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호 위원장이 부산영화제를 떠나신다는 소식은 꽤 오래전 들었다. 당시 그 이야기를 믿지 않았던 것은 김 위원장이 그동안 여러 번 위원장직에서 물러나려 하셨지만 주위의 끈질긴 만류로 결국엔 다시 자리에 앉으셨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그렇게 되리라 믿었고, 꼭 그렇게 돼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은퇴하신다는 발표를 들으니 약간은 울컥했던 게 사실이다.
김동호 위원장의 퇴임에 부치는 국내외 영화인 15인의 추억담을 읽노라면 그를 설명하는 키워드가 첫째 술이요, 둘째가 열정이며, 셋째가 겸양의 덕이고, 넷째가 친화력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 또한 잊지 못할 기억이 있다. 그중 하나가 2003년 도빌영화제 때다. 당시 도빌영화제의 후원사인 에어 프랑스는 취재기자에게 비행기 표를 협찬해줬는데, 그 등급이 비즈니스 클래스(무려!)였다. 집행위원장이었던 알랭 파텔이 기자들도 게스트급으로 대우하는 엄청난 배려를 베푼 덕분이었다. 김동호 위원장을 만난 건 인천공항이었다. 비즈니스석의 탑승을 알
[에디토리얼] 아이 러브 유, 오! 땡큐
-
영화의 약점이 내 눈에 지나치게 크고 뚜렷해 보일 경우, 수사(修辭)가 수사를 부르는 잡지 글쓰기 속성상 판단이 둔탁해지기도 한다. 그 위험을 피하는 한 방법은, 내가 좋건 싫건 감독이 최초에 품었을 최선의 의도에 입각해 영화를 다시 생각해보는 것인데 <라스트 에어벤더>는 그것도 용이하지 않았다. 동석한 다른 사람들은 샤말란의 최고작으로 <언브레이커블> <빌리지> <싸인>을 꼽았다. <식스 센스>는 한표도 얻지 못했다.
8월30일
일기를 쓰기로 한다. 나의 일기가 아니라 영화의 일기다. 영화관의 어둠에 잠겨 수천만 번째 태초의 빛이 스크린에 떨어지길 숨죽여 기다릴 때마다 나는 다시 한번 살아보기를 결심하고 있다는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그 영화에 아무런 기대가 없을 때조차. 그래서 영화의 일기를 쓰기로 한다. 영화를 보는 마음이란, 격류에 밀리고 내던져지는 오갈 데 없는 피조물의 기분인 동시에 살아 있음을 가장 능동적으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8월30일~9월7일
-
거짓말처럼 하루아침에 가을이 찾아왔다. 얼마 동안 여름의 마지막 조각 같은 땡볕에 시달려야겠지만, 이제부터 가을이라고 선언하는 데는 별 문제 없어 보인다. <씨네21> 구성원 입장에서 가을의 시작이라는 말은 추석이 가까워졌다는 이야기이고, 추석이 왔다는 말은 합본호를 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지금, 기자들이 노트북 속으로 들어갈 것처럼 마감 삼매경에 빠져있고 여기저기서 긴급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추석 합본호 때문이다.
추석을 버거워하기로는 영화계 또한 만만치 않다(힘들기론 까마득히 치솟은 물가 때문에 고심하고 있는 서민들이 가장 심하겠지만). 연휴가 절묘하게 자리한 덕에 경우에 따라 10일 가까이 휴일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 영화계를 더욱 분주하게 만들고 있다. 최근 몇년 사이 최고의 대목으로 꼽히는 이번 추석 시즌에는 메이저급 한국영화만 해도 5편이 포진해 있다. 한주 먼저 개봉한 <해결사>를 비롯해 16일 개봉하는 <그랑프리> &l
[에디토리얼] 추석, 한국영화 추수의 시즌
-
<옥희의 영화>는 정말이지 대단한 영화다. 반복과 차이라는 홍상수 감독 고유의 주제를 이토록 확장시킨 영화는 없는 듯 느껴진다. ‘세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네개의 단편 모음’이라는 이 영화의 구성은 주제와 구조를 극명하게 드러내 끝난 뒤 보는 이를 잠시 동안 멍하게 만든다. “많은 일들이 반복되면서, 또 어떤 차이를 가지는 이 인생이라는 게 뭔지는 끝내 알 수 없겠지만 제 손으로 두 그림을 붙여놓고 보고 싶었습니다”라는 옥희의 대사처럼, <옥희의 영화>는 엔딩 크레딧이 오르는 순간 정확하게 ‘뭔지는 끝내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반복과 차이를 가진 이 네개의 단편이라는 ‘그림’을 ‘붙여놓고 보고 싶’게 만든다. 물론 도무지 붙지 않긴 하지만.
