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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내가 신문기자가 되겠다고 했을 때 대학교수인 한 어른은 “앞으로 10년 안에 신문이 없어지고 방송만 남을 텐데 왜 신문사에 들어가려느냐”고 했다. 기자가 된 뒤엔 한때 “전자신문이 등장하면 장차 종이신문은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므로 실직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90년대 들어 PC가 대중보급되고 모든 직장이 곧 재택근무체제로 이행할 것처럼 이야기할 때, 출퇴근을 즐기는 편인 나는 벌써부터 서운해졌던 기억이 있다. 우리는, 한 사람의 인생을 여러 차례의 기술혁명들이 가로지르고 기술진보가 교과서에서 배워 익힐 수 있는 수준을 훌쩍 추월해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시대엔 미래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큰 만큼 성급하고 과격한 예언들이 남발하고 또 금세 부인되곤 한다. ‘공식적으로’ 틀린 예언들은 이것들만이 아니다. 20세기 안에 석유자원이 고갈되리라는 예고도 틀렸고, 공황에 의한 자본주의 자멸설도 어긋났다. 컴퓨터 한대가 커다란 학교 교실만했던 1940년대엔 어느 누구도 그 교
[편집장이 독자에게] 즐거운 밀레니엄 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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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남기남입니다. 여기 근처에 있는데 얼른 나오쇼.” 저녁에 일을 하다 전화 한통을 받았다. 남기남 감독이었다. 최근 <바리바리 짱>을 개봉시킨, <영구와 땡칠이>의 전설적 흥행감독, 6일 만에 영화 1편을 찍었다는, 바로 그분이다. 한겨레신문사 근처 어느 주꾸미집에 있으니 빨리 나오라는 말에 다른 약속이 있었지만 잠깐 얼굴이라도 뵙자는 생각이 들었다.
6∼7년 전쯤이다. 남기남 감독에 관한 특집기사를 준비하면서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같은 성씨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를 오랜 친분을 나눈 사이처럼 대했다. 취재를 위해 만난 첫날, 한낮에 만나 저녁 무렵 술에 취해 사무실로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오늘은 너무 마셔서 인터뷰는 내일 다시 하시죠.” 그렇게 첫 만남은 아무 소득없이 끝났고 나는 다음날 비로소 남기남 감독의 전설적 빨리찍기 비법을 들을 수 있었다. 그뒤로 몇년간 그를 잊고 지냈다. 그때 난 지금은 남기남 감독이 다시 영화를 찍을 수 있는 환경이
[편집장이 독자에게] 남기남과 주꾸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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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가장 무섭고 긴장되냐고 묻는다면 나는 처음 가는 미용실에서 머리를 맡길 때라고 대답할 것 같다. 단골 미용실을 정한 뒤로는 자리에 앉으면 알아서 깎아주는 상황이 됐지만 단골 미용실을 찾기까지 꽤 많은 식은땀을 흘렸다. “어떻게 깎아드릴까요?”라는 질문에 할 수 있는 대답이 “음, 좀 짧게” 아니면 “잘” 혹은 “예쁘게” 같은 도합 4∼5가지도 안 되는 말밖에 없으니 가위를 든 자에게 목숨이라도 맡긴 기분이 든다. 그럴 땐 그저 속으로 ‘인샬라’(신의 뜻대로)라고 되뇌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이런 일을 겪다보면 자기가 원하는 헤어스타일을 아주 구체적으로 정확히 설명하는 여자들(혹은 남자들)을 볼 때 존경하는 마음이 절로 우러난다. 헤어스타일만 그런 것도 아니다. 옷이나 액세서리를 고를 때 반짝반짝 빛나는 여인들의 눈은 수십 가지 화장품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는 그들의 두뇌처럼 영민하고 치밀하다. 많은 남자들이 여자들의 그런 노력을 할일없는 자들의 소일거리라고 무시하지만 과연 그
[편집장이 독자에게] 예쁜 게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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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테이크는 널리 알려진 촬영기법 가운데 하나다. 오랜 시간 컷을 나누지 않고 찍는 이 기법은 지루한 예술영화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런 오해가 무조건 부당한 것은 아니다. 의미없는 롱테이크만큼 효과만점인 자장가도 드물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롱테이크는 가장 단순한 촬영기법이다. 널리 아다시피 뤼미에르가 만든 최초의 영화는 롱테이크로 찍은 것이다. 