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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도 운명이란 게 있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기자로 일하다보면 느끼는 것이지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단 하루도 못 버티는 글이 있는가 하면 수십년이 지나도록 읽히는 글이 있다. 주간지라면 그 생명은 대체로 일주일일 것이고 월간지라면 한달이 평균 수명일 것이다. 그렇다고 일간지보다 주간지가, 주간지보다 월간지가, 월간지보다 단행본이 우월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각자 주어진 생명에 걸맞은 삶이 있다. 단 하루 살아남는 일간지 기사라 할지라도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나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보도처럼 고전소설 못지않은 가치를 지닌 글도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주가 지나면 쓰레기통에 처박혀 영영 사라질 주간지라 해도 최선의 노력이 들어가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10년 넘는 역사를 만들어가면서 일주일 만에 잊혀지고 버려지기 아까운 글들이 <씨네21>에 적지 않게 쌓였다. 가끔 한주의 삶으로 만족 못할 글들이 “이대로 죽을 순 없다”고 아우성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
[편집장이 독자에게] <씨네21>의 첫 단행본 <내 인생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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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춘향뎐>은 완성품이 어떤 모양일지 혼란스런 작품이었다. 시나리오는 따로 없고 판소리와 영상이 함께 가는 거다, 라는 감독의 설명으로는 어떤 영화가 나올지 감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건, 제작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지난 1월18일 <춘향뎐>이 첫 공개된 시사회장에서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은 “영화를 별로 많이 만들지는 않았지만 영화 공개하면서 이렇게 긴장되긴 처음”이라고 했다(‘영화를 별로 많이 만들지 않았다’는 건 농담이다. 태흥영화사는 동아수출공사와 함께 실제 영화제작을 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두 영화사 가운데 하나다). 임권택 감독도 찍는 동안 스스로 결과가 궁금했다고 말했다. 이건 물론 그다운 겸양이긴 하지만, 실제로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고난도의 실험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영화 <춘향뎐>은 한국영화에서 아주 특별한 성과다. <춘향가>의 ‘소리’를 그처럼 열린 형식의 영화로 건져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실
[편집장이 독자에게] 판소리는 한국의 셰익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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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드라마 <제5공화국>을 본다. 대단한 완성도를 지닌 드라마는 아니지만 나의 정치의식이 자랐던 80년대를 다루고 있기에 자연스레 눈길이 간다. 그동안 이 드라마는 전두환 일당의 악행을 하나하나 들춰냈고 마침내 대통령이 되기 직전 전두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 그때를 경험 못한 세대라면 그냥 즐기며 볼 수도 있겠지만 나로선 이 드라마를 보며 오래전 아물었던 상처를 헤집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구가 되었던가. 20살 무렵 그런 사실을 처음 접하고 울분을 터트렸던 순간이 떠오른다. 지금 드라마를 보며 느끼는 감정과 차원이 다른 분노가, 그때는 있었다.
엉뚱하지만 <친절한 금자씨>를 보면서 <제5공화국>이 떠올랐다. 최민식이 연기한 백 선생이라는 인물이 전두환과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만인에게 불행을 몰고온 악인이라 그렇기도 하지만
