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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발견의 순간에 있다. 부산국제영화제처럼 수백편의 영화가 선보이는 곳에선 더욱 그렇다. 특별한 기대를 품지 않고 봤는데 가슴 떨리는 감흥을 주는 작품이라면 여행길의 피로는 눈 녹듯 사라진다.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본 영화 가운데는 <경의선>이 그런 영화였다. 이윤기 감독의 <아주 특별한 손님>, 김동현 감독의 <상어>, 김태식 감독의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 신동일 감독의 <나의 친구, 그의 아내> 등 널리 호평받은 한국영화들이 많아 영화제 관계자들이 특정한 영화 한편에 집중하는 일은 드물었던 영화제였지만 개인적으로 <경의선>은 아주 특별한 감흥을 줬다.
<경의선>을 만든 박흥식 감독은 평론가와 관객으로부터 외면당한 <역전의 명수>로 데뷔했다(<인어공주>의 박흥식 감독과 다른 동명이인). 찬반양론이 갈리는 영화였다면 덜했을 텐데 <역전의 명수>에
[편집장이 독자에게] <경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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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매력이 뭐냐고 묻는다면 사람마다 다르게 답할 것이다. 우주 전쟁이나 괴물처럼 상상 속 존재를 눈앞에 보여주기 위한 것일 수도, 압도적인 스펙터클을 제공하는 것일 수도,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짜릿한 긴장감을 주는 것일 수도, 인생의 극적 순간을 압축해 경험하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다양한 매력 가운데 시간을 거슬러 과거를 재현할 수 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순간을 영원으로, 영원을 순간으로 만든다. 영화를 시간의 예술이라 칭하는 것도 시간을 다루는 데 있어서만큼은 영화가 미술, 사진, 음악, 연극 등 다른 예술 장르보다 우월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가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데 있어서 가장 일반적인 형식은 플래시백이다. 회상장면을 통해 관객은 인물의 심리에 동화되거나 흩어진 퍼즐의 조각을 맞춘다. 쉽고 효과가 확실한 방법이라 플래시백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한다. 너무 흔히 볼 수 있어서 그만큼 식상한 기
[편집장이 독자에게] 플래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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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잠수함이 북한 영해에서 조난당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북한군은 조난당한 잠수함을 포위하고, 백악관엔 비상이 걸린다. 잠수함에 탄 군인들을 구하는 길은 둘 중 하나다. 전쟁을 할 것인가? 협상을 할 것인가? 지난 9월17일 방영된 미니시리즈 <커맨더 인 치프>의 내용이다. 지나 데이비스가 연기하는 미국 대통령 앨런이 힐러리 클린턴을 닮았다고 해서 화제가 됐던 <커맨더 인 치프>는 <웨스트윙>과 마찬가지로 백악관을 무대로 삼은 정치드라마다. 우연히 틀었다가 채널을 고정시키고 보게 된 건 신문에서 무척이나 알기 어렵게 표현하는 한반도를 둘러싼 정치역학이 한눈에 드러나 보였기 때문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와 맞먹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직면한 대통령 앨런은 관계자들의 자문을 구한다. 북한엔 핵무기와 정규군만 100만명이 있다며 전쟁을 반대하는 온건파와 북한군 100만명은 독재자의 압제에 신음하는 배고픈 국민들일 뿐이라며 본때를 보이자는 강경파가 맞서는 가운
[편집장이 독자에게] 위험한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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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촬영장에서 있었던 일. 영화에서 연인으로 나오는 두 배우가 스탭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상대역인 남자와 조금 떨어져 앉아 있던 여자가 밥먹는 내내 상대방 모습을 유심히 보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고 있더란다. 왜 그럴까 싶어 조감독이 물어봤다. “뭘 그렇게 봐요?” “아, 예, 사랑하는 연습 하는 거예요. 진짜 연인처럼 자꾸 바라보고 좋아하는 마음을 가져야 카메라 앞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촬영 기간 내내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하는 배우들에게 이런 일이 드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다 진짜 정분이 났다는 얘기도 더러 들어봤지만 그런다 한들 이상할 게 없다. 진실한 감정을 드러내는 연기와 감정을 모방하는 연기 가운데 당연히 전자가 관객의 마음을 훨씬 잘 움직일 것이다. 실제 부부인 두 노인이 주연을 맡은 박진표 감독의 <죽어도 좋아!>를 떠올려보라. 거짓이 없는 그들의 표정은 전문 배우가 따라한다고 나올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연기는 촬영장에
