갑자기 코끝에서 어린 시절 엄마로부터 얻어 입었던 추석빔의 새옷 냄새가 맡아지고, 한가위 특유의 넘치는 듯한 풍성함에 대한 묘사로부터 시작하는 대하소설 <토지>가 이내 떠올랐다.전환기의 청춘이 흔히 그렇듯이 정신적인 홍역을 호되게 앓던 시절,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방콕’하며 여러 대하소설을 끼고 살았더랬다(아, 그 풍성한 시절을 왜 비참한 슬럼프라고만 생각했던 것일까?). 그중에서 <토지>는 내리닫이로 두 바퀴 반을 읽었는데(세 번째 바퀴가 채워지기 전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거기 나오는 여러 인물 유형과 직업군
대목과 소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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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도 등급이 있다면 그 마지막 단계쯤에 해당하는 말이 ‘먹먹하다’가 아닐까 싶다. 대성통곡이라는 것도 남이 내 슬픔에 공감할 기회를 주거나 아니면 여기서 무너지지 않겠다는 자기 보존의지의 표현이라고 느껴진다. 그런데 마음이 먹먹해지면 그것마저도 귀찮아진다.나는 이런 유의 먹먹함을 느낀 적이 있다. 어떤 죽음에 대면했을 때의 일이다. <씨네21> 창간 당시 기자로 입사해서 잡지 만들 준비하느라 정신없던 나날이었다. 나는 그 죽음 앞에 멀뚱히 서서 나에게 물어보았다. 만약 메피스토펠레스가, 떠난 영혼을 돌려줄 테니 너의 영혼을 내놓겠느냐고 흥정해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었다.그 일을 전후로 성수대교가 끊어지고 삼풍백화점이 주저앉았다. 개인의 붕괴와 사회의 붕괴가 강렬한 하나의 이미지로 결합되어 꿈에 나타났고, 사막처럼 뜨겁고 건조한 허무, 조와 울이 교체하는 생의 리듬이 몇년이나 지속되었다. 그 죽음에 엉킨 개인과 가족, 사회와 제도의 문제에 대해서, 분석하기 좋아하는
먹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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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인이나 집단에 시간이 늘 동일하게 감각되는 것은 아니다. <씨네21>에 지난 한달은 통상성을 뛰어넘는 응축과 확장의 느낌을 동시에 준 시기였다. 그 사이에 3중의 변화가 있었다.<씨네21>이 한겨레신문사의 품을 떠나 2003년 8월1일자로 ‘씨네21주식회사’라는 독립법인이 되었다. 1995년 창간 이래 맞이한 최대의 변화로, <씨네21>이 미디어로서 지니고 있는 잠재력을 다양하게 펼쳐보자는 의지의 소산이다.이에 맞추어 한동헌 대표이사가 취임했다. 본사와 아무런 연고없이 순수 공모를 통해 초빙되었는데, 학문적 배경과 대기업의 첨단-중추분야에서의 경력, 문화계의 오랜 연고를 겸비했고 심지어 김광석의 <나의 노래> 작곡자라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그리고 편집장이 바뀌었다. 편집장으로서의 3년을 포함, 도합 5년간 <씨네21>에 헌신했던 허문영 전 편집장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분사를 한달 앞둔 시점에 사직했다. 아마도 새 술은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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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냉이를 오도독 오도독 깨물며 에디토리얼을 궁리하는 이 시간에, <씨네21> 사무실 곳곳에서는 작은 수런거림과 웃음소리가 여기저기 굴러다닌다. 한주 동안의 고심과 노동을 털어낸 취재와 사진, 자료쪽 기자들이 장난도 치고 다음주 작업에 대해 의논하는가 하면, 마감 독려해가며 원고를 매만지고 꾸미느라 숨이 턱에 닿았던 편집과 교열 기자들도 발걸음을 늦춘 채 농담 대열에 가세한다. 디자인 마무리에 한창이거나 제작 인쇄를 준비하는 동료들은 긴장의 도가 아직 덜 낮아졌을 것이다.일터에서 행복을 구하는 건 어지간한 배짱이 아니면 갖기 어려운 태도겠지만 그래도 지금의 찰나적인 여유를 누리는 동료들이 발산하는 느낌은 따뜻하다. 세상 곳곳의 일터와 삶의 현장에서 가끔씩 벌어지는 풍경일 터이다.나의 상상은 고등학교 시절의 선인장 이야기로 점프컷한다. 지금은 세상에 없는 혜강이라는 친구네는 난을 키워서 파는 일을 했다. 세심하게 관리된 난초들 사이로 동그랗고 커다란 선인장이 몇개 놓여 있었는
