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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자전거를 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두번 나온다. 첫 번째는 아들이 커닝을 했다는 의심을 받은 다음이다. 학교에선 아들과 친구의 답안지가 같다는 이유로 아들에게 처벌을 내리고 아버지는 이에 항의하러 학교에 간다. 아들은 자신이 친구 답안지를 베낀 것이 아니라 친구가 자신의 답안지를 일방적으로 베꼈다며 억울해하지만 선생님은 귀담아듣지 않는다. 아들을 믿는 아버지는 학교에서 이런 식으로 진실을 외면하면 어떡하냐며 화를 내지만 소용없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버지는 말한다. “이번 일이 너에게 좌절이 아니라 긍정적인 계기가 됐으면 좋겠구나. 너의 미래는 네가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에 달렸단다.” 두 번째 동행길은 아들이 양호선생님에게 심한 욕설을 한 다음 이뤄진다. 학교를 찾아간 아버지는 진땀을 흘리며 선처를 호소하지만 선생님은 오래전 자신에게 대들었던 아버지를 잊지 않고 있다. 아버지가 모욕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들
[편집장이 독자에게] 부산의 에드워드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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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스>를 뮤지컬이라 부르자니 망설여진다. 뮤지컬 하면 화려한 무대에 어우러진 춤과 노래를 떠올리게 되는데 <원스>는 우리가 익히 아는 뮤지컬과 거리가 멀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차이. <원스>에는 주인공의 심경을 담은 노래는 있지만 시선을 사로잡는 황홀한 무대도, 근사한 춤도 없다. 공연예술의 양식적 아름다움에 관심이 없는 이 영화는 뮤지컬의 특징 가운데 오직 노래의 힘을 빌려왔다. 그것도 기타 하나로 충분한 노래. 아마도 <원스>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원칙은 꼭 악기가 많아야 좋은 음악은 아니라는 생각이 아닐까. 대부분 기타 하나로 충분하고, 피아노로 보완되는 정도면 충분한 영화 속 노래처럼 <원스>는 이것저것 한눈팔지 않고 자신이 잘 아는 것에 충실하다. 기타와 피아노가 있고 남자와 여자가 있으면 된다. 영화 속 배경은 더블린이 아니라 어디여도 상관없다는 듯 풍경에 무심하며 두 주인공을 둘러싼 인물들도 필요한 대목에만 그럴
[편집장이 독자에게] 강추! <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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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워>의 미국 흥행결과가 나왔다. 첫 주말 박스오피스 5위로 출발한 <디 워>는 온갖 혹평에 난타당하며 개봉 2주차 주말 10위, 최종 극장 수입 1천만달러 수준으로 예상된다. 2천개 넘는 스크린에서 개봉하면서 200억원 가까운 마케팅비를 썼을 것이라고 보면 DVD, 방송 등 2차 판권을 합쳐도 돈을 벌었다고 말하긴 힘들어 보인다. 한국에서 800만명 넘는 관객을 동원했지만 투자된 제작비를 생각하면 아직 손익분기점의 고지에 다다르지 못했다. 영화는 상품이며 수출만이 살길이라고 외친 심형래 감독의 논리에 따르더라도 외화벌이에 성공한 상품이 되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미국에서 개봉해서 이 정도면 대단한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디 워> 이전까지 한국영화로 미국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번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분명하다. IMDb에 따르면 <봄 여름…>은 단 6개 극장에서 개봉한