[편집장이 독자에게] 안성기와 박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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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반바지를 입고 다니다 아침저녁 차가운 공기에 깜짝 놀랐다. 어느새 여름이 물러나고 가을 바람이 서늘하다. 에어컨에 익숙해졌던 몸은 자연이 실어온 바람에 새살이 돋는 느낌을 받는다. 게다가 서울에서 요즘처럼 청명한 하늘을 볼 수 있는 때는 많지 않다. 나는 가을이 걷기 좋은 계절이라 좋다. 어딘가 여행을 갈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좋겠지만 그냥 가까운 곳에서 산책만 하더라도 좋은 때다. 9월이나 10월에 서울 성곽길이나 삼청동, 가회동 골목 같은 곳을 걷다보면 가을이 몸에 스며드는 게 느껴진다. 그런 거리가 주말마다 사람들로 꽉 차는 것은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 말고도 많아서일 것이다.
강남에도 옛 정취가 남아 있는 동네가 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강북에도 그런 동네가 많지는 않다. 시대 배경이 현재가 아닌 영화를 만드는 경우에 더욱 절실히 느끼는 문제지만 서울은 시간이 쌓인 흔적을 발견하기 어려운 도시이다. 그래서 불편하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어딘가 에어컨 바람을 닮
[편집장이 독자에게] 가을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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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학교 3학년 때 교복, 두발 자율화를 경험한 세대다. 거꾸로 말하면 중학교 2학년까지 머리 깎고 교복 입고 모자를 썼다는 말이다. 어려서 교복에 심한 거부감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막상 자율화가 이뤄지자 얼마간 당황했다. 교복을 입었을 때 감춰졌던 빈부격차가 한눈에 드러나 학교 가는 일이 우울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자율화는 기쁜 일이었다. 복장이나 머리 때문에 선생님한테 싫은 소리 들을 일은 없어졌기 때문이다. 요즘 청소년들은 교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내게 자율은 빈부격차의 노출에도 불구하고 억누르고 금지하는 것보다는 나은 조치였다.
그러나 사복을 입고 머리를 기르게 됐다고 자율의 세상이 온 건 아니었다. 자율학습시간이 자율이 아닌 것처럼 대학 진학도 정말 자율적인 목표는 아니었다. 대학을 가야겠다 생각한 건 아마도 그곳엔 진정한 자율이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막상 대학에서 얼마나 자율을 만끽했는지는 기억이 희미하다. 마신 술의 양으로
[편집장이 독자에게] 다름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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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감독의 몇 차례 발언 때문에 세상이 시끄럽다. <시간> 시사회 뒤에 열린 기자회견에서 시작해서 <100분 토론>을 거쳐 사죄문 소동까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김기덕 감독이 <연합뉴스>에 보낸 사죄문의 전문을 보지 못해 그의 진의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보도된 내용이 맞다면 그걸 사죄문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일종의 코미디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 당신들이 맞고 내가 틀렸다, 당신들을 우롱해서 죄송하다, 는 말이긴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자학과 자책은 김기덕의 진심이라고 믿기 어렵다. 정말 김기덕 감독은 자신을 “열등감이 낳은 괴물”이라고, 자신의 작품을 “모두 쓰레기”라고 생각할까? 역설에 관한 약간의 상식을 동원한다면 그렇지 않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나는 그의 글을 사죄문이 아니라 차라리 격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쓰레기로, 괴물로 이름 붙인 사회를 비판하는 격문.
