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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씨네21> 홈페이지에 가장 큰 변화는 블로그를 만든 것이다. 인터넷 소식에 둔감한 나는 온라인팀 배성준 팀장이 블로그의 필요성을 역설할 때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필요하면 하죠, 뭐, 정도였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글을 쓰고 덧글을 달아가며 교류한다는 게 처음엔 상상이 잘 안 됐다. 돈주는 것도 아닌데 그런 귀찮은 일을 누가 하겠어, 싶었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난 요즘,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씨네21>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블로그부터 살펴본다. 하나하나 덧글을 달 만큼 부지런하진 않지만 블로그에 올린 글과 사진들을 보는 게 소소한 즐거움이 돼버렸다. 독자엽서만으론 알 수 없던 독자들의 모습을 아주 가깝게 들여다보고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씨네21 블로그에 몇몇 스타(?)가 등장하고 있다. 김혜리, 이종도, 손홍주, 오계옥, 백은하 등 기자나 통신원의 블로그도 인기지만 블로그 개설 전까지 전혀 몰랐던 독자들의 블로그 가운데 매일
[편집장이 독자에게] 웰컴 투 씨네21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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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하 같은 배우는 멀찍이 바라만 보아도 즐겁다. 며칠 전 <인터뷰> 시사회장은 그가 무대 앞에 나와서있기만 해도 객석이 고요히 숨죽였다. 스타의 힘이란 그런 것이다. 하지만 시사회장의 여배우들에게서 늘 “열심히 했어요. 잘 봐주세요” 또는 “예쁘게 봐주세요” 식의 똑같은 인사말을 들을 때, 나는 궁금해지곤 한다. 작품 발표를 앞둔 사람으로서 짐짓 겸손하려 하는 걸까, 작품에 대해 실제로 아무런 의견이 없는 걸까.
<8월의 크리스마스>의 심은하나 <내 마음의 풍금>의 전도연은 각기 자신의 배역을 정확히 이해하고 표현하는 연기를 했다. 그들은 모두 ‘유능한 전문직 여성’들이다. 그들의 경쟁력이 오직 예쁜 얼굴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연기란 대단히 지적인 노동이다. 대본을 외우려면 타고난 기억력이 요구되고, 배역을 이해하려면 분석적인 사유능력이 필요하며, 성격을 표현하려면 풍부한 감수성이 받쳐줘야 한다. 배우는 배역의 인생에 푹 빠져야하며
[편집장이 독자에게] 유능한 전문직여성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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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 기억 가운데 아주 끔찍했던 장면이 있다. 시시때때로 나오는 반공드라마에서 인민재판을 하는 모습이었다. 반공 청소년으로 커가는 데 밑거름이 된 그 장면을 보며 몸서리친 이유는 순전히 죽창이 몸을 뚫는 잔인한 이미지 때문이었다. 인민재판 자체가 끔찍한 것이란 건 나중에야 알았다. 오늘날 흔히 이지메라 부르는 이것은 집단이 개인을 통제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는 방법이다. 꼭 죽창을 쓰지 않아도 이지메를 당한 자의 영혼은 피눈물을 흘린다.
