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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영화를 보다가 내 이름이 나와서 놀라는 경우가 있다. 어린 시절 봤던 TV드라마 <달동네>에서 안소영의 애인 이름이 동철이었고 <살인의 추억>에선 송재호가 분한 수사반장 이름이 동철이었다.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흡혈형사 나도열>에 나오는 악당 이름은 성까지 같아서 남동철이란다. 꽤 촌스런 이름인데 그래서인지 캐스팅이 상당히 잘된다. <천하장사 마돈나>를 보니 주인공 동구의 동생 이름이 동철이다. 주인공 이름으로 캐스팅되진 않아도 주변 인물 이름으론 그럴듯한 모양이다. 영화를 보고나니 동철이 이름으로 형 동구에게 편지 한통을 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 잘 지내? 형보다 20살도 더 많은 내가 형이라고 부르니까 어색하지만 감독이 동구 동생 동철이라고 이름지은 거니까 이해해줘. 옛날에 홍길동이란 사람은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고 동생을 동생이라 부르지 못해 가출을 하기도 했다니까 나 확 가출해버리기 전에 그냥 내 맘대로 형이라
[편집장이 독자에게] 동구에게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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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을 보면 영화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사람은 영화를 통해 자기 삶을 대신 살아보는 경험을 하며 그런 점에서 영화는 그 사람이 살아본 물리적 시간보다 오래 살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극장에서 만나 데이트를 하고 나온 소년 소녀가 나누는 가벼운 대화 속에 들어 있어 크게 의미심장한 느낌은 없지만 영화에 대한 감독 자신의 생각이 투명하게 들어 있는 말이다. 그 뒤로 한동안 삶을 대신 살아보는 영화, 라는 말을 곱씹곤 했다. 쉬운 말이지만 정작 그런 영화를 흔히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할리우드가 장르로 발전시킨 영화의 대부분은 삶을 대신 살아보는 영화라기보다 꿈을 대신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잘 만든 영화라고 하더라도 스필버그나 피터 잭슨의 영화를 보면서 삶을 대신 살아본다는 느낌을 갖긴 어렵다. 반면 에드워드 양이나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를 볼 때는 삶을 대신 살아본다는 느낌을 강렬히 받는다. 그리고 이런
[편집장이 독자에게] 강추! 나루세 미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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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필버그의 영화 <뮌헨>에서 인상적인 대목 하나.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이 뮌헨올림픽 선수촌에 들어가 이스라엘 선수들을 납치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스라엘이 발칵 뒤집힌다. 당시 이스라엘 총리인 골다 메이어는 에릭 바나가 연기한 주인공을 집으로 초대해 팔레스타인 테러조직의 요인들을 암살하는 비밀지령을 내린다. 무시무시한 암살명령이 이뤄지는 상황이지만 영화에서 묘사된 집안의 분위기는 너무도 평화롭고 아늑하다. 당시 정치상황을 잘 모르는 관객이라면 자상한 할머니가 오랜만에 장성한 손자를 만나 반갑게 대화하는 장면처럼 보일 정도다. 정부의 최고지도자가 직접 요인암살을 지시하는 장소라면 으리으리한 총리관저나 은밀한 제3의 장소가 적당할 것 같지만 <뮌헨>에선 평범하고 일상적 공간에서 음모가 진행된다. 오늘 저녁은 뭘 먹지, 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투로 그놈들을 다 찾아서 죽여버려, 라고 말한다. 지금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습도 그런 식으로 시작됐을 것 같다.