[편집장이 독자에게] <디 워>, 수출지상주의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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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추석은 한국영화의 대목으로 꼽힌다. 특히 올해는 4일 연휴라 극장가의 기대가 크고, 여름 동안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때문에 몸을 사렸던 탓에 추석 연휴를 노리고 개봉하는 한국영화가 많다. 추석시즌을 겨냥한 한국영화 가운데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벌써 ‘관객에게 드리는 글’을 내보내며 추석연휴까지 극장가에서 버티기 어려울 것 같다는 호소를 했다. 추석이 끝난 뒤 누가 웃고 울지 짐작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냥 묻어두기 아까운 영화가 한편 있어 얘기를 꺼낸다. 방송다큐로 소개됐던 실화를 소재로 만든 <마이파더>는 대단한 미학적 야심은 없지만 대중영화로서 눈여겨볼 미덕이 있는 작품이다. 영화를 보기 전 이야기만 들었을 때 <마이파더>는 기대할 게 별로 없는 영화 같았다. 입양아 애런 베이츠가 친부모를 만나고 싶어 한국에 왔다가 아버지를 만났는데, 흉악한 살인을 저지른 사형수였다는 실화에서 연상할 수 있는 게 뻔해 보였다. 사연은 기가 막히지만 결론
[편집장이 독자에게] 제임스 파커 혹은 애런 베이츠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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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얼굴의 주근깨투성이 소녀가 있다. 갓 스물이 됐을까. 미용실 보조로 일하는 그녀는 지난 여름 해변에서 이지적인 느낌의 대학생을 만나 파리에서 함께 살았더랬다. 출근하는 그녀를 침대로 끌고 와 안으며 속삭이던 남자에게 그녀는 모든 것을 의지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배운 적 없지만 그건 사랑이었고 그녀의 전부였다. 하지만 꿈같은 날은 가고 그녀가 출근하는 동안 남자는 자지 않으면서 자는 척한다. 그녀가 씹는 사과 소리가 거슬리고 변증법이 뭐냐고 묻는 그녀의 무식함이 부끄럽다. 여자는 눈물을 머금고 남자의 집을 나와 어머니와 살던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다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고 우연히 소식을 접한 남자가 병원으로 찾아온다. 넋이 나간 듯 더 창백하고 여윈 그녀를 만난 뒤 남자는 도망치듯 병원을 떠나고 자리로 돌아온 여자는 레이스를 뜨며 물끄러미 뒤돌아 쳐다본다. 아무것도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지만 모든 것을 보고 있는 듯한 그 눈동자. 슬프지만 슬퍼하지 않는 그 표정. 클로드
[편집장이 독자에게] 이자벨 위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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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충격적인 기사 하나를 봤다. 폐교 위기에 몰린 고등학교에 관한 이야기로 문제의 학교는 옥수동에 있는 동호정보공업고등학교다. 동호정보공고에 닥친 위기의 발단은 지역주민들이 ‘공고’를 싫어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지역 부유층에 해당하는 남산타운아파트에서 동호정보공고를 없애고 그 자리에 초등학교를 유치하고 싶어하고, 주변 부동산업자들은 그렇게 되면 집값이 10%는 더 오를 것이라고 전망했다고 한다. 애초에 편법을 써서 대규모 아파트에 주어질 학교용지 분담금을 내지 않았던 아파트 조합은 뒤늦게 초등학교가 필요하다며 나섰고 해마다 관청에 압력을 행사해 동호정보공고의 이전을 촉구했으며 2004년 동호고를 이전시킨다는 결정이 났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이전도 쉽지 않았다. 다른 지역에서도 실업계 고등학교가 이사오는 것을 반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서울시교육청은 오는 9월7일까지 동호교 폐교에 관한 의견을 듣고 교육위원회에서 폐교 여부를 최종결정한다고 한다. <
[편집장이 독자에게] 동호정보공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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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학교에서 가정환경조사라는 것을 했던 기억이 있다. 집에 자가용이 있는지, 월소득이 얼마인지, 부모님 직업은 무엇인지 등을 적어내는 것인데 공란으로 적어내면 다시 써오라는 꾸지람을 듣곤 했다. 가정환경조사를 하면 늘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부모님의 학력을 묻는 난이었는데 고졸, 중졸인 당신들은 항상 대졸, 고졸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학력을 기재하곤 하셨다. 