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주에 있었던 <씨네21> 송년회 자리에 참석한 한 감독님이 농담 삼아 전하기를, "언론 때문에 가슴에 대못이 박힌 감독들끼리 모여서 '여섯 개의 눈알'이라는 옴니버스 영화를 만들자"는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여섯 개의 시선>이라는 인권 영화를 빗대어 발언권의 불균형을 야유하는 말일 터이다.저널이 운용하는 활자는 즉각 칼과 꿀로 변용될 수 있다. 정보를 사전에 접하는 필자들이 독자들에게 판단의 근거를 제공한다는 것이 이 메커니즘의 본질인 까닭이다. 특히 영화는 전달자의 취향과 안목이 큰 폭으로 개입하는 소재다.그런데 감독들의 비판적 농담과 관련하여 내 관심을 끄는 것은 안목과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도리어 어떤 영화가 내 취향이 아니고 보통 수준의 안목에 못 미친다는 판단과 중평이 나올 때, 바로 그때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태도와 방법에 관한 요청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나는 여기서 안목과 예의의 대립을 본다. 저널의 공정성이나 균형이란 어차피 신화에 불
안목과 예의
-
설문의 계절이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어떤 영화를 좋게 보았으며 훌륭한 영화인들은 누구냐고 묻는 질문지들이 날아왔다. 다른 것은 어물쩍 넘겼는데 <씨네21>의 이영진 기자에게는 꾀를 피워도 통하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숙제를 했다.스물여덟명이 참여한 설문 결과는,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작품들의 윤곽이 비교적 뚜렷한 가운데 개인의 취향을 반영하는 몇몇 상이한 응답들이 덧붙여져 있다. 특히 개성적인 목록과 선정자를 연결시켜 상상해보는 일이 내게는 흥미로웠는데, 소리없는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그런데, 아뿔싸! 숙제를 하는 동안 내가 원천적으로 빠뜨린 영화의 목록들이 발견되었다. 다시 적어보니 리스트는 금세 죽 늘어났다. 이리저리 분류를 해봐도 작업은 여전히 매끄럽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망각도 일종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며 ‘나만의 베스트 5’ 선정을 종료하기로 했다.건망증 덕분에 조금은 간단하게 마쳤지만, 한해 동안 이루어진 영화적 성과를 단칼에 평가하는 일이란 애초에
건망증이 즐거워
-
이번주에 본 세편의 신작 영화는 특이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반지의 제왕> <아타나주아> <실미도>가 그 영화들인데 국적과 소재, 스타일 등 모든 것이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비슷한 면이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이었다.<반지의 제왕>은 19세기 음악사에서 달성되었던 바그너적 웅장함이 21세기 초두의 영화사 안에서 체험되는 분수령적인 사건이라고 여겨진다. 신화와 드라마, 음악과 무대디자인이 손발을 맞춘 거인적 풍모의 종합예술작품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거니와 중세에 대한 상상력, 천재적 낭만주의, 그리고 작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뉴질랜드 민족주의 열풍조차 바그너의 음악극이 당대 독일에서 불러일으킨 효과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어쨌거나 이 모든 체험은 하나로 귀결된다. 스펙터클이다.<반지의 제왕> 이후에 과연 어떤 새로운 스펙터클이 가능할까 의문스러워하며, 그리고 이 자극적인 시각 체험을 지워보겠다는 심산으로 <아타나주아>를
스펙터클
-
