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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미래의 영화는 어떻게 될까? <베오울프>를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보면 누구라도 이런 의문을 품게 된다. 흔히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보면서 롤로코스터를 타는 기분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베오울프>만큼 롤로코스터에 다가간 영화는 없는 것 같다. 테마파크에서 보는 입체영화와 비슷한 체험이지만 입체영화와 달리 캐릭터와 이야기가 있는 <베오울프>는 미래의 영화가 지금껏 보던 것과 다른 종류일 것이라 암시한다. 극장용 영화란 3차원 공간감을 만들어내는 종류만을 의미하고 나머지 영화는 TV나 컴퓨터 모니터로만 보는 시대가 오는 게 아닐까. <베오울프>가 그 정도로 완벽하진 않지만 기술이 점점 발전한다면 어떻게 될까 싶다. 물론 <베오울프>의 기술은 특정한 소재에 한정된 것이다. <베오울프>가 드래곤과 마녀가 나오는 중세모험담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람들의 상상에만 존재하는 시공간이 아니라면 이런 기술의 장점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편집장이 독자에게] 미래 영화의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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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중국영화가 아닐까? <검은 땅의 소녀와>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중국어로 대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중국에서 찍은 영화도 아닌데 그랬던 건 지금 한국에도 저런 일이 있나 싶어서였다. 지아장커나 리양 같은 중국 감독의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가난과 궁핍을 21세기 한국영화에서 보는 것은 참으로 낯선 일이었다. 폐광촌에 카지노가 들어섰다는 뉴스만 보고 들었던 나 같은 사람에겐 <검은 땅의 소녀와>가 보여주는 현실이 몇 십년 전 일처럼 보인다. 박광수 감독의 <그들도 우리처럼> 이후로 탄광촌의 막장인생에 카메라를 들이댄 다른 영화가 없었던 탓일지도 모른다. 독립영화조차 탄광촌을 다룬 경우는 드물었기에 그곳의 삶은 모두의 관심권에서 멀어졌다. 전수일 감독은 여전히 그곳에 존재하는 것을 보여주며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가난한 이들의 안간힘과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궁지의 나락을 그린다. 그것을 단지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삶에
[편집장이 독자에게] 주목! <검은 땅의 소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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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국제영화제에서 <레오파드>를 봤다. 상영시간이 3시간 넘는 루키노 비스콘티의 대작 <레오파드>는 19세기 남부 이탈리아를 무대로 삼은 이야기다. 그 자신 유명한 귀족 출신인 비스콘티는 <레오파드>에서 몰락하는 귀족 가부장의 마지막 모습을 경건하고 우아하게 보여주는 데 반해 새로운 권력층이 될 자본가 계급을 비열하고 경망스런 존재로 묘사한다. “우리는 표범이나 사자였다. 표범이나 사자가 물러나면 자칼과 양들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리고 표범, 사자, 자칼, 양 우리 모두는 스스로를 대지의 소금이라 생각할 것이다.” 극중 대사에 따르면 당대의 귀족은 표범과 사자였고 새로운 지배자인 부르주아는 자칼에 해당한다. <레오파드>에서 표범은 물러날 때가 되자 조용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리는데 영화는 자칼이나 하이에나라면 그러지 않았을 거란 뉘앙스를 풍긴다.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는 <레오파드>를 이야기