그렇지 않다는 걸 뻔히 아는데 왜 꼭 거짓으로 학력을 높였을까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보진 못했다. 아마 궁색한 대답에 오히려 상처를 받지 않을까 싶었던 게 아닐지. 그러면서 자연스레 몸에 밴 것이 있다. 학력이 낮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 그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란 것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렸던 것 같다. 대학에 다닐 때,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친구들의 대화에서 아무개는 대입 시험 성적과 무관하게 어느 대학을 갔다는 얘기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운좋게(혹은 부정한 방법으로) 특기생으로 입학한
[편집장이 독자에게] 학력 검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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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휴가를 갔다 와보니 난리가 났다. 1주일 자리를 비웠는데 사태를 파악하느라 그간 있었던 일들을 뒤쫓다보니 1년은 비운 느낌이 들었다. <디 워> 논란에 대해 내가 쓴 글에 달린 댓글은 편집장이 된 이래 처음 맛보는 흥분을 안겨줬다. 이렇게 많은 댓글은 경험해보지 못한 터라 나를 비판하는 글인데도 이런 관심 황송하다, 싶었다. 결정적으로 휴가 때문에 <100분 토론>을 놓쳤는데 인터넷에 오른 기사와 댓글을 살펴보니 <무릎팍도사>를 뛰어넘는 올해 최고의 토크쇼였던 모양이다. <디 워>가 그냥 한편의 영화가 아니라 사회현상이 되고 있다고 했던 예측이 들어맞은 셈이다. 물론 그간 <디 워> 논란만 화제가 된 건 아니었다. 남북이 정상회담을 한다는 놀라운 뉴스가 있었고 한국이 별안간 아열대기후로 둔갑했으며 학력 위조 사례가 연이어 적발되고 있었다. 오랜만에 ‘다이내믹 코리아’의 활기를 느끼면서 이것이야말로 내가 이 땅을 벗어났을 때 맛
[편집장이 독자에게] <디 워> 논란 2라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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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이 펼치는 말과, 그 말에 대한 말은 무섭다. 명분 앞세운 말이 스스로 그 명분을 죽이다 못해 그저 살고자 할 뿐인 생명까지 짓밟는 시간을 말로서 증언한다. 명분으로 말하고 행하는 자의 진심이 진심인 것이 공포스럽다. 말로 빌어먹고 사는 직업을 가진 덕에 행여 그런 누를 저지르지 않았나, 저지를까 공포가 일었다. 대의명분을 도약대 삼은 말들이 부쩍 의심스러워졌다.
‘<디 워> 현상’도 말의 전쟁이다. 그 기세가 공포스러운 건 위세를 부리는 말들이 요상한 명분으로 상대를 짓밟기 때문이다. 황우석 사태보다 고약한 건, 그때는 있다 없다를 가르는 기준점이 분명했지만 지금은 개인의 좋다 싫다를 놓고 심판할 절대기준이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한쪽에서 절대기준을 무자비하게 휘두르고 있으니, 공포스러워도 직업도의상 말로 끼어들지 않을 수 없는 형국이다.
이번호는 <디 워> 현상을 비판적으로 다룬 9쪽짜리 기획이 아니더라도 <디
[편집장이 독자에게] 말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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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랜드 엠파이어>를 보면서 오금이 저렸다. 이렇게 무서운 영화인데 왜 아무도 그런 말을 안 했을까 싶었다. 올해 나온 공포영화 가운데 <디센트>와 <기담>이 좋았지만 <인랜드 엠파이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귀신, 괴물, 연쇄살인마, 좀비, 흡혈귀, 그 어느 것도 나오지 않지만 3시간 내내 온 신경이 두려움과 불안에 꽁꽁 묶인 것 같았다. 일반적 의미의 장르영화가 전혀 아닌데 공포의 효과가 이토록 강력한 이유는 뭘까? 그 비밀은 영화의 줄거리로는 설명이 안 된다. 내게 이 기묘한 이야기의 매듭을 풀 능력도 없기도 하거니와 영화 전체가 그 매듭을 풀어보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이야기의 매듭을 풀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무시무시하다. <인랜드 엠파이어>는 영상이 재현하는 의미의 법칙을 전부 빨아들여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게 설계된 거대한 미궁이다.
