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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을 보다 속으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 얼마 만에 보는 노골적 백인 우월주의인가’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 <씨네21> 홈페이지와 포털 사이트를 뒤져보니 역시나 활발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입장과 영화에 숨은 이데올로기를 봐야 한다는 입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고 별 반개부터 별 다섯개까지 영화에 대한 평가도 극단적으로 갈렸다. 이번호 독자면을 찬반논쟁에 할애한 것은 그래서다. 나로 말하면 영화를 볼 때 정치적 함의에만 매몰되면 나무만 보고 숲을 못 보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300>을 보면서 정치적 의미를 지우고 즐기는 일은 불가능했다. 정치적 의미를 따져보는 흥미를 빼고 <300>을 보라는 건 피 한 방울 흘리지 말고 살만 1파운드를 떼어가라는 <베니스의 상인>식 판결과 다를 바 없다. 나의 뇌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일까? 주변부 아시아인의 콤플렉스나 피해의식이 작동한 것이라고
[편집장이 독자에게] <300>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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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기술 발전의 산물이고 19세기 말의 발명품이다. 영화의 예술성은 비교적 나중에 드러났는데 짐작건대 그전까지 영화를 보러가는 사람들은 발명품 전시회를 찾을 때와 비슷한 마음가짐으로 극장을 찾았을 것이다. 영화가 발명품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종종 오해가 벌어지곤 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기술이 발전할수록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다. 20세기 초의 사람들이 <매트릭스>나 <반지의 제왕> 같은 영화를 상상할 수 없었다는 걸 생각하면 타당한 얘기이지만 꼭 맞는 얘기는 아니다. 피터 잭슨의 <킹콩>이 수공업적 특수효과로 만든 1933년작 <킹콩>보다 우월하다고 말한다면 그건 누구나 수긍할 만한 주장이 아니다. 거꾸로 기술 발전이 영화 고유의 예술성을 파괴한다고 믿는 경우도 있었다. 유성영화가 처음 등장했을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소리의 등장에 반대했다. 정돈된 시각예술을 혼돈의 현실로 밀어넣는 시도라 여겼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술 발
[편집장이 독자에게] 무성영화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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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만큼 재미있는 구경거리는 없다. 신문 정치면에 관한 얘기가 아니다. 그렇게 안 보여줄 것 뻔히 아는데 보여줄 게 있는 것처럼 떠들어대는 정치는 사람을 흥분시키지 못한다. 번번이 홀랑 다 벗는다고 목청을 높이지만 어디 한두번 속나. 보는 사람이나 보여주는 사람이나 안 벗을 거 다 아니까 영 긴장감이 생기질 않는다. 직업으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다 벗지 않고 남겨두는 게 있다. 전두환의 비밀계좌처럼 볼썽사나운 가리개가 전복적 영화가 될 수 있었던 것을 싸구려 비디오 에로물로 전락시킨다. 정치가 재미없다는 편견은 그래서 생긴다. 그런데도 정치만큼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없다고 말한 건 정치가 청와대나 국회의사당이 아니라 엉뚱한 데서 작동할 때이다. 가릴 거 다 가리는 정치인들과 달리 직업 정치인이 아닌 사람들의 정치는 종종 알몸 다 보여줄 때까지 거침이 없다. 황우석 사건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연일 반대증거가 제시되고 배신자가 속출했던 그때는 정말 입이 바짝 타는 긴