레바논 공
[편집장이 독자에게] 레바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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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국적이 절대적 의미를 갖는 건 아니지만 나라마다 잘하는 장르가 있다. 모든 장르에서 할리우드가 독보적인 입지에 서 있다 해도 조금 더 세분해 들어가면 특별히 눈에 띄는 분야가 보인다. 예를 들어 70~80년대 이탈리아에선 ‘지알로’라 불리는 공포스릴러가 특산물이었다. 히치콕 영화를 자극적 색채감각으로 덧칠한 듯한 이 영화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탈리아를 가장 독특한 공포영화를 만드는 나라로 인식하게 했다. 그런가 하면 영국에선 위기에 처한 탄광촌 또는 실업으로 허덕이는 소도시를 배경으로 서민정서에 호소하는 영화가 꾸준히 만들어진다. 존 포드의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 빚지고 있는 이 장르는 90년대 이후 <풀 몬티> <빌리 엘리어트> <브래스드 오프> 등을 통해 다시 한번 각광받았다. 홍콩에선 홍콩누아르라는 변종장르가 대표 격이다. 이 장르는 홍콩영화의 침체와 더불어 힘을 잃은 듯 보였으나 <무간도> 시리즈를 통해 ‘썩어
[편집장이 독자에게] 일본 젊은 영화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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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어김없이 물난리가 났다. 흙탕물이 집안 가득 들어찼고 소와 돼지가 강물에 떠내려갔으며 비닐하우스가 주저앉았다. 거동이 불편했던 할아버지, 할머니는 산사태가 나도 꼼짝 못해서 흙더미에 깔려 돌아가셨고 집도 가재도구도 몽땅 못 쓰게 된 일가족은 초등학교 강당에서 앞날에 대한 두려움에 떨며 새우잠을 자야 했다. 다시 한번 수재민 돕기 특별방송이 기획되고 천재지변을 어쩌겠냐는 관련 공무원의 말과 그걸 인용보도하며 인재임을 강조하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일인데 어째서 이 모든 사태를 올해도 꼼짝없이 앉아서 지켜봐야 하는가. 아마 그건 이 재난이 빈곤한 이들만 괴롭히기 때문일 것이다. 돈이 없어 수해방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그래서 수해를 당하면 가난해지고 다시 가난 때문에 이사를 못해 수해를 당하는 악순환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긴급구호자금이나 성금으로 떼어놓을 수 없는 가난과 재난의 동거 앞에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전염병 방지용 소독약을 뿌리는 것뿐이다. 집을
[편집장이 독자에게] 물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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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이 좋아하는 야쿠르트 스왈로스 야구팀의 경기를 보다가 날아가는 타구를 보고 이제 소설을 써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박민규는 TV에서 마이크 타이슨이 상대 선수의 귀를 물어뜯는 장면을 보고 소설 쓰기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런 식이라면 지단이 박치기하는 장면을 보면서 뭔가 중대한 결심을 했어야 했는데 나는… 그냥 박치기를 하고 싶어졌다. 어린 시절 프로레슬러 김일의 박치기를 보고 자란 세대라서 그런가.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파워풀한 박치기였다. 영웅다운 마지막 무대를 기대했는데, 어머나 박치기라니, 한동안 멍하더니 이번주 내내 머리 속에서 박치기 장면이 리플레이됐다. 아마 지난주에 지단을 현대의 신화라고 부른 글을 썼던 터라 더 그랬을 것이다. 내 멋대로 규정한 신화를 지단이 머리로 박살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난 7월13일 지단이 입을 열면서 진실게임은 2라운드로 접어들었다. 그동안 사람들마다 누구 잘못이 더 큰가를 놓고 갑론을박을 했다.
