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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씨네21> 특집 기사는 영화와 TV쪽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사극의 변화를 관찰했다. 필자들은 MBC의 <다모>와 <대장금>, 지금 극장에 걸려 있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와 <황산벌>을 대표 사례로 들고 그 정황을 진단했는데 공감하는 바가 크다.이 현상은 여러 가지로 음미할 만한데, 우선 사극이 한국 대중영화의 장르로 부활하는 기폭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 관객은 멜로와 코미디, 액션에 이어 공포와 사극을 반복 재생산이 가능한 장르로 끌어올리고 있다. 한국영화사의 황금기라고 평가되는 1960년대 전반기에 거의 10여 가지 장르가 동시적으로 성행했던 것을 상기할 때, 지금의 한국 영화계 또한 성장기를 지나 황금기로 진입하고 있다는 판단을 내려봄직하다.또한 역사라는 것이 얼마든지 새로워질 수 있는 상상적 공간으로 재인식되고 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그동안 사극이라 하면 대부분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어마어마한 텍스트
상상력의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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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이나 오해가 가끔 뜻밖의 진입로 구실을 하기도 한다. 일본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를 보고 난 뒤 여주인공이 더 멋있게 나온다는 원작소설을 읽고 싶어졌다. 그런데 기억과 달리 내가 갖고 있는 책은 <열정>이라는, 제목이 얼추 비슷한 헝가리 소설이었다.대문호다운 필치로 묘사된 이 특이한 정념의 세계를 ‘헝가리적’이라고 받아들여도 좋을까, 생각해보니 나는 작가인 산도르 마라이는 물론이고 헝가리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아마 헝가리 사람들도 한국을 잘 알지 못할 것이다.슬라보예 지젝의 강연을 들을 때 다시 비슷한 기분이 떠올랐다. 지젝의 방한과 연이은 강연회는 한국의 진보적 학문 공동체를 술렁이게 만들었는데, 놀랄 만한 지적 섭렵을 바탕으로 새로운 대안 담론의 동력을 일구고 있는 ‘유럽 인문학의 천재’마저도 어떤 맥락에서는 주변인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슬로베니아 출신인 그는 미국에서 있었던 하나의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내가 히치콕에 관해 강연하
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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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란 겉보기에 근사한 한두 가지 의미나 기쁨을 위해서 백여 가지 견마지로를 수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매체를 만드는 일도 예외가 아닌데 이번주에는 견마지로를 하는 동안 여러 번의 기쁜 일이 있었다.그중에서도 영화를 통해서 마음과 관계를 치유해보자는 정성어린 제안, 이재용 감독과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내면에 대한 진솔하고 진심어린 소개를 접하는 기쁨은 청명하고 깊다. 기력이 쇠한 몸이 기름기 없이 맑은 고급 음식을 접한 듯한 쾌감과 통한다.이들 감독 혹은 필자들의 태도는 ‘이질적인 것에 대한 관조와 연민’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분야와 직능을 막론하고 문화라는 이름으로 진심을 다해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가만히 귀기울이면, 그 수많은 이야기들은 하나의 메시지로 모아진다. 그것은 바로 승인된 문화 규범의 바깥에 있는 이질성이나 불일치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리오타르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가 지키려고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화합할 수 없음’ 자체다.이런 가치를
