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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 편집국장 가운데 문화부 출신은 드물다. 한국사회의 권력 서열을 따라서인지 대부분 정치부나 경제부, 사회부 뭐 이런 부서를 거친 기자들이 국장자리까지 차지한다. 이유는 비슷한 것 같은데 문화부는 어느 신문사냐를 물을 것도 없이 인력난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요즘도 문화면을 펴보면 한면을 가득 채운 기사들이 하나같이 똑같은 기자 이름을 달고 있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아니, 흔하다.그래도 요즘은 사정이 나아진 편이다. 한 사람이 두 분야, 심하게는 세 분야까지 ‘담당’하던 시절도 있었다. 전문화시대라 부르는 지금도 그렇게 거룩한 르네상스맨 역할을 해야 하는 이들이 아주 없어진 건 아니지만. 비판적으로 보자면 부실하기 짝이 없는 기사 생산시스템이지만, 문화부 기자 일을 오래한 나는 개인적으로 그 시스템 덕을 많이 봤다. 정말이다. 유달리 부족한 문화예술적 기초교양을 일하면서 습득할 수 있었다. 예컨대, 음악을 담당하게 됐을 때는 태어나서 처음 피아노 교습소에 등록까지 해봤다. 최단기
반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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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미켈란젤로의 대작에 천장과 벽면을 내놓은 시스틴 성당 입구. 그 축쇄한 세장이 한조를 이루어 열두 남짓 세트가 나란히 서 있다. 관광 가이드들이 그 앞에서 벽화에 대한 설명을 한다. 안에서는 설명이 금지된다. 들어가보면, 영역의 신성함을 유지하자는 목적이 아니라는 걸 눈치챌 수 있다. 인파의 유속을 재촉하려는 것이다. 그 많은 관광객들! 나는 지금 로마에 와 있다.그는 이 사람들에게 성공적으로 존재를 확인시키는 조역이다. 본명은 스테파노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벽화제작에 앞서서, 서구 르네상스의 거인 미켈란젤로는 완성되기 전에는 그림을 절대 공개하지 않겠다고 교황의 확약을 받는다. 한해, 두해 세월이 쌓이자 교황은 초조해지고, 궁금해진다. 좀 보자, 청을 해도 미켈란젤로는 거절한다. 어느 날, 충성심과 노파심이 남다른 인간이었음이 분명한 스테파노라는 주교가 성당 안을 엿본다. 모든 인물들이, 심지어 예수까지도 벌거숭이다!
스테파노 vs 김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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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오랜 동안 부모들, 특히 아버지들과의 싸움에 ‘청춘’을 걸었다. 성장기의 억압은 그들에게 어떤 상흔을 남겼나를 분석하는 일이 유행이었다. 집 밖에서는 또 다른 커다란 억압을 분석하고, 거기 맞서는 싸움이 오래 진행됐다. 바깥의 싸움이 지리멸렬해졌다. 그들을 불러내는 건 그런 싸움이 아니다. 엔터테인먼트를 닮은, ‘약간의 폭력도 있지만’ 본격적 유혈은 없고 컵 하나를 놓고 벌이는 싸움이다. 그들의 정체를 알고 싶다는 욕망들이 곳곳에서 부글거린다.전경과 고복수와 미래는 바로 그 세대의 젊은이들이다. 이들 역시 지난 시대의 싸움에 관심이 없다. 백은하 기자가 이번 특집에서 인용했듯 “세상을 바꾸는 건 죽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중심은 ‘나’다. 그래도 진화론자들은 이들에게서 지난 시간의 흔적들을 찾아내고야 말 것이다. 그건 모든 수직적 권위가 이들 앞에서 위력을 잃어버렸다는 극중 ‘사실’이다. 드라마 속 사람들은 대체로 평등의 수혜자들이다. 억압의 피해자 자리
그들은 징징거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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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씨가 프로듀스한 <겨레의 노래>가 ‘히트’했더라면, 거기 실린 ‘사향가’도 제법 알려졌을 거다. 나같은 열성분자가 20장씩 사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강매했어도 앨범판매는 부진했다. 아니지. 그래도 거기 실렸던 <이등병의 편지>는 연주자를 바꿔가며 진짜 유행곡이 됐으니까 그 반대의 일이 생겨났을지도 모르지. ‘겨레의 노래사업단’에서 발굴한 그 노래, 만주의 무장독립군들이 애창했다던 옛노래는 참으로 구슬펐다. “내 고향을 멀리 떠나 타향에 와서…”로 시작되는 순간부터.한 4반세기 전쯤, 잊혀졌던 독립군가들을 발굴·소개하는 시도가 있었다. 전투적이리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노래들은 ‘사향가’처럼 애조 그 자체였다. 해설을 해주시던 선생께서 분석을 하셨다. 사람의 정조와 어긋난다면 그 노래가 어찌 힘이 될 수 있겠는가. 나라 뺏기고, 고향 떠나와, 가족과도 헤어졌는데 씩씩하고 경쾌한 행진곡풍 군가가 무슨 위로가 되겠나. 내 기억에 정확한 원문 대신 편집저장된
