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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가 별로 없다고? 그럼 우리가 관계를 맺어주지 뭐?” 매주 열리는 <씨네21> 기획회의에서 내가 자주 뱉는 말이다. 별 관계가 없어 보이는 사람이나 사건이라도 관점만 제대로 잡으면 굴비 엮듯 엮어서 흥미로운 기획기사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번번이 이런 식이다보니 “관계를 맺어주자”는 말만 나오면 기자들 낯빛이 변한다. “어이구, 저 인간, 또 저런다 또!” 하는 표정이다. 조니 뎁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한 묶음으로 특집을 만들자는 얘기도 그러다 시작됐다. 하지만 이번 경우가 뜬금없는 한 묶음이 아니란 걸 독자 여러분도 금방 눈치챌 것이다. 두 배우가 함께 나왔던 1993년작 <길버트 그레이프>를 봤다면 틀림없이.
<길버트 그레이프>는 내가 시사회라는 걸 처음 경험한 영화였다. 막 제대를 하고 백수였던 1994년 봄, 어디서 시간을 때우나 배회하다가 동숭씨네마텍 개관 기념 시사회에 떠밀리듯 들어갔다. 아직 조니 뎁과 레오나르도
[편집장이 독자에게] 조니 뎁과 디카프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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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좀 그만 들어라, 너 딴따라 될래?” 남보다 철이 늦게 들었던 10대 시절의 나는 아버지가 이렇게 말할 때 한마디 반항도 하지 않았다. 그땐 잘 몰랐지만 딴따라가 된다, 는 건 인생 종친다는 말로 들렸고, 무서웠다. 대입 시험을 치른 다음날 그동안 모은 돈으로 오디오를 샀고 몇주간 몇장 안 되는 레코드판을 바늘이 닳도록 들으면서 ‘이러다 진짜 딴따라 되는 건가?’ 걱정하기도 했다(그때 나는 착한 청소년이었다). 외국에선 다들 아티스트라고 부른다는데 우리나라에선 왜 딴따라라고 부르는 건지, 그 단어가 주는 묘한 뉘앙스가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딴따라가 될 만한 재능도 열정도 없었으니 바보 같은 망상이었지만 그때는 그랬다. 딴따라는 (적어도 내겐) 저주받은 단어였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딴따라는 ‘연예인을 얕잡아 부르는 말’이라고 적혀 있다. 아직 유교 전통이 건재한 이 나라에서 연예인을 천민 취급했다는 뜻일 것이다. 전통을 숭상하는 우리 민족은 참으로 자랑
[편집장이 독자에게] 딴따라, 연예인을 바라보는 또다른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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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대해 “미국영화의 기적”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무법자> 시리즈와 <더티 하리> 시리즈로 유명한 젊은 날의 액션스타가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감독이 됐으니, 이런 표현도 무리가 아니다. 2003년 <미스틱 리버>를 보고 난 이스트우드가 생애 최고의 영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선악의 싸움과 인간의 운명을 종횡으로 엮은 이 영화는 우리의 평화와 안녕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인지 절감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이스트우드의 최고작이 무엇이냐는 건 사람마다 다른 답을 내놓겠지만 아무튼 <미스틱 리버>가 최고라는 내 판단은 빗나갔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막 보고나오며 그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다시 한번 걸작을 만들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늙은 복싱트레이너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여자 복싱선수 힐러리 스왱크가 나누는 교감을 따라가는 영화다. 이스트우드의 다른 영화들처럼
[편집장이 독자에게] 클린트 이스트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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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네 생각이 나서 편지를 쓴다. 요즘 많이 힘들다는 얘기 들었어. 회사에서 당분간 나오지 말라고 했다며. 딸린 식구도 많은 너한테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을 거 같아. 동료들이 항의시위까지 했다던데 그분들도 충격이 클 거야. 아무쪼록 잘돼야 할 텐데 지금 상황으로 봐선 쉽게 낙관하기도 힘들구나. 아예 책상을 뺀다는 소문도 들리니 말이야. 정말 맘이 많이 상했을 거 같아. 더군다나 그게 <겨울연가>란 녀석 때문이니 오죽 하겠니. 그 친구가 회사에 돈을 많이 벌어주긴 했어도 네 자리를 차고 들어올 만한 실력은 없잖아. 지나가는 사람 열을 잡고 물어봐도 네가 <겨울연가>보다 낫다고 말할 거야. 그러니 너무 낙심하지마. 널 좋아하는 사람은 아직 많이 있다구.
