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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성영화제 프로그램 소개 기사를 보다 깜짝 놀랐다. 다큐멘터리 상영작 내용 대부분이 글로 읽어도 몸서리가 쳐지는 이야기다. 이런 건 인권영화제에서 틀어야 적당한 것 아닌가 싶은 영화가 한두편이 아니다. 예를 들어 <명예살인>. 파키스탄의 경우, 가문의 명예를 훼손한 여성은 가족이 공모해서 죽여도 문제삼지 않는 처벌관습이 존재한단다. 한편 <결혼선고>에선 이혼문제를 라비의 법정에서 판결하는 이스라엘 상황이 등장한다. 자기는 다른 여자를 만나 함께 살면서 다른 남자를 만난 전처의 자유는 완전히 박탈한다는 라비 법정의 재판도 파키스탄의 <명예살인> 못지않게 끔찍하다. 세상에, 이런 나라에 태어나지 않은 걸 감사해야지 싶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전에 봤던 다큐멘터리 한편이 떠오른다. 이란의 어느 연쇄살인범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는 매춘하는 여인을 살해하며 그것이 신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말한다. 더 놀라운 것은 살인범 가족의 반응이다. 아내와 자식
[편집장이 독자에게] 여인잔혹사, 제7회 여성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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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울지 않는다. <아무도 모른다>에 다른 제목을 붙인다면 이게 적당하지 않을까? <아무도 모른다>를 보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머니가 버린 꼬마 넷이 남들 눈을 피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본다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아마 이 영화를 보고 가장 빨리 마음을 진정시키는 방법은 아이들을 내팽개친 어머니를 비난하는 일일 것이다. 혼자 행복하자고 자식을 버리다니, 응당 누구나 분개할 만하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별로 안 들었다. 적개심을 품기엔 너무 철없는 어머니가 아닌가. <아무도 모른다>에서 어머니는 꿈을 꾸는 여자일 뿐이다. 그녀는 너무 많이 버림받아서 버림받는 공포조차 잊어버렸다. 어머니는 크리스마스에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나지만 소년도 안다. 이번엔 정말 돌아오지 않을지 몰라. 그래도 울고불고 매달리지 않고 어머니를 떠나보낸다. 건조하게 연출된 이별장면에서 <아무도 모른다>가 비범한 영화라는 걸 알게
[편집장이 독자에게]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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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한국영화와 한국축구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한국영화가 칸, 베를린, 베니스영화제에서 수상하자 월드컵 4강의 환호가 재현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혹은 국민 4명 가운데 1명이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를 봤다는 사실이 월드컵의 광기를 보는 듯했다. 물론 월드컵 때 붉은 악마의 응원 같은 눈에 보이는 이벤트는 없었지만 무언가 열광할 만한 것을 찾는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로 말하자면 축구팬으로서 월드컵의 환호를 즐거운 기억으로 간직한 사람이지만 그만큼 실망도 빨리 하는 편이다. 월드컵 이후 한동안 한국대표팀의 경기에서 희열을 느낀 적이 없었다. 오만, 베트남, 몰디브 등 월드컵 근처에도 못 가본 나라들한테 쩔쩔매는 경기를 하는 걸 보면서 복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이래서는 내년 독일월드컵에 참가도 못하겠다, 싶었다. 그런 점에서 상당수 한국영화는 한국대표팀의 오만전을 연상케 한다. 문전처리 미숙, 골결정력 부족, 수비불안
[편집장이 독자에게] 한국영화와 한국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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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비사 가운데 ‘가짜 남동철 기자 사건’이라는 게 있다. 이렇게 말하면 두둥 북소리도 나고 뭐 대단한 일 같은 느낌이 있지만 그냥 편의상 나 혼자 멋대로 그렇게 이름 붙인 사건이다. 아마 8년도 더 된 일일 것이다.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가 동숭씨네마텍에서 전화 한통을 받았다. “오늘 극장에 자리 빼놨다”는 전화였다. “자리를 빼놓다니, 무슨 말이죠?”