쿨한 관조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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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국제영화제 개막 이틀째 되는 날이다. 개막 당일 수영만은 한국 가을날씨의 매력을 유감없이 뽐내는 저녁 바닷바람 속에 성황을 이뤘다. 확실히 축제는 단조로운 일상과 노동의 리듬을 일탈하고 궁극적으로는 보완하는 생활의 악센트다.올해는 부산영화제가 해운대 시대로 전환하는 원년이라고 기록될 것이다. 국제적으로 명망있는 영화제들이 거의 예외없이 쾌적한 휴양 기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부산영화제에도 시사하는 바가 큰데, 영화제 전용공간이 착공되는 2005년이면 멀티플렉스를 포함하는 안정적인 상영관 인프라, 배후의 고급 숙박시설 등과 더불어 영화제가 제2의 도약기에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그런데 이러한 공간상의 변동과 더불어 미묘하지만 중요한 변화가 동시에 감지된다. 남포동의 좁은 광장을 송곳 꽂을 데도 없이 가득 메우며 스타를 향해 꺅꺅 환호하던 예의 팬덤을 어떤 이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젊은 영화 열기라고 불렀지만, 무언가 결핍에서 기인한 극단적인 열
영화제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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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태풍으로 한 계절이 지새고 새로운 계절도 젖어서 오고 있다. 살면서 물 무서운 꼴을 직접 겪어보지 않았는지라 비 마니아를 자처해왔지만 지금은 말문이 막힌다. 물 피해를 연달아 당하고 나니 살맛이 없다며, TV카메라 앞에서 울지도 않고 말하는 사람들 때문이다.요새 내리는 비는 단순히 자연의 변덕이나 위력 탓으로 돌리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데가 있다. 아마도 환경의 문제로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런 혐의는 곳곳에서 발견된다.그런데 우리가 환경문제에 대응하는 방식은 매우 제한적이다. 그중 하나가 환경문제를 윤리의 문제 혹은 가족주의의 틀로 바꾸는 것이다. 저런 난리를 겪었으니 저 가족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겠냐는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기부금을 거두는 방식이 단적인 예다. 이 땅의 착한 사람들은 오늘도 열심히 ARS를 눌러 작은 돈을 기부하며, 피해를 당한 가족들이 따뜻한 밥 한끼라도 드시게 되기를 기원하고 자신이 지금 누리는 편안함에 대해 미안함 섞인 안도감을 느낄 것이
비,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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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샛노랗게 물든 은행 한 그루를 보았다. 온산이 아직 푸른 중에 홀로 노랗게 변한 것을 마주하는 기분은 감탄보다 충격에 가까웠다. 그 나무는 내내 비로 지새는 늦여름을 견디지 못한 예민한 녀석이었을 것이다. 시인은 사회의 환부를 남보다 먼저 감지하는 몸을 지닌 존재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산속의 노란 시인!무언가를 미리 보는 눈에 대해 생각할 때면 에두아르 마네가 떠오른다. 그의 만년작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은 벨 에포크(좋은 시절)로 불리는 19세기 말 파리의 정경을 인상파 특유의 감각으로 전해준다. 그런데 이 그림의 핵심은 거울로 비치는 술집의 화려함이나 종류도 다양한 술병과 과일, 장식적인 옷차림으로 가득한 사교계의 생동감이 아니라, 홀을 내다보고 있는 어린 여급의 무표정한 얼굴이다.그림 속 소녀의 얼굴은 예언적이다. 그 상황과 표정은 이후로 백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세계 곳곳에서 보아왔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보게 될 종류의 것이다. 마네는 근대
예민한 나뭇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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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 동안 잡지를 만들면서 미리 본 영화 가운데 <오! 브라더스>가 며칠째 머리 속에 맴돌고 있다. 영악한 형이 조로증을 앓고 있는 어린 이복동생과 부득이한 동행을 하면서 벌어지는 상황을 주축으로 한 이 영화는, 대략 분류하자면 비평계보다는 대중관객의 취향을 더 많이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이럴 경우 효력이 검증된 흥행 장치에 의존하게 마련인데, <오! 