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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사라졌다. 언제부터인가. 한참을 뒤돌아봐야 한다. <마부> <박서방> <월급봉투>, 제목을 짚어가면 그건 이미 ‘조국의 근대화'가 조국을 뒤덮기 전이다. 그때 이미 아버지들의 위치는 불안불안했다. 옛시대의 심성으로 변화하는 세태를 맞는 그 모습에는 희생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주인공이었다. 그들이라기보다 배우 김승호라고 말해야 정확하겠지만.그의 아들들은 어디로 갔을까. 영화에서건 현실에서건 아들들은 이미 그때의 아버지 나이를 넘겼을 텐데. 한해 1인당 평균 영화관람 횟수가 5회, 10회를 웃돌던 극장가의 황금기가 순식간에 막을 내렸을 때, 한국영화도 긴 불황에 들어갔다. 영화는 혼자서 늪에 빠지지 않았다. 배우들도, 스타들도 끌고 침몰했다. 시기적으로 대략 유신시대부터 80년대 초반까지로 계산된다. 한국영화가 수면 위로 다시 떠올랐을 때, 구명정을 탄 몇몇을 빼면 한국영화 황금기의 아들들은, 그리고 딸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아버지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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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제네바에 가본 적은 없지만, 세계화란 단어와 세계화 강박증을 세계화한 WTO 본부는 그곳에 있다. 본부가 자리한 로잔거리가 어디로 통하는지, 그 거리 154번지가 어디쯤인지 알 리가 없지. 어쨌든 스크린쿼터문화연대의 ‘대표단’이 7월2일, 그 낯선 거리로 향한다. 유럽방송연합(EBU), 영국영화자문위원회(BSAC), 유로시네마(EUROCINEMA), 유럽영화감독연합(FERA) 등 이름만으로도 유럽 영상기구라는 걸 알 수 있는 비정부기구, NGO들이 문화적 다양성에 관한 시청각 세미나를 열며 초청장을 보내온 것이다. 자국영화를 지켜낸 한국의 경험에 관해 발제를 해달라는 내용이었다.다시, 가본 적은 없지만 WTO 건물에서는 다양한 의제를 놓고 비정부기구 대표들과 사무국, 그리고 WTO 회원국 대표들 사이에 포럼이 자주 벌어진단다. 이번 세미나도 그런 모임 중 하나다. WTO는 자신들의 활동에 관한 대중의 이해를 높이는 데 NGO가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고 판단해, 대화창구
지금 우리는 제네바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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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우려를 들어 등급보류를 내리고 잘라오면 허용하는, 이런 식의 운용은 사실상 검열이다.” 대마초 흡입장면이 많다는 이유로 등급보류 판정을 받았던 <오! 그레이스>의 수입사가 영화를 잘라와 ‘18살 이상 관람등급’을 받자, 영화평론가 전찬일씨는 한 일간지와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다. 그는 등급판정을 담당하는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이다.그의 말은 옳다. 한국 사정은 등급을 받기 싫으면 상업적 이익을 희생하고라도 등급없이 상영할 수 있는 택할 수 있는 다른 나라와 같지 않다. 등급매기기를 위원회가 유보라는 이름으로 거부하면, 해당영화가 택할 길은 두가지다. 상영을 포기하거나, 필름을 자르거나. <오! 그레이스>는 두번 째 방법을 택했다. 영화는 졸지에 남편을 잃고, 빈털털이가 된 여자가 우연찮게 ‘삼’(대마)을 기르면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포석을 놓아둔다. 자기가 재배한 거니까, 직접 경험을 해봐야 된다고 여자는 생각하고, 대마초무해론을 주장하는
청소년과 성인을 차별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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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일본에서 <철도원>의 감독 후루하타 야스오의 <호타루>에 이어 흥행 2위를 기록하고 있다는 소식이 매주 들려온다. 안동에서 일부분 촬영을 해간 영화다. 역시 <철도원>에 나온 다카구라 겐이 2차대전 말 특공대로 전사한 ‘조선인 전우’의 가족을 만나러 온 장면이었다. 전쟁에서 희생된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한일간의 화해를 꾀하겠노라, 감독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갔었다.개봉 직전, <호타루>는 한국언론의 도쿄특파원들을 대상으로 시사회를 가졌다 했다. 두 나라의 화해를 위해 이 영화를 한국에서 상영하고 싶다는 의사를 제작사 쪽에서 밝혔다고도 했다. 주인공의 전우의 신원도 파악됐다. 창씨 개명한 이름은 가네야마, 본명은 김성재, 장교였다. 장교였으니 강제징용된 건 분명 아니다. 가네야마는 출격전, “나는 일본제국주의가 아니라 조국의 가족과 애인을 위해 적함을 격침시키겠다”는 대사를 남겼다 했다. <한겨레> 도쿄발 기사는 그렇지 않아도