[편집장이 독자에게] <친절한 금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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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낙원 이야기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비치>는 정작 대니 보일 감독 자신의 실낙원 같다. 이 영화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하는 배낭족 청년은 천혜의 낙원을 발견하지만 낙원은 이미 지옥이었고 곧 참혹한 종말을 맞는다. <쉘로우 그레이브>와 <트레인스포팅> 등 단 두편으로 단숨에 영국이 낳은 세계적 스타 감독이 돼버린 대니 보일이 할리우드의 프로포즈를 받았을 때, 할리우드는 그에게 어쩌면 기회와 자본의 인공낙원처럼 보였을는지 모른다. 실제로 그는, 영국에서의 100배쯤 되는 제작비에다 섬 하나를 세트처럼 마구 뜯어고쳐가며 사용했다. 하지만 할리우드와의 거래에서 그는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아 보인다. 디카프리오라는 특급 스타와 화려무비한 스케일은 대니 보일 특유의 무자비한 냉소나 희망없음의 절규와 뒤섞이면서 계통도 족보도 없는 이상한 사생아를 출산했다. 글쎄, 대니 보일의 세계라는 것도 그의 영화제목처럼 얕게 덮어놓은 무덤 같은 것이었을까. 그보
[편집장이 독자에게] 그냥 자기 나라에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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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해 아시아영화들을 둘러보고 다니는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 김지석씨에게 “요즘 동아시아영화들 어때요? 한국 같은 데 있어요?”하고 물어보았다. 그의 대답은 “없다”는 것이었다. “산업으로나, 작품수준으로나.” 80년대 중반 이후 작가 영화의 뉴 웨이브로 한때 한국 ‘작은영화주의자’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기도 했던 대만영화만 보더라도 지금 “근근이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국내산업은 거의 몰락했고 명망가 감독들이 외국 돈으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이다. 차이밍량은 미국 돈으로 차기작을 준비하고 있고, 허우샤오시엔은 프랑스 자본으로 신작을 찍는데 ‘시나리오를 미리 내놓으라’는 주문을 이행하지 못해 촬영을 중지당했다는 것이다. 중국 역시 국가주도 영화산업이 민영화의 과도기에 극심한 자금난을 겪고 있고 독립영화작가들은 검열과 제작비 문제로 게릴라식 작업을 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바다. 일본 역시 메이저들은 생산활동을 중지했고, 과거와 같은 대작 제작시스템은 무너졌으며, 독립영화사들이
[편집장이 독자에게] 정말 영화 잘들 찍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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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이 아니라 <북21>이 어울리겠는걸.” 이번주 <씨네21>을 보고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이번호엔 유난히 소설과 소설가에 대한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다. 특집으로 작가와 감독의 대화를 실은 것에서 시작해서 최근 일본에서 개봉한 <플라이, 대디, 플라이>의 원작자 가네시로 가즈키의 인터뷰를 거쳐 포커스 지면엔 올 여름에 읽을 만한 신작 추리소설들이 선보인다. 갑자기 소설 이야기가 많아진 것은, 한국영화의 위기에 출구가 없는지 되짚어보자는 제안이다, 한국영화가 잃어버린 서사의 즐거움을 되찾자는 선언이다, 지난 6개월간 극비리에 추진해온 <씨네21>의 안중근 계획이다, 라고 말하면 좋겠는데, 사실 그렇게 굉장한 의도를 갖고 추진한 프로젝트는 아니었다. 좀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하다보니 우연히 그렇게 됐다. 각각의 특집과 기획엔 분명한 이유가 있었지만 이렇게 한꺼번에 들어가게 될 줄은 예상을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만
[편집장이 독자에게] 문학아, 말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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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목적>을 보면서 치가 떨린 장면이 하나 있다. 교생 홍과 연애한 사실이 인터넷을 통해 알려지자 흥분한 유림이 학생들을 때리는 대목이다. 왜 이런 장면이 필요했는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너무 화가 나서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란 걸 보여줘야 했으리라.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런 선생들이 있었지, 라고 생각하지만 난 그런 유림을 용서할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런 유림을 귀엽고 사랑스런 모습으로 분칠하는 영화에 화가 났다. <연애의 목적>을 보여주려면 까짓 애들 몇놈 엉덩이 때리는 게 대수인가, 라는 생각이었던 걸까. 아마 내 뺨을 갈겼던 고등학교 시절 선생도 그런 식이었으리라. 개인적인 분풀이가 필요했을 수도 있고, 선생이 애들 때리는 걸 별거 아닌 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20년 이상 지난 지금도 그들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친다.
