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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난 영화를 두편 보았다. ‘잘 만들었다’가 아니라 ‘재미있다’는 느낌은 다분히 주관적일 터인데, 재미는 취향의 코드와 관련되어 있는 까닭이다.<라이어>는 성공적인 배우 앙상블 영화로 기억됨직하다. 어떤 영화라고 배우들 사이의 조화가 없을까마는 원작인 연극이 갖고 있는 성격, 그러니까 연출의 치열한 작업을 거쳐 일단 무대에 오른 뒤에는 배우 중심의 호흡과 조율로 전체를 끌어가는 연극성이 <라이어> 안에 잘 살아나 있다. 평소 반복적으로 보여온 이미지를 정통 코미디 감각으로 재활용한 손현주, 공형진씨를 비롯해서 새로운 느낌을 선보인 주진모씨가 이 영화를 감칠맛 나는 시트콤이 되도록 주도한다. 연극성을 살려낸다는 것이 무대 앞에 카메라 뻗쳐놓고 기다린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임을 생각한다면 연기 리듬과 커팅, 정서적 효과음으로서의 음악을 팽팽하게 유지시킨 김경형 감독의 영화적 연출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구로사와 기요시의 <밝은 미래>에 관해서는 아마
소년과 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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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어째서 신기한 물건인고 하면, 2차원의 평면 위에 3차원인 척하는 이미지가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가능해진 것은 카메라니 영사기니 하는 특정한 기계 장치가 발명된 덕분이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움직이는 이미지를 붙잡아서 놀아보려는 인간의 유희적 소망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살았던 조선의 화가들은 그림 안에 움직임을 표현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긍재 김득신은 마루에서 담배를 태우던 남자가 말썽꾸러기 고양이를 뒤쫓느라 탕건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맨발로 우당탕탕 마루를 내려서는 순간을 포착했다. 단원 김홍도는 음률에 맞추어 춤추는 무동의 옷자락 속에, 혹은 기와를 얹느라 하늘로 던져올린 물체의 하강 속에 순간성을 기록했다. 혜원 신윤복의 경우 유곽 앞에서 힘자랑하는 왈패들의 싸움 뒤끝이나, 밤길에 남몰래 만난 연인들의 밀회장면, 악공의 연주에 맞추어 칼춤 추는 무희 등 육체의 움직임과 감정의 한순간을 특히 많이 그렸다.같은 시기의 다산
춤,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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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봄인가요? 아, 봄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영화사 봄을 찾는 이성욱 기자의 통화 내용을 들은 정한석 기자가 하하 웃으며 “계절에게 묻는 것 같았어요, 선배”라고 여담을 건넨다. 문득 걷고 싶어진다.회사 근처에 있는 효창공원은 멀리서 볼 때 아직 가라앉은 갈색이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야트막한 관목들의 머리꼭지에 맑은 초록빛이 올라앉아 있다. 여린 싹은 내게 전혀 다른 감정들을 차례로 불러일으킨다. 처음엔 환하게 반갑다. 그리곤 안쓰럽다. 마침내 무섭다.오래전, 집 마당에 호박씨를 심었던 적이 있다. 호박죽 끓여먹는다고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도록 다듬다 보니 거기서 나온 씨마저도 의미가 있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몇 센티미터 간격으로 한 구멍에 서너개씩, 요령부득으로 씨앗을 밀어넣고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었다. 마침내 싹이 돋아 올랐다. 어느 씨앗도 실패하지 않고 한 구멍에서 여러 개의 싹들이 하늘을 향해 그 작은 두팔을 힘차게 벌리고 있었다. 너무 많은 호박이 열린 나머지
