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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28일 월요일 새벽 칸영화제 수상결과를 기다렸다. 월드컵 경기도 아니고 올림픽 금메달을 놓고 다투는 것도 아니건만 <밀양>이 상을 받을 것 같다는 소식을 접한 뒤로 궁금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여우주연상을 받았다는 결과를 접하자 휴우~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우울했던 영화계가 오랜만에 힘을 낼 수 있는 낭보였다. 어떻게 보면 영화를 놓고 1등, 2등을 논한다는 게 우스운 일이라 수상에 흥분하는 내가 촌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했다는 말을 떠올리며 그런 자신을 합리화했다. “영화는 상과 관계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젊은 나에게는 그 상이 필요했습니다. 그건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격려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상은 영화가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영화를 만들면서, 같은 동네에 살면서 서로 격려하는 것입니다.”
<밀양>의 전도연에 대한 칭찬은 차고 넘치게 많으니 더 보태지 않아도 좋을 듯싶다. 대
[편집장이 독자에게] 전도연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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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게. 그렇게 끔찍하진 않아. 사람들이 말하듯, 이탈리아에선 보르지아 치하 30년간 전쟁, 테러, 살육, 학살을 겪었지만, 미켈란젤로, 다 빈치, 르네상스를 만들었어. 형제애를 가진 스위스에선 500년간 민주주의와 평화를 가졌지. 그런데 그들은 뭘 만들었나? 뻐꾸기 시계라네. 잘 가게.” 캐럴 리드의 영화 <제3의 사나이>에서 오슨 웰스가 내뱉은 말이다. 곧잘 명대사로 인용되는 문구인데 오래전 머릿속에 새겨진 이후로 스위스 하면 뻐꾸기 시계를 연상하는 버릇이 생겼다. 스위스의 역사에 정통한 사람이라면 반발할 만한 내용이겠으나 외부에서 본 스위스의 이미지가 그렇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스위스가 뻐꾸기 시계라면, 홍콩은 누아르와 무술영화다. 청소년기를 홍콩영화의 세례를 받으며 자란 세대에겐 보편적인 일이다. 홍콩영화의 전성기가 끝났다고 알려졌지만 <무간도>나 <묵공> 같은 영화를 볼 때면 “썩어도 준치라더니”하며 감탄하게
[편집장이 독자에게] 한국영화 하면 무슨 장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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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되기 전에 인간이 돼야 한다.” 배우 인터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인데 배우에겐 연기 테크닉보다 인간적 수련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일 게다.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일 만한 말이지만 가끔 얼마나 맞는 얘기인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사생활의 영역에서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라는 평을 듣지 못하는 사람도 좋은 배우로 평가받는 사례를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선 반대 사례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성격적 결함이나 정신적 상처가 예술가의 동력이 되는 경우 말이다. 확실히 인간성 좋은 순서대로 좋은 배우로 평가받는 것은 아닐 텐데 가끔은 그럴지 모른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최근엔 <상성: 상처받은 도시>(이하 <상성>)의 양조위를 보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품이 배어나는 그의 눈빛은 아무리 봐도 연기 테크닉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서 형성된 것 같다. 그래서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양조위의 선한 본성은 카메라에 포착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편집장이 독자에게] 양조위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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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영화평론가 황진미씨에게 문자가 왔다. 딸을 낳았다는 소식이었다. 당분간 영화를 보러 가거나 영화평을 쓰는 일이 힘들겠지만 곧 몸을 추스르고 돌아오겠노라 전했다. 