[편집장이 독자에게] 희생양 장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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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마틴 스코시즈가 오스카를 받았다. 40년 가까이 미국영화를 대표하는 이름이었음에도 5전6기 만에 감독상을 탄 것이니 본인이나 지켜본 사람들이나 특별한 감격을 느꼈으리라. 문제는 이번에 감독상과 작품상을 탄 작품이 <디파티드>라는 점. 미국 평단에선 비교적 호평을 받았으나 결코 스코시즈의 대표작이 될 수 없는 영화였기에 수상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개운치가 않다. 물론 스코시즈 말고 누가 받았어야 옳으냐는 것은 좀 애매하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 때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택했는데 또 한번 스코시즈를 물먹이긴 곤란했을 테고 <바벨> <더 퀸> <미스 리틀 선샤인> 등 다른 작품상 후보작은 그리 굉장한 영화라는 느낌이 안 든다. 이렇게 뚜렷한 대안이 없을 때 미뤘던 숙제하듯 스코시즈한테 작품상까지 몰아주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했으리라. 이번호에 실린 기획기사 ‘아카데미, 오판과 뒷북의 역사’를 보면 그런 과정에서 오스카가 놓친 걸작
[편집장이 독자에게] 아카데미 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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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에게 특권이 있다면 누구보다 빨리 해당 잡지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인쇄된 책을 먼저 보는 건 제작담당자의 몫이지만 인쇄 직전 단계의 기사나 사진은 편집장의 검열을 거치게 마련이다. 다시 말하자면 편집장은 잡지의 첫 번째 독자로 비평적 코멘트를 하는 사람이다. 편집장에게 보람이 있다면 그렇게 가장 먼저 읽은 잡지가 무지 재미있다고 느낄 때다. 본분을 잊고 글 읽는 재미, 사진 보는 재미, 디자인 보는 재미에 빠져들 때마다 얼른 이 잡지를 세상에 선보이고 싶어진다. 물론 자뻑 분위기는 경계해야겠지만 어느 정도 자뻑하지 않고 잡지를 만든다는 건 불가능할 게다. 충분치 못하다는 자책과 뭔가 빠진 것 같다는 불안과 함께 피그말리온 이야기처럼 스스로 만든 대상과 사랑에 빠지는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 한주 한주 자책과 불안과 사랑의 비중이 조금씩 달라질 뿐이다.
12년간 매주 만드는 잡지도 그러한데 창간하는 잡지라면 오죽하랴. 자책과 불안과 사랑의 파장이 하루에도 수십번 극에서 극으
[편집장이 독자에게] 개봉박두! <팝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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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지가 1년에 2번 남보다 좋을 때가 있으니 설과 추석이다. 합본호를 만들고 남들 일할 때 쉬는 달콤한 1주일. 불공평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으나 인쇄소, 우체국, 가판대 등도 설과 추석엔 쉬어야 하니 독자 여러분도 이해하리라. 이번 설 합본호를 만들면서 보니까 2주간 개봉작만 16편이 넘는다. 이미 극장에 걸려 설 연휴까지 이어질 영화들까지 합치면 30편 가까운 영화들이다. 2월 말 아카데미 시상식이 있어서 이번엔 해외에서 호평받은 작품들도 많다. <바벨> <더 퀸> <드림걸즈> <리틀 칠드런> <아버지의 깃발> 등이 오스카 특수를 기대하는 작품들이다. 그런가 하면 <쓰리 타임즈>나 <눈에게 바라는 것>처럼 아시아에서 호평받은 영화들이 있고 <1번가의 기적> <복면달호> 등 한국 코미디들도 명절 대목을 노리고 있다. 풍성한 식탁이 차려진 것 같아 입에 침이 고이지만 걱정스런 점도 있다.