사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우려도 있었다. 수많은 인물들이 교차하던 전작들과 달리 세 인물에만 초점을 맞추는 탓에 영화가 앙상하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또 구조가 두드러진 영화인 만큼 딱딱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걱정도
[에디토리얼] 문성근, 혹은 ‘나이든 남자’의 위엄
-
-
남성 관객으로서 영화 속 남자배우에게 반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반할 뻔했던 남자배우라면 <다이 하드> 시리즈의 브루스 윌리스,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의 조니 뎁, <비트>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정우성, <비열한 거리>의 조인성 정도가 얼핏 떠오른다. 이들은 각 영화에서 근사하고 멋지고 남성적인 모습을 보여줬지만, 수컷끼리의 영역 본능 때문인지 단순한 질투심 때문인지 또는 호모포비아 탓인지 선뜻 ‘반했다’라고 고백하기는 어려웠다. 그저 ‘자식, 좀 하는데’라거나 ‘흠, 괜찮네’라는 뜨뜻미지근한 표현으로 찬사를 보낼 뿐.
그런데 <아저씨>의 원빈은 달랐다. 원빈 특유의, 약간은 경직된 연기가 주를 이루는 초반부에선 별 감흥이 없었지만, 본격적인 액션이 펼쳐지는 중반부 이후부턴 넋을 잃고 빠져들고 말았다. 그 섬세한 외모가 액션을 감행할 때 그건 단지 근사한 이미지만이 아니었다. 그 무자비한 폭
[에디토리얼] 난 네게 반했어
-
이른 아침부터 태양이 이글거리지만 힘이 예전보다 떨어진 듯해 여름의 마지막 발악 같다. 아직 낮에는 무덥지만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습도도 차츰 낮아지고 있다. 출근길 버스 안에서 햇살을 받고 있어도 짜증이 그렇게까지 심하지 않다(요즘 버스의 에어컨이 워낙 좋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도리없는 자연의 섭리를 실감하는 요즘, 출근길에 자주 듣는 노래는 ‘생각의 여름’(박종현이라는 뮤지션의 원맨밴드)이 부른 <다섯 여름이 지나고>다. 심플한 기타 반주와 어딘가 서늘한 목소리는 청량한 바람을, ‘다섯 여름이 지나고 나는 어디 있을까… 푸르러질까 붉어질까 짙어질까 창백해질까’라며 스스로에게 묻는 가사는 쓸쓸한 바람을 가슴에 불어넣어주는데, 지금 하나의 여름이 지나고 있네, 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러고 보면 출근길 음악메뉴 중에 인디 뮤지션의 음악이 많은 편이다. 우쿨렐레 피크닉, 옥상달빛, 국카스텐, 시와, 한희정, 조정치, 디어 클라우드 등등. 그렇다고
[에디토리얼] 독립 영화·인디 음악, 맞절하세요
-
<악마를 보았다>를 보았다. 마감 중임에도 무리까지 해가며 시사회를 찾았던 건 거대한 물음표 때문이었다. 그 물음표는 여러분의 머리 위에 떠 있는 그것과 다르지 않다. 영상물등급위원회가 두번씩이나 제한상영가 판정을 내릴 만큼 표현이 강하다는데 대체 어떻기에, 라는 궁금증 말이다. 결론적으로 표현 수위는 무척 세다. 그렇다고 두눈 뜨고 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뭐, 몇몇 장면에서는 눈을 가리긴 했지만). 이전 버전을 보지 못해 속단할 수는 없지만 시신을 바구니에 던지는 장면이나 인육을 먹고 개에게 주는 장면 등이 덧붙여져 있다 하더라도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현저히 훼손시킨다”는 느낌을 받진 않았을 것 같다. 이미 <아저씨> 시사회 직후 “<악마를 보았다>가 <아저씨>보다 100배 세다”는 말을 들었고, 영화 안에서도 이병헌이 ‘약혼녀가 당한 이상으로 복수하겠다’는 대사를 반복적으로 하는 터라 마음의 준비는 충분히 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제