[편집장이 독자에게] 자칼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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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 독자들이 이런 걸 좋아할까? 잡지를 만들다보면 늘 부딪히는 질문이다. 독자 여러분에게 설문을 돌려 기사를 작성한다고 해도 이런 고민에서 벗어날 것 같진 않다. 사람 마음이 이랬다 저랬다 하게 마련이고 많은 독자가 원한다고 무조건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는 기사가 될 거란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올해 처음 독자편집위원회를 만들면서 그래도 이런 시스템을 갖추면 사후적인 모니터는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능하면 쓴소리를 많이 할 것 같은 사람들로 위원회를 출범시켰고 예상했던 이상으로 냉정한 비판을 많이 받았다. 솔직히 말하면 매주 나오는 위원회의 보고서를 볼 때마다 꼭 이런 걸 해서 일하는 사람들의 사기를 저하시킬 필요가 있냐는 말까지 나왔다. 그래도 내가 한 일을 꼼꼼히 지켜보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1기와 2기 사이에 공백이 있던 몇주간 쓸쓸하고 불안한 마음이 들었던 걸 보면 솔직하게 말을 건네는 누군가는 확실히 필요한 것 같다. 대단한 혜택도
[편집장이 독자에게] 독자편집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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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 반성문 한번 안 써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말죽거리 잔혹사>나 <친구>에 나오듯 이삼십년 전 고등학교에선 뺨을 때리거나 몽둥이로 패는 비인간적 처벌이 대세였지만 맞고 나서도 반성문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반성문을 쓰라는 이유는 짐작건대 너의 잘못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기 위함이다. 명백한 잘못을 저지른 경우 반성문을 쓰는 것은 어려울 게 없다. 자신에게 솔직할수록 문장도 매끄럽게 이어지게 마련이다. 반성문 하면 떠오르는 게 있는데 대학을 다닐 때 시위를 하다 경찰서에 잡혀간 일이다. 그때 경찰서에서 요구한 것은 반성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경찰은 자신을 학교 선도부 선생님으로 착각하고 있었고 나는 선생님한테 혼나는 고등학생처럼 다소곳했다. 범법자와 공권력의 사이에 사실관계를 적는 조서가 아니라 반성문이라는 것이 개입된다는 것이 공과 사의 경계가 희미한 한국사회의 특징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양심수에게 전향서를 요구
[편집장이 독자에게] 어떤 반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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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자전거를 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두번 나온다. 첫 번째는 아들이 커닝을 했다는 의심을 받은 다음이다. 학교에선 아들과 친구의 답안지가 같다는 이유로 아들에게 처벌을 내리고 아버지는 이에 항의하러 학교에 간다. 아들은 자신이 친구 답안지를 베낀 것이 아니라 친구가 자신의 답안지를 일방적으로 베꼈다며 억울해하지만 선생님은 귀담아듣지 않는다. 아들을 믿는 아버지는 학교에서 이런 식으로 진실을 외면하면 어떡하냐며 화를 내지만 소용없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버지는 말한다. “이번 일이 너에게 좌절이 아니라 긍정적인 계기가 됐으면 좋겠구나. 너의 미래는 네가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에 달렸단다.” 두 번째 동행길은 아들이 양호선생님에게 심한 욕설을 한 다음 이뤄진다. 학교를 찾아간 아버지는 진땀을 흘리며 선처를 호소하지만 선생님은 오래전 자신에게 대들었던 아버지를 잊지 않고 있다. 아버지가 모욕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들
[편집장이 독자에게] 부산의 에드워드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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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스>를 뮤지컬이라 부르자니 망설여진다. 뮤지컬 하면 화려한 무대에 어우러진 춤과 노래를 떠올리게 되는데 <원스>는 우리가 익히 아는 뮤지컬과 거리가 멀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차이. <원스>에는 주인공의 심경을 담은 노래는 있지만 시선을 사로잡는 황홀한 무대도, 근사한 춤도 없다. 공연예술의 양식적 아름다움에 관심이 없는 이 영화는 뮤지컬의 특징 가운데 오직 노래의 힘을 빌려왔다. 그것도 기타 하나로 충분한 노래. 아마도 <원스>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원칙은 꼭 악기가 많아야 좋은 음악은 아니라는 생각이 아닐까. 대부분 기타 하나로 충분하고, 피아노로 보완되는 정도면 충분한 영화 속 노래처럼 <원스>는 이것저것 한눈팔지 않고 자신이 잘 아는 것에 충실하다. 기타와 피아노가 있고 남자와 여자가 있으면 된다. 영화 속 배경은 더블린이 아니라 어디여도 상관없다는 듯 풍경에 무심하며 두 주인공을 둘러싼 인물들도 필요한 대목에만 그럴
