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1월 말에 <씨네21> 기자 공채공고를 냈고, 1600명가량이 지원을 했다. 서류전형, 필기시험, 1차 면접, 2차 면접을 거쳐 4명을 뽑았다.아마도 지원한 사람들이 열배는 더했겠지만, 뽑는 사람 마음도 많이 불편했다. 몇장 안 되는 문서, 두어 시간의 필기시험, 10분 남짓한 면접으로 한 사람의 자질과 성품, 그리고 잠재력까지 알기란 불가능하다. 불가능하지만 달리 방도가 없어 그렇게 한다. 선발과정을 훨씬 더 복잡하게 하더라도, 응시자의 불편만 늘어날 뿐 객관성이 썩 커지진 못할 것이라는 게 그나마 어쭙잖은 변명이 된다.어설픈 방식이나마 우리의 선발과정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뜻과 함께 깊은 송구스러움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내 진가를 모르는군” 하고 웃어넘기시기를, 그리고 자기 안의 보석을 여전히 믿으시길….2.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났다. 언론은 그걸 ‘인재’라고 한다. 맞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유용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 유용함
감사,변명
-
매주 보시는 독자들은 아시겠지만 두호 전부터 ‘아저씨 vs 아줌마’가 ‘아가씨 vs 건달’로 바뀌었다. 풍부한 교양과 정련된 언어로, 혹은 생활에서 길어올린 따뜻하고 생생한 말들로 우리를 행복하게 했던 고종석, 오은하씨가 동시에 휴식을 청했고, 고심 끝에 새 단장을 했다. 설 합본호에 첫 원고를 쓴 남재일씨는 <중앙일보 > 문화부에서 오래 일했으며, 지금은 신문방송학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기억력이 아주 좋은 분이라면 그가 지난해 설 합본호에 쓴 아주 인상적인 ‘애마부인론’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를 ‘건달’로 초빙하자 그는 주저했다. “건달 보고 건달이라고 부르면 기분 나쁘지.” 먹물이 무슨 건달이냐고 하면 할말 없지만, 그는 그렇게 먹물을 먹고도 여전히 건달이다. 같이 술을 마셔보면 금방 알 수 있고 글을 봐도 대강 짐작할 수 있다. 그가 혹시 갑자기 전임교수라도 돼서 건달에서 완전히 벗어나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최근에 모 대학 교수모집에 떨어져서 당
새 필자들
-
설 연휴 직전인 1월29일, KBS1TV는 <수요기획-아프간으로 간 영화감독>(연출 지혜원)을 방영했다. 흙바람과 질병과 아사의 땅 아프간에서 영화를 찍고 있는 이란의 거장 모흐센 마흐말바프 일가의 촬영현장을 담은 다큐멘터리였다. 3년 전 부산국제영화제의 초청으로 한국을 찾았던 마흐말바프와 그의 가족은, 우리가 영화라고 말할 때 떠오르는 것들과 가장 먼 곳에서 영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다. 보통의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시계는 나와 함께 늙었어”라고 중얼거리던 아프간 노인(자기 나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그는 현장에서 캐스팅돼 영화에 출연했다)이 마흐말바프의 손을 붙잡고 “당신은 가장 좋은 친구야”라고 말할 때, 눈물을 참기 힘들었을 것 같다.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더이상 삶이 축복이 아닌 그 저주의 땅에서 그는 어떻게 영화를 버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1달러짜리 연고가 없어 살이 썩어가는 아이를 보고, 흙바닥 위에서 질병보다 먼저 찾아온 굶주림으로 죽어
그 감독
-