봄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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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떠나왔다. 약속한 일 독촉하러 전화했던 말수 적으신 학교 선배, 몸이 비상신호를 보내와서 1년 만에 휴가 갖는 거라는 변명 듣더니 “그런 식으로 일한다고 누가 상 주나” 하신다. “그러게요.” “상 받은들 뭐 할 거라고.” “그러게요.” 일을 한주 연기해놨다는 전화를 다음날 받았다.하루 반에 걸쳐 도착한 강릉. 피로를 이기지 못해 도중에 1박을 한 때문이지만 여행을 꼼꼼하게 계획하지 않고 즉흥성을 즐기는 탓이 더 크다. 인적 드문 바다, 늦은 오후의 호숫가, 선교장의 뒷산 솔숲을 걸어다니며 회복의 느낌, 장소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갖다. 다음날 다시 찾은 선교장. 세종 임금의 형이었던 효녕대군의 후손이 중종대, <대장금>의 바로 그 시절부터 세거하던 대저택. 날씨가 쌀쌀해선지 오후부터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다. 사람이 살고 있는 한옥. 이 집이 매혹적인 한 이유다. 비는 오지 않았다. 서울발 일기예보에서는 동쪽에서도 비가 내릴 거라고 했다. 중앙에서 뿌려대는 지
외면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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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에 조선시대 최고의 왕따는 허균이 아닐까 싶다.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저자라는 것밖에 모르던 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여행 중에 마주친 시비(詩碑)를 통해 그가 교산(蛟山), 그러니까 이무기 교자가 들어간 호를 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였다. 역적으로 처형되었으며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복권되지 않은 유일한 지식인·정치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그에 대한 관심이 몹시 치솟았다. 스스로 용이 못 된 이무기를 자처했고, 왕조 내내 용서할 수 없었던 대역죄인의 정체란 도대체 무엇일까.허균은 15∼16세기에 걸쳐 선조와 광해군대를 살았고 고려시대 이래 대대로 문장가를 배출한 집안의 후예였다. 아버지와 두 형, 그리고 누이 난설헌까지 아울러 오문장가라고 불렸으며 임진왜란 전후의 어려운 국제정세 속에서 대중국 외교사절단에 단골로 끼었다. 그때마다 책을 수천권씩 사들였다. 고도의 중앙집권적 지식국가에서 정치적 출세의 핵심 요소를 두루 갖춘 허균은, 그러나 소
왕따 이야기 두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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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말해서 나는 모범생의 인생을 살았다. 모범생이 가질 법한 콤플렉스 혹은 자존심 때문에 아웃사이더에 대한 관심과 호감도 제법 표했지만, 그것마저도 범생이스러운 관용의 일부였을 것이다. 모범이라는 가치관은 지루하고 억압적이므로, 그런 유의 기웃거림은 일종의 얌전한 일탈로서 내 심신을 부분적으로 해방시켜주는 기능도 했을 것이다. 토끼가 목 축이고 간다는 산속 옹달샘처럼.그런데 내가 이 세상 왕따 중의 왕따들과 한편이 되는 순간이 있었다. 예전에 본의 아니게 어딘가에서 지내다 나온 적이 있는데,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관계가 거기에서 펼쳐졌다. 아침저녁으로 포승에 묶여 조사받으러 다니는 동안, 유치장을 제집 드나들 듯하는 한 청년은 화장지로 만든 한 다발의 꽃을 선물해주었고, “아이고, 이 생기다 만 사람 좀 보게. 한여름에 털옷이 웬 말이야” 하면서 저녁이면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고 아침이면 머리를 땋아주던 사람은 소매치기 대장 아줌마였다. 얼굴도 모르는 어떤 이는 운동 중에
왕따에 대한 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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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화를 통해 세상 보는 눈을 정해나가는 경우가 꽤 있다. 사형제도에 대한 견해도 그중 하나였는데 중학교 때 TV 주말의 명화를 본 날, 주인공이 살인을 저질렀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인간의 심판으로 다시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것이 엄청나게 충격적인 일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어찌나 울었는지 뱃살이 아파서 숨을 못 쉴 지경이었다.한참 세월이 지난 뒤 <데드 맨 워킹>이란 영화를 극장에서 보았다. 그 당시 내가 좋아하던 사람들이 감독과 주연을 한데다 주제가 살인제도에 관한 것이었으므로 표 끊고 들어갈 때의 기분은 약간 흥분상태였다. 드디어 저 파렴치한 살인범을 죽이느냐 마느냐, 드라마의 극적 긴장감이 핵심에 육박해가는 순간이 왔다. 아뿔싸, 삐리리∼ 울리는 휴대전화 소리! ‘저 전화기의 주인은 지금 얼마나 미안해할까’ 생각하는 순간, “여보세요”라니? 김이 팍 샜지만 숀 펜의 연기력은 다시 한번 나를 영화에 몰입하도록 도와주었다. 마침내 그가 사형집행 호출을 받고