[편집장이 독자에게] 박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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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단의 은퇴경기가 될 것이다.” 라울은 그렇게 말했다 스페인행 보따리를 쌌다. “지단의 마지막 경기가 될 것이라 유감이다.” 브라질의 카를로스도 그렇게 말했다 고국에서 팬들의 야유에 직면했다. ‘지단의 저주’라는 말이 돌 정도로 지네딘 지단이 이끄는 프랑스팀은 그들을 비웃는 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버렸다. 지단의 저주가 무서웠는지 4강전 상대 포르투갈은 지단의 은퇴 운운하는 얘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역시 지단의 페널티킥 골을 먹고 독일을 떠났다. 98년 프랑스에 월드컵을 안겨준 34살 축구선수 지단은 그렇게 돌아왔다. 월드컵이 시작되기 전에 은퇴 발표를 한 선수가 이만큼 잘하리라는 건 지단의 열혈팬조차 예측 못한 것이리라. 브라질과의 8강전. 지단이 그 유명한 마르세유 턴(360도 회전해서 수비수를 따돌리는 지단 특유의 개인기)으로 수비수 서넛을 제치고 무인지경에 패스를 넣어주는 장면을 보며 소름이 돋았다. 축구팬으로서 지단의 시대를 함께할 수 있어 고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편집장이 독자에게] 지단, 현대의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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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크백 마운틴>을 보면서 의아했던 대목이 있다. 에니스는 왜 가난한 걸까, 라는 의문. 60년대부터 20년에 걸친 이야기 내내 에니스는 늘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고 있었다. 위자료와 양육비를 마련하느라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혼 전에 잘살았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잭이 로데오에 집착하는 이유도 금방 짐작하기 힘든 것이었다. 카우보이의 삶에서 로데오가 어떤 의미인지를 체감하지 못한 탓이다. 존 알퍼트의 다큐멘터리 <라스트 카우보이>는 이런 궁금증을 해소하는 데 유용한 작품이다. 7월10일부터 열리는 EBS국제다큐멘터리페스티벌의 존 알퍼트 회고전에서 소개될 이 영화는 사우스 다코타주 포큐파인이라는 작은 마을에 사는 베른이라는 카우보이의 삶을 그리고 있다. 감독 존 알퍼트는 1980년부터 2003년까지 23년간 간헐적으로 베른의 목장을 찾아갔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배경인 와이오밍이 아니라 사우스 다코타이긴 하지만 <라스트 카우보이>가 그
[편집장이 독자에게] 다큐멘터리가 그리운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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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다. 19세기 말 러시아 리얼리즘 화가 일리야 레핀의 작품으로 유배를 갔던 남자가 갑자기 집안에 나타나자 당황하는 가족의 모습을 담고 있다. 아내는 놀라 일어서고 아이들은 초라한 몰골의 사내를 보고 겁에 질린 표정을 짓는다. 아마도 여인은 남편이 유배를 떠난 뒤에 새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그래서 갑작스러운 남편의 등장에 기뻐하기보다 난감해하는 것이리라. <수퍼맨 리턴즈>의 설정은 어쩌면 이 그림에서 영감을 얻었는지 모르겠다. 5년 전 작별인사도 없이 떠났던 슈퍼맨이 클라크 켄트의 모습으로 등장할 때 로이스는 그를 반기지 않는다. 로이스의 옆엔 남편과 아들이 있고 로이스는 “왜 우리는 더이상 슈퍼맨이 필요없는가”라는 기사로 퓰리처상을 받을 예정이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처럼 슈퍼맨은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되어 돌아온다. <수퍼맨 리턴즈>가 주목하는 것이 ‘슈퍼맨의 비애’일 것이란 예고이다.
[편집장이 독자에게] 슈퍼맨의 비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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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은 힘이 세다. 여자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남자들은 대체로 20대가 넘어서야 의상의 힘을 깨닫는다. 언제? 대체로 예비군 훈련 받으러 갈 때다. 군복만 입으면 평소 의젓하던 남자들도 수컷 냄새를 흘린다. 남자들만 있던 중·고등학교처럼 욕설과 음담패설이 거리낌없이 흘러나온다. 평소 욕이랑 안 친하던 나도 “새끼”라는 말이 절로 흘러나와 스스로 대견(?)한 적이 있다. 군복을 벗고 다닐 때는 아무 느낌도 없던 신경세포들도 군복 안에선 예민해진다. 평소에 봤으면 그냥 지나쳤을 여성의 노출에 일제히 눈길이 쏠리고 휘파람이 흘러나온다. 군복만 입으면 짤짤이(동전치기)를 하고 싶은 것도 기이한 현상이다. 게다가 배는 왜 그리 일찍 고파지고 단것은 왜 그리 먹고 싶어지는지. 예비군 훈련장에서 제시간에 밥을 안 준다면 분명 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신기한 것은 군복만 벗으면 그런 궁기나 허세, 음흉함과 난폭함이 맥을 못 춘다는 사실이다. 옷에 주술적 힘이 있다는 걸 그런
[편집장이 독자에게] 옷은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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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CJ CGV가 발표한 5월 통계에 따르면 한국영화 점유율이 33.9%라고 한다. 올해 1월 77.6%까지 치솟았던 수치가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다. 1월엔 <왕의 남자>가 관객몰이를 했고 5월엔 <미션 임파서블3>과 <다빈치 코드>가 휩쓸었으니 이런 점유율이 나오는 게 당연할 것이다. 그래도 극장업계엔 희소식인 것이 할리우드영화 두편 덕에 올해 5월 관객 수가 여름 성수기인 지난해 7월의 관객 수보다 많다는 점이다. 여름 성수기가 일찍 시작된 탓이지만 이런 추세가 6, 7월로 넘어간다고 꺾일 것 같진 않다. <포세이돈>이 개봉일 관객동원 신기록을 세웠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걸 보면 올 여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위력은 굉장하다는 느낌이 든다.