[에디토리얼] 악마 같은 세상, 악마 같은 영화
-
영화에 관심도 지식도 없던 시절, 내게 임권택이란 이름은 그저 ‘흥행감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개봉했던 <길소뜸> <티켓> <씨받이> <장군의 아들> 등은 대단한 흥행작이었기 때문이다(한국영화 사상 첫 100만 관객을 동원한 <서편제>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임권택 감독에게서 흥행 이상의 관심을 갖게 된 것은 TV에서 <짝코>를 본 뒤부터다. ‘반공영화’라는 딱지가 붙어 있음에도 당시(이 영화는 1980년작이다)의 살벌한 시대적 공기를 확고하게 거스르는 이 영화를 보면서 소름이 확 돋았다. 빨치산이라는 민감한 소재를 균형잡힌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짝코>는 엄청난 파격이요 대단한 용기였다. 그 뒤 <깃발없는 기수> <만다라> <안개마을> <연산일기> 같은 비디오 출시작을 보면서, 그리고 <춘향뎐> <취화선> <천
[에디토리얼] 임권택이라는 이름의 山
-
인디밴드 브로콜리 너마저를 굉장히 좋아한다. 남녀 두 보컬의 음색도 사랑스럽고 (불행히도 여성 보컬 계피가 탈퇴했다는 이야기가 들리지만) 나긋나긋한 멜로디도 정겹지만 무엇보다 덤덤하고 솔직하면서 쿨한 느낌의 가사가 마음에 든다. 이들의 음악을 처음 접했을 때는 인디음악을 오래 응원해온 사람으로서 뭔가를 ‘발견’했다는 나름의 성취감도 있었다. 그러나 놀란 건 이들이 이미 꽤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의 주된 팬은 (내가 보기엔) 대체로 70년대 후반 이후 태어난 이들로 감수성이 나름 예민하고 문화적 수용의 폭이 큰 부류들로 보인다. 따지고 보면 브로콜리 너마저는 이들 세대의 밴드다. 비슷한 사회적 경험을 겪었고 그 속에서 비슷한 정서를 쌓아온 그들은 그러니까 세대적 동지인 셈이다. 결국 내가 브로콜리 너마저를 좋아한다는 얘기는 그들 세대의 감수성을 갖고 싶다는 희망사항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개인적인 느낌도 이것과 비슷하다. ‘87 체제’의
[에디토리얼] 무라카미 너마저
-
스티븐 스필버그와 장이모는 2006년 4월 중국의 한 영화채널이 주관한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했다. 서양과 아시아의 대표적인 두 감독이 1시간30분 동안 대화를 나눈 것이다. 인상적이었던 내용 중 하나는 영화와 기술 발전과 관련된 대목이었다. “영화의 역사가 기술 발전의 역사라는 견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라는 진행자의 질문에 스필버그는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이어 “영화의 역사는 좋은 스토리텔링의 역사다”라고 힘주어 주장했다. “대신 새로운 기술은 스토리텔링을 쉽게 만들어준다. 나는 디지털 애니메이션이라는 새로운 수단을 통해 <쥬라기 공원>의 공룡을 만들 수 있었다. 이 기술은 상상 속으로 좀더 깊게 들어갈 수 있도록 해준다.” <죠스> <미지와의 조우> < E.T >처럼 획기적인 특수효과가 두드러지는 영화를 통해 스타가 된 그이지만, 만약 스필버그가 기술적 성취에 매몰돼 나태한 이야기를 펼쳤다면 지금처럼 최고의 흥행감독이 될 수
[에디토리얼] 스토리 없인 미래도 없다!
-
어슴푸레할 무렵 충무로에는 자동차가 한대도 다니지 않았다. 텅 빈 거리를 몇몇 동료와 함께 걷는데 갑자기 굉음이 들려왔다. 이런! 하늘에서 대형 헬리콥터가 추락하고 있는 게 아닌가. 쿠쿵! 잠시 뒤 또 다른 헬리콥터가 내 바로 앞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부웅! 아아, 이런 식으로 인생이 끝나는 건 곤란한데, 라고 생각하는 순간 뒤편에서 강병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으음, 이게 김혜리 선배가 말했던 꿈이구나.”