하긴 요즘 40대 직장인만 되어도 언제 잘릴지 몰라 조마조마하다잖아. 네가 이렇게 찬밥 신세가 됐다니 가슴이 아프지만 세상이 그렇게 변했다는 생각도 들더구나. 우리 어렸을 때는 영화 보려면 언제나 널 찾았
[편집장이 독자에게] <토요명화>에게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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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지조있는 분이시다. 홍건표 부천시장은 유명 배우, 감독을 비롯해 각종 영화단체의 반발에 꿈쩍도 안 했다. 조직위원장으로서 자신의 결정에 책임을 지겠다는 저 자세, 눈칫밥로 살아온 철새 정치인이라면 감히 못할 일이다. 수도 이전에 동의했다 슬그머니 말을 바꾼 한나라당이나 국가보안법 연내 폐지를 약속했다 은근슬쩍 뒤로 물러선 열린우리당과 차원이 다른, 소신 정치인이라 할 만하다. 덕분에 설마 이렇게 반대하는데 해촉하겠어, 했던 나는 한동안 정신이 멍했다. 와, 정말 센데, 오랜만에 그런 느낌을 받았다.
솔직히 이 정도로 강경한 태도라면 김홍준 집행위원장과 적지않은 마찰이 있었겠구나 싶다. 부천영화제에서 김홍준 위원장이 부천시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본 경험이 여러 번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부천시 유지 몇분이 가족을 데리고 영화를 보러왔다. 좌석이 매진이라 줄을 서야 했는데 그분들은 안내를 담당한 자원봉사자들에게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러느냐며 화를 냈다. 영화제에 적지않은 돈
[편집장이 독자에게] 부천이 어쩌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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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호를 만들고 있는 지금은, 아직 2004년이다. 신년에 어울리는 여러 가지 기획기사를 준비했지만 새해를 실감하긴 이르다. 그러다보니 기사를 쓰면서 번번이 실수가 나온다. 2003년을 ‘지난해’로, 2004년을 ‘올해’로, 2005년을 ‘내년’으로 써놓는 식이다. 의식과 달리 몸이 새로운 시간에 적응 못한 탓이리라. 오늘과 내일을 구분하는 것과 달리 새로운 1년을 받아들이는 데는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 내 손에 완성된 신년호가 쥐어지면 그제야 2004년이 끝났다는 걸 실감하겠지 싶다.
영화주간지 기자로 10년을 지내다보니 끝과 시작을 느끼는 방식도 기사 마감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1년의 무게가 50권 무게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지난 50권의 잡지가 1년 삶의 궤적이고 이제 한주 한주 새로운 50권을 만들어갈 일이 남았다.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지루하지만 이런 생활패턴이 주는 중독성 즐거움도 있다. 무엇보다 노동의 결과가 눈앞에 보인다는 점인데 특히 지난 한해를
[편집장이 독자에게] 가늘고 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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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들이 불우한 분들을 위해 기부를 하는 캠페인을 하면 어떨까요?” 회사 사업팀에서 이런 말이 나왔을 때 솔직한 나의 첫 느낌은 “글쎄, 그게 잘될까”였다. 좋은 일 하자는 얘기건만 무조건 반색을 하지 못한 건 내 몸에 뿌리깊은 어떤 회의주의 때문이었으리라. 자선행사에 적극 나서 본 적 없는 나로선 어딘지 어색하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었다. 영화하는 사람들은 영화만 잘 만들면 되고, 잡지 만드는 사람들은 잡지만 잘 만들면 된다는 귀차니스트의 신조에도 왠지 어울리지 않는 짓 같았다. 더군다나 이런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한다는 건 괜한 생색내기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대 시절엔 누구나 그렇겠지만 “세상을 바꾸겠다”는 이상주의가 있었다. 나처럼 8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인 경우엔 그게 의식화의 핵심사항이기도 했다. 기억에 남는 일 가운데 하나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둘러싼 토론이었다. 선배들은 정치투쟁을 역설했고 자선이나 봉사활동을
‘아름다운 영화인’ 캠페인을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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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나온 단편영화 가운데 상복이 터졌던 작품으로 이경미 감독의 <잘돼가? 무엇이든>이 있다. 여성영화제,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 미쟝센단편영화제 등에서 상을 받았다. 대체 어떤 영화이기에 상을 휩쓸었나 싶어 서울독립영화제를 찾았다. 보고나니, 여러분도 기회가 되면 꼭 보시라, 권하고 싶어졌다.