김성재는 왜 가미가제가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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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란 그 도시에선 '미성년자 관람가' 영화라 해도, 개인적으로 보러가는 건 금지돼 있었다. 대신 시험이 끝나는 날이면 어김없이 학교에선 영화단체관람행사를 마련해놓았다. 시내 학교의 시험날짜가 똑같은 건 아니니까, 이 학교 저 학교의 단체관람영화만 쫓아다녀도 영화구경은 웬만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본 <나바론>에서 기억에 남은 건 주인공 그레고리 펙이었다. 그의 곁에 있던 배우는 정말 미안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세계를 그대 품안에>의 앤 브라이스를 혹시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우리가(그 우리가
추억을 애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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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영화과와 애니메이션 관련학과가 많기로는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대한민국엔 영화사가 없다. 생각해보면 좀 이상한 일이다. 1969년판 이영일의 <한국영화전사>가 아주 오래 유일한 영화사 독본으로 읽혀야 했고, 거기에 수록되지 못한 일제하 좌파 영화운동사는 세대를 두어번쯤 건너 영화평론가 이효인의 <한국영화역사강의1>이 출현하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일제 식민지배 종식 이후부터 지금까지를 아우르는 영화사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초창기, 그러니까 일제 식민지배 아래서 만들어진 극영화들이 단 한편도 남아 있지 않고, 기록과 보존에 둔한 우리 현실과 무척 어울리는 풍경 아니냐고 접어둬야 할까?올초 타계한 고(故) 이영일이 남긴 초창기 영화인 인터뷰 자료는 우리 처지가 그렇기에 더 소중했다. 그들의 기억 속에는 사라진 영화들이 기거하고 있었으므로. 이영일 선생의 30여년 전 녹음 테이프는 <임자없는 나룻배>의 이규환, 나운규의 친구 윤봉춘
어떤 도서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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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제38회 대종상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종상 문제를 다룬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끝부분을 우연히 보게 됐는데, 우리집 텔레비전 수상기는 사랑받아 마땅한 우리의 대종상이 신구세대의 갈등에 희생이 되고 말았다고 단정하고 있었다. 세대간의 화합을 강권하고 있었다.정말 대종상은 세대갈등에 상처입은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보면 대종상의 역사는 온갖 로비설과 음모설이 서식해온 어두운 터널이었다. 오죽하면 당대의 활동성 높은 영화인들이 대종상을 거부하자는 집단적 움직임을 두어번씩 되풀이했을까. 불공정심사 의혹으로 상처입고, 운영비조차 마련 못해 해걸이를 하는 수모까지 당한 상. 철지난 냉전논리로 냉전이데올로기에 찌든 당국의 검열을 통과한 영화조차 빨간 딱지를 붙여 시상대 진출을 막던 상. 빛나는 영화의 싹을 발견할 힘을 잃은(아니면 시력이 애초부터 없었던) 노안을 과시하던 상. 빈사 상태의 대종상을 새숨을 불어넣어 긴급구조해온 건 언제나 영화였다. 대종상은