[편집장이 독자에게] 강추! <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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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워>의 미국 흥행결과가 나왔다. 첫 주말 박스오피스 5위로 출발한 <디 워>는 온갖 혹평에 난타당하며 개봉 2주차 주말 10위, 최종 극장 수입 1천만달러 수준으로 예상된다. 2천개 넘는 스크린에서 개봉하면서 200억원 가까운 마케팅비를 썼을 것이라고 보면 DVD, 방송 등 2차 판권을 합쳐도 돈을 벌었다고 말하긴 힘들어 보인다. 한국에서 800만명 넘는 관객을 동원했지만 투자된 제작비를 생각하면 아직 손익분기점의 고지에 다다르지 못했다. 영화는 상품이며 수출만이 살길이라고 외친 심형래 감독의 논리에 따르더라도 외화벌이에 성공한 상품이 되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미국에서 개봉해서 이 정도면 대단한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디 워> 이전까지 한국영화로 미국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번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분명하다. IMDb에 따르면 <봄 여름…>은 단 6개 극장에서 개봉한
[편집장이 독자에게] <디 워>, 수출지상주의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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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추석은 한국영화의 대목으로 꼽힌다. 특히 올해는 4일 연휴라 극장가의 기대가 크고, 여름 동안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때문에 몸을 사렸던 탓에 추석 연휴를 노리고 개봉하는 한국영화가 많다. 추석시즌을 겨냥한 한국영화 가운데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벌써 ‘관객에게 드리는 글’을 내보내며 추석연휴까지 극장가에서 버티기 어려울 것 같다는 호소를 했다. 추석이 끝난 뒤 누가 웃고 울지 짐작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냥 묻어두기 아까운 영화가 한편 있어 얘기를 꺼낸다. 방송다큐로 소개됐던 실화를 소재로 만든 <마이파더>는 대단한 미학적 야심은 없지만 대중영화로서 눈여겨볼 미덕이 있는 작품이다. 영화를 보기 전 이야기만 들었을 때 <마이파더>는 기대할 게 별로 없는 영화 같았다. 입양아 애런 베이츠가 친부모를 만나고 싶어 한국에 왔다가 아버지를 만났는데, 흉악한 살인을 저지른 사형수였다는 실화에서 연상할 수 있는 게 뻔해 보였다. 사연은 기가 막히지만 결론
[편집장이 독자에게] 제임스 파커 혹은 애런 베이츠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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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얼굴의 주근깨투성이 소녀가 있다. 갓 스물이 됐을까. 미용실 보조로 일하는 그녀는 지난 여름 해변에서 이지적인 느낌의 대학생을 만나 파리에서 함께 살았더랬다. 출근하는 그녀를 침대로 끌고 와 안으며 속삭이던 남자에게 그녀는 모든 것을 의지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배운 적 없지만 그건 사랑이었고 그녀의 전부였다. 하지만 꿈같은 날은 가고 그녀가 출근하는 동안 남자는 자지 않으면서 자는 척한다. 그녀가 씹는 사과 소리가 거슬리고 변증법이 뭐냐고 묻는 그녀의 무식함이 부끄럽다. 여자는 눈물을 머금고 남자의 집을 나와 어머니와 살던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다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고 우연히 소식을 접한 남자가 병원으로 찾아온다. 넋이 나간 듯 더 창백하고 여윈 그녀를 만난 뒤 남자는 도망치듯 병원을 떠나고 자리로 돌아온 여자는 레이스를 뜨며 물끄러미 뒤돌아 쳐다본다. 아무것도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지만 모든 것을 보고 있는 듯한 그 눈동자. 슬프지만 슬퍼하지 않는 그 표정. 클로드
