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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다니던 사촌누나는 <아침이슬>을 가장 좋아했다. 아마 그에게 <아침이슬>은 연가였을 것이다. 나에게, 그리고 나와 비슷한 시기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에게 <아침이슬>은 성가였다. 많은 데모가가 있었지만, 그 노래만큼 부를 때마다 마음이 저려오는 노래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 아니 오래전부터 그 노래를 듣고 있기 불편하다. 90년대 초에 가장 싫었던 것 중의 하나가 술 마시고 헤어질 때 어깨동무하고 <아침이슬> 부르는 일이었다(요즘엔 그런 사람들이 사라진 것 같다). 우리 사는 꼴은 이미 <아침이슬>로부터 너무 많이 멀어져 있었다.잘은 모르겠지만 미국의 로커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아마 대단한 부자일 것이다. 그가 95년에 를 내놨을 때 약간 놀랐다. 초기에 노동계급의 영웅으로 불리긴 했지만, 이미 돈방석에 올라앉은 지 오래된 가수가 갑자기 초심으로 돌아가 이민 노동자의 불행한 삶은 다룬 노래를 부른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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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 보는 신문을 어깨 너머로 힐끗 보다, 오늘이 5·18이구나, 생각했다. 얼마 전 4·19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이 숫자의 조합이 상기시키는 기억과 상념의 무게는 아마 세대별로 다를 것이다. 나는 그걸 무겁게 상기하는 세대에 속하지만, 그 무거움으로부터 도피한 부류다.영화는 도피처로 적당하다. 나는 <스타워즈>가 싫지 않다. 싫기는커녕, 그런 판타지의 쾌감이 없으면 이 일이 도무지 재미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에피소드1>의 레이스 장면만으로도 나는 7천원 지불을 망설이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재미없는 건 할리우드영화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말들이다. 그런 말들은 너무 뻔하게 옳아서 재미없다.그런데 이 쾌락의 세계는 안전하지 않다. 판타지에서 다시 기억으로 결국 현실에의 회귀를 권유하며 안온한 자족적 쾌락을 뒤흔드는 것도 영화다. 켄 로치의 영화가 그랬다. 1996년, <랜드 앤 프리덤>을 봤을 때의 충격을 잊기 힘들다. 기
켄 로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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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사는 게 힘들구나. 늙었다….”이렇게 만난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사실은 좀 민망했다. 친구 상가에서 같이 운구를 했던 게 1990년쯤이니 12년 만이다.<씨네21> 평론상 당선작을 뽑고 나서 뽑힌 사람이 1962년생이라는 걸 알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이 마흔 넘어 이런 짓을 하고 있다니…. 이 사람도 속에 바람이 어지간히 많은 모양이군…. 그런데, 이름이 낯익었다. 설마 했다. 사실은 내가 아는 친구와 동일 인물일 거라는 예감이 곧바로 들었으나, 그렇지 않길 바랐다. 그런 예감이 든 이유도 그게 아니길 바란 이유도 잘 모르겠다.그 친구와 나는 딱히 친한 편은 아니었다. 그저 같은 시대에 같은 학교를 다니고 비슷한 고민을 했던 터라, 강의실에서보다는 술집에서 거리에서 좀더 자주 마주쳤고, 난 사람 좋아보이는 잔주름 많은 그의 얼굴과 처진 눈과 느린 말투를 기억하고 있었다. 살다보면, 느리게 천천히 다가와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다. 대개 목소리
5월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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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마시다가 남동철과 논쟁을 벌였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와 <아이언 팜>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간 뜨악하지게 느껴지실지 모르지만 간략하게 중계하자면 이렇다.남:<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최근의 멜로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 만듦새도 좋고, 무엇보다 캐릭터가 참신하다. 윤리적 금기 뿐만 아니라, 전통적 여성성으로부터 이만큼 자유로운 여성 캐릭터를 최근 몇년간의 멜로에서 보지 못했다. <아이언 팜>은 너무 허술하고 진부하다.허:<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만듦새가 좋은 건 동의한다. 상대적으로 <아이언 팜>이 허술해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이언 팜>을 지지한다. <아이언 팜>이 훨씬 영화적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영화적이지 않으면, TV드라마의 대체재로 전락한다. 영화적이려면 스크린 사이즈에 대한 자의식이 있든가, 아니면 영화사와 어떤 방식으로든 소통해야 한다. <