동숭씨네마텍에선 내가 전화해서 오늘 영화 보러 온다고 좌석을 부탁하지 않았냐고 반문했다. 곰곰이 생각해봤다. “저 그런 전화 한 적 없는데요.” 상대편에선 무슨 소리냐며 분명히 나에게서 전화가 왔고 좌석을 4개 마련해놨다고 말했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했다. 내가 단기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걸까? 그러나 흥분 모드에서 평정 모드로 바꾸고 생각해보니 짐작가는 게 있었다. 그래, 전에도 이런 전화가 온 적 있었지? 추리를 해보니 결론은 하나였다. 누가 내 이름을 대고 공짜로(!) 영화를 본다는 얘기였다.
그
[편집장이 독자에게] 가짜 남동철 기자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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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일, 휴일이라 회사가 썰렁하다. 주초에 휴일 있다고 마감을 하루 늦춰도 되는 게 아닌지라 기자들은 전부 나와 기사를 쓰고 있지만, 다른 부서엔 출근한 사람이 거의 없다. 인구밀도가 줄어서 숨쉬기는 편하지만 텅 빈 공간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남들 노는 날 일하는 것도 억울한데 휴일이라 난방마저 끊긴 탓이다. 명랑만화처럼 기자들 얼굴에 빗금이 그어져 있는 듯한 착시현상이 일어난다. 사무실에 앉아 외투를 걸친 채 일하는 기자들 모습이 안쓰럽지만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떠오르진 않는다. 춥다고 투덜대는 기자들을 피해 약속이 있는 척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은 추워서 도망가는 거지만 절대 내색하지 않으면서.
문득 여기저기서 봄소식이 올라오는 3월이 진짜 겨울인 1, 2월보다 춥다는 생각이 든다. 굳이 꽃샘추위가 아니라도 얇게 입고 나섰다가 낭패 본 일이 한두번이 아니다. 1, 2월엔 ‘그래, 겨울이니까’ 싶어서 단단히 대비해 옷을 입고 난방이 끊길 리도 없지
[편집장이 독자에게] 꽃샘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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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아, 겨울엔 원래 눈이 왔었지.’ 그런 생각이 든 날이었다. 지난 2월22일, 참으로 오랜만에 서울이 하얗게 보이던 날, 배우 이은주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마침 그 시간엔 서울극장에서 <여자, 정혜> 시사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영화를 보다말고 휴대폰을 받고 나가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고 나지막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영화 상영 도중에 참 매너들도 없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영화가 끝나고 극장 문을 나서자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이은주의 자살소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25살, 이제 꽃피는 나이에 어떤 절망이 그녀를 삼켜버린 걸까? 딱 한번 스쳐가듯 그녀를 본 적 있다.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 현장에서. 벌써 5년 전 일이다. 그럼 20살 무렵의 이은주였을 것이다. 그때도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있었던가? … 잘 기억나지 않는다.
때로 어떤 영화에 대한 기억은 영화 내용보다 영화를 보는 환경에 더 크게 지배를 받는다. 이은주
[편집장이 독자에게] 정혜와 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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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한통을 받았다. 무늬나 색깔이 첨가되지 않은 평범한 편지지 10장에 빽빽이 사연을 적은 편지였다. 이메일과 휴대폰이 일반화된 세상에서 이런 편지를 받은 것 자체가 신기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읽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자신이 교도소에 있다고 밝혔고 2012년에 출소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는 내가 이 지면에 썼던 ‘<토요명화>에게 보내는 편지’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자신이 정말 쓰고 싶었던 글이라고 적었다. 내 글이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아 반응을 얻었다는 점에서 반갑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만큼 낯설기도 했다. 그는 <씨네21>을 창간호부터 쭉 사서 봤고 교도소에서도 부모님이 소포로 보내줘서 보고 있다고 했다. 그가 무슨 죄로 그곳에 있는지 모르지만 그가 처한 환경을 상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전 외화물의 외국배우들 목소리 출연을 맡은 성우들을 맞춰보는 것에도 관심이 있어서 만일 예를 들어 <히트>란 영화를 하는데 주연으로 나오
[편집장이 독자에게] 교도소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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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가 별로 없다고? 그럼 우리가 관계를 맺어주지 뭐?” 매주 열리는 <씨네21> 기획회의에서 내가 자주 뱉는 말이다. 별 관계가 없어 보이는 사람이나 사건이라도 관점만 제대로 잡으면 굴비 엮듯 엮어서 흥미로운 기획기사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번번이 이런 식이다보니 “관계를 맺어주자”는 말만 나오면 기자들 낯빛이 변한다. “어이구, 저 인간, 또 저런다 또!” 하는 표정이다. 조니 뎁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한 묶음으로 특집을 만들자는 얘기도 그러다 시작됐다. 하지만 이번 경우가 뜬금없는 한 묶음이 아니란 걸 독자 여러분도 금방 눈치챌 것이다. 두 배우가 함께 나왔던 1993년작 <길버트 그레이프>를 봤다면 틀림없이.