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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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탤런트 이승연씨의 곤욕이 크다. 누드 상품을 만들면서 일제 종군위안부 컨셉을 차용하는 바람에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는 것이다. “연예인 생명은 끝장”이라는 말이 점잖은 언론에서도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으니 사고를 크게 치긴 친 모양이다. 일부 여성 연예인들이 승부수로 구사하는 누드 동영상은 육체를 엿보게 해주고 돈을 버는 오래된 책략이라는 측면과, 젊은 육체의 화사한 매력을 주저없이 내보이며 가볍게 향유하는 새로운 시대의 덕을 이중으로 보는 아이템이다. 거기에 누군가가 이런 머리를 보탰을 것이다. 대박 나는 영화를 보면 민족의 아픔을 이야기하잖아? 벗은 몸과 민족이라. 위안부가 딱이네. 역사의식이 가미된 엔터테인먼트!그런데 이 대목이 패착이다. <태극기 휘날리며>와 <실미도>가 전쟁과 분단 후유증, 부도덕한 군사정권 등 한국 현대사의 깊은 상처들을 건드리며 집단적인 해원을 유도하고 있긴 하나, 매우 영리하게 계산된 눈높이와 감성 코드를 유지하고 있다. 종군위
헛다리 짚은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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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영화계 풍경은 한 극장에서 대여섯개씩 스크린을 잡고 있는 <태극기 휘날리며> 때문에 입이 귀에 걸린 사람과 눈꼬리가 귀에 닿는 사람으로 나뉜다. 자잘하고 사랑스런 영화들은 태풍 <실미도>를 피해 2월이면 극장에 나서볼까 했다가 핵폭풍을 또 만나 한없이 표류하는 중이다. 봄기운이나 들어야 이들에게도 햇살이 들려나. 이런 판국을 보며 블록버스터는 나쁘다고 하자니 우습고 시장 논리니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단순하다. 하나마나한 모범답안으로 체면치레하자면, 우리는 지금 영화산업의 제2차 폭발기를 맞아 새로운 문제에 직면한 것이고 문제가 생겼으니 답을 찾아야 하고 답은 목마른 자가 우물 파는 심정으로 달려들고 옆에서 거들어야 한다.나는 요즘 우물을 파는 대신 틈만 나면 등짝을 바닥에 붙인 채 눈만 가자미처럼 옆으로 돌리고 누워 텔레비전을 보는 중이다. 그랬더니 재미있었다. <대장금>만 잘 만드는 게 아니라 몇몇 드라마, 오락, 다큐멘터리에 이르기까지
<귀여운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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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가인 고 이영일 선생은 한국전쟁, 우리 식으로 말해서 6·25사변이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말한 바 있다. 지표면의 모든 것이 깡그리 무너져서 새롭게 세워져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상상해본 이미지는 정말 놀랄 만했다.<태극기 휘날리며>를 보고 나서 선생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그때 무너진 “지표면의 모든 것”이란 산야와 도시와 건축물만이 아니었다. 우리 몸의 피와 살, 인간 정신을 유지시키는 정서와 믿음 체계, 삶의 기반으로서의 가족, 대의명분으로서의 국가 윤리, 이 모든 실존의 기반이 산산이 흩어졌던 듯하다. 한국의 근대는 혹시 전쟁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두려움과 증오, 죄의식과 그리움으로 뒤범벅된 남한과 북한의 괴물스러운 집단의식에 마음을 열고 접근할 수 있는 심리적인 기반을 영화로부터 선물받은 느낌이다.남동철 기자의 지적대로 <태극기 휘날리며>는 스펙터클과 가족멜로라는 장치를 대담하고 효과적으로 구사하면서 시