창간 12주년 기념호에서 정윤철 감독이 한 인터뷰를 읽어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황진미씨는 감독 입장에선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로 거침없는 비판을 하는 평론가이며 할 말을 참지 못하는 열정적인 논객이다. 당분간 황진미씨가 없어서 감독들 마음이 편하겠군 싶으면서도 뭔가 화끈한 게 없으니 허전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다 그가 김기덕의 <숨>을 보고 쓴 20자평이 눈에 띄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아동문학임을 증명하는 걸작.” 나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하 <우행시>)이 아동문학은 아니라고 보지만 <우행시>와 <숨>을 비교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에서 창조적 표현, 혹은 영화적 표현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편집장이 독자에게] <숨>과 <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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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맨 3>가 춘궁기에 허덕이던 극장가의 구세주가 되고 있다. 흔히 말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힘이겠으나 <스파이더맨 3>가 스펙터클만 요란한 영화는 아니다. 2편만큼 훌륭하진 않지만 3편 역시 시리즈 특유의 개성은 살아 있다. 이웃집 소년 같은 피터 파커의 성장담인 <스파이더 맨> 시리즈는 각각 주제를 함축하는 대사를 갖고 있다. 평범한 젊은이가 슈퍼히어로가 되는 운명에 관한 이야기인 1편은 전체 시리즈를 관통하는 선언이 나온다. “막강한 힘에는 막대한 책임감이 따른다.” 슈퍼히어로의 사랑과 고난에 관한 이야기인 2편에선 메리 제인의 대사를 들 수 있다. “난 늘 너의 문 앞에 있었어. 누군가 널 구할 때도 있어야 되지 않겠니?” 슈퍼히어로도 외롭고 힘들며 돌봐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3편도 이런 식으로 규정짓자면 용서에 대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벤 아저씨는 우리가 가슴속에 복수심을 품고 살아가길 원하진 않았을 게다. 복수
[편집장이 독자에게] <스파이더맨 3>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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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2주년 기념호를 읽은 독자 한분의 이메일을 받았다. 황은하라는 이름의 독자는 전주영화제에 갈 수 없는 설움과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책을 사서 봤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번호는 솔직히 영화제에 대한 위로 이상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잡지를 읽으면서도 도무지 불안하지 않았으며 늘어진 (영화에 대한) 애티튜드의 나사를, 헨리 제임스의 소설 제목처럼 회전시켜 조일 수 있었죠. 정윤철 감독이 만든 세 가지 특급 요리가 즐거웠습니다. 다시 영화가 하나의 특권으로 제게 배달될 것만 같습니다. 정확히 무엇이 현을 건드렸는지는 딱 짚어 말하지는 못하겠네요. 박신양씨처럼 도덕시간에 졸아 감사를 전할 수는 없고 대신 시를 씁니다.” 황은하씨는 <나쁜 교육> <별점에 대하여> <떨림에 대하여>라는 세편의 시를 선물로 보내왔다. 지면에 다 싣긴 힘들지만 마음에 와닿았던 <별점에 대하여>라는 시의 한 대목을 인용해본다.
만약 어떤 영화를 보고 벽에 머리를
[편집장이 독자에게] 선물로 받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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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왜 보냐고요? 아무래도… 가오가 살잖아요.” 지면 개편을 위해 독자 몇명을 불러 벌인 토론에서 나온 말이다. ‘가오’라는 표현이 바르진 않지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씨네21>이 가오가 있어야 돼, 라며. 가오라는 표현을 쓴 독자도, 고개를 끄덕인 나도 가오가 겉멋이나 허세라고 생각하진 않았으리라. 뭔가 있어 보이는 잡지, 아니 진짜 뭔가 특별한 게 있는 잡지. 창간 12주년을 맞으면서 “초심을 잃지 말라”는 독자들의 당부가 뜻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특별한 뭔가를 만들겠다는 다짐을 담은 이번호의 특집기사는 정윤철 감독이 만든 것이다. 늘 영화인을 취재대상으로 만나는 우리 입장과 반대로 영화인이 직접 영화기사를 만들면 재미있지 않을까 싶어 내놓은 아이디어였다. 정윤철 감독은 이 제안에 흔쾌히 응했고 평론가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 감독이 평론가에게 묻고 싶은 말이 많겠지, 아니, 항의하고 싶은 게