학창 시절, “왜 사냐건 웃지요”라는 글귀가 담긴 시를 펜으로 적어서 따로 가지고 다닌 적이 있다. 국어선생님 말씀이나 참고서의 해설이 아니더라도 이 말은 너무 멋졌다. 요즘 누군가가 내게 왜 사냐고 묻는다면 답은 역시 ‘웃지요’다. 이번엔 소녀 시절 특유의 도도한 몽환성 대신, 헷갈리거나 별 생각없으면서도 뭔가 있어 보이지 않으면 안 될 듯하여 어색하게 웃는 웃음일 것이다.그런데 방만한 자세로 TV를 힐끔거리다가 한 소식 깨치는 순간도 있다. 한국의 쌀 농사가 맞이한 절체절명의 위기와 이에 대응하려는 농부들의 노력을 말하는 다큐멘터리였는데 거기 나온 할머니가 툭 던진 말씀이, 선승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벼락 같았다.“1년만 묵히면 산 돼버린다. 배고파서가 아니라 보기 싫어서 해야 해.” 정별심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팔순의 여성 농부는, 인건비도 안 나오는 먼 산 다락논을 왜 포기하지 않고 해마다 경작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여기서 삶과 노동의 의미는 미학으로 수직 도약한다
다락논
-
-
근년에 종종 누리는 쏠쏠한 재미 하나가 있는데, TV드라마나 CF, 연극에 나온 새 얼굴 중에서 ‘찜’했던 이들이 뒤에 유명스타나 역량있는 배우로 등장하는 것을 보는 일이다. 이런 경험이 시작된 것은 유오성씨가 나온 연극을 볼 때였다. 꽤 오래전 일로, 대학로의 어느 소극장이었던 것 같다. 마치 생고무로 만든 공이 마루 위에서 튀듯이, 온몸 가득 충전된 기를 무대 위에 팡팡 발산하는 한 배우가 있었다. <친구>의 준석을 볼 때 그 젊은이의 기가 문득 다시 떠올랐었다.이런 인연(?)으로 엮어진 나의 기억 파일 속 인물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TV에서 탄생하고 성장한 선남선녀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기원을 알 수 없는데다 다소 실례를 무릅쓰자면 그리 잘생기지 않은, 이팔청춘이기보다는 약간은 나이 든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자는 영화의 중량감과 흥행까지 좌지우지할 만큼 풍요로운 역량을 갖고 있다. 당연히 생명력도 길다. 그들은 도대체 어디
꿀벌과 곰
-
이번주 <씨네21>에는 강한 남성들의 기가 흐른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순전히 영화를 통해서 아시아적인 의협에 매료되었다는데, 그가 만든 <킬 빌>은 마치 젓가락을 들고 현란한 손놀림을 하는 서양인을 보는 듯이 익숙하고도 낯선 느낌을 준다. 더구나 한점의 망설임도 없이 잔혹한 복수의 풍경을 나열해가는 기세는, 이런 유의 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마저도 그 과격한 오락의 장에 슬그머니 눌러앉힐 정도로 강하고 유려하다.기세로 말하자면 <올드보이>의 박찬욱 감독도 여기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아직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누지 못한 사이임에도 나는 그의 풍모에 관한 매우 뚜렷한 기억 하나를 가지고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초대되었을 때의 일이다. 국내외 기자들이 참석한 공식 기자회견장에서 박찬욱 감독은 오만함 일보 직전의 당당함과 얄미울 정도의 깔끔한 언변을 과시했다. 국제무대에 나선 인사들을 여러 차례 보아왔지만 드
신념의 이면
-
사람이 성장한다는 것은 보는 눈이 입체적으로 된다는 말과 통할 성싶다. 내가 속한 세대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십대까지는 대부분 사물을 파편적인 지식으로 분절하는 법을 암기했고, 20대는 세상을 보는 전혀 다른 시선을 충격적으로 접하는 반역의 시기였으며, 그것조차도 단지 가능한 하나의 시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갈 무렵 우리의 청춘도 막을 내렸던 것 같다.그러고 나자 해체의 시대가 도래했다. 고정된 모든 질서와 경계가 의심받았으며 진실은 상대화되었다. <매트릭스>는 심지어 세계 전체의 존재방식에 이원론을 재도입했다(이 시리즈의 속편들은 전혀 다른 영화이지만).상대주의는 비단 거시적인 차원에만 해당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도 그러하다. 누군가의 확고한 믿음이 나에게는 도전해야만 하는 과제가 된다거나 나의 진실이 누군가에게는 의심스러운 대상일 수 있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내가 보는 법’이다.모든 가능성을 다 품고 있는 세상, 바라보는