[편집장이 독자에게] 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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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을까? 이번호 인터뷰 지면에서 매그넘의 사진작가 엘라이 리드는 “그렇다”고 말했는데 역사적으로도 그런 믿음을 뒷받침 할만한 증거는 많이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신작 <아버지의 깃발>에 따르면 2차 세계대전 때도 사진 한장이 미국의 승리에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고 한다. 일본의 작은 섬 이오지마에 성조기를 꽂는 군인들을 찍은 사진. 문제는 이 사진이 그리 극적인 상황에서 찍힌 게 아니라는 데서 발생한다. 사진 속 주인공들은 미국에 돌아와 영웅으로 대접받으며 전쟁공채 판매를 위해 동원되지만, 나는 영웅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자리를 훔쳤을 뿐이라는 죄의식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영웅이 필요했던 국가는 그들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진실은 전쟁으로부터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드러난다. <아버지의 깃발>은 이처럼 영웅신화를 다시 쓰는 영화다. 이스트우드는 이런 이야기를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도 보여준 적 있는데 이번엔 서부극
[편집장이 독자에게] 개봉촉구!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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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미녀는 괴로워>가 한국영화 역대 흥행순위 10위에 올랐단다. 1월24일까지 전국 585만명을 넘었고 600만명 돌파가 기정사실로 보인다는 것이다. 종전까지 역대 흥행 10위 자리를 지켰던 <공동경비구역 JSA>를 10위권 밖으로 밀어내는 결과이니, 새삼 놀랍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쉬리>의 기록을 넘었느니 못 넘었으니 다투며 한국영화 역대 흥행 1위 자리에 이름을 올렸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코미디영화로는 <투사부일체>가 <미녀는 괴로워>보다 많은 관객을 동원했지만 조만간 추월당할 가능성이 크다. 상대적으로 적은 제작비를 들이는 코미디 장르라 편당 수익률로 따지면 상위 5위 안에 들 만한 결과다. <미녀는 괴로워>가 이런 인기를 끈 이유는 무엇일까? 김아중의 신선한 매력? 귀에 쏙 들어오는 노래? 성형이라는 소재의 힘? 대중영화의 기본기를 지키는 연출력? 눈길을 사로잡는 마케팅과 적절한
[편집장이 독자에게] 미녀는 괴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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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열심히 보는 TV프로그램이 두개 있다. <거침없이 하이킥>과 <하얀거탑>. 두 프로가 다루는 세계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지만 어떤 면에선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권력을 둘러싼 다툼을 하나는 가족코미디로, 다른 하나는 정치드라마로 풀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엉뚱한 상상을 할 때도 있다. <거침없이 하이킥>의 서민정 선생이 <하얀거탑>의 병원에서 일하면 어떻게 될까 같은. 서민정 선생이 장준혁 교수 앞에서 토끼옷 코스프레를 하고 이렇게 외친다. “저 선생님이 생각하는 그런 여자 아니에요. 저 닳고 닳은 여자란 말이에요.” 아마 장준혁 교수는 진지한 목소리로 이렇게 반응하겠지. “서민정 선생은 당장 뇌수술이 필요한 환자이니 빨리 입원조치를 하죠.” 반대로 <하얀거탑>의 장준혁 교수를 <거침없이 하이킥>의 이순재 한방병원에 모시고 오면 어떨까. 장준혁 교수가 힘주어 말할 때마다 해미가 “오~케이,
[편집장이독자에게] <거침없이 하이킥>과 <하얀거탑>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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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 가끔 이런 말을 할 때가 있다. “뭐야, 이거 TV드라마 같잖아.” 이럴 때 TV드라마란 말은 영화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허황된 스토리의 영화를 보면서 “이거 만화네. 만화”라고 말할 때처럼. 그러나 만화나 TV드라마가 수준 낮다는 인식이 옳은 것은 아니다. 만화가 독자적 대중예술장르인 것처럼 웬만한 영화보다 나은 TV드라마도 존재한다. 특히 최근 국내 방영되는 미국 TV드라마는 근자의 할리우드영화보다 흥미로울 때가 많다. <CSI>를 보면서 영화로 만든 요즘 범죄스릴러물이 오히려 시시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케이블채널에서 <CSI 데이>를 시청하느라 하루를 보내다 보면 갑자기 이런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이제 영화의 시대가 끝난 것 아닌가?