브라더스> 역시 조폭영화로부터 변주되어 나온 양아치 캐릭터의 코믹 코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거기에 장애우와 이른바 ‘정상인’의 소통과 이해라는 휴먼드라마를 가미했고, 어린아이가 질서잡힌 세계에 들어와서 일으키는 무구한 혼란이 이른바 ‘어른’들에게는 공포일 수 있다는 관찰을 웃음의 원천으로 끌어들인다.상업영화로서 평범한 길을 가면서도 새로운 노력까지 조금 보태어 대중영화를 한뼘쯤 착실하게 갱신시키는 작품들을 만날 때, 한국영화가 균형있게 성장 중이라는 확신이 짙어진다. 그런데 이런 유의 확신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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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라고 불리는 한국의 주류 영화계 안에 30대의 역량있는 여성프로듀서들이 열한명이 넘는다는 소식, 그러니까 우리가 알 만한 유능한 여성프로듀서가 도합 20명쯤 된다는 사실은 정말 흥분되는 일이다(우리나라에서 연간 만들어지는 주류영화가 대략 60∼70여편 된다). 이와 관련해 함께 나눔직한 이야기들이 이번주 <씨네21> 특집 기사에 상당량 들어 있다. 나는 여기에 그분들이 살아내고 있는 길과 삶의 태도에 대한 존경의 인사를 덧붙이고 싶다.그리고 행복하게도 지난 한주 동안 어떤 영화에 사로잡혀 지냈다. 다큐멘터리 <영매>다. 한창 신명이 오른 무당이 그리도 서럽게 우는 모습과 함께 영화 만들기가 중반을 넘어서고야 그 이유를 알았다는 내레이션으로 대뜸 시작하는 이 다큐멘터리는, 서서히 호흡 조절한 끝에 급기야 관객도 울린다.카메라 앞에 선 무당, 그들이 중재하는 보이지 않는 어떤 세계, 화면 속 관중, 스크린을 바라보는 관객까지 꿰뚫어 소통시키는 박기복 감독의 역
경계를 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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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가을 소리가 들린다. 방사형으로 화사하게 꽂히는 햇살, 실로폰 채로 치면 또로롱 울릴 것 같은 투명한 공기, 부지런히 줄을 뜯는 가야금 연주자의 손가락처럼 살랑거리는 나뭇잎들이 가을 소나타의 서주를 연주하는 계절이다.이번주 <씨네21>은 가을영화의 행렬을 예고하고 있다. 짧지만 미려한 소개글들에 마음이 살짝 설레더니 갑자기 코끝에서 어린 시절 엄마로부터 얻어 입었던 추석빔의 새옷 냄새가 맡아지고, 한가위 특유의 넘치는 듯한 풍성함에 대한 묘사로부터 시작하는 대하소설 <토지>가 이내 떠올랐다.전환기의 청춘이 흔히 그렇듯이 정신적인 홍역을 호되게 앓던 시절,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방콕’하며 여러 대하소설을 끼고 살았더랬다(아, 그 풍성한 시절을 왜 비참한 슬럼프라고만 생각했던 것일까?). 그중에서 <토지>는 내리닫이로 두 바퀴 반을 읽었는데(세 번째 바퀴가 채워지기 전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거기 나오는 여러 인물 유형과 직업군
대목과 소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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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도 등급이 있다면 그 마지막 단계쯤에 해당하는 말이 ‘먹먹하다’가 아닐까 싶다. 대성통곡이라는 것도 남이 내 슬픔에 공감할 기회를 주거나 아니면 여기서 무너지지 않겠다는 자기 보존의지의 표현이라고 느껴진다. 그런데 마음이 먹먹해지면 그것마저도 귀찮아진다.나는 이런 유의 먹먹함을 느낀 적이 있다. 어떤 죽음에 대면했을 때의 일이다. <씨네21> 창간 당시 기자로 입사해서 잡지 만들 준비하느라 정신없던 나날이었다. 나는 그 죽음 앞에 멀뚱히 서서 나에게 물어보았다. 만약 메피스토펠레스가, 떠난 영혼을 돌려줄 테니 너의 영혼을 내놓겠느냐고 흥정해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었다.그 일을 전후로 성수대교가 끊어지고 삼풍백화점이 주저앉았다. 개인의 붕괴와 사회의 붕괴가 강렬한 하나의 이미지로 결합되어 꿈에 나타났고, 사막처럼 뜨겁고 건조한 허무, 조와 울이 교체하는 생의 리듬이 몇년이나 지속되었다. 그 죽음에 엉킨 개인과 가족, 사회와 제도의 문제에 대해서, 분석하기 좋아하는
