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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2주년 기념호를 읽은 독자 한분의 이메일을 받았다. 황은하라는 이름의 독자는 전주영화제에 갈 수 없는 설움과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책을 사서 봤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번호는 솔직히 영화제에 대한 위로 이상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잡지를 읽으면서도 도무지 불안하지 않았으며 늘어진 (영화에 대한) 애티튜드의 나사를, 헨리 제임스의 소설 제목처럼 회전시켜 조일 수 있었죠. 정윤철 감독이 만든 세 가지 특급 요리가 즐거웠습니다. 다시 영화가 하나의 특권으로 제게 배달될 것만 같습니다. 정확히 무엇이 현을 건드렸는지는 딱 짚어 말하지는 못하겠네요. 박신양씨처럼 도덕시간에 졸아 감사를 전할 수는 없고 대신 시를 씁니다.” 황은하씨는 <나쁜 교육> <별점에 대하여> <떨림에 대하여>라는 세편의 시를 선물로 보내왔다. 지면에 다 싣긴 힘들지만 마음에 와닿았던 <별점에 대하여>라는 시의 한 대목을 인용해본다.
만약 어떤 영화를 보고 벽에 머리를
[편집장이 독자에게] 선물로 받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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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왜 보냐고요? 아무래도… 가오가 살잖아요.” 지면 개편을 위해 독자 몇명을 불러 벌인 토론에서 나온 말이다. ‘가오’라는 표현이 바르진 않지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씨네21>이 가오가 있어야 돼, 라며. 가오라는 표현을 쓴 독자도, 고개를 끄덕인 나도 가오가 겉멋이나 허세라고 생각하진 않았으리라. 뭔가 있어 보이는 잡지, 아니 진짜 뭔가 특별한 게 있는 잡지. 창간 12주년을 맞으면서 “초심을 잃지 말라”는 독자들의 당부가 뜻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특별한 뭔가를 만들겠다는 다짐을 담은 이번호의 특집기사는 정윤철 감독이 만든 것이다. 늘 영화인을 취재대상으로 만나는 우리 입장과 반대로 영화인이 직접 영화기사를 만들면 재미있지 않을까 싶어 내놓은 아이디어였다. 정윤철 감독은 이 제안에 흔쾌히 응했고 평론가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 감독이 평론가에게 묻고 싶은 말이 많겠지, 아니, 항의하고 싶은 게
[편집장이 독자에게] 창간 12주년의 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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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서울여성영화제를 찾았던 관객이라면 <씨네21>에서 만든 영화제 일간지를 접했을 것이다. 그동안 부산, 전주, 부천 등 여러 영화제에서 이런 일간지를 만들었지만 올해 9회를 맞은 서울여성영화제의 일간지를 만든 건 처음이다. 짐작대로 영화제 일간지를 만드는 것은 고된 일이다. 매일 돌아오는 마감에 맞추려면 잠을 줄이고 끼니를 거르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극장을 찾은 관객들이 일제히 <씨네21> 일간지를 펼쳐 읽는 모습을 볼 때면 일의 보람을 느끼게 된다. 거기다 누군가 잘 읽었다는 한마디만 덧붙여주면 쌓인 피로도 잊곤 한다. 이번 여성영화제 일간지는 취재 박혜명, 최하나, 편집 심은하, 권은주, 사진 서지형, 디자인 김차인애, 객원기자 정김미은 등의 노력으로 만들어졌다. 마지막 일간지 마감을 마치고 몇 명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번 일간지에 대해 박혜명 기자는 “명품 데일리였다”고 말했다. 물론 웃으라고 한 말이지만 만드는 사람들이 자부심을 느끼며 일했다는 얘기
[편집장이 독자에게] 명품 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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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어떤 영화들은 자꾸 뒤를 돌아보게 만든다. 스쳐지나간 그곳에 흘린 것은 없는지, 놓쳐버린 것은 없는지, 잊은 것은 없는지. 기억을 헤집으면 아스라이 떠오르는 잔상들이 쓰지 않던 감각을 일깨운다. 오즈 야스지로, 나루세 미키오, 허우샤오시엔, 에드워드 양 등 이런 영화의 대가들은 노스탤지어에 투항하는 법이 없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되 향수에 머물지 않고 후회와 탄식의 눈물을 자아내는 경지를 보면서 사람들은 ‘거장’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곤 한다. 임권택의 <천년학>은 그런 영화다. <씨네21> 27쪽을 할애한 이번 특집은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를 기념하는 의례적인 기사가 아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감독 임권택에 대한 예의 이전에 <천년학>이 걸작이기 때문이다.