취중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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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라는 직함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어떤 선배가 “기자는 잘한다고 치켜세워주면 저 죽는 줄 모르고 뛰는 놈들”이라고 말한 기억이 난다. 내가 보기에 한국영화인들이야말로 그런 사람들이다. 도저히 불가능해보이는 고지를 그들은 의지와 뚝심으로 돌파해버렸다. 냉정한 사람이라면 해선 안될 일을 저질렀고, 그래서 성공했다. 20억 남짓한 돈으로 잠수함영화를 만들거나 대규모 시가지 총격전을 찍는 영화인들은 한국 밖엔 없었다. 그러느라 정두홍 무술감독 같은 사람은 몸에 볼트를 12개씩 끼우게 됐다. <씨네21>에서 강우석 감독을 ‘과욕의 승부사’로 부른 적이 있는데, 따지고보면 많은 그 호칭은 많은 한국영화인들이 나누어 가져야 맞다. 그 과욕이야말로 지난 7년간 한국영화가 이룬 경이적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문제는 그 과욕의 목표가 돈과 힘만이 아니라는 데 있다.창간 7주년 기념호라서 올해도 변함없이 한국영화산업을 움직이는 파워 50을 선정했다. 개인적으로 이 순위 작성에서 늘 흥미로
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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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기자 혹은 영화기자가 되는 방법을 우리 인터넷사이트나, 독자엽서, 혹은 개인 전자우편으로 물어오는 독자들이 꽤 많다.(<씨네21> 편집장이 되는 방법을 물어온 특이한 사람도 있었다.) 그런 때는 대개 이런 정보를 알려드린다.시험의 평가기준은 첫째, 글솜씨. 둘째, 평론가 수준은 아니라도 일반 관객보다는 높은 영화 지식. 셋째, 중급수준 이상의 영어 독해력. 그리고 모집주기는 평균 1년반 정도만에 한번이지만 결원이 생길 경우에 모집하므로 시기가 일정하진 않음. 전공은 묻지 않음.그렇게만 말하고 나면 어딘지 허전해진다. 뭔가 더 필요하고 중요한 게 있는데 그걸 말하지 않았다는 느낌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서라도 뭔가 보충설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편의상 여기서 영화기자는 영화잡지 기자를 말한다. 일간지의 영화기자는 신문기자로 들어간 뒤에 발령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되는 길도 가는 길도 좀 다르다)솔직히 말하면, 영화평론가가 되겠다는 후배들을 보면
영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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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앞에 김밥마을이란 분식집이 있었다. 8명이 들어가면 꽉 차는 아주 작은 집이었다. 나이 예순쯤 되는 주인 아줌마가 아침 일찍 나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큰 찜통에 멸치와 무, 파 등등을 넣어 그날 쓸 멸치국물을 끓이는 일이었다. 빈속에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어김없이 구수한 냄새로 허기를 자극하는 그 국물이 서울 최고의 국물이라고 나는 아직도 믿고 있다. 그 국물로 만든 2800원짜리 잔치국수는 진정 장인의 작품이었다. 김밥마을은 대안의 식당이었다.한달 전쯤 김밥마을이 사라졌다. 망한 게 아니라 그 옆에 네배쯤 되는 큰 식당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간판도 시골나라로 바뀌었다. 나는 그 집에 잘 가지 않는다. 아줌마는 더이상 그 국물을 만들지 않는다. 대신 아구찜, 닭도리탕, 돌솥밥 같은 ‘복잡한’ 음식을 만드는 데 몰두하고 있다. 딱히 맛이 없다고 할 순 없지만, 그건 다른 곳에서도 먹을 수 있다. 김밥마을 시절의 그 국물이 돌아오지 않는 한 나는 앞으로도 그 집에 잘 안 가