뒤늦게 <혈의 누>를 보면서 가물가물했던 인민재판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감독의 말로 확인한 바는 없으나 김대승 감독 또한 인민재판의 끔찍한 이미지에서 <혈의 누>를 만들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희생자의 몸이 나무에 꽂혀 있는 장면이나 모든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사지가 찢겨나가는 장면은 한국전쟁의 상처를 상기시키기에 충분했다. 나는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잔인함이 흥행을 고려한 결정이라고 생각하
[편집장이 독자에게] 군대는 선, 국적 포기는 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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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허리케인 카터>에서 수감중인 루빈 카터가 “writing is magic”(글쓰기는 마술)이라고 했을 때, 이 발언은 과연 카터가 유죄냐 무죄냐 하는 시비를 덮으면서 마치 영화 전체의 메시지인 것처럼 강력한 힘을 발산했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글쓰기란 자신을 심화(가운데점) 확장시키며, 그것은 종신형의 죄수를 구원할 만큼의 놀라운 힘을 지닌 것이다. 진정성을 가진 진술이라면, 수기든 소설이든 영화든 모든 창작행위가 다 마찬가지 효과를 가질 것이다. 홍상수 감독은 언젠가 “내 내부에서 아직 정리가 안 된 문제들을 영화로 다룬다”고 말한 적 있는데, 영화 만들기가 자신을 정신적으로 고양시키는 경험일 수 있다는 것, 그처럼 사적인 창작행위의 진정성을 고수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문학도 아닌 영화에서 말이다. 영화산업은 감독 개인에게 사적인 창작행위의 여지를 그닥 허용하지 않는다. 그보다 영화는 시장전략의 산물이고, 산업시스템과의 흥정이며, 기껏해야 관객과의
[편집장이 독자에게] 영화만들기의 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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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씨네21> 창간 10주년 기념 특강이 진행 중이다. 지난주 배우 백윤식이 스타트를 끊었고 이번주에 배우 문소리와 박찬욱 감독이 강연자로 나섰다. 박찬욱 감독 특강 진행을 하면서 그에게 연기 연출의 비결을 물었더니 재미있는 답변이 나왔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예전에 <올드보이> 오디션을 할 때 강혜정이 왔는데, 문승욱 감독의 <나비>를 찍었잖아요. 그래서 그 감독과 일할 때 어땠냐고 질문을 했는데 너무나 인상적인 대답이 나왔어요. 문승욱 감독은 아실지 모르겠는데 굉장히 책도 많이 읽고 굉장히 지식인이에요. 한 장면의 연기를 설명할 때 10분, 20분을 굉장히 어려운 단어를 써서, 그리고 아주 복합적인, 도저히 동시에 하기 힘들 것 같은, 자기로선 도저히 자신이 없는,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하고 뭐 그런 거 있잖아요. 그런 것을 10분 동안 설명해주신대요. 그러면 자기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대요. 그래서 그때 같이 연기했던 사람이 김호정씨
[편집장이 독자에게] 연기, 작지만 무한한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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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홍상수 감독 인터뷰를 하면서 그와 처음 이야기를 나눴던 때가 떠올랐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개봉을 앞둔 1996년의 어느 날, 당시 <씨네21> 기자였던 김영진 선배와 난 너무나 낯선 영화를 만든 이 신인감독에게 물어볼 것이 많았다. 지금보다 훨씬 날렵하고 젊었던 홍상수 감독의 첫인상은 흔히 볼 수 있는 지식인 같았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깊이 들어가면서 그의 언성은 높아졌고 기자의 상투적 질문이 무색할 답변들이 쏟아져나왔다. 그건 그가 만든 영화만큼 색다른 경험이었고 일종의 정신적 충격이었다. 홍상수 감독을 만나기 전까지 자기 영화의 방법론을 그처럼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영화이론서에서 결코 본 적 없는 사유체계를 접하면서 영화란 무엇인가에 관한 내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나는 <극장전>이 지금까지 홍상수 영화 가운데 가장 좋다. 솔직히 홍상수 영화가 얼마나 진보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의 영화는
[편집장이 독자에게] <극장전>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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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 봄, 처음으로 칸영화제엘 갔다. 당시로선 일간지들이 아직 해외영화제에 기자를 보내지 않을 때였고, 나는 대종상 예심 심사료 받은 것과 약간의 돈을 모아 자비출장을 결행했다. 내가 놀랐던 건, 영화제 본부 건물은 외관이 예상보다 작고 수수했다는 것이고, 일단 영화제가 시작되니 해변을 따라 뻗어있는 시가지가 모두 행사장이더라는 것이다. 그해 칸영화제에서 받은 좋은 인상과 나쁜 인상 몇가지. 좋았던 건, 첫째, 영화제 주요 행사장과 호텔 로비들에 아침마다 가지런히 비치되는 각종 영화제 일간지들. <버라이어티> 등 잡지들이 현지에서 발행하는 일간지들은 매일매일의 영화제 상황을 환하게 알려 주었다. 둘째, 아이디카드의 위력. 아이디카드 발급 기준은 까다롭지만 일단 받으면 견본시 소극장들을 포함해서 본부 건물안에 있는 수십개 상영관을 자유자재로 들락거릴 수 있다. 단, 입구에 줄서서 입장권을 받아야하는 경쟁부문 메인 시사회만 빼고. 그래서 상영일정표를 들고 체크해가며 한 극장
[편집장이 독자에게] 또하나의 국제영화제를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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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5일, <씨네21> 창간 10주년 기념 영화제가 끝났다. 아직 정확한 통계는 나오지 않았지만 6천명 이상이 이번 영화제를 다녀갔다. 영화제를 준비하면서 가장 걱정했던 것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와서 영화를 못 보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이었다. 극장에 못 들어간 사람들이 내 멱살을 잡는 꿈을 꾼 적도 있다.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번 영화제는 최근 몇년간 허리우드극장이 경험 못한 많은 관객을 동원하는 성황을 이뤘지만 매진은 딱 한번 나왔다. 지난 4월30일, 갑자기 한여름처럼 더웠던 날,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상영시간이었다.