<천년학>은 사연 많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로도, 소리라는 사라진 예술에 관한 이야기로도, 인정사정 볼 것 없던 한국의 근대화에 대한 이
[편집장이 독자에게] 걸작 <천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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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에 <우아한 세계>와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봤다. 스타일이나 소재가 전혀 다른 영화지만 두 작품엔 공통점이 있다. 웃고 즐기며 보다가 예기치 못한 대목에서 눈물이 흐른다는 점, 그리고 곱씹어보면 겉보기와 달리 심각한 비극이라는 점. 먼저 <우아한 세계>에서 송강호가 연기하는 주인공 인구를 보자. 조폭 중간보스인 그의 꿈은 멋진 전원주택에서 아내와 딸을 데리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그는 이번 건만 잘 처리하면 그렇게 될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손에 피를 묻히고 밤잠을 설치며 등이 칼에 찔릴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한다. 부동산 중개업자가 보여준 근사한 고급 주택에서 인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집에 담고 싶은 모든 가치 힐스테이트? 모두가 꿈꾸는 그곳 자이? 숱한 아파트 CF가 유도한 대로 어떤 착각을 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좋은 집에 행복이 있다는 인구의 오해는 이중적인 방식으로 그를 불행으로 내몬다. 열심히 일할수록 조직도 그를
[편집장이 독자에게] 바보 같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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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을 보다 속으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 얼마 만에 보는 노골적 백인 우월주의인가’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 <씨네21> 홈페이지와 포털 사이트를 뒤져보니 역시나 활발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입장과 영화에 숨은 이데올로기를 봐야 한다는 입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고 별 반개부터 별 다섯개까지 영화에 대한 평가도 극단적으로 갈렸다. 이번호 독자면을 찬반논쟁에 할애한 것은 그래서다. 나로 말하면 영화를 볼 때 정치적 함의에만 매몰되면 나무만 보고 숲을 못 보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300>을 보면서 정치적 의미를 지우고 즐기는 일은 불가능했다. 정치적 의미를 따져보는 흥미를 빼고 <300>을 보라는 건 피 한 방울 흘리지 말고 살만 1파운드를 떼어가라는 <베니스의 상인>식 판결과 다를 바 없다. 나의 뇌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일까? 주변부 아시아인의 콤플렉스나 피해의식이 작동한 것이라고
[편집장이 독자에게] <300>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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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기술 발전의 산물이고 19세기 말의 발명품이다. 영화의 예술성은 비교적 나중에 드러났는데 짐작건대 그전까지 영화를 보러가는 사람들은 발명품 전시회를 찾을 때와 비슷한 마음가짐으로 극장을 찾았을 것이다. 영화가 발명품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종종 오해가 벌어지곤 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기술이 발전할수록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다. 20세기 초의 사람들이 <매트릭스>나 <반지의 제왕> 같은 영화를 상상할 수 없었다는 걸 생각하면 타당한 얘기이지만 꼭 맞는 얘기는 아니다. 피터 잭슨의 <킹콩>이 수공업적 특수효과로 만든 1933년작 <킹콩>보다 우월하다고 말한다면 그건 누구나 수긍할 만한 주장이 아니다. 거꾸로 기술 발전이 영화 고유의 예술성을 파괴한다고 믿는 경우도 있었다. 유성영화가 처음 등장했을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소리의 등장에 반대했다. 정돈된 시각예술을 혼돈의 현실로 밀어넣는 시도라 여겼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술 발