<잘돼가? 무엇이든>은 회사 경리 일을 하는 두 여자, 지영과 희진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입사 4개월째인 지영은 먼저 입사한 나이어린 동료 희진이 못마땅하다. 지영이 보기에 희진은 대체 생각이라곤 없는 아이처럼 보인다. 그럴 만도 한 게 희진은 사장이 자신을 신뢰한다는 게 자랑스러워서 사장이 시키는 탈세조작에 열성적이다. 거래처를 반씩 나눠서 세금조작을 하기로 해놓고 몰래 지영의 몫까지 손대는 일도 벌어진다. 사장은 같은 장부에서 더 많은 탈세조작을 한 희진에게 흡족해한다. 그런 희진이 지영에겐 악몽이다. 영화는 둘의 갈등을 폭발 직전까지 몰고간다. 나는 이 영화에서
<잘돼가? 무엇이든>, 꼭 보시라, 권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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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영화상 시상식 시즌이다. 청룡영화상 시상식은 미처 못 봤지만 지난 일요일에 TV에서 MBC 대한민국 영화대상 시상식은 봤다. 누가 상을 받을까 궁금한 점도 있었지만 방송국에서 주최하는 행사인만큼 재미있는 볼거리도 있을 거 같았다.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많다고 내가 관심있게 본 것 가운데 하나는 여자 배우들의 의상이었다. 볼거리라는 표현 때문에 여자 배우가 눈요깃감이냐고 항의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도리없다. 내가 영화를 좋아하게 된 이유가 아름다운 배우들 때문이니까. 나는 영화를 보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여전히 멋진 배우를 보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이번엔 김혜수가 무슨 옷을 입을까, 그런 호기심이 무색하게 시상식장의 다른 여자 배우들 의상도 눈에 띄게 화려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 공효진의 의상은 ‘충격’이었다. 저런 의상은 김혜수 외엔 못 입는 줄 알았는데, 놀라웠다.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느냐? 전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우리나라도 파티의 문화, 쇼의
김혜수와 안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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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그랬을까. 영화나 드라마에서 옥탑방 풍경을 자주 보게 됐다. 주인집 옥상이지만 내 집 마당처럼 쓸 수 있는 넓은 공간이 있고 탁 트인 전망이 펼쳐지는 옥탑방.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나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그곳은 사랑과 낭만이 숨쉬는 아늑한 공간이었다. 옥탑방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나도 저런 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얼마 전 <마이 제너레이션>을 보면서 인상적이었던 건 남자주인공이 사는 방이었다. 좁고 칙칙한 그 방을 보면서 어, 이건 못 보던 풍경인데, 싶었다. 현실에선 너무 익숙한 단칸방의 모습이건만 화면으론 처음 접하는 공간으로 느껴진 탓이다. 익히 봤던 옥탑방의 화사함이 현실엔 없는 것임을 불현듯 깨닫게 됐다. <마이 제너레이션>의 미덕은 무엇보다 바로 그 정직함에 있다. 별다른 장식이 없는 현실 공간을 찾아간 것처럼 등장인물들도 어딘가 꾸민 흔적이 없다. 출생의 비밀도, 의외의 반전도,
<마이 제너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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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 깊은 유럽의 몇몇 도시에는 고문박물관이라는 게 있다. 유명한 런던탑에도 중세의 고문기구를 전시한 방이 있지만 체코의 프라하 같은 도시에서도 이런 박물관을 만날 수 있다. 몇년 전 우연히 고문기구를 구경하다가 몸서리를 쳤던 적이 있다. 중세 유럽에서 다양한 고문이 이뤄졌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실물로 대한 고문기구들은 나의 상상력을 훌쩍 뛰어넘었다. 록밴드의 이름으로 잘 알려진 아이언 메이든만 해도 그렇다. 주물로 사람 모양을 만들어 그 안에 쇠창살을 박아놓은 이 기구는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의 두눈과 심장을 찌르도록 되어 있다. 두눈을 향해 다가오는 쇠꼬챙이를 보면서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은 무슨 얘기든 순순히 불게 되는 것이다.