<인랜드 엠파이어>는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편집장이 독자에게] <인랜드 엠파이어>의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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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워>를 둘러싸고 말이 많다. 순수하게 영화적 성과를 논하는 것부터 심형래 감독의 학력 위조에 관한 입장까지. 한편의 오락영화일 뿐이니 재미있냐 없냐만 말하면 된다는 주장도 있지만 <디 워>는 이미 하나의 사회현상이 된 것처럼 보인다. 영화가 개봉하기 전이지만 인터넷을 뒤져보니 <디 워>와 심형래 감독을 둘러싼 다양한 입장을 접할 수 있었다. 간략하게 쟁점들을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1. 영화에 관한 평가는 ‘뛰어난 컴퓨터그래픽과 다소 허술한 이야기’라는 말로 축약되는 분위기지만 긍정적인 입장과 부정적인 입장 사이의 거리는 멀다. “이무기가 도심에서 벌이는 파괴 행위와 여의주를 둘러싸고 두 마리 이무기가 벌이는 박진감 넘치는 배틀은, 그 어떤 거대괴수영화에서도 보기 힘들었던 장관”이라고 말하는 호평이 있는 반면 “이야기의 구성에 아무런 개연성과 매력이 없다보니 이무기가 떼로 몰려와서 LA를 파괴하는 장면도 게임 신작 오프닝을 보는 정도로만 재미
[편집장이 독자에게] <디 워>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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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하드4.0>을 보고나니 대체 존 맥클레인의 매력이 뭘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흔히 말하는 것은 슈퍼히어로처럼 초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람보나 코만도 같은 근육덩어리도 아니며 007 제임스 본드처럼 멋지지도 않은, 보통 사람과 가장 가까운 액션영웅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의 매력을 설명하자니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예를 들면 <본 아이덴티티>의 제이슨 본도 그런 경우일 텐데 맥클레인과 많이 닮아 보이지 않는다. <하이눈>의 게리 쿠퍼처럼 홀로 악당들과 맞서는 서부극의 고독한 총잡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것도 개운치는 않다. 시대가 다르고 무대가 다른데다 서부극의 영웅들보다 훨씬 말도 많고 욕도 잘한다. 맥클레인의 거친 말투에 러닝셔츠를 입은 외모를 덧붙이면 블루컬러 계급의 전형적 이미지가 나온다. ‘블루컬러 액션영웅’이라는 정의는 그런 점에서 적절하지만 그런 계급 규정이 충분한 설명 같지도 않다. 그렇다고 악당들이 특별해서 맥클레인
[편집장이 독자에게] 관료제 사회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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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점이 밀집한 지역을 다니다보면 가끔 언제 이렇게 변했지, 싶을 때가 있다. 주로 강북에서 생활하다보니 종로, 신촌, 홍대 앞 등을 자주 들르게 되는데 얼마 전 홍대 앞에 고깃집이 밀집했던 지역을 지나다 깜짝 놀랐다. 야외에 불판을 내놓고 고기를 굽던 집들이 거의 없어져서다. 삼겹살 집이 없어진 자리에 들어선 것은 이자카야라 불리는 일식 주점들이다. 한집 건너 하나씩 비슷한 메뉴를 파는 이자카야가 빼곡히 들어섰다. 예전에 신촌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돼지갈비로 유명했던 골목이 어느 순간 모조리 닭꼬치집으로 변하더니 몇년 뒤엔 조개구이집으로, 다시 이듬해엔 찜닭집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물론 홍대 앞과 마찬가지로 이자카야가 우세종으로 자리잡았다. 전통을 고집하는 음식점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행에 따라 순식간에 바뀌는 식당들을 보노라면 사람들 입맛이 정말 그렇게 바뀌는지 의심스럽다. 지지난해엔 돼지갈비를 좋아하던 사람들이 지난해엔 찜닭만 찾고 올해는 이자카야를 선호하는
[편집장이 독자에게] 여름 극장가 숨은 영화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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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양이 죽었다. 컴퓨터 모니터는 그의 부고를 짧게 전하며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굳은 표정이다. 한참을 멍하게 기사를 되풀이해 읽었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 인생을 3배 길게 사는 법을 가르쳐준 <하나 그리고 둘>을 남기고 에드워드 양 자신은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났다. 망연자실한 감정을 추스르기 앞서 부끄러움에 고개가 숙여졌다. 내가 본 그의 영화는 <하나 그리고 둘>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마 많은 사람이 그럴 것이다. 에드워드 양은 그만큼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고 세계적으로도 충분히 소개되지 않은 감독이다. 하지만 <하나 그리고 둘>과 <고령가 소년살인사건>을 본 사람들은 말한다. 에드워드 양은 대만영화뿐 아니라 현대영화에서 가장 뛰어난 감독 가운데 한명이라고. 부고를 접한 뒤 <고령가 소년살인사건>을 조악한 화질의 동영상 파일로 보면서 <씨네21> 창간 10주년 영화제 때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
[편집장이 독자에게] 고맙습니다. 에드워드 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