[편집장이 독자에게] 무성영화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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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만큼 재미있는 구경거리는 없다. 신문 정치면에 관한 얘기가 아니다. 그렇게 안 보여줄 것 뻔히 아는데 보여줄 게 있는 것처럼 떠들어대는 정치는 사람을 흥분시키지 못한다. 번번이 홀랑 다 벗는다고 목청을 높이지만 어디 한두번 속나. 보는 사람이나 보여주는 사람이나 안 벗을 거 다 아니까 영 긴장감이 생기질 않는다. 직업으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다 벗지 않고 남겨두는 게 있다. 전두환의 비밀계좌처럼 볼썽사나운 가리개가 전복적 영화가 될 수 있었던 것을 싸구려 비디오 에로물로 전락시킨다. 정치가 재미없다는 편견은 그래서 생긴다. 그런데도 정치만큼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없다고 말한 건 정치가 청와대나 국회의사당이 아니라 엉뚱한 데서 작동할 때이다. 가릴 거 다 가리는 정치인들과 달리 직업 정치인이 아닌 사람들의 정치는 종종 알몸 다 보여줄 때까지 거침이 없다. 황우석 사건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연일 반대증거가 제시되고 배신자가 속출했던 그때는 정말 입이 바짝 타는 긴
[편집장이 독자에게] 희생양 장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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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마틴 스코시즈가 오스카를 받았다. 40년 가까이 미국영화를 대표하는 이름이었음에도 5전6기 만에 감독상을 탄 것이니 본인이나 지켜본 사람들이나 특별한 감격을 느꼈으리라. 문제는 이번에 감독상과 작품상을 탄 작품이 <디파티드>라는 점. 미국 평단에선 비교적 호평을 받았으나 결코 스코시즈의 대표작이 될 수 없는 영화였기에 수상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개운치가 않다. 물론 스코시즈 말고 누가 받았어야 옳으냐는 것은 좀 애매하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 때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택했는데 또 한번 스코시즈를 물먹이긴 곤란했을 테고 <바벨> <더 퀸> <미스 리틀 선샤인> 등 다른 작품상 후보작은 그리 굉장한 영화라는 느낌이 안 든다. 이렇게 뚜렷한 대안이 없을 때 미뤘던 숙제하듯 스코시즈한테 작품상까지 몰아주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했으리라. 이번호에 실린 기획기사 ‘아카데미, 오판과 뒷북의 역사’를 보면 그런 과정에서 오스카가 놓친 걸작
[편집장이 독자에게] 아카데미 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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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에게 특권이 있다면 누구보다 빨리 해당 잡지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인쇄된 책을 먼저 보는 건 제작담당자의 몫이지만 인쇄 직전 단계의 기사나 사진은 편집장의 검열을 거치게 마련이다. 다시 말하자면 편집장은 잡지의 첫 번째 독자로 비평적 코멘트를 하는 사람이다. 편집장에게 보람이 있다면 그렇게 가장 먼저 읽은 잡지가 무지 재미있다고 느낄 때다. 본분을 잊고 글 읽는 재미, 사진 보는 재미, 디자인 보는 재미에 빠져들 때마다 얼른 이 잡지를 세상에 선보이고 싶어진다. 물론 자뻑 분위기는 경계해야겠지만 어느 정도 자뻑하지 않고 잡지를 만든다는 건 불가능할 게다. 충분치 못하다는 자책과 뭔가 빠진 것 같다는 불안과 함께 피그말리온 이야기처럼 스스로 만든 대상과 사랑에 빠지는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 한주 한주 자책과 불안과 사랑의 비중이 조금씩 달라질 뿐이다.
12년간 매주 만드는 잡지도 그러한데 창간하는 잡지라면 오죽하랴. 자책과 불안과 사랑의 파장이 하루에도 수십번 극에서 극으
[편집장이 독자에게] 개봉박두! <팝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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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지가 1년에 2번 남보다 좋을 때가 있으니 설과 추석이다. 합본호를 만들고 남들 일할 때 쉬는 달콤한 1주일. 불공평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으나 인쇄소, 우체국, 가판대 등도 설과 추석엔 쉬어야 하니 독자 여러분도 이해하리라. 이번 설 합본호를 만들면서 보니까 2주간 개봉작만 16편이 넘는다. 이미 극장에 걸려 설 연휴까지 이어질 영화들까지 합치면 30편 가까운 영화들이다. 2월 말 아카데미 시상식이 있어서 이번엔 해외에서 호평받은 작품들도 많다. <바벨> <더 퀸> <드림걸즈> <리틀 칠드런> <아버지의 깃발> 등이 오스카 특수를 기대하는 작품들이다. 그런가 하면 <쓰리 타임즈>나 <눈에게 바라는 것>처럼 아시아에서 호평받은 영화들이 있고 <1번가의 기적> <복면달호> 등 한국 코미디들도 명절 대목을 노리고 있다. 풍성한 식탁이 차려진 것 같아 입에 침이 고이지만 걱정스런 점도 있다.