당일 현장에 없었던 탓에 직접 목격하진 못했지만 이날 극장 환경은 끔찍했단다. 이른 더위에 무방비 상태였던 터라 에어컨은 작동이 안 됐고 때마침 매표시스템도 장애를 일으켰다. <안녕, 프란체스카>의 박희진 말투로 “아니, 이게 웬 당황스런 시추에이션”. 480석 좌석이 완전 매진된 상태에서 바닥에
[편집장이 독자에게] <씨네21> 영화제를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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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영화담당 기자들은 김기덕 감독의 <활>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기자 시사회를 열지 않고 인터뷰도 전혀 안 하겠다고 하니 영화에 대해 쓸 말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보도자료도 없고 공개된 스틸사진도 달랑 한장이다. 이거야 원, 기자들 엿먹으라는 거야 뭐야, 하는 볼멘소리가 나올 만도 하다. <씨네21>도 예외는 아니라서 이번호 기획기사에도 다른 데서 볼 수 없던 사진은 없다. 별 수 없이 우리는 제작진과 배우에게 <활> 제작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기사를 준비했다. 김기덕 감독은 <씨네21>의 인터뷰 요청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11편 영화를 찍는 동안 너무나 많은 말을 했다. 내 영화를 있는 그대로 보기 힘들 만큼 많이. 그냥 영화 자체로 설명이 되지 않겠나? 나의 말로 규정되거나 왜곡되지 않은 상태로 영화를 봐줬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영화를 미리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니냐, 대체 무슨 배짱으로
[편집장이 독자에게] 김기덕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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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벌써 1800명이나! <씨네21> 홈페이지에 창간 10주년 축하 리플을 다는 자리를 마련했더니 사흘 만에 1800명 넘는 사람들이 축하인사를 남겼다. 경품을 내걸긴 했지만 사심이 있어 쓴 글 같진 않다. 한마디 한마디 진심이 묻어나는 말이 대부분이다. <씨네21>을 만나 행복했다는 표현을 만날 때마다 가슴이 뭉클하다. 쓸쓸히 보낼 줄 알았는데 여러 지인들이 예상치 못한 생일파티를 마련해준 것 같은 기분이다. 이런 날은 잘난 척 좀 해도 욕먹지 않을 것 같다.