국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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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비평으로 묶여지는 글들의 대부분은 영화 자체보다는 영화가 불러일으킨 심리적 파장에 대해서 주로 말한다. 다시 말하면, 많은 영화비평은 대개 영화의 구조가 아니라, 영화의 효과를 말한다. 오로지 효과만을 말할 때, 그런 비평은 한때 인상비평으로 불렸다.그런 비평이 좋은 비평이 안 되라는 법은 없다. 인상비평이란 말은 한동안 감성적이고 주관적인 낡은 비평방식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됐지만, 여전히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독자에게,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 내가 느꼈던 것을 어떻게 이렇게 잘 집어내 정확하게 표현했을까, 하는 즐거움을 주는 글은 좋은 비평이다. 따지고보면 감상도 비평도 결국 영화와의 대화이며 궁극적으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그러나 결국 구조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영화들이 있다. 홍상수의 영화가 그런 영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많은 대중영화들의 구조는 일정한 규칙과 관습에 따라 만들어지며, 비평이 그걸 매번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홍상수의 영화는
구조와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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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지를 들추다가 이인제씨가 god 공연장을 찾아 마이크를 잡고 “god가 세계를 제패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는 기사에 눈이 멈췄다. 그 기사의 제목은 ‘연예인을 공략하라’였다.기분이 나빴다. 뒤이은 내용 때문에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이인제 고문의 god 콘서트장 방문에 가장 놀란 곳은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 진영이었다. god는 이 총재가 젊은 세대에게 다가가기 위해 ‘찜’해 놓았던 연예인이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많은 배우, 가수, 개그맨의 이름과 이른바 대권후보 정치인들의 줄잇기로 채워져 있었다.과문한 탓인지 모르나 나는 이인제씨나 이회창씨가 평소 대중문화에 관심을 갖고 특정한 기호나 소신을 밝혔다는 소식을 한번도 접한 적이 없다. 국회에서 <친구> 폭력성 시비가 일었을 때, 혹은 이재수의 ‘컴배콤’ 논란이 터졌을 때 대권후보들이 어떤 소신을 밝혔다는 소식을 접한 적도 없다. 그런데 이 무슨 수작들인가.나는 대중문화를 알고 그것에 매혹된 정치인이 멋지다고 생각한다
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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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린다. 정신사납다. 다 까먹었다.’이번주에 개봉하는 <촉산전>에 대한 영화평론가 박평식씨의 20자 평이다. <씨네21> 기자 가운데 다수도 비슷한 의견이다. 그런데 그런 영화를 이렇게 대문짝만하게 소개하다니, 라고 의아해하실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영화세상에는 이구동성 혹은 만장일치의 호평 또는 혹평을 받는 영화도 있고, 찬반이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영화도 있다. 당연하게도, 후자에 속하는 영화들이 훨씬 흥미롭다. 발견의 기쁨을 선사하는 영화들은 바로 장점을 자기 속에 깊이 감추고 있어 쉽게 눈에 띠지 않는 영화들이기 때문이다.<촉산전>을 보고난 날 밤 김봉석과 나는 서로 입에 거품을 물고 찬사를 주고 받았다. 우리 둘을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던 터라 우리는 더욱 신이 났다. 영화에 대해 말하고 써서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이런 순간의 쾌감은 그것이 아무리 얄팍한 것이라고 해도 포기하기 힘들다.우리의 판단이 과연 절대적으로 옳은가. 그