이런 예는 적지 않다. <여선생 vs 여제자>에는 사리사욕에 눈이 먼 선생이 초등학교 아이들
[편집장이 독자에게] 학생, 다수의 마이너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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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대학생 단체에서 강의하게 되었다. 마흔을 넘기면서 '젊은층'이라는 착각이 확실히 불식되고 나이에 대한 자의식이 생겨나고보니, 진짜 젊은층들은 요즘 어떤 생각을 하나 알고 싶어진다. 그래서 강의시간 2시간 중 한 시간 강의하고 30분 질문받고 30분 질문하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내가 학생들에게 던진 질문은 대체로 직업관/결혼관 따위였다. 재미있는 건, 여학생들에게 결혼관을 물었을 때였다. 졸업후 결혼해서 현모양처 되는 것이 꿈인 사람? 아무도 없었다. 졸업후 취직하고 결혼해서 두 가지 모두 하며 살겠다는 사람? 절반 정도가 손을 들었다. 사회활동만 하면서 독신으로 살겠다는 사람? 아무도 없었다. 그러면 나머지 절반의 정체는 뭐지? 혹시, 동성애 커플을 만들 계획들인가? 한 학생 대답이 졸업후 취직했다가 결혼하면서 그만둔다는 것이다. 그게 나머지 절반이라는 것이다. 그런 길도 있긴 있었군.
지금은 여성특파원을 둔 신문사도 여럿이지만,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82년만 해도 여성
[편집장이 독자에게] 대학졸업을 맞는 여학생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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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주간 영화판이 꽤 시끄러웠다. 강우석 감독의 발언으로 촉발된 사태는 최민식, 송강호의 기자회견을 거쳐 강우석 감독의 사과문 발표로 마무리되는 분위기다. 이번주 <씨네21>은 불똥이 엉뚱한 방향으로 번진 것은 잠시 잊기로 하고 문제의 핵심에 집중하는 특집기사를 준비했다. 한 가지 미리 말하자면 우리가 기사를 준비한 것은 이번 소동이 있기 오래전부터다.
사실 지난 십수년간 한국영화가 위기에 처하지 않은 시점은 한번도 없다(내가 이런 유의 기사를 쓴 것만도 여러 번이다). 올해의 위기가 특별하다고 느낀 건 한국 영화산업이 어떤 한계에 도달했다는 느낌 때문이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지난 10년간 한국영화는 성장일로에 있었다. 극장이 늘어나는 만큼 관객이 늘었고 엄청난 제작비에 1천만 관객이 화답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한국영화가 일찍이 꿈도 꾸지 못한 액수로 외국에 팔리는가 하면 한류를 타고 스타 산업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됐다. 거칠 것 없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편집장이 독자에게] <여고괴담4: 목소리>가 전해준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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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베를린영화제 평생공로상을 받은 여배우들의 인터뷰는 늘 감동적이다. 개인적으로 그닥 호감이 안 가는 카트린 드뇌브(98년)는 역시 인터뷰도 별 감흥이 없었지만, 마치 대항해시대의 탐험가처럼 영적 성적 예술적 정치적 세계를 용감무쌍하게 탐험해온 셜리 매클레인(99년)이나 예전엔 유럽예술영화의 연인이었고 지금은 그 대모인 잔 모로(2000년)의 인터뷰를 보노라면 대배우란 하나의 박물관이구나 싶다. 그들의 내면엔, 여러 시대의 공기와 명감독들의 상상력과 수많은 가상의 개인사들이 숨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배우가 대가가 되는 건 아니다. 어느 분야에서든 대가가 된 사람에게는 ‘길을 아는’ 사람만의 체취가 있다.