임권택 감독이 1980년에 만든 <만다라>는 번뇌하는 두 승려에 관한 이야기다. 이 영화의 제작은 처음부터 벽에 부딪혔다. 촬영장소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승려에 관한 이야기이니 당연히 절이 무대여야 하는데, 어떤 절에서도 촬영 허가를 해주지 않았다. 그건 얼마간 자연스러운 반응이기도 했다. 주인공인 두 승려가 전통적 승려와 거리가 먼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 가운데 특히 지산은 가승(假僧), 잡승(雜僧)으로 자처하면서 기괴한 행동을 하고 다니는 자칭 땡땡이중이었고, 술과 여자도 거침없이 범하는 파계승이다.몇달 고생 끝에 어렵사리 촬영할 절을 구했을 때, <만다라> 제작진에는 식구가 한 사람 늘어 있었다. 촬영을 거절한 어떤 절에 기거하던 승려였다. 자기 절에선 촬영을 거절했지만, 자기는 관심이 있으니 촬영에 동행하고 싶다고 부탁을 해왔고, 당시 임권택 감독은 불교 교리나 승려의 생활에 대해서 잘 몰랐던 터라, 어떤 식으로나마 영화에 도움이 되겠거니 해
진짜
-
-
프랑수아 트뤼포가 기꺼이 ‘가장 위대한 감독’이라 불렀던 장 르누아르는 1차 세계대전 때 최전방의 병사로 참전했다. 그리고 그때의 부상으로 평생 다리를 절었다. 그가 자서전 <나의 인생 나의 영화>에 남긴 회고담 중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전쟁이 벌어지면 으레 관능적 차림의 여가수들이 전방의 병사들에게 위문공연을 와서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노래로 그들을 격려했다. 르누아르가 보기에 이건 꼴불견이었다. 병사들은 그런 노래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여가수의 미끈한 허벅지만 좋았다고 한다). 최전방의 병사들이 좋아하는 노래는 오히려 18세기 말의 감상적 가요 <93년 파리>였다. 그 노래는 혁명기인 1793년에 한 젊은 귀족이 사랑하는 여공 리종을 만나러 파리에 왔다가 체포돼 단두대에 보내지는 사연을 담고 있다. 노래는 젊은 귀족의 반항적인 독백으로 이렇게 끝맺는다.“나는 비웃겠다. 참수인 상송을/ 그의 작업은 이미 끝난 것이 아니더냐/ 그대에 대한 나의 사랑 때문에,
어떤 질서
-
2000년 5월, 프랑스 영화도시 칸의 인터뷰장에서 오시마 나기사를 비로소 만났다. 만난 게 아니라 그냥 멀찍이 지켜봤다. 그의 몸이 의탁한 휠체어를 재일동포 감독 최양일이 끌고 있었고, 곁에는 이번엔 배우로 온 기타노 다케시가 서 있었다. 어떤 질문에도 한 문장을 넘어서지 않는 단호한 답변, 그리고 오만한 눈빛과 근엄한 표정이 위압감을 주긴 했지만, 그의 육신은 이제 늙고 병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건 오시마에겐 어울리지 않았다. 내게 오시마는 늙을 수 없는 사람으로 기억됐었다.나는 오시마의 영화를 1990년대 중반, 지금은 사라진 서대문의 추레한 2층 골방에서 낡은 비디오로 처음 만났다. 유명한 <감각의 제국>을 그보다 훨씬 전에 순전한 호기심으로 봤지만, 서대문 골방에서 <청춘잔혹이야기>를 봤던 기억이 굳이 첫만남이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주인공인 청년 기요시가 더러운 낙태수술대 위에 잠든 연인 곁에서 사과를 질겅거리며 눈물을 훔치던 모습을 잊을 수
오시마
-
<네 멋대로 해라> DVD가 나왔다는 소식과 인정옥 작가의 ‘내 인생의 영화’를 실으면서, 때가 많이 늦었다는 걸 알지만, 어쩔 수 없이 복수 이야기를 해야겠다. 복수는 인정옥 작가가 쓴 TV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주인공이다. 지난해 여름 휴직에 들어간 직후에 메일을 보내느라고 PC방에 들렀다가 아침을 맞은 적이 세번 정도 있었다. 밤새 복수를 만났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올 무렵 어느 날에도 비슷한 짓을 했다.길가는 사람들에게 2002년의 인물 셋을 꼽으라고 한다면, 대부분 노무현과 히딩크를 우선 말할 것 같다. 나도 그럴 것 같다. 나는 거기다 복수를 더하고 싶다. 드라마가 끝난 뒤 <네 멋대로 해라>의 인터넷 사이트에는 많은 사람들이 “복수가 보고 싶다”고 적고 있다. “재미있다”거나 “감동적이다” 혹은 “멋있다”가 아니라 그냥 그가 보고 싶은 것이다. <네 멋대로 해라>가 정말 우리 시대 최고의 드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
복수
-