“쓰레기통을 뒤지면 향기가 난다.” 언젠가 김기덕은 자신
[편집장이 독자에게] 김기덕의 퍼포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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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영화를 보다가 내 이름이 나와서 놀라는 경우가 있다. 어린 시절 봤던 TV드라마 <달동네>에서 안소영의 애인 이름이 동철이었고 <살인의 추억>에선 송재호가 분한 수사반장 이름이 동철이었다.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흡혈형사 나도열>에 나오는 악당 이름은 성까지 같아서 남동철이란다. 꽤 촌스런 이름인데 그래서인지 캐스팅이 상당히 잘된다. <천하장사 마돈나>를 보니 주인공 동구의 동생 이름이 동철이다. 주인공 이름으로 캐스팅되진 않아도 주변 인물 이름으론 그럴듯한 모양이다. 영화를 보고나니 동철이 이름으로 형 동구에게 편지 한통을 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 잘 지내? 형보다 20살도 더 많은 내가 형이라고 부르니까 어색하지만 감독이 동구 동생 동철이라고 이름지은 거니까 이해해줘. 옛날에 홍길동이란 사람은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고 동생을 동생이라 부르지 못해 가출을 하기도 했다니까 나 확 가출해버리기 전에 그냥 내 맘대로 형이라
[편집장이 독자에게] 동구에게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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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을 보면 영화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사람은 영화를 통해 자기 삶을 대신 살아보는 경험을 하며 그런 점에서 영화는 그 사람이 살아본 물리적 시간보다 오래 살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극장에서 만나 데이트를 하고 나온 소년 소녀가 나누는 가벼운 대화 속에 들어 있어 크게 의미심장한 느낌은 없지만 영화에 대한 감독 자신의 생각이 투명하게 들어 있는 말이다. 그 뒤로 한동안 삶을 대신 살아보는 영화, 라는 말을 곱씹곤 했다. 쉬운 말이지만 정작 그런 영화를 흔히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할리우드가 장르로 발전시킨 영화의 대부분은 삶을 대신 살아보는 영화라기보다 꿈을 대신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잘 만든 영화라고 하더라도 스필버그나 피터 잭슨의 영화를 보면서 삶을 대신 살아본다는 느낌을 갖긴 어렵다. 반면 에드워드 양이나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를 볼 때는 삶을 대신 살아본다는 느낌을 강렬히 받는다. 그리고 이런
[편집장이 독자에게] 강추! 나루세 미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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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필버그의 영화 <뮌헨>에서 인상적인 대목 하나.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이 뮌헨올림픽 선수촌에 들어가 이스라엘 선수들을 납치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스라엘이 발칵 뒤집힌다. 당시 이스라엘 총리인 골다 메이어는 에릭 바나가 연기한 주인공을 집으로 초대해 팔레스타인 테러조직의 요인들을 암살하는 비밀지령을 내린다. 무시무시한 암살명령이 이뤄지는 상황이지만 영화에서 묘사된 집안의 분위기는 너무도 평화롭고 아늑하다. 당시 정치상황을 잘 모르는 관객이라면 자상한 할머니가 오랜만에 장성한 손자를 만나 반갑게 대화하는 장면처럼 보일 정도다. 정부의 최고지도자가 직접 요인암살을 지시하는 장소라면 으리으리한 총리관저나 은밀한 제3의 장소가 적당할 것 같지만 <뮌헨>에선 평범하고 일상적 공간에서 음모가 진행된다. 오늘 저녁은 뭘 먹지, 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투로 그놈들을 다 찾아서 죽여버려, 라고 말한다. 지금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습도 그런 식으로 시작됐을 것 같다.