컷을 잘게 나누고 편집을 하는 것은 좀더 나중에 개발됐다. 초기 영화의 발달사는 지금 현재 어떤 개인이 영화를 배운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롱테이크는 편집에 익숙지 않은 사람에게 자연스런 선택이다. 그러던 롱테이크가 대가들의 전유물이 된 것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기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거장들의 영화에서 롱테이크는 시간과 감정의 결정체를 만드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롱테이크는 지루하다는 말을 믿을 필요는 전혀 없다. 예를 들어 <살인의 추억> 도입부에 롱테이크로 촬영한 장면. 넓은 들에서 시체가
[편집장이 독자에게] 어떤 롱테이크, 정성일과 박찬욱의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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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앞에는 굉장히 커다란 비디오대여점이 있다. 이번에 <씨네21>에서 우수 비디오숍 콘테스트를 하면서 일정한 실사기준에 의해 채점한 성적표에 따르면 바로 이 대여점이 4등이다. 좋은 비디오대여점을 가까이 두고 있는 게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얼마만한 행운인지는, 이 곳에 이사온지 얼마 안돼 곧 알게됐다. 예전에 나의 비디오대여점 출입은 대체로 개봉관에서 빠뜨린 신작들을 건지자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비디오 3만편을 소장하고 있는 이 대여점을 드나들면서 목적이 다양해졌다. 개봉관에서 빠뜨린 신작영화 줍기, 내가 좋아하는 감독의 작품연보를 체크해가며 한편씩 봐치우기, 신작 위주의 개봉관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고전들 찾아 보기. 영상자료원이나 사설 시네마테크를 찾아다닐 시간 여유가 없는 나는 ‘내 인생의 영화’들 상당수를 이 비디오숍에서 빌려보았다. 물론, 70년대 이전 한국영화나 세계영화사의 고전 리스트가 몹시 빈약한 한국 비디오산업의 얄팍함을 일선의 비디오숍들이 결코
[편집장이 독자에게] 비디오숍 콘테스트를 진행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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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여배우를 만나면 꼭 하게 되는 말이 있다. 30대 여배우가 주인공인 시나리오가 많지 않아 힘들지 않나요 하는 질문. 한국영화가 많이 다양해졌다고 하지만 여주인공이 돋보이는 영화는 여전히 적기 때문에 자연스레 이런 말이 나오게 된다. <인어공주> 촬영현장에서 만난 전도연과 <청연> 촬영현장에서 만난 장진영에게 똑같이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그들의 반응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요. 여성영화가 많지 않죠. 나이가 많아지면 더 그렇고요.” 그런 점에서 이영애 주연의 <친절한 금자씨>가 폭발적 반응을 얻고 있는 상황은 반갑다. 그간 한국영화 흥행작 가운데 여성영화가 드물다는 점을 고려하면 영화제작의 전반적 기류에 작은 변화라도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활동 폭에 제한이 있는 건 30대 여배우만이 아니다. 젊은 여배우들에게 주어지는 배역도 그저 보기 좋은 예쁜 인형이 되길 요구하는 영화들이 많다. 그러다보니 재능을 발휘할 기
[편집장이 독자에게] 여배우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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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이 코너에서 나는 한 극장주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려 했었다. <박하사탕>을 1개관에서라도 장기상영할 수 있도록 그의 양식에 호소하려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관객이 늘면서 개봉관이 늘게 된 것이다. 시장이란 기본적으로 대자본가가 다루기 편하도록 설계된 제도이지만, 아주 가끔 그 힘관계를 교란하는 작은 반란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자본주의 시장은 음흉한 만큼 건강하기도 한 것이다. <박하사탕>이 개봉관을 줄여가다가 설에 극장가에서 사라져주기로 돼 있었고, 그것은 소프트웨어 공급자와 배급사의 힘관계에 의해 예정된 코스였으나, 뜻밖에 관객의 힘이 변수로 등장한 것이다. 실제로 배급업자와 극장주들이 반드시 좋은 영화 편은 아닌 다음에야, 시장 속에서 ‘좋은 영화 볼 권리’를 유린당하지 않으려면 대중도 스스로 저항력을 길러야 할 것이다. <박하사탕>은 그 흥미진진한 사례다.