다시 대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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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일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사람들 이야기는 언제나 감동적이다. 라면을 먹고 달리는 임춘애에게 온 나라가 감동한다. 날숨이 보얀 입김이 되어버리는 추운 다락방에서 오선지에 악상을 옮기는 슈베르트를 본 적은 없어도, 이야기만으로 가슴이 뭉클해진다. 시대가 열정적으로 흠모하는 영화의 현장에 참여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젊은 날을 통째로 바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그러나 이같은 희생이 언제까지나 미담으로 남아 있지는 못한다. 영화산업의 파이가 그러기엔 너무 커졌다. 분배의 문제가 최근 영화계 스탭들 사이에서 터져나온 것도 그 때문이다. 돈은 영화를 향해 밀려 들어오고, <쉬리>에서 <공동경비구역 JSA>, 그리고 <친구>까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무찌른’ 한국영화들의 명맥이 끊이지 않는데 우리들의 처우는 달라진 것이 없다, 그들은 말한다. 한국영화 80년사에서 처음 들리는 목소리다. 경력 5년에 연봉 150만원, 충무로 ‘조수’들의 생존현
영화계에도 분배의 정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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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힘으로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신문을 만든다는 건 80년대 말, 믿기 힘들 만큼 엄청난 창조적인 꿈이었다. ‘6만주주’가 성금을 모아서 정말로 하나의 신문을 만든 사건은 세계언론사에도 없는 일이었다. 프랑스의 <르 몽드>도 시민이 만든 신문은 아니었다. 나치에 협력한 신문사를 정부가 접수하여 양심적 지식인들에게 불하해서 태어난 신문이었고, 스페인의 <엘 파이스>는 프랑코 독재에 저항하던 이들이 만들었다지만 한국과 같은 폭넓은 열망과 지지 위에서 출발하지는 않았다. 알다시피 한국 민주화운동의 결실이라고 해도 과히 틀리지 않는 그 신문이 <씨네21>의 모태이다.출발 때의 목적과 의지가 출발 이후 과정 모두를 물론 합리화하지는 않는다. 다만 어떠한 시행착오를 했더라도 본질을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 이 신문의 하루하루에는 애초 신문을 탄생시킨 우리 사회의 이상을 발전시켜가는 의무와 권리가 새겨져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제는 시민의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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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취재를 마치고 도쿄로 돌아가는 길에 <키네마순보>의 전 편집장 겸 현 사업담당 책임자인 가케오씨가 <씨네21> 사무실에 들렀다. 그는 일본, 중국, 이란 등을 거쳐온 아시아영화열이 앞으로 몇년 동안 한국 위에 머물 거라고 관측하는 영화평론가다. 그는 <쉬리>나 <공동경비구역 JSA>처럼 할 얘기를 하면서 대중을 휘어잡는 영화가 불행하게도 일본에는 없다고 아쉬워해왔다. 그런 그가 진지하게 물었다. 왜 한국에는 허우샤오시엔이나 에드워드 양이 없는 것일까. 사회 자체가 정체돼버려서 영화소재도 빈곤해진 유럽이나 일본과 달리 한국은 아직 천착할 역사적 정치적 사안들이 풍부한데. 통일이 된다면 한국영화의 폭발이 다시 일어나게 될까. 전주에서 <필름컬처> 임재철 주간과 마주 앉아 영화를 논하던 <카이에 뒤 시네마>의 샤를 테송 편집장도 비슷한 질문을 던져왔다. 한국에는 작가영화의 전통이 없는 것 같다, 왜?이들에게 모종의 우월
허우샤오시엔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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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99호에서 <씨네21>은 지나간 영화들에게 늦은 편지를 부쳤다. 그렇게 어제의 서랍을 뒤져, 정리를 하고 나니 창간호부터 시작한 오늘의 그림을 그릴 시간이 됐다. '한국영화산업 파워50'은 처음 등장할 때부터 화제도 많이 불러일으켰고, 영화인을 서열을 매겨 줄세우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많이 받았다.그런 평가와 관계없이 가장 재미있는 건 영화인과 관게자, 영화기자들로 구성된 추천인들의 목소리를 청취해 가감없이 작성하는 이 충무로 조감도가 해를 거듭하며 한국영화산업의 변화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충무로 토착자본들이 대부분 사라진 가운데 극장과 배급을 장악한 곽정환씨나 임권택 감독과 참으로 예술적인 콤비를 이뤄 한국영화의 진정한 세계화에 기여한 명제작자 이태원도 하나의 영화적 상징이라 하겠다. 이 여론조사의 대상이 되는 '영화산업'이 자본과 예술을 두 축으로 하고 있다는 기초상식을 강조하느 듯한 상징말이다. 그래서 산업적 지략과 영화감각을 두루 갖춘 강우석씨가 연속 1위를