지난해(2001년) 가을 <오아시스> 크랭크인 직전에 이창동 감독을 인터뷰했다. 길지 않은 인터뷰를 마치고 난 뒤 가진 술자리에서 이창동 감독이 불쑥 물었다. “내년 대통령선거에서 누구를 지지할 거요” 우물쭈물하다가 “모르겠다”고 했더니 그때부터 그는 왜 노무현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1시간 동안 내게 강의를 했다.뜻밖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속으론 ‘이분이 왜 이러시나’ 하고 생각했다. 이창동 감독은 대중적 열광이나 대중운동을 신뢰하지 않거나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다. 그가 그렇게 말한 적은 없고, 그의 영화를 보고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다. 그가 “축제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은 있다. <오아시스>를 포함해 그의 영화 세편엔 각기 다른 파티장면이 나오는데 뜻밖의 방해자의 출현으로 늘 난장판으로 끝맺는다. 그렇게 체질적으로 잔치판에 동화되기 힘든 사람이 한 정치인의 열성 팬이라는 사실은 믿기 힘들었다. 그러기엔 그는 생각과 자기 검열이 너무 많을 사람이다. 그런
상식
-
월드컵 경기 때 광장을 뒤덮은 응원단의 붉은 물결은 ‘그림’이 되었다.효순, 미선을 추도하고, 소파 개정을 요구하는 광화문의 촛불시위도 아름다웠다. 그 광경을 보고, 어느 신문은 시위문화가 성숙했다고 평을 했다. 시위문화가 시위대열에 선 사람과 시위를 저지하는 권력, 양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 말이었다면 나도 동의하겠다. 시위라는 무리짓기 행위는 일종의 대중발언인데, 그것을 물리력으로,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힘이 있다면 충돌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을 경우 화염병이 촛불로 바뀔 수 있다. 그런데, 그 글을 꼼꼼히 읽어보니 그런 뜻으로 쓴 것 같지는 않았다.또 어느 신문은 이런 대중집회 장소에 어린이들을 데리고 나오는 부모들을 걱정하기도 했다. 그것도 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답게 모여서, 언니 누나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나라의 자존과 평화를 얘기하는 사람들 속에서 보낸 저녁은 어린이들에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광장을 열어두니까 이렇게 좋지 않은
촛불과 국화
-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열광한다. 도대체 어떤 작자기에. 자본주의 강대국의 패권을 지키기 위해 살인해도 좋다는 면허증도 받았고, 독점적으로 최첨단 무기들을 제공받았고, 무엇보다 ‘남성적’ 매력이 넘쳐 눈길이 마주치면 원하는 미녀들이 목숨까지 바쳐가며 로맨스를 구성해준다. 되풀이되는 이야기들이 상투적이라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고 시대착오적이라고 그렇게 진지하게 달려들지 마시지. 이건 오락인데. 즐길 때 즐기지 못하다니, 그것 참 촌스럽네.여자는 말한다. 내 혀도 맛봉오리의 기능은 범세계적이어서, 그 화려하고 기름지고, 때로는 적절히 산뜻한 볼거리들을 탐식하곤 해. 그런데 식탁 구석에 놓인 질박한 자연식이 이따금 마음에 걸리네.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해, 그토록 처절하게 백인들과 싸워온 마오리족의 후예. 그 선조들이 지켜온 땅을 물려받았으되 그 땅은 백인의 문명에 휩쓸려버렸고, 거기 적응하는 방도는 익히지 못한 마오리들이 어떻게 자신의 땅에서 유배되는가를, 어떻게 황폐해지는가를 거칠게
질투는 그의 힘
-