<태극기 휘날리며>의 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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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부쩍 눈에 띄게 늘어난 <씨네21>의 업무 중의 하나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찾아오는 출판계 인사를 만나는 일이다. 그들의 용무는 대부분 같다. 자국에서 인기있는 한류 스타의 사진과 기사를 제공해줄 수 있겠냐는 것이다.오늘 방문한 일본 손님들은 한국에서도 아직 개봉하지 않은 <태극기 휘날리며>의 장동건씨를 취재하러 왔다며, 일부 스타들의 경우 표지에 이름만 나와도 책이 팔리는 형편이라고 전했다. 개봉예정인 영화 목록에는 아직 우리 극장에 걸려 있는 작품도 눈에 띄었다. 이들은 방문 목적을 잊은 채 <오아시스>의 첫 장면에서 설경구씨가 두부를 먹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한국에서 나오는 영화는 무조건 사려고 하는 일본 영화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한국 문화를 제대로 반영하는 자막 번역을 해야 할 텐데 걱정이라는 등의 질문과 탄식을 쏟아놓았다. 영화가 국경을 넘을 때는 차이와 오인이 발생하는 법이니 일본 관객의 자유로운 이해에 맡겨두면 되지 않겠냐고
들끓는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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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년의 한국영화를 이리저리 가로질러보면 몇 가지 흥미로운 경향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지역성(locality)을 적극적으로 사유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사투리에 부여된 전형화된 이미지를 끌어다쓰는 예는 오래전부터 있어왔지만, 최근에는 특정 언어와 인물의 기질적인 특성을 단단히 결합시킴으로써 문화의 지역성 자체를 영화의 핵심으로 끌어올리는 방식이 두드러진다. 지역성이 곧 캐릭터인 셈이다.영화 <친구>가 잭팟을 터뜨리는 데에 한몫 단단히 했던 지역성은 <똥개> <황산벌>에서도 자의식적으로 추구되었다. 이만큼 선명하진 않을지라도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인사동 문화, 과 강남 아파트촌의 관계가 내게는 매우 의미있는 코드로 다가온다.우연하게도 서울의 남북을 각각 내세운 영화가 연달아 개봉한다. <말죽거리 잔혹사>가 강남 영화라면 <안녕! 유에프오>는 강북 영화라고 부를 만하다. 전자는 대한민국 수도서울 하고도 노른자위인 강남의
지역성의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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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영화계에서 제일 뜬 용어를 하나 꼽으라면 단연 ‘웰 메이드’일 것이다. 이를테면 <실미도>가 개봉영화 사상 최단기간에 관객 400만명을 돌파한 것은 웰 메이드 영화의 승리이며, 지난해 한국영화가 역사상 처음으로 국적별 관객동원 1위에 올라서면서 전체 영화산업이 흑자를 회복한 것 역시 <살인의 추억> <장화, 홍련>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황산벌> <올드보이> 같은 웰 메이드 영화에 대한 관객의 폭발적인 호응 때문이라는 등의 분석 기사가 많다.이에 따라 웰 메이드는 2004년 한국영화의 주요 흐름을 예측하는 키워드로 부상했다. 몇년째 고만고만한 코미디물이 장악했던 한국영화의 방향 전체를 바꾼 웰 메이드 영화의 추세가 올해 어떻게 이어지느냐가 영화계의 가장 큰 관심사라는 소식에 이어 영화인들은 올해 라인업을 죽 훑어보며 자신있어 한다는 반응도 첨부되어 있다.웰 메이드는 또한 블록버스터라는 문제적인 용어를 대체하고
¨웰 메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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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칼럼니스트인 김형태, 박민규 두분의 이름 옆에는 무규칙이종예술가 혹은 무규칙이종소설가라는 호칭이 적혀 있다. 특정 장르에 대한 기존의 규칙이나 고정관념에 구애받지 않고 서로 다른 종류의 문화예술 분야를 자유롭게 오가는 사람이라는 자기 호명일 것으로 짐작된다.지난 연말 그 무규칙이종예술가들이 주최하는 송년 모임에 참석했다. 해금과 색소폰, 기타가 즉석에서 어울린 모던한 연주가 참석자들의 환호성을 자아냈는데 여기서 기타리스트는 <씨네21>에 칼럼을 쓰면서 그림도 직접 그리는 김형태씨다. 이처럼 다양한 형태로 자신을 표현하고 즐기는 능력은 단지 몇몇 특출한 예술가들에 국한되기보다는 지금 이곳의 젊고 진취적인 세대 사이에 벌어지는 문화현상의 본질에 가깝다고 느낀다.영화계에서도 이런 현상을 지목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를 들면 이광모 감독은 최근 “<씨네21>이 드디어 시선을 다른 문화에도 적극 돌리는군요. 사실은 영화가 별것 아니잖아요?”라고 말한
무규칙이종예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