[편집장이 독자에게] 창간 12주년의 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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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서울여성영화제를 찾았던 관객이라면 <씨네21>에서 만든 영화제 일간지를 접했을 것이다. 그동안 부산, 전주, 부천 등 여러 영화제에서 이런 일간지를 만들었지만 올해 9회를 맞은 서울여성영화제의 일간지를 만든 건 처음이다. 짐작대로 영화제 일간지를 만드는 것은 고된 일이다. 매일 돌아오는 마감에 맞추려면 잠을 줄이고 끼니를 거르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극장을 찾은 관객들이 일제히 <씨네21> 일간지를 펼쳐 읽는 모습을 볼 때면 일의 보람을 느끼게 된다. 거기다 누군가 잘 읽었다는 한마디만 덧붙여주면 쌓인 피로도 잊곤 한다. 이번 여성영화제 일간지는 취재 박혜명, 최하나, 편집 심은하, 권은주, 사진 서지형, 디자인 김차인애, 객원기자 정김미은 등의 노력으로 만들어졌다. 마지막 일간지 마감을 마치고 몇 명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번 일간지에 대해 박혜명 기자는 “명품 데일리였다”고 말했다. 물론 웃으라고 한 말이지만 만드는 사람들이 자부심을 느끼며 일했다는 얘기
[편집장이 독자에게] 명품 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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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어떤 영화들은 자꾸 뒤를 돌아보게 만든다. 스쳐지나간 그곳에 흘린 것은 없는지, 놓쳐버린 것은 없는지, 잊은 것은 없는지. 기억을 헤집으면 아스라이 떠오르는 잔상들이 쓰지 않던 감각을 일깨운다. 오즈 야스지로, 나루세 미키오, 허우샤오시엔, 에드워드 양 등 이런 영화의 대가들은 노스탤지어에 투항하는 법이 없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되 향수에 머물지 않고 후회와 탄식의 눈물을 자아내는 경지를 보면서 사람들은 ‘거장’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곤 한다. 임권택의 <천년학>은 그런 영화다. <씨네21> 27쪽을 할애한 이번 특집은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를 기념하는 의례적인 기사가 아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감독 임권택에 대한 예의 이전에 <천년학>이 걸작이기 때문이다.
<천년학>은 사연 많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로도, 소리라는 사라진 예술에 관한 이야기로도, 인정사정 볼 것 없던 한국의 근대화에 대한 이
[편집장이 독자에게] 걸작 <천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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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에 <우아한 세계>와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봤다. 스타일이나 소재가 전혀 다른 영화지만 두 작품엔 공통점이 있다. 웃고 즐기며 보다가 예기치 못한 대목에서 눈물이 흐른다는 점, 그리고 곱씹어보면 겉보기와 달리 심각한 비극이라는 점. 먼저 <우아한 세계>에서 송강호가 연기하는 주인공 인구를 보자. 조폭 중간보스인 그의 꿈은 멋진 전원주택에서 아내와 딸을 데리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그는 이번 건만 잘 처리하면 그렇게 될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손에 피를 묻히고 밤잠을 설치며 등이 칼에 찔릴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한다. 부동산 중개업자가 보여준 근사한 고급 주택에서 인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집에 담고 싶은 모든 가치 힐스테이트? 모두가 꿈꾸는 그곳 자이? 숱한 아파트 CF가 유도한 대로 어떤 착각을 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좋은 집에 행복이 있다는 인구의 오해는 이중적인 방식으로 그를 불행으로 내몬다. 열심히 일할수록 조직도 그를
[편집장이 독자에게] 바보 같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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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을 보다 속으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 얼마 만에 보는 노골적 백인 우월주의인가’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 <씨네21> 홈페이지와 포털 사이트를 뒤져보니 역시나 활발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입장과 영화에 숨은 이데올로기를 봐야 한다는 입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고 별 반개부터 별 다섯개까지 영화에 대한 평가도 극단적으로 갈렸다. 이번호 독자면을 찬반논쟁에 할애한 것은 그래서다. 나로 말하면 영화를 볼 때 정치적 함의에만 매몰되면 나무만 보고 숲을 못 보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300>을 보면서 정치적 의미를 지우고 즐기는 일은 불가능했다. 정치적 의미를 따져보는 흥미를 빼고 <300>을 보라는 건 피 한 방울 흘리지 말고 살만 1파운드를 떼어가라는 <베니스의 상인>식 판결과 다를 바 없다. 나의 뇌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일까? 주변부 아시아인의 콤플렉스나 피해의식이 작동한 것이라고