장난기 많은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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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보면 사람들은 무작정 애정을 갖게 되는 대상들을 제각기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건 영화나 음악일 수도, 어떤 생명체일 수도, 혹은 특정한 순간일 수도 있다. 그게 비슷할 때 우리는 사람끼리도 비슷하다거나 서로 통한다고 이야기한다.나에게는 쌈지공원이 그런 것 중 하나이다. 옷에 매달고 다니던 작은 주머니라는 뜻의 쌈지에서 유래했을 이 명칭은, 도시 곳곳의 조그만 귀퉁이들에 나무를 심고 의자를 놓아 휴식할 수 있게 만든 공간을 가리킨다. 그것은 빌딩 사이의 세모난 콘크리트 땅이나 동네 은행 앞 등 예기치 못한 곳에 나타난다.<씨네21>이 자리잡고 있는 곳에도 쌈지공원이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흔히들 만리동 고개라 부르는, 공덕동 언덕배기에 자리잡은 한겨레신문사는 건물 모양이 희한해서 6층과 9층에 각각 옥상이 있다. 거기에 화단을 둘러 꽃을 심었고, 서너뼘짜리 물길도 내어 그 위에 앙증맞은 나무다리까지 얹었는데 심지어 물고기도 산다. 나무로 만든 벤치는 오늘처럼
쌈지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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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겨울, 동료들과 함께 늦은 대화를 마치고 카페 문을 나설 때였다. 느닷없이 내린 눈발이 나지막한 담장 위에 고스란히 쌓여 있었는데, 새끼손톱만한 크기의 눈송이들이 녹거나 흐트러지지 않고 서로 몸을 기댄 채 가로등 빛을 받아 일제히 반짝였다. 허리를 굽혀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눈의 결정체들은 어느 것 하나 서로 같지 않았고,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눈송이 하나도 이러할진대 천지간의 우주는 어떻겠느냐는 어느 책 한 구절을 감동적으로 회상했다.우주물리학은 나에게 접근을 허락지 않는 어려운 세계이지만 그래도 쉽고 아름답게 쓰여진 대중서를 통해 간혹 그쪽 세상을 구경하곤 한다. 최초의 경험은 <우주의 역사>라는 책이었는데, 20세기의 인류가 겨우 도달한 우주에 관한 지식을 정리하면서 그 한계를 이렇게 요약했다. 고대 동양의 어떤 민족은 우주가 거북이 열몇 마리를 엎어놓은 것처럼 생겼다고 믿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동그랗고 평평한 우주 모델이 거북이 모
우아한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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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난과 동미는 오랜 친구다. 나난은 소심하고 귀엽다. 동미는 개방적이고 대범하다. 그런데 동미가 뜻하지 않게 임신을 했다. 문제의 남자와는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는데도 동미는 뜻밖에 아이를 낳겠다고 결심한다. “내 애니까”가 이유다. 기겁해서 “미쳤냐”고 뜯어말려도 동미는 끝내 듣지 않는다. 나난은 결국 이렇게 말한다. “그래, 낳아라, 이년아. 내가 애 아버지가 될게. 분윳값도 대주고.” 그리고 친구를 안아준다.다음주에 개봉하는 <싱글즈>의 한 대목이다. 내가 친구라면 동미를 두들겨패서라도 끝까지 말리겠다. 한국사회에서 미혼모가 된다는 건 100가지 시련을 자초하는 일이다. 더구나 동미는 순정파도 도덕주의자도 아니며, 갑자기 종교적 각성이 찾아온 것도 아니다. 동미는 그를 아끼는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말리고 싶은 길을 가려는 것이다.지난 5월 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된 홍기선 감독의 <선택>은 한국전쟁 때 포로로 잡혀 평생을 감옥에서 보낸 김선명씨의 옥살이를 그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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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회를 이런저런 일로 놓쳤다가 결국 비디오로 보게 되는 영화들이 종종 생긴다. <클래식>도 그런 영화 중의 하나였다. 이 영화는 비평적으로 크게 주목받진 못했다. 영화를 보니 그 이유를 알겠다. <클래식>은 신파다. 신파의 공식대로 절대 사랑이 절대 실패한다. 절대 사랑은 그 자체로는 완전하므로 그를 부정하는 외부의 힘이 절대적이어야 실패한다. 그래야 신파가 완성된다. 사랑도 절대적이고 실패를 초래하는 외부의 힘도 절대적이라야 한다면, 이야기는 과장과 비약을 피할 수 없다.<클래식>도 그렇다. 그러나 심금을 울렸다. 처음엔 영화의 시대와 공간이 불러일으키는 향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점이 있었을 것이다. 부잣집 아들이지만 정신적 저항력이 전혀 없는 꺽다리 친구는 자꾸 실신하며 나중엔 목을 맨다. 유년의 낙원에서 추방된 뒤로는 누구도 풍요롭지 않았고, 주위에선 무언가 자꾸만 사라져갔다. 새 것이 사라진 것의 자리를 채울 수 없었다. 이상향의 이미