해피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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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씨가 7월18일 중학교 일일교사 활동을 위해 길을 서두르다 교통위반 딱지를 떼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이 봉변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두 가지 규칙이 충돌할 때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묻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약속시간을 지키기 위해 교통질서을 위반하는 것이 옳을까요, 아니면 약속시간을 어기더라도 교통질서는 지켜야 할까요.” 토론이 끝난 뒤에 그는 “여러분이 공부하는 이유 중 하나도 규칙이 충돌했을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라고 덧붙였다.노무현씨의 뛰어난 순발력을 알게 해주는 일화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동의하기 힘들다. 규칙이 충돌할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으며 공부한다고 알게 되지 않는다. 고등학교 때, 우리의 국어교사는 자칭 ‘초현실주의’ 시인이었고 몇년이 지나면 한국문학사에 ‘절대공간파’라는 자신의 유파가 기록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그는 3학년 담임이었고, 어떤 3학년 담임보다 열성적으로, 대학 못가면 ‘현실적으로’
규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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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 아름답다는 말을 나는 믿을 수 없다. 내 메일박스엔 하루 20개 안팎의 광고메일이 들어온다. 그중의 반은 성인사이트 광고다. 그중의 어떤 걸 클릭해봐도 성은 아름답지 않다. 로그인은커녕 성인인증을 하기 전에 나오는 초기화면만으로도 충분히 그렇다. 저열한 언어들과 그에 꼭 맞는 자료화면들을 한번이라도 보지 않고 넘어가는 날은 하루도 없다. 모 사이트의 초기화면이 열려 여성의 항문에 남성의 성기가 박혀 있는 사진에 내 눈이 멈출 때, 성은 차라리 추하며, 그 이미지를 은밀히 즐기는 나의 욕망은 당당하지 않고 부끄럽다. 성은 너무 복잡하고 거대하고 고통스러울 만큼 어려운 문제다.나는 감히 포르노를 완전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할 만큼 담대하지 못하다. 예컨대 엄청난 크기로 확대된 남녀의 성기 사진이 담긴 광고판을 보며 거리를 걷는 일은 생각만 해도 불편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포르노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인터넷 선진국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인터넷이 가져다준 가
죽어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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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하는 목요일 저녁, 스콧 버거슨이라는 사람이 우리 사무실 한 귀퉁이에서 한참 원고를 쓰다 갔다. 그날 막을 내린 부천판타스틱영화제 유람기를 그에게 부탁했기 때문이다. 편집장으로서 귀한 필자가 왔으니 인사도 하고 멋진 유머도 발휘하는 매너를 발휘해야 마땅하나 독설가로 이름난 그가 짓궂은 농담을 던졌는데도 못 알아듣고 맹한 표정으로 듣고 있을까봐, 언제 다 쓰고 가나, 하고 눈치만 보다 말았다. 아, 하고 싶은 말이 이건 아니었다.아는 사람은 알 테지만, 국제문화건달로 불리는 그는 한국에 4년 동안 눌러 사는 미국인이며, 자기 혼자 잡지를 만들어 거리에서 판 돈으로 끝없이 돌아다니는 유랑자다. <발칙한 한국학>이란 한국을 비판하는 책까지 펴내 이젠 꽤 유명인사가 됐다. 그는 한국을 사랑한다고 떠벌리기는커녕, 한국사회를 독하게 꼬집는 글을 썼지만, 그의 유별난 행동에서 이 땅과 이곳 사람들에 대한 애착 적어도 호감을 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다.더한 사람도 있다. <씨네2
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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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중음악을 잘 모른다. 두어달에 CD 한장씩 사고 요즘 온갖 곡들이 담겨 있는 인터넷 사이트를 최근 발견하고 마감 때 이것저것 듣는 게 전부이며, 취향은 아주 평범하다. 대중음악평론가를 가까운 친구로 두고 있고, 부서 내에도 대중음악전문가들이 서너명 있지만, 그들에게서 별로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보아의 을 듣고, 야, 죽인다고 느껴도 그냥 속으로만 좋아하고 발설하지 않는다(가요 순위 1위에 올라오는 곡을 음악전문가들은 안 좋아할 거라는 선입견이 내게 있다).