[편집장이 독자에게] 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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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을까? 이번호 인터뷰 지면에서 매그넘의 사진작가 엘라이 리드는 “그렇다”고 말했는데 역사적으로도 그런 믿음을 뒷받침 할만한 증거는 많이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신작 <아버지의 깃발>에 따르면 2차 세계대전 때도 사진 한장이 미국의 승리에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고 한다. 일본의 작은 섬 이오지마에 성조기를 꽂는 군인들을 찍은 사진. 문제는 이 사진이 그리 극적인 상황에서 찍힌 게 아니라는 데서 발생한다. 사진 속 주인공들은 미국에 돌아와 영웅으로 대접받으며 전쟁공채 판매를 위해 동원되지만, 나는 영웅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자리를 훔쳤을 뿐이라는 죄의식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영웅이 필요했던 국가는 그들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진실은 전쟁으로부터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드러난다. <아버지의 깃발>은 이처럼 영웅신화를 다시 쓰는 영화다. 이스트우드는 이런 이야기를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도 보여준 적 있는데 이번엔 서부극
[편집장이 독자에게] 개봉촉구!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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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미녀는 괴로워>가 한국영화 역대 흥행순위 10위에 올랐단다. 1월24일까지 전국 585만명을 넘었고 600만명 돌파가 기정사실로 보인다는 것이다. 종전까지 역대 흥행 10위 자리를 지켰던 <공동경비구역 JSA>를 10위권 밖으로 밀어내는 결과이니, 새삼 놀랍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쉬리>의 기록을 넘었느니 못 넘었으니 다투며 한국영화 역대 흥행 1위 자리에 이름을 올렸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코미디영화로는 <투사부일체>가 <미녀는 괴로워>보다 많은 관객을 동원했지만 조만간 추월당할 가능성이 크다. 상대적으로 적은 제작비를 들이는 코미디 장르라 편당 수익률로 따지면 상위 5위 안에 들 만한 결과다. <미녀는 괴로워>가 이런 인기를 끈 이유는 무엇일까? 김아중의 신선한 매력? 귀에 쏙 들어오는 노래? 성형이라는 소재의 힘? 대중영화의 기본기를 지키는 연출력? 눈길을 사로잡는 마케팅과 적절한
[편집장이 독자에게] 미녀는 괴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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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열심히 보는 TV프로그램이 두개 있다. <거침없이 하이킥>과 <하얀거탑>. 두 프로가 다루는 세계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지만 어떤 면에선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권력을 둘러싼 다툼을 하나는 가족코미디로, 다른 하나는 정치드라마로 풀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엉뚱한 상상을 할 때도 있다. <거침없이 하이킥>의 서민정 선생이 <하얀거탑>의 병원에서 일하면 어떻게 될까 같은. 서민정 선생이 장준혁 교수 앞에서 토끼옷 코스프레를 하고 이렇게 외친다. “저 선생님이 생각하는 그런 여자 아니에요. 저 닳고 닳은 여자란 말이에요.” 아마 장준혁 교수는 진지한 목소리로 이렇게 반응하겠지. “서민정 선생은 당장 뇌수술이 필요한 환자이니 빨리 입원조치를 하죠.” 반대로 <하얀거탑>의 장준혁 교수를 <거침없이 하이킥>의 이순재 한방병원에 모시고 오면 어떨까. 장준혁 교수가 힘주어 말할 때마다 해미가 “오~케이,
[편집장이독자에게] <거침없이 하이킥>과 <하얀거탑>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