월드컵으로 몸이 지쳐 있던 몇주 전의 꿈 이야기다. 이 꿈은 개인적으로 몇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 처음으로 꿔보는 HD 화질의 꿈이라는 점. 헬기가 추락하는 장면의 해상도가 어찌나 뛰어났던지 파일럿이 탈출 버튼을 누르려 애쓰는 모습까지 생생하게 보였다. 꿈속에서 HD 화질 또는 3D 영상 또는 5.1채널 오디오 체험이 가능하냐, 라고 진지하게 질문하신다면 절대 답할 수 없지만 어쨌거나 나의 인식체계 속에서는 분명 HD였다(꿈속 강병진의 “정말 HD네”라는 혼잣말이 큰
[에디토리얼] 지금 꿈을 꾸고 있습니까?
-
2004년 이맘때 나는 영화 현장에 있었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의 제작부 막내라는 지위로 말이다. 주차 관리, 촬영지 및 식당 섭외, 부식 수급처럼 ‘시다바리’에 해당하는 일만 했지만 내 기여도 적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상당수 장면이 연출부 민범이와 헌팅을 다니며 찾아낸 공간에서 촬영됐고, 배우와 스탭들이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제작부는 무조건 뛰어다녀야 한다”는 근대조국건설산업역군식 조언에 따라 비지땀을 쏟아냈던(촬영을 끝까지 함께하지 못하고 중퇴한 건 부끄러운 기억이다) 6년 전 기억이 문득 떠오른 건 이번주 독자사연 때문이다. <파괴된 사나이>에 연출부 막내로 참여했던 김원석씨의 “영화가 별점 2개를 받았다고 해서 스탭들도 별점 2개는 아니”라는 말은 한때 스탭으로서 느꼈던 나름의 보람을 되새기게 했다.
뻔한 말이지만 영화에서도 중요한 건 사람이다. 스크린 안 스타 배우나 스크린 속 세계
[에디토리얼] 사람이 먼저, 그 다음이 영화
-
한국이 아쉽게 8강 진출에 실패했지만 여전히 월드컵 열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나만 그런가 했더니 <씨네21> 식구 대부분이 새벽녘까지 펼쳐지는 승부의 세계에 매료된 눈치다(월드컵이 끝나야 마감도 정상화되려나… 흑).
경기가 거듭되면서 각 팀의 전력과 색깔도 뚜렷해지고 있는데, 직업 탓인지 자연스레 영화 또는 감독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스페인팀은 우디 앨런을 연상케 한다. 짧고 날카로운 패스를 주고받으면서 아기자기한 플레이를 펼치는 스페인 축구는 톡톡거리는 수다로 이뤄진 앨런의 영화세계와 유사하다. 승부를 끝낼 수 있는 한방이 아쉽다는 점도 비슷하지만. 화려한 공격진에 비해 수비와 미드필드가 취약한 아르헨티나팀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떠올리게 한다. 메시, 이과인, 디마리아가 상대방 진영을 향해 질주하는 동안에도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역습에 대한 불안감은 <놈놈놈>을 볼 때의 느낌을 되새기게 한다. 빈틈이 없는 브라질팀은 크리
[에디토리얼] 강우석의 변신에 부부젤라를!
-
창의성이라는 차원에서 할리우드영화가 갈수록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이야기는 오랫동안 제기됐다. 거기에는 안정적인 포트폴리오만 고집하는 스튜디오들의 방침이 가장 큰 원인을 제공했을 것이다. 스튜디오들이 거대 미디어자본 아래 놓여 있고 미디어자본은 다양한 금융투자사들과 파트너십을 맺고 있는 까닭에 이들의 급선무는 안정적인 이윤을 만들어내는 것이 된다. 스튜디오들의 이윤을 안정화할 방법론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다. 영화의 독창적 색채를 흐릿하게 하는 대신 규모를 키운다(CG는 규모를 키우는 최고의 저비용 고효율 방법론이다). 개봉주 박스오피스 성적을 극대화하기 위해 마케팅 비용을 늘린다. 성공했던 영화의 경우 속편을 만든다. 고정 팬을 확보하고 있는 원작(그중에서도 슈퍼히어로를 다룬 만화나 그래픽 노블)의 판권을 계약한다 등등등.
그러니까 작가의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담긴 영화가 갈수록 나오기 힘들다는 이야기다. 할리우드에서는 영화화에 대한 스튜디오나 제작사의 확약없이 작가가 쓴
[에디토리얼] 컴 온, 웹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