대통령 후보들의 영화·문화정책을 묻는 릴레이 인터뷰를 약속대로 이번호로 종결한다. 노무현, 정몽준 후보 사이의 단일화가 이루어져, 19일의 선거에 나설 후보는 그 가운데 셋이 되었는데, 4주에 걸쳐 나간 기사의 형식과 분량은 동일하지 않았다. 그것은 인터뷰의 형식을 따른 것이었다. 서면인터뷰냐, 직접 대면한 경우냐를 기사에 반영했다. 활자로 얻은 답일 경우, 실제 만난 것처럼 분식하는 일은 피했다. 그것이 취재의 노고나 우리 매체의 ‘권위’를 과대포장하는 허위를 벗어나는 방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육성을 서면답변보다 무겁게 대했다. 추상적 의견에 육성, 그리고 존재의 무게를 합산한 결과였다.연속인터뷰의 지상중계를 마치며 둘러보니 이번 선거는 영화인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대통령선거가 되어 있다. 여당이 전국구 의석 하나쯤을 문화예술단체의 장에게 배정해주고, 상대 후보의 선거를 돕는 이들에게 불이익을 주던 문화는 이제 정말 퇴장당한 상태다. 영화인들이 운동과정의 ‘화동’, 아
대통령 후보 릴레이 인터뷰를 끝내며
-
이제는 편안해졌습니다. 지금 원하는 일이 당장 그 결과를 볼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유로워진 젊은 예술가는 진짜 무서운 낙관은 철저한 비관 위에서 피어나는 법이라는 것을 진짜 우리 눈앞에서 실연하려는가보다. 잃어버린 평등, 잃어버린 삶의 가치를 일시에 회복하고 바람직한 변화를 얻어내는 일이 단박에 실현될 수 없으므로 초조함을 버리고 자기 사회 속에서 지식인으로서의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라. 갈수록 책임이라는 말이 좋아집니다. 왜냐하면 중국에선 갈수록 이 책임감이 적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이 지아장커 감독은 아다시피 중국의 언더그라운드, 지하에서 영화를 하는 인물이다. 그가 한국에 처음 들고온 첫 장편 <소무>에는 그때까지 어느 영화에서도 본 적 없는 중국의 오늘, 화장을 지운 맨 얼굴의 현실이 있었다. 자본주의가 도입되는, 급변하는 중국사회의 변두리에서 낙오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시선이 거기 있었다. 그들의 아름다운 화면에
어느 영화감독의 자유
-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동안 <씨네21>과 그 언저리는 평균 이하의 생존조건이 강요되는 분라쿠 아니면, 인간이상- 감히 초인이라고는 말 못하겠다- 의 괴력이 발휘되는 올림푸스 산상이거나 둘 중 하나다. 현지로 내려가 매일매일 <씨네21 PIFF 2002 DAILY>를 만들어내는 기지와 제작진의 노고가 우선 제일 크다. 더구나, 데일리 마지막호 원고를 넘기는 즉시, 이 잡지의 부산발 기사를 써서 올려보내야 하는 이들이 시간과 경주하는 모습은 직접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하다. 서울, `본사`에 남아 그들의 공백을 메우는 쪽의 노동강도도 무슨 계측기로 재본 바는 없지만 만만치 않다. 밤과 싸우는 일은 다시 인쇄와 제본을 담당하는, 얼굴도 모르는 고마운 인쇄노동자들께로 전파된다.이런 와중에 <죽어도 좋아>의 두 주인공들의 표지출연이 어렵다는 소식이 왔다. <집으로..>의 할머니가 언론에 노출된 뒤 겪은 여러 어려움을 이번 주인공들께 안길 수는 없다고
권주가
-
영화제가 열리는 부산에서는 정치와 관련된 해프닝들이 심심하지 않게 벌어져왔다. 영화의 바다는 한편으로 표의 바다다. 표심 낚기가 최대 과제인 어부들이 이곳을 무시하기는 어려우리라. 그들을 어떻게 맞이하느냐를 영화제쪽은 고심해왔다. 아니, 그것보다는 이것은 순수한 영화행사이므로 무대에는 영화인들만 올라갑니다, 같은 원칙을 납득시키기 위해 고심해왔다. 어떤 행사장에 가든 내빈소개시간이 짧지 않게 배정되어 있는 게 일반적이어서, 이곳의 문화는 좀 다르다고 설득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얘기다.영화제와 정치의 사소한, 그러나 꽤 신경쓰였을 갈등은 그런 대로 진정됐거나 잠복기에 들어간 듯 보인 올해도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 예비후보들이 개막식장을 찾았다. 개막날이 지난 뒤, 다음에 아무아무 행사를 할 때 참관하겠노라고 미리 알려왔다는 예비후보도 있었다. 영화제의 주인공은 영화와 영화인, 그리고 관객이라는 관습법이 인정돼가고 있는 셈이다. 거론하는 게 새삼스럽고, 쑥스럽기는 하다. 이런 자리에는 영화
영화와 선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