먹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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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인이나 집단에 시간이 늘 동일하게 감각되는 것은 아니다. <씨네21>에 지난 한달은 통상성을 뛰어넘는 응축과 확장의 느낌을 동시에 준 시기였다. 그 사이에 3중의 변화가 있었다.<씨네21>이 한겨레신문사의 품을 떠나 2003년 8월1일자로 ‘씨네21주식회사’라는 독립법인이 되었다. 1995년 창간 이래 맞이한 최대의 변화로, <씨네21>이 미디어로서 지니고 있는 잠재력을 다양하게 펼쳐보자는 의지의 소산이다.이에 맞추어 한동헌 대표이사가 취임했다. 본사와 아무런 연고없이 순수 공모를 통해 초빙되었는데, 학문적 배경과 대기업의 첨단-중추분야에서의 경력, 문화계의 오랜 연고를 겸비했고 심지어 김광석의 <나의 노래> 작곡자라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그리고 편집장이 바뀌었다. 편집장으로서의 3년을 포함, 도합 5년간 <씨네21>에 헌신했던 허문영 전 편집장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분사를 한달 앞둔 시점에 사직했다. 아마도 새 술은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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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냉이를 오도독 오도독 깨물며 에디토리얼을 궁리하는 이 시간에, <씨네21> 사무실 곳곳에서는 작은 수런거림과 웃음소리가 여기저기 굴러다닌다. 한주 동안의 고심과 노동을 털어낸 취재와 사진, 자료쪽 기자들이 장난도 치고 다음주 작업에 대해 의논하는가 하면, 마감 독려해가며 원고를 매만지고 꾸미느라 숨이 턱에 닿았던 편집과 교열 기자들도 발걸음을 늦춘 채 농담 대열에 가세한다. 디자인 마무리에 한창이거나 제작 인쇄를 준비하는 동료들은 긴장의 도가 아직 덜 낮아졌을 것이다.일터에서 행복을 구하는 건 어지간한 배짱이 아니면 갖기 어려운 태도겠지만 그래도 지금의 찰나적인 여유를 누리는 동료들이 발산하는 느낌은 따뜻하다. 세상 곳곳의 일터와 삶의 현장에서 가끔씩 벌어지는 풍경일 터이다.나의 상상은 고등학교 시절의 선인장 이야기로 점프컷한다. 지금은 세상에 없는 혜강이라는 친구네는 난을 키워서 파는 일을 했다. 세심하게 관리된 난초들 사이로 동그랗고 커다란 선인장이 몇개 놓여 있었는
장난기 많은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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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보면 사람들은 무작정 애정을 갖게 되는 대상들을 제각기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건 영화나 음악일 수도, 어떤 생명체일 수도, 혹은 특정한 순간일 수도 있다. 그게 비슷할 때 우리는 사람끼리도 비슷하다거나 서로 통한다고 이야기한다.나에게는 쌈지공원이 그런 것 중 하나이다. 옷에 매달고 다니던 작은 주머니라는 뜻의 쌈지에서 유래했을 이 명칭은, 도시 곳곳의 조그만 귀퉁이들에 나무를 심고 의자를 놓아 휴식할 수 있게 만든 공간을 가리킨다. 그것은 빌딩 사이의 세모난 콘크리트 땅이나 동네 은행 앞 등 예기치 못한 곳에 나타난다.<씨네21>이 자리잡고 있는 곳에도 쌈지공원이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흔히들 만리동 고개라 부르는, 공덕동 언덕배기에 자리잡은 한겨레신문사는 건물 모양이 희한해서 6층과 9층에 각각 옥상이 있다. 거기에 화단을 둘러 꽃을 심었고, 서너뼘짜리 물길도 내어 그 위에 앙증맞은 나무다리까지 얹었는데 심지어 물고기도 산다. 나무로 만든 벤치는 오늘처럼
쌈지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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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겨울, 동료들과 함께 늦은 대화를 마치고 카페 문을 나설 때였다. 느닷없이 내린 눈발이 나지막한 담장 위에 고스란히 쌓여 있었는데, 새끼손톱만한 크기의 눈송이들이 녹거나 흐트러지지 않고 서로 몸을 기댄 채 가로등 빛을 받아 일제히 반짝였다. 허리를 굽혀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눈의 결정체들은 어느 것 하나 서로 같지 않았고,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눈송이 하나도 이러할진대 천지간의 우주는 어떻겠느냐는 어느 책 한 구절을 감동적으로 회상했다.우주물리학은 나에게 접근을 허락지 않는 어려운 세계이지만 그래도 쉽고 아름답게 쓰여진 대중서를 통해 간혹 그쪽 세상을 구경하곤 한다. 최초의 경험은 <우주의 역사>라는 책이었는데, 20세기의 인류가 겨우 도달한 우주에 관한 지식을 정리하면서 그 한계를 이렇게 요약했다. 고대 동양의 어떤 민족은 우주가 거북이 열몇 마리를 엎어놓은 것처럼 생겼다고 믿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동그랗고 평평한 우주 모델이 거북이 모
우아한 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