<박하사탕>이 전폭적인 호평에 휩싸이자 짐
[편집장이 독자에게] <박하사탕>을 볼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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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도 운명이란 게 있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기자로 일하다보면 느끼는 것이지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단 하루도 못 버티는 글이 있는가 하면 수십년이 지나도록 읽히는 글이 있다. 주간지라면 그 생명은 대체로 일주일일 것이고 월간지라면 한달이 평균 수명일 것이다. 그렇다고 일간지보다 주간지가, 주간지보다 월간지가, 월간지보다 단행본이 우월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각자 주어진 생명에 걸맞은 삶이 있다. 단 하루 살아남는 일간지 기사라 할지라도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나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보도처럼 고전소설 못지않은 가치를 지닌 글도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주가 지나면 쓰레기통에 처박혀 영영 사라질 주간지라 해도 최선의 노력이 들어가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10년 넘는 역사를 만들어가면서 일주일 만에 잊혀지고 버려지기 아까운 글들이 <씨네21>에 적지 않게 쌓였다. 가끔 한주의 삶으로 만족 못할 글들이 “이대로 죽을 순 없다”고 아우성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
[편집장이 독자에게] <씨네21>의 첫 단행본 <내 인생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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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춘향뎐>은 완성품이 어떤 모양일지 혼란스런 작품이었다. 시나리오는 따로 없고 판소리와 영상이 함께 가는 거다, 라는 감독의 설명으로는 어떤 영화가 나올지 감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건, 제작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지난 1월18일 <춘향뎐>이 첫 공개된 시사회장에서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은 “영화를 별로 많이 만들지는 않았지만 영화 공개하면서 이렇게 긴장되긴 처음”이라고 했다(‘영화를 별로 많이 만들지 않았다’는 건 농담이다. 태흥영화사는 동아수출공사와 함께 실제 영화제작을 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두 영화사 가운데 하나다). 임권택 감독도 찍는 동안 스스로 결과가 궁금했다고 말했다. 이건 물론 그다운 겸양이긴 하지만, 실제로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고난도의 실험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영화 <춘향뎐>은 한국영화에서 아주 특별한 성과다. <춘향가>의 ‘소리’를 그처럼 열린 형식의 영화로 건져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실
[편집장이 독자에게] 판소리는 한국의 셰익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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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드라마 <제5공화국>을 본다. 대단한 완성도를 지닌 드라마는 아니지만 나의 정치의식이 자랐던 80년대를 다루고 있기에 자연스레 눈길이 간다. 그동안 이 드라마는 전두환 일당의 악행을 하나하나 들춰냈고 마침내 대통령이 되기 직전 전두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 그때를 경험 못한 세대라면 그냥 즐기며 볼 수도 있겠지만 나로선 이 드라마를 보며 오래전 아물었던 상처를 헤집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구가 되었던가. 20살 무렵 그런 사실을 처음 접하고 울분을 터트렸던 순간이 떠오른다. 지금 드라마를 보며 느끼는 감정과 차원이 다른 분노가, 그때는 있었다.