연이어 개봉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극장가를 잠식하는 가운데 7월1일부터 스크린쿼터도 축소된다. 일부에선 당장의 한국영화 점유율을 들어 쿼터 축소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지금 상
[편집장이 독자에게] 대박 아니면 쪽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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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칸영화제 경쟁부문 마지막 상영작은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이었다. <아들의 방> <피아니스트> <멀홀랜드 드라이브>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등이 상을 나눠가진 그해 영화제에서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은 거장에 대한 예우 차원의 초청처럼 보였다. <나라야마 부시코>와 <우나기>로 두번씩이나 황금종려상을 받은 노장이 유작이 될지 모르는 작품을 내놓았으니 초청작 명단에 포함시키는 게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따라서 영화를 보는 입장도 아주 편안했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였으면 했는데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은 정말 그랬다. 칸영화제처럼 낯선 작가영화가 우루루 쏟아지는 곳에서 부담없이 울고 웃을 수 있는 영화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보이기도 한다. 난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뻔뻔하게 야한 할아버지, 좋아 좋아.”
그해 칸영화제에 이마무라
[편집장이 독자에게] 나라야마에 눈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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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인이라는 말을 언제부터 쓰게 됐을까. 기억이 맞다면 <다모>가 시초이겠으나 <다모> 이전에도 폐인은 많았다. 고백하자면 나도 폐인이었다. 이주일, 심형래, 최양락, 이창훈 등 당대를 주름잡던 코미디언들이 10대 시절 나의 우상이었다. 그들의 몸동작을 흉내내고 유행어를 따라하면 친구가 생겼고 대화가 통했다. 커서 뭐 되려고 하며 쯔쯧 혀를 차는 어른들 때문에 정말 커서 뭐가 되려고 이러나 싶었지만, 보고 있으면 웃긴데 어떻게 참고 안 보나. 그래서인지 코미디가 애들을 버린다는 말을 들으면 뜨끔하다. 내가 그들의 주장을 입증하는 사례일까. 그럼 영구 흉내를 잘 냈던 종팔이는, 맹구를 따라했던 삼득이는? 걔들도 다 인생 종쳤나. 잘만 사는 것 같던데. 코미디가 애들을 버린다는 말은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어, 라고 쓴 원시 동굴 벽화의 글귀 같은 게 아닐까. 코미디를 예로 들었지만 실은 TV라는 것 자체가 늘 욕을 먹었던 대상이다. 오죽하면 TV를 끄자, 는 운동이
[편집장이 독자에게] 폐인들이여, 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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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국회의사당의 둥근 지붕이 열리면 로봇 태권V가 나온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태권V를 숨겨놓은 게 아니라면 저렇게 넓은 곳에 돔 형태의 저런 건물을 지을 리가 없잖아.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고 모두 맞아, 맞아, 고개를 끄덕였다. 이소룡이 살아 있다는 소문도 꽤 그럴싸하게 들렸다. 무술고수 수십명과 싸움을 하다 여러 군데 칼에 찔렸지만 적들을 모두 해치우고 마침내 속세를 떠나 은둔생활에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영화 속에서 불사신이었던 이소룡을 본 아이들은 이번에도 맞아, 맞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돌아보면 어처구니없지만 동심은 그런 음모론에 이끌렸다. 세상을 잘 몰랐을 때 할 수 있는 상상이었다.
그에 비해 오늘날 음모론은 대단히 정교하고 파괴력도 높다. 이런 계통의 기념비로 꼽힐 만한 <X파일>은 세련된 음모론 덕분에 미국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미궁에 빠진 세계사의 100대 음모론>이라는 책에서 저자 데이비드 사우스웰은 이렇게
[편집장이 독자에게] 즐거운 음모론, 슬픈 음모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