모두가 하나님을 찬양하던 나라에서 이런 발명품이 나왔다는 게 아이러니지만 터무니없는 일도 아니다. 예수가 살해된 방식을 떠올려보라. 십자가형은 그 잔인함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반골 기질의 감독 짐 자무시를 만났을 때 그는 이렇게 말
나쁜 상상력에 재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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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이 끝났다. 수능 시험장을 보여주는 TV 뉴스를 보다가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교문 앞에 나와 선배를 응원하는 후배들, 시험장에 늦어 경찰관의 호위를 받으며 급히 달려가는 아이들, 100일 불공을 드리고 추운 날씨에도 교문 앞을 떠나지 못하는 어머니들, 모든 풍경이 내가 시험을 쳤던 20년 전과 다를 게 없다. 그동안 입시제도가 많이 바뀌어서 지금은 어떻게 대학을 가는지도 모르지만 그 풍경만은 똑같다. 갑자기 요즘도 수능점수가 당신들의 미래를 좌우한다고 가르치는지 궁금해졌다. 온갖 신문에서 1면 머릿기사로 수능 난이도에 대해 언급하는 걸로 봐선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 내가 학교를 다닐 때는 대부분 어른들이 이 시험만 잘 보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말했다. 연애는 나중에 해도 된다, 취미 활동은 나중에 해도 된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약간 의심은 했지만 대충 믿어버렸다. 그래서일 것이다. 대입시험이 끝난 뒤 일종의 공황상태가 왔다. 한달간 매일 술을 마시기
적당한 비관을 즐기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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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영화보는 즐거움을 만끽한 날이었다. 11월8일 <하나와 앨리스>와 <팜므 파탈>을 연달아 봤다. 하나는 너무 귀엽고 예쁜 영화였고 다른 하나는 너무 자극적이고 농염한 영화였다. 전혀 다른 매력이지만 둘 다 대만족이다. 이런 날만 있으면 영화잡지에서 일하는 거 정말 할 만하다.
<하나와 앨리스>를 보고나니 이와이 순지가 쓴 책 <쓰레기통 극장>에서 그가 오즈의 영화에 대해 쓴 대목이 떠올랐다. “오즈에게 있어서 사랑하는 딸을 시집보내는 날의 쓸쓸한 밤만이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하는 전부였던 것처럼 생각된다. 인생이란 필름에서 그 하룻밤만을 잘라내 몇번이나 계속 찍는다. 그런 이질적 행위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인 것이다.” 어쩌면 이와이 순지는 같은 말을 자신에게 되돌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나와 앨리스>를 보노라면 그에게 인생은 10대 소년 소녀가 성장하는 순간에 머물러 있다. 친구와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하나와 앨리스>와 <팜므 파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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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가 이겼다. 믿을 수 없지만, 믿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 영화 시나리오로 치면 최악이다. 거의 스너프필름 수준이다. 목을 따고 시체를 절단하는 끔찍한 살인을 저질러도 스너프필름에선 결코 악당이 처벌받지 않는다. 전세계가 악당으로 지목한 부시가, 이라크에서 수십만, 수백만명을 살해하고 아이들을 불구로 만든 전쟁광 부시가 다시 4년간 미국 대통령이 된다는 이 결말은 스너프필름보다 더하다. 미국은 지금 스너프필름의 살인자에게 앞으로 4년간 맘껏 활보해도 좋다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상상만 해도 구역질이 날 것 같다.
미국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언론에 따르면 이번 선거의 판세를 갈라놓은 것은 백인 개신교 신자란다. 한적한 시골에 살면서 주일이면 교회에 나가고 가족과 바비큐 파티를 벌이는 가정, 그들에게 이라크인의 죽음은 그리 중요한 사건이 아니었으리라. 생각해보니 나도 이런 친구들을 만난 적이 있다. 미군 부대에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얼마간 오해나 편견이 개입될 여지가 있지만 내
갓 블레스 아메리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