친구
-
옛날에도 이랬을까. 우리 시대는 빠르고 복잡하다. 생각해야 할 것은 늘 너무 많고 몸의 에너지도 종종 바닥을 친다. 신경줄과 근육이 마침내 늘어져버렸을 때, 무언가가 시작되는 것은 바로 그런 순간이다.사무실 근처 골목 귀퉁이에 자리잡은 구두 센터 아저씨를 생각하고 있다. 아저씨네 가게를 멋지게 말하기 위해 센터라고 이름 붙여보지만, 실은 한 사람이 들어가 앉기에도 여의치 않은 공간이다. 그곳에서 아저씨는 구두를 닦으신다.그 분은 <씨네21>이 창간될 때에도 거기 계셨다. 그러니까 적어도 9년째 한자리에서 같은 업에 종사하고 있는 셈이다. 아저씨는 하루에 몇 마디쯤 말을 하실까. 실은 그분의 목소리 자체가 궁금하다. 아저씨는 매일 이곳 한겨레신문사 건물에 규칙적으로 들러서 닦여야 할 만한 구두를 걷어가고 되돌려주는 일을 거르지 않지만, 무어라 소리내어 말씀하시는 경우는 없다. 종종 함께 나타나는 부인도 마찬가지다. 마케팅은 오늘날 모든 영업의 기본일진대, 이들 내외는 “신발
구두 아저씨
-
“한국은 베트남의 친구.” 지난주 <씨네21>에 실린 한쪽짜리 기사 제목이다. 어린이 글짓기나 관광공사 홍보문구에 등장함직한 이 순박한 표현에 담긴 내력인즉 이렇다.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베트남의 존경받는 지식인 중 한명인 반레 감독은 한국을 정말 싫어했지만, ‘미안해요 베트남’ 캠페인을 주도한 구수정씨를 알게 된 뒤 서서히 마음을 돌이켜 이제는 한국을 친구의 나라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구수정씨를 주인공으로 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든 바 있고, 베트남을 소재로 영화를 제작하려는 영화사를 돕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김에 5·18 묘역과 부산영화제를 둘러봤다.그가 한국을 증오하고 이해하고 마침내 포용하는 치열한 생의 격류를 겪게 된 뿌리는 물론 베트남 전쟁이다. 1945년부터 10년간 프랑스에 대항한 독립전쟁을 치른 베트남에 다시 미국이 개입하기 시작한 것은 1961년. 한국 정부는 1964년 이동외과병원 장병과 태권도 교관을 100여명 파견하더니 점차 전투부대쪽으로 옮겨 급
반복
-
이번주 <씨네21> 특집 기사는 영화와 TV쪽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사극의 변화를 관찰했다. 필자들은 MBC의 <다모>와 <대장금>, 지금 극장에 걸려 있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와 <황산벌>을 대표 사례로 들고 그 정황을 진단했는데 공감하는 바가 크다.이 현상은 여러 가지로 음미할 만한데, 우선 사극이 한국 대중영화의 장르로 부활하는 기폭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 관객은 멜로와 코미디, 액션에 이어 공포와 사극을 반복 재생산이 가능한 장르로 끌어올리고 있다. 한국영화사의 황금기라고 평가되는 1960년대 전반기에 거의 10여 가지 장르가 동시적으로 성행했던 것을 상기할 때, 지금의 한국 영화계 또한 성장기를 지나 황금기로 진입하고 있다는 판단을 내려봄직하다.또한 역사라는 것이 얼마든지 새로워질 수 있는 상상적 공간으로 재인식되고 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그동안 사극이라 하면 대부분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어마어마한 텍스트
상상력의 경쟁
-
착각이나 오해가 가끔 뜻밖의 진입로 구실을 하기도 한다. 일본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를 보고 난 뒤 여주인공이 더 멋있게 나온다는 원작소설을 읽고 싶어졌다. 그런데 기억과 달리 내가 갖고 있는 책은 <열정>이라는, 제목이 얼추 비슷한 헝가리 소설이었다.대문호다운 필치로 묘사된 이 특이한 정념의 세계를 ‘헝가리적’이라고 받아들여도 좋을까, 생각해보니 나는 작가인 산도르 마라이는 물론이고 헝가리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아마 헝가리 사람들도 한국을 잘 알지 못할 것이다.슬라보예 지젝의 강연을 들을 때 다시 비슷한 기분이 떠올랐다. 지젝의 방한과 연이은 강연회는 한국의 진보적 학문 공동체를 술렁이게 만들었는데, 놀랄 만한 지적 섭렵을 바탕으로 새로운 대안 담론의 동력을 일구고 있는 ‘유럽 인문학의 천재’마저도 어떤 맥락에서는 주변인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슬로베니아 출신인 그는 미국에서 있었던 하나의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내가 히치콕에 관해 강연하