<길버트 그레이프>는 내가 시사회라는 걸 처음 경험한 영화였다. 막 제대를 하고 백수였던 1994년 봄, 어디서 시간을 때우나 배회하다가 동숭씨네마텍 개관 기념 시사회에 떠밀리듯 들어갔다. 아직 조니 뎁과 레오나르도
[편집장이 독자에게] 조니 뎁과 디카프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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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좀 그만 들어라, 너 딴따라 될래?” 남보다 철이 늦게 들었던 10대 시절의 나는 아버지가 이렇게 말할 때 한마디 반항도 하지 않았다. 그땐 잘 몰랐지만 딴따라가 된다, 는 건 인생 종친다는 말로 들렸고, 무서웠다. 대입 시험을 치른 다음날 그동안 모은 돈으로 오디오를 샀고 몇주간 몇장 안 되는 레코드판을 바늘이 닳도록 들으면서 ‘이러다 진짜 딴따라 되는 건가?’ 걱정하기도 했다(그때 나는 착한 청소년이었다). 외국에선 다들 아티스트라고 부른다는데 우리나라에선 왜 딴따라라고 부르는 건지, 그 단어가 주는 묘한 뉘앙스가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딴따라가 될 만한 재능도 열정도 없었으니 바보 같은 망상이었지만 그때는 그랬다. 딴따라는 (적어도 내겐) 저주받은 단어였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딴따라는 ‘연예인을 얕잡아 부르는 말’이라고 적혀 있다. 아직 유교 전통이 건재한 이 나라에서 연예인을 천민 취급했다는 뜻일 것이다. 전통을 숭상하는 우리 민족은 참으로 자랑
[편집장이 독자에게] 딴따라, 연예인을 바라보는 또다른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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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대해 “미국영화의 기적”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무법자> 시리즈와 <더티 하리> 시리즈로 유명한 젊은 날의 액션스타가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감독이 됐으니, 이런 표현도 무리가 아니다. 2003년 <미스틱 리버>를 보고 난 이스트우드가 생애 최고의 영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선악의 싸움과 인간의 운명을 종횡으로 엮은 이 영화는 우리의 평화와 안녕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인지 절감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이스트우드의 최고작이 무엇이냐는 건 사람마다 다른 답을 내놓겠지만 아무튼 <미스틱 리버>가 최고라는 내 판단은 빗나갔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막 보고나오며 그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다시 한번 걸작을 만들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늙은 복싱트레이너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여자 복싱선수 힐러리 스왱크가 나누는 교감을 따라가는 영화다. 이스트우드의 다른 영화들처럼
[편집장이 독자에게] 클린트 이스트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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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네 생각이 나서 편지를 쓴다. 요즘 많이 힘들다는 얘기 들었어. 회사에서 당분간 나오지 말라고 했다며. 딸린 식구도 많은 너한테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을 거 같아. 동료들이 항의시위까지 했다던데 그분들도 충격이 클 거야. 아무쪼록 잘돼야 할 텐데 지금 상황으로 봐선 쉽게 낙관하기도 힘들구나. 아예 책상을 뺀다는 소문도 들리니 말이야. 정말 맘이 많이 상했을 거 같아. 더군다나 그게 <겨울연가>란 녀석 때문이니 오죽 하겠니. 그 친구가 회사에 돈을 많이 벌어주긴 했어도 네 자리를 차고 들어올 만한 실력은 없잖아. 지나가는 사람 열을 잡고 물어봐도 네가 <겨울연가>보다 낫다고 말할 거야. 그러니 너무 낙심하지마. 널 좋아하는 사람은 아직 많이 있다구.