[편집장이 독자에게] <300>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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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기술 발전의 산물이고 19세기 말의 발명품이다. 영화의 예술성은 비교적 나중에 드러났는데 짐작건대 그전까지 영화를 보러가는 사람들은 발명품 전시회를 찾을 때와 비슷한 마음가짐으로 극장을 찾았을 것이다. 영화가 발명품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종종 오해가 벌어지곤 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기술이 발전할수록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다. 20세기 초의 사람들이 <매트릭스>나 <반지의 제왕> 같은 영화를 상상할 수 없었다는 걸 생각하면 타당한 얘기이지만 꼭 맞는 얘기는 아니다. 피터 잭슨의 <킹콩>이 수공업적 특수효과로 만든 1933년작 <킹콩>보다 우월하다고 말한다면 그건 누구나 수긍할 만한 주장이 아니다. 거꾸로 기술 발전이 영화 고유의 예술성을 파괴한다고 믿는 경우도 있었다. 유성영화가 처음 등장했을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소리의 등장에 반대했다. 정돈된 시각예술을 혼돈의 현실로 밀어넣는 시도라 여겼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술 발
[편집장이 독자에게] 무성영화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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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만큼 재미있는 구경거리는 없다. 신문 정치면에 관한 얘기가 아니다. 그렇게 안 보여줄 것 뻔히 아는데 보여줄 게 있는 것처럼 떠들어대는 정치는 사람을 흥분시키지 못한다. 번번이 홀랑 다 벗는다고 목청을 높이지만 어디 한두번 속나. 보는 사람이나 보여주는 사람이나 안 벗을 거 다 아니까 영 긴장감이 생기질 않는다. 직업으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다 벗지 않고 남겨두는 게 있다. 전두환의 비밀계좌처럼 볼썽사나운 가리개가 전복적 영화가 될 수 있었던 것을 싸구려 비디오 에로물로 전락시킨다. 정치가 재미없다는 편견은 그래서 생긴다. 그런데도 정치만큼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없다고 말한 건 정치가 청와대나 국회의사당이 아니라 엉뚱한 데서 작동할 때이다. 가릴 거 다 가리는 정치인들과 달리 직업 정치인이 아닌 사람들의 정치는 종종 알몸 다 보여줄 때까지 거침이 없다. 황우석 사건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연일 반대증거가 제시되고 배신자가 속출했던 그때는 정말 입이 바짝 타는 긴
[편집장이 독자에게] 희생양 장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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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마틴 스코시즈가 오스카를 받았다. 40년 가까이 미국영화를 대표하는 이름이었음에도 5전6기 만에 감독상을 탄 것이니 본인이나 지켜본 사람들이나 특별한 감격을 느꼈으리라. 문제는 이번에 감독상과 작품상을 탄 작품이 <디파티드>라는 점. 미국 평단에선 비교적 호평을 받았으나 결코 스코시즈의 대표작이 될 수 없는 영화였기에 수상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개운치가 않다. 물론 스코시즈 말고 누가 받았어야 옳으냐는 것은 좀 애매하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 때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택했는데 또 한번 스코시즈를 물먹이긴 곤란했을 테고 <바벨> <더 퀸> <미스 리틀 선샤인> 등 다른 작품상 후보작은 그리 굉장한 영화라는 느낌이 안 든다. 이렇게 뚜렷한 대안이 없을 때 미뤘던 숙제하듯 스코시즈한테 작품상까지 몰아주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했으리라. 이번호에 실린 기획기사 ‘아카데미, 오판과 뒷북의 역사’를 보면 그런 과정에서 오스카가 놓친 걸작
[편집장이 독자에게] 아카데미 취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