엉뚱하지만 <친절한 금자씨>를 보면서 <제5공화국>이 떠올랐다. 최민식이 연기한 백 선생이라는 인물이 전두환과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만인에게 불행을 몰고온 악인이라 그렇기도 하지만
[편집장이 독자에게] <친절한 금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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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낙원 이야기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비치>는 정작 대니 보일 감독 자신의 실낙원 같다. 이 영화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하는 배낭족 청년은 천혜의 낙원을 발견하지만 낙원은 이미 지옥이었고 곧 참혹한 종말을 맞는다. <쉘로우 그레이브>와 <트레인스포팅> 등 단 두편으로 단숨에 영국이 낳은 세계적 스타 감독이 돼버린 대니 보일이 할리우드의 프로포즈를 받았을 때, 할리우드는 그에게 어쩌면 기회와 자본의 인공낙원처럼 보였을는지 모른다. 실제로 그는, 영국에서의 100배쯤 되는 제작비에다 섬 하나를 세트처럼 마구 뜯어고쳐가며 사용했다. 하지만 할리우드와의 거래에서 그는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아 보인다. 디카프리오라는 특급 스타와 화려무비한 스케일은 대니 보일 특유의 무자비한 냉소나 희망없음의 절규와 뒤섞이면서 계통도 족보도 없는 이상한 사생아를 출산했다. 글쎄, 대니 보일의 세계라는 것도 그의 영화제목처럼 얕게 덮어놓은 무덤 같은 것이었을까. 그보
[편집장이 독자에게] 그냥 자기 나라에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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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해 아시아영화들을 둘러보고 다니는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 김지석씨에게 “요즘 동아시아영화들 어때요? 한국 같은 데 있어요?”하고 물어보았다. 그의 대답은 “없다”는 것이었다. “산업으로나, 작품수준으로나.” 80년대 중반 이후 작가 영화의 뉴 웨이브로 한때 한국 ‘작은영화주의자’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기도 했던 대만영화만 보더라도 지금 “근근이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국내산업은 거의 몰락했고 명망가 감독들이 외국 돈으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이다. 차이밍량은 미국 돈으로 차기작을 준비하고 있고, 허우샤오시엔은 프랑스 자본으로 신작을 찍는데 ‘시나리오를 미리 내놓으라’는 주문을 이행하지 못해 촬영을 중지당했다는 것이다. 중국 역시 국가주도 영화산업이 민영화의 과도기에 극심한 자금난을 겪고 있고 독립영화작가들은 검열과 제작비 문제로 게릴라식 작업을 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바다. 일본 역시 메이저들은 생산활동을 중지했고, 과거와 같은 대작 제작시스템은 무너졌으며, 독립영화사들이
[편집장이 독자에게] 정말 영화 잘들 찍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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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이 아니라 <북21>이 어울리겠는걸.” 이번주 <씨네21>을 보고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이번호엔 유난히 소설과 소설가에 대한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다. 특집으로 작가와 감독의 대화를 실은 것에서 시작해서 최근 일본에서 개봉한 <플라이, 대디, 플라이>의 원작자 가네시로 가즈키의 인터뷰를 거쳐 포커스 지면엔 올 여름에 읽을 만한 신작 추리소설들이 선보인다. 갑자기 소설 이야기가 많아진 것은, 한국영화의 위기에 출구가 없는지 되짚어보자는 제안이다, 한국영화가 잃어버린 서사의 즐거움을 되찾자는 선언이다, 지난 6개월간 극비리에 추진해온 <씨네21>의 안중근 계획이다, 라고 말하면 좋겠는데, 사실 그렇게 굉장한 의도를 갖고 추진한 프로젝트는 아니었다. 좀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하다보니 우연히 그렇게 됐다. 각각의 특집과 기획엔 분명한 이유가 있었지만 이렇게 한꺼번에 들어가게 될 줄은 예상을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만
[편집장이 독자에게] 문학아, 말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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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목적>을 보면서 치가 떨린 장면이 하나 있다. 교생 홍과 연애한 사실이 인터넷을 통해 알려지자 흥분한 유림이 학생들을 때리는 대목이다. 왜 이런 장면이 필요했는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너무 화가 나서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란 걸 보여줘야 했으리라.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런 선생들이 있었지, 라고 생각하지만 난 그런 유림을 용서할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런 유림을 귀엽고 사랑스런 모습으로 분칠하는 영화에 화가 났다. <연애의 목적>을 보여주려면 까짓 애들 몇놈 엉덩이 때리는 게 대수인가, 라는 생각이었던 걸까. 아마 내 뺨을 갈겼던 고등학교 시절 선생도 그런 식이었으리라. 개인적인 분풀이가 필요했을 수도 있고, 선생이 애들 때리는 걸 별거 아닌 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20년 이상 지난 지금도 그들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친다.
이런 예는 적지 않다. <여선생 vs 여제자>에는 사리사욕에 눈이 먼 선생이 초등학교 아이들
[편집장이 독자에게] 학생, 다수의 마이너리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