두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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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상 TV를 자주 보지 못하지만, TV를 좋아한다. 슬플 때나 기쁠 때처럼 감정이 선명할 때 TV는 별 필요없다. 하지만, 우리의 감정은 대개 선명하지 않다. 짜증날 때, 괜히 울화가 치밀 때, TV는 도움이 된다. 그냥 켜놓고 아무거나 멍하게 쳐다보고 있으면, 혹은 켜놓고 딴 데 보고 있어도, 마음이 좀 편해진다. 때론 잠들기 위해 TV를 켠다. 그럴 때, TV는 내가 그를 돌보지 않아도 내게 아부하는 지상의 유일한 존재다.그러다 가끔 뜻밖의 즐거움도 얻는다. 아무 생각 없이 채널을 돌리다 <옥탑방 고양이>를 두어번 봤다. 나는 정다빈이나 김래원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지만, 둘 다 귀여웠다. 정다빈이 연기한 정은의 캐릭터가 특히 흥미로웠다. 당사자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정다빈이 밉게 생겼다고 느낀다. <명랑소녀 성공기>의 양순(장나라)은 전형적 미인은 아니지만 충분히 예쁘게 보이며 그렇게 보이도록 드라마가 도와줬다. 그러나 <옥탑방 고양이>의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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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봄, 서울 시내 곳곳에는 이런 플래카드가 나붙었다.'100년을 기다려온 그 잡지가 온다'이 호방하고 대담한 기치의 주인공은 <키노>였다.1995년은 영화 탄생 1백주년을 맞은 해였다. 세계 각국에선 기념 다큐멘터리가 제작됐고, 많은 영화 책과 이벤트가 쏟아졌으며, 한국에선 그 해 4월 두 영화 잡지가 동시에 창간됐다. 그 하나가 <키노>이고, 다른 하나가 <씨네21>이다.동갑내기지만, 두 잡지는 많이 달랐다. <키노>의 편집장은 영화광 1세대가 낳은 스타 평론가 정성일이었고, 그 잡지는 처음 내건 기치대로 영화사 100년의 무게를 기꺼이 짊어진 채 미학적 정치적 전위의 언어로 자신을 구축했다. <씨네21>의 편집장은 한겨레신문 영화기자였던 조선희였고, 이 잡지는 긴 동면을 마치고 깨어나기 시작한 한국영화와 영화산업에 집중하며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격려하고 함께 호흡하려 했다. 달랐지만, 한가지 소망은 공유했다. 영화가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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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이 시위대의 맨앞에 서서 외친다. 무슨 소리인지 들리진 않으나, 시위대는 반전 평화의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곧이어 정우성은 두세명의 전경에게 들려간다. 그런데 정우성은 팔다리가 들려서도 웃는다. 웃으며 무언가를 계속 외친다. 외치면서 웃는다.최근 TV에 자주 나오는 한 의류 광고다. 한 후배는 이 광고가 기분 나쁘다고 했다. 그가 기분 나쁘다고 느낀 이유는 잘 이해된다. 지지난해라면 나도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제 더이상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그 광고가 기분 나쁘다면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고결한 이상주의를 물건파는 데 써먹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정우성이 속한 쇼 비즈니스 세상은 속되고 정치적 이상주의는 성스럽다는 암묵적 판단 때문이다.첫째 이유라면 나도 아직 벗어나지 못한다. <아침이슬>이 햄버거 광고에 쓰일 때 내 마음은 그것에 격렬히 저항한다. 그 곡의 사용을 허락했을 저작권자에 대한 원망까지 밀려온다. 두 번째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