변화는 오래전에 예고된 것이기도 하다. 80년대 중·후반부터 불어닥친 미디어 기업간의 인수, 합병은 거대 미디어 그룹의 탄생을 재촉했고 영화와 방송은 뗄 수 없는
[편집장이 독자에게] TV드라마의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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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공>은 중국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삼은 전쟁사극이다. 와이어와 CG로 도배한 무협액션이 주류인 요즘 영화와 달리 이 영화는 한눈에 보기에도 꽤 고전적이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아름다운 화면이 아니라 흙탕물에 범벅이 된 사실적인 액션장면이 나오고 CG 캐릭터 대신 진짜 엑스트라들이 수천명 등장한다. <와호장룡> 이후 <영웅> <연인> <무극>이 향했던 탐미적 무협액션의 길에서 멀리 벗어난 드문 예이다. 차라리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영향을 받았던 김성수 감독의 <무사>가 어떤 영감을 줬을 거란 생각이 든다. 물론 탐미적 액션이냐, 사실적인 액션이냐는 주제와 동떨어진 문제가 아니다. <묵공>이 하려는 이야기는 묵직하고 현실적인 것이어서 이런 사실적 액션에 잘 어울린다. 김혜리 편집위원(이번주부터 기자에서 편집위원으로 직책이 바뀌었다)의 표현을 빌리면 “<묵공>의 깃발은 장이모의 <영웅
[편집장이 독자에게] <묵공>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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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만 영화는 이제 그만
영화계 관계자들이 화낼 소리인지 몰라도 관객 1천만명을 넘는 영화는 안 나왔으면 좋겠다. 1천만 관객 시대는 영화계에 대한 환상을 키우는 데 일조했고 덕분에 적지 않은 돈이 충무로로 들어오게끔 만들었다. 그러나 천만 영화가 2편이나 나온 2006년, 수많은 영화사들이 빚더미에 올랐다. 터지면 왕창 벌지만 한편이 1천만명을 동원하는 동안 20여편이 적지 않은 손해를 보는 것이다. 영화계의 빈익빈 부익부는 대한민국 부의 양극화처럼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과연 이대로가 좋은 것일까. 한 영화가 1천만명을 동원하는 대신 5편이 200만명씩 동원하는 것이 부의 분배, 배급질서의 확립, 관객의 정신건강 등 모든 면에서도 나을 것이다.
2. 서울아트시네마의 재정안정
<씨네21>이 지난해부터 시네마테크 살리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지만 서울아트시네마의 형편은 별로 나아지지 않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금이 있지만 그것만으로 유지하기 어렵다는 절박한 호
[편집장이 독자에게] 새해 영화계에 바라는 다섯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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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이식 같은 거 안 되는 거냐? 정말 안 되는 거야?” 친구인 의사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죽음을 늦춰달라고 애원하는 사내가 있다. 돈도 없고 백도 없었지만 악착같이 일해서 승승장구, 사회에서 직장에서 인정받던 남자. 이제 막 사장으로 승진해 정상에 오른 쾌감을 맛보려는 순간 폐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이건 너무 불공평한 것 아니냐고 항변한다. 평소 담배도 안 피우고 건강관리도 철저히 했는데 이렇게 죽는 건 억울하다며 끓어오르는 감정을 되삼킨다. 얼마 전 방영된 드라마 <기적>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시한부인생이야 TV에서 숱하게 봤던 이야기지만 <기적>은 억지스러운 사랑의 신화를 만드는 드라마가 아니다. <기적>에 등장하는 인물 하나하나는 놀랄 만큼 우리 이웃의 얼굴을 닮았다. 선악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그저 흔히 볼 수 있는 얼굴들. 그들은 각자 자신에게 진실된 삶을 살려 했지만 어디에선가 어긋난다. 아버지와 딸은, 아버지
[편집장이 독자에게] <기적>이 남긴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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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문여고에는 인유반이라 불리는 학급이 있단다. K리그 최하위팀 인천유나이티드FC(인유)를 응원하는 바람에 붙여진 이름이다. 다큐멘터리 <비상>에서 인유반의 한 소녀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람들이 1등만 원하고 그런 편견으로 세상을 보잖아요. 축구를 해도 이천수, 박주영, 뭐 그런 스타들만 찾고. 하지만 그들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어떻게 꼴찌팀을 응원하는 학급이 생겼는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인유반의 담임선생님은 인천팀의 참담한 성적을 오히려 즐기는 듯 보인다. 아마도 그는 학생들에게 축구에 대한 열광이 아니라 꼴찌를 응원하는 마음을 가르치고 싶었던 것 같다. 뒤처졌다고 기죽지 말자는 무언의 교육. <비상>을 보면서 저 반의 아이들은 좋은 선생님을 둬서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쟁에서 이기는 법만 가르치는 세상에서 경쟁에서 지고 있을 때 다독이는 법을 가르치는 일은 참으로 귀하게 느껴진다.
영화에서 꼴찌팀을 이끄는 장외룡 감독도 그런 선생님처럼
[편집장이 독자에게] 꼴찌 응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