한국영화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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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이다. 창간 6주년을 맞으며 <씨네21>은 우리의 발밑에 새로 출발선을 긋는다. 돌아보면 지난 길은 <씨네21> 혼자 만든 것이 아니었다. 영화를 '우리들의 예술'로 채택한 시대가 있었고,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영화가 있었다.그 영화들을 우리는 온전히 읽은 것일까. 그것이 품고 있는 의미와 가치를 놓치지 않고 포착해 독자들에게 제대로 전달한 것일까. 혹시 다가올 시대의 전령을 문전박대하여 거리로 내쫓은 우를 범한 적은 없을까. 출발선에서 우리는 그런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본다. 반대의 경우도 있을 것이다. 지적 유희에 휘말려, 아니며 일시적 환호에 휩쓸려, 감각의 새로움에 미혹되어 안 그래도 좋을 영화에 과도한 찬사를 보냈을 수도 있을 것이다.신발끈을 다시 매며, 우리는 그 답을 찾기로 했다. 298권의 <씨네21>을 거슬러 창간호에 가닿기까지, 예상은 했지만, 작업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영화의 두 주체, 만드는 이와 보는 이의 중간지
영화를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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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더위에 때이르게 벚꽃이 피고, 황사 바람에 비까지 찾아들어 또 꽃들이 진다. 에이, 버얼써 졌지요, 출장을 다녀온 동료는 남녁 꽃소식을 묻자 타박을 한다(진짜 타박은 아니고, 웃으면서). 집으로 돌아가려면 여의도를 지나야 하는데, 늦은 밤 꽃가지 아래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쌍쌍의 남녀가 끝없이 줄을 잇는다. 그래, 봄밤나들이구나.<씨네21>도 계절을 못이겨 나들이를 준비했다.길은 두 갈래다. 창간 6주년을 앞두고 여는 씨네21영화제가 그 하나. 지난 해 조선희 창간편집장이 시작한 이 행사의 출발배경은 단순하고 소박했다. 부산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국제영화제들이 생겨났고, <친구>처럼 부산에서 출발해 전국을, 영호남의 경계까지 넘어서 휩쓰는 영화가 늘어나고 있지만 아직도 문화의 서울편중현상은 가시지 않았다. 좀더 단순하게 말하자면, <씨네21>의 독자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영화를 기사로만 읽는다는 얘기다. 독자시사회 같은 소소한 즐거움도 모두 서
봄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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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의 민족주의자 밀로셰비치가 전쟁범죄자로 낙인찍힌 일을 패권주의의 승리라고 말할 생각이 적어도 내게는 조금도 없다. 무자비한 인종청소, 그 과정에서 인종개량의 이름으로 자행된 강간, 그건 어떤 말로도 변명할 수 없다. 오늘 과거를 반성한다한들, 그 잘못을 되풀이하는 바보짓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나마 회복한 ‘건강한 정신’으로 세상과 삶을 일으켜 세우려 안간힘을 쓰는 동안, 우리는 한뼘씩 사람답게 사는 영역을 확장시켜나갈 수 있다.제3회 여성영화제가 ‘쟁점’이라는 부문을 따로 만들어놓고, ‘포화 속의 여성들’을 초청해들였다. 그 ‘여성’들은 때로 남편과 아들을 전쟁에서 잃어버린 아내거나 어머니이다. 직접 싸움터에서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의 슬픔과 비탄은 전쟁의 비극을 정서적으로 환기시키는데 더없이 적절하다. 전쟁은 물론 그러한 상실만 강요하지는 않는다. 아이다처럼, 환향녀들처럼 남자들이 패배하면 그들의 여자들은 승리자의 전리품이
제3회 여성영화제를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