2. 배우의 가치는 스타의 가치와 다르다. 배우의 가치가 작품에서 나온다면, 스타의 가치는 산업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비치>의 제작비 4500만달러 가운데 2천만달러가 디카프리오의 개런티였다. 그건 할리우드에서 심심찮게 있는 일이다. 그래서 메이저 스튜디오
[편집장이 독자에게] 배우에 대한 세 가지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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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 비긴즈>는 조엘 슈마허가 망쳐버린 <배트맨> 시리즈의 새로운 출발로 손색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나도 이 말에 동의한다. <배트맨 비긴즈>에서 심금을 울린 대목 하나는 상처를 입은 배트맨이 길바닥에 굴러떨어졌다 잽싸게 건물 옥상으로 솟아올라가는 대목이다. 잠시 쓰러져 있어도 될 텐데 누가 볼까 겁나 사력을 다해 몸을 숨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그가 공포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자신이 두려워하던 박쥐를 자신의 심벌로 택한 것과 관련된다. 브루스 웨인은 상처입고 쓰러진 배트맨이 목격되는 것이 배트맨이 죽는 것보다 나쁜 사태라고 여겼을 것이다. 적에게 두려움을 심어주는 것은 배트맨의 실제 능력이 아니라 배트맨에 대한 신비감이기 때문이다. 배트맨이 평범한 인간이라는 게 알려지는 순간 배트맨은 슈퍼히어로이길 멈출 것이다. 배트슈트와 배트카로 누구나 배트맨이 될 수 있다면 그따위 배트맨을 누가 두려워하겠는가. <배트맨 비긴즈>는 돈은 많지만
[편집장이 독자에게] 배트맨,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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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어떤 고등학생이 중퇴를 하고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냐는 상담을 청해왔다. 이미 카메라를 샀다고 했다. 내 대답은, 이왕 학교 나와버린 건 하는 수 없고 검정고시를 봐서 대학 영화과나 영상원에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혹시, 이 학생이 정규교육 따위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천재일까. 또는 정규교육이 예술적 상상력과 창의성을 갉아먹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떠나는 것이 나았던 건 아닐까. 그렇다고 해도 하는 수 없다. 현실은 빤히 눈에 보이는 거니까. 지금 충무로에서 활동하는 젊은 세대 영화감독들은 거의 모두 대학을 나왔거나 일단 대학을 들어가기는 한 사람들이다. 오직 김기덕 감독 한 사람이 예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1/100의 예를 따르도록 충고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한국은 완고한 학력계급사회다. 예술쪽은 예외를 허용할 법도 한데 그렇지 않다. 가령 프랑스 50, 60년대의 누벨바그가 전형적인 지식인 감독들의 작품이었다면, 80년대 이후 프랑스영화의
[편집장이 독자에게] 감독이 되려면 대학을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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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 자신도 삼순이도 노처녀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몰아가는 건, 사회가 아닌가 싶다.” 이번호 특집기사에 들어 있는 인터뷰에서 배우 김선아가 한 말이다. 이 말을 읽으면서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찌릿찌릿했다. 김삼순, 아니 김선아가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다. 그의 말처럼 노처녀란 사회가 만들어낸 말이며 어떤 편견을 재생산하는 단어다(나이든 미혼 여성은 빨리 결혼시키라는 압력이 절로 느껴지지 않는가). 이런 예로 동성연애를 들 수 있다. 동성연애는 이성애의 반대말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성행위라는 데 방점이 찍힌 말이다. 동성애자에게 그런 것처럼 노처녀에게도 인권탄압은 그치지 않는다. 세상은 운전하는 여자에게 폭언을 퍼붓듯 싱글로 사는 여인에게 버럭 소리를 지른다. “아줌마, 아니, 처녀라고? 그러니까 시집을 못 갔지”라며.
노처녀라는 희생양은 남성적 지배질서에 꽤 쓸모있는 존재다. 그들은 한마디로 만만하다. 파업을 결의할 조직도 없는데다 결혼이라는 전선에 서면 대오를 이탈하기
[편집장이 독자에게] 삼순이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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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생크 탈출> <그린 마일>의 감독 프랭크 다라본트는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비평을 혹독하게 비판하면서 자신은 대중을 위해서 영화를 만들지 비평가를 위해 만들지 않는다고 일갈했다. 그런데 정작 다라본트 감독의 영화적 후견인이자 파트너인 소설가 스티븐 킹은 “판매는 잠시지만 평은 오래 지속된다”며 대중의 열광에도 불구하고 비평가의 지지를 그리워했다. 다라본트와 킹의 상반된 논평은 비평과 저널리즘에 대한 창작자들의 애증을 각기 대변한다. 그렇다해도 킹의 논평은 다소 뜻밖이다. 베스트셀러 작가나 흥행감독이라면 대중과의 밀월과 상업적 성공에 흠뻑 취해 있게 마련인데 말이다.
<씨네21>도 지난5년 동안, 비판의 침이 상대방 얼굴에 튀는 좁은 충무로, 난류와 한류가 섞여 흐르는 비평과 창작 사이의 해협을 통과해오면서 적잖은 시시비비에 휘말려야 했다. 특별히 기억되는 사건의 첫째는, <런어웨이>를 이정하씨가 주평에서 신랄하게 꼬집은
[편집장이 독자에게] 별점이 문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