[편집장이 독자에게] 이자벨 위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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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충격적인 기사 하나를 봤다. 폐교 위기에 몰린 고등학교에 관한 이야기로 문제의 학교는 옥수동에 있는 동호정보공업고등학교다. 동호정보공고에 닥친 위기의 발단은 지역주민들이 ‘공고’를 싫어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지역 부유층에 해당하는 남산타운아파트에서 동호정보공고를 없애고 그 자리에 초등학교를 유치하고 싶어하고, 주변 부동산업자들은 그렇게 되면 집값이 10%는 더 오를 것이라고 전망했다고 한다. 애초에 편법을 써서 대규모 아파트에 주어질 학교용지 분담금을 내지 않았던 아파트 조합은 뒤늦게 초등학교가 필요하다며 나섰고 해마다 관청에 압력을 행사해 동호정보공고의 이전을 촉구했으며 2004년 동호고를 이전시킨다는 결정이 났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이전도 쉽지 않았다. 다른 지역에서도 실업계 고등학교가 이사오는 것을 반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서울시교육청은 오는 9월7일까지 동호교 폐교에 관한 의견을 듣고 교육위원회에서 폐교 여부를 최종결정한다고 한다. <
[편집장이 독자에게] 동호정보공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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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학교에서 가정환경조사라는 것을 했던 기억이 있다. 집에 자가용이 있는지, 월소득이 얼마인지, 부모님 직업은 무엇인지 등을 적어내는 것인데 공란으로 적어내면 다시 써오라는 꾸지람을 듣곤 했다. 가정환경조사를 하면 늘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부모님의 학력을 묻는 난이었는데 고졸, 중졸인 당신들은 항상 대졸, 고졸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학력을 기재하곤 하셨다. 그렇지 않다는 걸 뻔히 아는데 왜 꼭 거짓으로 학력을 높였을까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보진 못했다. 아마 궁색한 대답에 오히려 상처를 받지 않을까 싶었던 게 아닐지. 그러면서 자연스레 몸에 밴 것이 있다. 학력이 낮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 그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란 것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렸던 것 같다. 대학에 다닐 때,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친구들의 대화에서 아무개는 대입 시험 성적과 무관하게 어느 대학을 갔다는 얘기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운좋게(혹은 부정한 방법으로) 특기생으로 입학한
[편집장이 독자에게] 학력 검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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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휴가를 갔다 와보니 난리가 났다. 1주일 자리를 비웠는데 사태를 파악하느라 그간 있었던 일들을 뒤쫓다보니 1년은 비운 느낌이 들었다. <디 워> 논란에 대해 내가 쓴 글에 달린 댓글은 편집장이 된 이래 처음 맛보는 흥분을 안겨줬다. 이렇게 많은 댓글은 경험해보지 못한 터라 나를 비판하는 글인데도 이런 관심 황송하다, 싶었다. 결정적으로 휴가 때문에 <100분 토론>을 놓쳤는데 인터넷에 오른 기사와 댓글을 살펴보니 <무릎팍도사>를 뛰어넘는 올해 최고의 토크쇼였던 모양이다. <디 워>가 그냥 한편의 영화가 아니라 사회현상이 되고 있다고 했던 예측이 들어맞은 셈이다. 물론 그간 <디 워> 논란만 화제가 된 건 아니었다. 남북이 정상회담을 한다는 놀라운 뉴스가 있었고 한국이 별안간 아열대기후로 둔갑했으며 학력 위조 사례가 연이어 적발되고 있었다. 오랜만에 ‘다이내믹 코리아’의 활기를 느끼면서 이것이야말로 내가 이 땅을 벗어났을 때 맛
[편집장이 독자에게] <디 워> 논란 2라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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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이 펼치는 말과, 그 말에 대한 말은 무섭다. 명분 앞세운 말이 스스로 그 명분을 죽이다 못해 그저 살고자 할 뿐인 생명까지 짓밟는 시간을 말로서 증언한다. 명분으로 말하고 행하는 자의 진심이 진심인 것이 공포스럽다. 말로 빌어먹고 사는 직업을 가진 덕에 행여 그런 누를 저지르지 않았나, 저지를까 공포가 일었다. 대의명분을 도약대 삼은 말들이 부쩍 의심스러워졌다.
‘<디 워> 현상’도 말의 전쟁이다. 그 기세가 공포스러운 건 위세를 부리는 말들이 요상한 명분으로 상대를 짓밟기 때문이다. 황우석 사태보다 고약한 건, 그때는 있다 없다를 가르는 기준점이 분명했지만 지금은 개인의 좋다 싫다를 놓고 심판할 절대기준이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한쪽에서 절대기준을 무자비하게 휘두르고 있으니, 공포스러워도 직업도의상 말로 끼어들지 않을 수 없는 형국이다.
이번호는 <디 워> 현상을 비판적으로 다룬 9쪽짜리 기획이 아니더라도 <디
[편집장이 독자에게] 말의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