하긴 요즘 40대 직장인만 되어도 언제 잘릴지 몰라 조마조마하다잖아. 네가 이렇게 찬밥 신세가 됐다니 가슴이 아프지만 세상이 그렇게 변했다는 생각도 들더구나. 우리 어렸을 때는 영화 보려면 언제나 널 찾았
[편집장이 독자에게] <토요명화>에게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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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지조있는 분이시다. 홍건표 부천시장은 유명 배우, 감독을 비롯해 각종 영화단체의 반발에 꿈쩍도 안 했다. 조직위원장으로서 자신의 결정에 책임을 지겠다는 저 자세, 눈칫밥로 살아온 철새 정치인이라면 감히 못할 일이다. 수도 이전에 동의했다 슬그머니 말을 바꾼 한나라당이나 국가보안법 연내 폐지를 약속했다 은근슬쩍 뒤로 물러선 열린우리당과 차원이 다른, 소신 정치인이라 할 만하다. 덕분에 설마 이렇게 반대하는데 해촉하겠어, 했던 나는 한동안 정신이 멍했다. 와, 정말 센데, 오랜만에 그런 느낌을 받았다.
솔직히 이 정도로 강경한 태도라면 김홍준 집행위원장과 적지않은 마찰이 있었겠구나 싶다. 부천영화제에서 김홍준 위원장이 부천시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본 경험이 여러 번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부천시 유지 몇분이 가족을 데리고 영화를 보러왔다. 좌석이 매진이라 줄을 서야 했는데 그분들은 안내를 담당한 자원봉사자들에게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러느냐며 화를 냈다. 영화제에 적지않은 돈
[편집장이 독자에게] 부천이 어쩌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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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호를 만들고 있는 지금은, 아직 2004년이다. 신년에 어울리는 여러 가지 기획기사를 준비했지만 새해를 실감하긴 이르다. 그러다보니 기사를 쓰면서 번번이 실수가 나온다. 2003년을 ‘지난해’로, 2004년을 ‘올해’로, 2005년을 ‘내년’으로 써놓는 식이다. 의식과 달리 몸이 새로운 시간에 적응 못한 탓이리라. 오늘과 내일을 구분하는 것과 달리 새로운 1년을 받아들이는 데는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 내 손에 완성된 신년호가 쥐어지면 그제야 2004년이 끝났다는 걸 실감하겠지 싶다.
영화주간지 기자로 10년을 지내다보니 끝과 시작을 느끼는 방식도 기사 마감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1년의 무게가 50권 무게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지난 50권의 잡지가 1년 삶의 궤적이고 이제 한주 한주 새로운 50권을 만들어갈 일이 남았다.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지루하지만 이런 생활패턴이 주는 중독성 즐거움도 있다. 무엇보다 노동의 결과가 눈앞에 보인다는 점인데 특히 지난 한해를
[편집장이 독자에게] 가늘고 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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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들이 불우한 분들을 위해 기부를 하는 캠페인을 하면 어떨까요?” 회사 사업팀에서 이런 말이 나왔을 때 솔직한 나의 첫 느낌은 “글쎄, 그게 잘될까”였다. 좋은 일 하자는 얘기건만 무조건 반색을 하지 못한 건 내 몸에 뿌리깊은 어떤 회의주의 때문이었으리라. 자선행사에 적극 나서 본 적 없는 나로선 어딘지 어색하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었다. 영화하는 사람들은 영화만 잘 만들면 되고, 잡지 만드는 사람들은 잡지만 잘 만들면 된다는 귀차니스트의 신조에도 왠지 어울리지 않는 짓 같았다. 더군다나 이런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한다는 건 괜한 생색내기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대 시절엔 누구나 그렇겠지만 “세상을 바꾸겠다”는 이상주의가 있었다. 나처럼 8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인 경우엔 그게 의식화의 핵심사항이기도 했다. 기억에 남는 일 가운데 하나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둘러싼 토론이었다. 선배들은 정치투쟁을 역설했고 자선이나 봉사활동을
‘아름다운 영화인’ 캠페인을 시작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