레바논 공
[편집장이 독자에게] 레바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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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국적이 절대적 의미를 갖는 건 아니지만 나라마다 잘하는 장르가 있다. 모든 장르에서 할리우드가 독보적인 입지에 서 있다 해도 조금 더 세분해 들어가면 특별히 눈에 띄는 분야가 보인다. 예를 들어 70~80년대 이탈리아에선 ‘지알로’라 불리는 공포스릴러가 특산물이었다. 히치콕 영화를 자극적 색채감각으로 덧칠한 듯한 이 영화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탈리아를 가장 독특한 공포영화를 만드는 나라로 인식하게 했다. 그런가 하면 영국에선 위기에 처한 탄광촌 또는 실업으로 허덕이는 소도시를 배경으로 서민정서에 호소하는 영화가 꾸준히 만들어진다. 존 포드의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 빚지고 있는 이 장르는 90년대 이후 <풀 몬티> <빌리 엘리어트> <브래스드 오프> 등을 통해 다시 한번 각광받았다. 홍콩에선 홍콩누아르라는 변종장르가 대표 격이다. 이 장르는 홍콩영화의 침체와 더불어 힘을 잃은 듯 보였으나 <무간도> 시리즈를 통해 ‘썩어
[편집장이 독자에게] 일본 젊은 영화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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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어김없이 물난리가 났다. 흙탕물이 집안 가득 들어찼고 소와 돼지가 강물에 떠내려갔으며 비닐하우스가 주저앉았다. 거동이 불편했던 할아버지, 할머니는 산사태가 나도 꼼짝 못해서 흙더미에 깔려 돌아가셨고 집도 가재도구도 몽땅 못 쓰게 된 일가족은 초등학교 강당에서 앞날에 대한 두려움에 떨며 새우잠을 자야 했다. 다시 한번 수재민 돕기 특별방송이 기획되고 천재지변을 어쩌겠냐는 관련 공무원의 말과 그걸 인용보도하며 인재임을 강조하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일인데 어째서 이 모든 사태를 올해도 꼼짝없이 앉아서 지켜봐야 하는가. 아마 그건 이 재난이 빈곤한 이들만 괴롭히기 때문일 것이다. 돈이 없어 수해방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그래서 수해를 당하면 가난해지고 다시 가난 때문에 이사를 못해 수해를 당하는 악순환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긴급구호자금이나 성금으로 떼어놓을 수 없는 가난과 재난의 동거 앞에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전염병 방지용 소독약을 뿌리는 것뿐이다. 집을
[편집장이 독자에게] 물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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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이 좋아하는 야쿠르트 스왈로스 야구팀의 경기를 보다가 날아가는 타구를 보고 이제 소설을 써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박민규는 TV에서 마이크 타이슨이 상대 선수의 귀를 물어뜯는 장면을 보고 소설 쓰기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런 식이라면 지단이 박치기하는 장면을 보면서 뭔가 중대한 결심을 했어야 했는데 나는… 그냥 박치기를 하고 싶어졌다. 어린 시절 프로레슬러 김일의 박치기를 보고 자란 세대라서 그런가.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파워풀한 박치기였다. 영웅다운 마지막 무대를 기대했는데, 어머나 박치기라니, 한동안 멍하더니 이번주 내내 머리 속에서 박치기 장면이 리플레이됐다. 아마 지난주에 지단을 현대의 신화라고 부른 글을 썼던 터라 더 그랬을 것이다. 내 멋대로 규정한 신화를 지단이 머리로 박살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난 7월13일 지단이 입을 열면서 진실게임은 2라운드로 접어들었다. 그동안 사람들마다 누구 잘못이 더 큰가를 놓고 갑론을박을 했다.
[편집장이 독자에게] 박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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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단의 은퇴경기가 될 것이다.” 라울은 그렇게 말했다 스페인행 보따리를 쌌다. “지단의 마지막 경기가 될 것이라 유감이다.” 브라질의 카를로스도 그렇게 말했다 고국에서 팬들의 야유에 직면했다. ‘지단의 저주’라는 말이 돌 정도로 지네딘 지단이 이끄는 프랑스팀은 그들을 비웃는 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버렸다. 지단의 저주가 무서웠는지 4강전 상대 포르투갈은 지단의 은퇴 운운하는 얘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역시 지단의 페널티킥 골을 먹고 독일을 떠났다. 98년 프랑스에 월드컵을 안겨준 34살 축구선수 지단은 그렇게 돌아왔다. 월드컵이 시작되기 전에 은퇴 발표를 한 선수가 이만큼 잘하리라는 건 지단의 열혈팬조차 예측 못한 것이리라. 브라질과의 8강전. 지단이 그 유명한 마르세유 턴(360도 회전해서 수비수를 따돌리는 지단 특유의 개인기)으로 수비수 서넛을 제치고 무인지경에 패스를 넣어주는 장면을 보며 소름이 돋았다. 축구팬으로서 지단의 시대를 함께할 수 있어 고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편집장이 독자에게] 지단, 현대의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