오인
-
노동이란 겉보기에 근사한 한두 가지 의미나 기쁨을 위해서 백여 가지 견마지로를 수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매체를 만드는 일도 예외가 아닌데 이번주에는 견마지로를 하는 동안 여러 번의 기쁜 일이 있었다.그중에서도 영화를 통해서 마음과 관계를 치유해보자는 정성어린 제안, 이재용 감독과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내면에 대한 진솔하고 진심어린 소개를 접하는 기쁨은 청명하고 깊다. 기력이 쇠한 몸이 기름기 없이 맑은 고급 음식을 접한 듯한 쾌감과 통한다.이들 감독 혹은 필자들의 태도는 ‘이질적인 것에 대한 관조와 연민’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분야와 직능을 막론하고 문화라는 이름으로 진심을 다해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가만히 귀기울이면, 그 수많은 이야기들은 하나의 메시지로 모아진다. 그것은 바로 승인된 문화 규범의 바깥에 있는 이질성이나 불일치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리오타르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가 지키려고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화합할 수 없음’ 자체다.이런 가치를
쿨한 관조자들
-
부산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국제영화제 개막 이틀째 되는 날이다. 개막 당일 수영만은 한국 가을날씨의 매력을 유감없이 뽐내는 저녁 바닷바람 속에 성황을 이뤘다. 확실히 축제는 단조로운 일상과 노동의 리듬을 일탈하고 궁극적으로는 보완하는 생활의 악센트다.올해는 부산영화제가 해운대 시대로 전환하는 원년이라고 기록될 것이다. 국제적으로 명망있는 영화제들이 거의 예외없이 쾌적한 휴양 기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부산영화제에도 시사하는 바가 큰데, 영화제 전용공간이 착공되는 2005년이면 멀티플렉스를 포함하는 안정적인 상영관 인프라, 배후의 고급 숙박시설 등과 더불어 영화제가 제2의 도약기에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그런데 이러한 공간상의 변동과 더불어 미묘하지만 중요한 변화가 동시에 감지된다. 남포동의 좁은 광장을 송곳 꽂을 데도 없이 가득 메우며 스타를 향해 꺅꺅 환호하던 예의 팬덤을 어떤 이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젊은 영화 열기라고 불렀지만, 무언가 결핍에서 기인한 극단적인 열
영화제의 미래
-
비와 태풍으로 한 계절이 지새고 새로운 계절도 젖어서 오고 있다. 살면서 물 무서운 꼴을 직접 겪어보지 않았는지라 비 마니아를 자처해왔지만 지금은 말문이 막힌다. 물 피해를 연달아 당하고 나니 살맛이 없다며, TV카메라 앞에서 울지도 않고 말하는 사람들 때문이다.요새 내리는 비는 단순히 자연의 변덕이나 위력 탓으로 돌리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데가 있다. 아마도 환경의 문제로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런 혐의는 곳곳에서 발견된다.그런데 우리가 환경문제에 대응하는 방식은 매우 제한적이다. 그중 하나가 환경문제를 윤리의 문제 혹은 가족주의의 틀로 바꾸는 것이다. 저런 난리를 겪었으니 저 가족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겠냐는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기부금을 거두는 방식이 단적인 예다. 이 땅의 착한 사람들은 오늘도 열심히 ARS를 눌러 작은 돈을 기부하며, 피해를 당한 가족들이 따뜻한 밥 한끼라도 드시게 되기를 기원하고 자신이 지금 누리는 편안함에 대해 미안함 섞인 안도감을 느낄 것이
비,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