어떤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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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부터 ‘이창’을 쓰기 시작한 조선희 전편집장이 항의문을 보내왔다. 16군데를 고치다니, 왜 그랬는가. 왜 ‘쥐도 개도’를 ‘개나 소나’로 고쳤는가. 그런 내용이었다. 구두점 하나도 이리 찍어보고 저리 찍어보면서 제자리를 찾아주려고 고심하는 글쟁이에게 그건 너무 정당한 항변이었다. 첫 장편을 아직 출간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제 소설가다.우리 인터넷 사이트에 <씨네21>에 실린 글 중에 어법이 맞지 않는 대목을 골라 지적한 글이 몇편 올랐다. 한사람이 썼는데, 틀린 지적이 없다. 아마 그도 소설가일지 모른다.이번호 특집 거리 <복수는 나의 것>을 만든 그리고 <공동경비구역 JSA>를 만든 박찬욱 감독은 감독이기 이전에 글쟁이였고 예리한 평론가였다. 그의 저서 <비디오드롬…>은 1990년대 초반 영화광들이 탐독한 책이었다. 지금은 감독만 한다. 박찬욱, 김지운, 민규동, 장진 감독은 글로 먹고 사는 왠만한 사람들보다 글을 더 잘 쓴다. 실제로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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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6년전쯤 공중파 TV로 <우묵배미의 사랑>을 다시 보다가 혼자서 한참 씩씩거렸다. 이번주 ‘내 인생의 영화’로 이 작품을 고른 김해곤씨만큼 열렬하지 않을진 몰라도, <우묵배미의 사랑>은 내 20대의 마지막 구비에서 오랜 술친구처럼 찾아와 마른 지푸라기같던 마음을 어루만져준 속깊은 영화였다.지금도 배일도와 민공례의 못나고 궁상맞은 기차여행을 떠올리면, 그 시절, 너무 젊어 피하지 못한 상처와 조로한 비겁이 놓아버린 소망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잠시 청승을 떨게 된다. 멀리 떠나와 여관방에서 공례와 처음 살을 맞댄 배일도가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은 특히 잊을 수가 없다. 정사장면이 그렇게 슬플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고, 그 뒤론 어떤 영화의 정사장면에서도 그런 절절함을 느끼지 못했다.문제는 TV에서 방영한 <우묵배미의 사랑>엔 그 정사 장면이 삭제돼 있다는 것이었다. 너무 어처구니 없고 분통 터져서 처음엔 허, 허, 하는 소리만 새나왔다. 그 장면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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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지난 얘기지만 지난 2월22일에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가 종영했다. 마지막회는 박정수가 암에 걸려 가족들이 모두 슬픔에 빠져있다 결국 박정수의 죽음으로 끝맺는다.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약간 밝은 후일담이 덧붙긴 하지만 시트콤 마지막회에서 중심인물이 갑자기 죽는다는 건 상식 밖이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PD를 빼고는 이런 결말을 모두 반대했다고 한다.마지막회가 방영된 건 금요일 밤 9시반. 보통은 마감하느라 모두 정신이 빠져있을 시간이다. 그런데 이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약속한듯 하나둘씩 TV 앞으로 몰려들었다. 고백하자면, 나를 포함한 <씨네21> 식구들은 김병욱 PD의 팬이다. 우리는 <순풍산부인과>를 사랑했다. 지금은 퇴사해 TV평을 쓰는 구둘래는 <순풍…>이 인생의 유일한 낙이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그랬다. 500회 때는 <순풍…> 특집도 마련했다.(TV 프로그램 하나로 특집을 꾸민 건 이때가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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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보면서, 처음엔 신났고 나중엔 찜찜했다. 신난 것도 찜찜한 것도 작품성과는 관계없다. 처음 1시간여 가량은 오우삼 영화 같아서 신났다. 첩혈쌍웅으로 통칭되는 멋진 두 남자의 의리와 개폼은 아직도 마음 설레게 한다. 지상의 계율이 적으로 갈라놓았으나 형제의 영혼을 지닌 사내들의 비감한 운명적 조우. 유치하다고 몇번인가 비난을 들었지만 그 유치한 기호에서 벗어난다는 게 무지 힘든 일이라는 걸 의 멋진 전반부가 깨닫게 해주었다. 취조실의 장동건 앞에 앉은 나카무라가 “이름은?”하고 물을 때 아득한 슬픔과 분노에 젖은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비춰주는 장면에선 “야, 죽인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그게 멋있는 건 지상의 율법으로부터 그들의 영혼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는 그렇게 시작했지만, 결국 배신한다. 배타적 민족주의, 그 단순한 세속적 정치학으로 돌아간다. 그게 싫었다. 멋있으려면 끝까지 멋있어야 한다. 그런 영혼은 지상의 질서에 포섭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멋있다. 지상의 어떤 이
민족,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