문득 내가 처음 편집장을 맡았을 때 3대 편집장이었던 허문영 선배가 보낸 이메일에 적혀 있던 글이 떠오른다. “나오고 나서 보니까 <씨네21>이 여전히 중요한 매체라는 걸 알겠다. 옛날보다 더 중요하진 않더라도 여전히 중요하고, <씨네21>에 마음 기대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겠더라.” 가끔은 정말 그런가 의심스럽지만 10주년을 맞는 지금 같은 때는 이 말이 실감난다. 감히
[편집장이 독자에게] <씨네21>의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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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호 표지를 보고 어디서 본 장면인데 하며 고개를 갸웃거릴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맞다. <영웅본색>이다. 갑자기 <영웅본색>을 패러디한 표지를 찍은 건 <씨네21> 창간 1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다. 특별한 표지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댄 결과다. 이번호에 이어 진짜 창간 10주년 기념호인 500호와 501호에도 패러디 표지는 이어진다. 어떤 장면이 어떻게 찍힐지, 두둥 기대하시라. 손홍주 사진팀장은 요즘 이 표지 준비 때문에 녹초가 됐다. 그래도 <씨네21>의 10주년을 특별하게 만들고 싶다는 열의가 끓어올라 주체할 수 없는 눈치다. 병원에서 수술하러 오라는데도 안 가고(실은 못 가고) 버티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왜 우린 늘 시간이 없는 걸까, 되묻게 된다. 어렸을 때는 일중독이라는 말이 참으로 이해가 안 갔다. 오죽 할 게 없으면 일에 중독이 될까, 싶었는데 요즘엔 일중독에 빠지지 않고서 사회에서 버틸 수 있는 방법이 있을
[편집장이 독자에게] 창간 기념 새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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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때가 있다. “너, 잘하고 있는 거니?” 누구나 그렇겠지만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란, 대략 난감하다. 옆에서 아무리 “그래, 너 잘하고 있어”라고 말해도 불안하고, 거꾸로 “너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하면 겉으론 태연한 척해도 속으론 섭섭해진다. 같은 질문을 <씨네21>을 향해 돌려보자. ‘우린 정말 좋은 잡지를 만들고 있는 건가?’ <씨네21>을 만들면서 끊임없이 부딪히는 이 질문은 꼭 누군가 “너, 떨고 있니?”라고 묻는 것 같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느낌을 받아 자꾸 주위를 둘러보지만 목적지를 알려주는 등대는 잘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당장 당도할 목적지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항해 자체가 목적일지도. 빙하를 피하고 폭풍우와 맞서면서 고난의 사투를 벌이고 있다고 과장할 생각은 없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적당한 불안과 긴장과 위험도 때론 힘이 된다. 그래서 어딘가 흔들리는 느낌이 들 때도 대범한 척 말한다. “아싸~.”
[편집장이 독자에게] 창간 10주년 기념 영화제를 준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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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성영화제 프로그램 소개 기사를 보다 깜짝 놀랐다. 다큐멘터리 상영작 내용 대부분이 글로 읽어도 몸서리가 쳐지는 이야기다. 이런 건 인권영화제에서 틀어야 적당한 것 아닌가 싶은 영화가 한두편이 아니다. 예를 들어 <명예살인>. 파키스탄의 경우, 가문의 명예를 훼손한 여성은 가족이 공모해서 죽여도 문제삼지 않는 처벌관습이 존재한단다. 한편 <결혼선고>에선 이혼문제를 라비의 법정에서 판결하는 이스라엘 상황이 등장한다. 자기는 다른 여자를 만나 함께 살면서 다른 남자를 만난 전처의 자유는 완전히 박탈한다는 라비 법정의 재판도 파키스탄의 <명예살인> 못지않게 끔찍하다. 세상에, 이런 나라에 태어나지 않은 걸 감사해야지 싶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전에 봤던 다큐멘터리 한편이 떠오른다. 이란의 어느 연쇄살인범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는 매춘하는 여인을 살해하며 그것이 신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말한다. 더 놀라운 것은 살인범 가족의 반응이다. 아내와 자식
[편집장이 독자에게] 여인잔혹사, 제7회 여성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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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울지 않는다. <아무도 모른다>에 다른 제목을 붙인다면 이게 적당하지 않을까? <아무도 모른다>를 보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머니가 버린 꼬마 넷이 남들 눈을 피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본다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아마 이 영화를 보고 가장 빨리 마음을 진정시키는 방법은 아이들을 내팽개친 어머니를 비난하는 일일 것이다. 혼자 행복하자고 자식을 버리다니, 응당 누구나 분개할 만하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별로 안 들었다. 적개심을 품기엔 너무 철없는 어머니가 아닌가. <아무도 모른다>에서 어머니는 꿈을 꾸는 여자일 뿐이다. 그녀는 너무 많이 버림받아서 버림받는 공포조차 잊어버렸다. 어머니는 크리스마스에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나지만 소년도 안다. 이번엔 정말 돌아오지 않을지 몰라. 그래도 울고불고 매달리지 않고 어머니를 떠나보낸다. 건조하게 연출된 이별장면에서 <아무도 모른다>가 비범한 영화라는 걸 알게
[편집장이 독자에게] 아무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