내가 좋아하는 노래 중에 델리 스파이스의 <챠우챠우>도 들어 있다. 1년 전쯤 버스에서 졸다가 이 노래 듣고 마음이 심하게 흔들렸다. 나는 <후아유>의 라스트신에 약간 감동받았는데, 그게 영화가 좋아서인지 그 대목에서 흘러나온 <챠우챠우> 때문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 노래를 대중음악평론가들이 높이 평가한다는 걸 알았을 때 자연스레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웃기는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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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98년 3월부터 <씨네21>에서 일했다. 조선희 편집장으로부터 한국영화팀장을 맡으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음, 일이 별로 많지 않겠군, 하고 생각하고 속으로 즐거워했다. 대단한 오판이었다. 1998년은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믿기 힘든 일이 한국영화계에 벌어진 해였다.상상치 못했던 놀라움을 선물한 사람들은 자신의 첫 영화를 선보인 젊은 감독들이었다. 당장 떠오르는 이름만 적어봐도, 허진호(8월의 크리스마스), 김지운(조용한 가족), 박기형(여고괴담), 장진(기막힌 사내들), 이재용(정사), 임상수(처녀들의 저녁식사), 이광모(아름다운 시절), 이정향(미술관 옆 동물원)…. <여고괴담>말고는 대박엔 이르지 못했지만, 관객은 그들 대부분에게 보통 수준을 훌쩍 넘는 환대를 표했고, 비평가들은 주기적으로 흥분했다. 환상적인 릴레이였다. 이 선수들이 그동안 어디에 숨어 있었을까. 누군가 이들 모두를 한결같이 지지하지 않는다 해도, 이런 새로운 재능을 한해에 넝쿨채
그해, 그 감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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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군부대에서 카투사로 군생활을 보냈다. 80년대 세대의 선입견이었겠지만, 입대 전엔 흑인 병사들과 좀더 친해질 거라고 예상했다. 쑥스런 용어를 쓰자면, 프란츠 파농과 말콤X를 떠올리며 피억압자들의 연대의식 같은 걸 기대했던 것 같다. 현실은 달랐다. 못된 상관은 대개 흑인이거나 히스패닉이었다. 그중에서도 레슬러처럼 생긴 흑인 칵스 중사는 정말 악질이어서, 일과 뒤에도 카투사들만을 골라 사역을 시켰다. 반면 백인 상관은 부드럽고 공정했다.집단적 갈등도 주로 카투사와 흑인 병사들 사이에 일어났는데, 옆 중대에선 집단 난투극까지 벌어졌다. 머리로야 그들의 억압적 현실이 빚어낸 왜곡된 보상심리로 이해하려고 했지만, 마음이 인종주의자로 변해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흑인들의 꽥꽥거리는 말투는 물론이고 그들의 냄새, 그들이 즐겨듣는 랩도 모두 싫어졌다. 그리고, 그들의 피부색까지. 단 한 가지, 노는 데는 흑인들을 따를 자 없었다. 걸음걸이부터 너무나 리드미컬해 춤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
카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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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별다른 충격이 없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가장 빈번한 사건 가운데 하나가, 내가 알고 있는 사람한테 일어났구나, 라는 짧은 감회가 스쳤고, 곧바로 한국과 이탈리아의 축구가 있었다. 떠들썩한 시간이 흘러갔고 만 하루가 지나자 그에 대한 기억들이 슬금슬금 떠올랐다. 뜻밖에 아니 당연히 나는 그를 많이 기억하고 있었다.그 친구의 이름은 채영주이며, 나와 같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녔고, 20대 후반부터 소설을 썼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신문 단신란에 날 정도의 사회적 이름을 얻었으나, 내게 있어 그의 의미는 아주 개인적인 것일 뿐이다.고등학교 때부터 글을 잘 써서 이런저런 상을 받았던 그 친구는 무슨 이유에선지 정치학과를 택했다. 내 생각에 그는 떠돌이의 피를 타고난 사람이었다. 당연하게도 성실한 대학생활을 못하다가, 4학년 때 6개월 동안 행방불명됐다. 나중에 들으니 광주에 내려가 나이트클럽에서 웨이터 생활을 했다고 했다. 왜 그랬는지 우리는
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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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16강행이 확정된 6월14일 밤, 두통의 전화가 왔다. 한통은 냉소적인 성격의 감독(축구감독이 아니라 영화감독)으로부터 왔다. 축구 보고 바람 쐬러 나왔더니 거리가 난리더라, 젊은 친구들이 나쁜 일로 몰려나온 것만 보다가 좋은 일로 몰려나온 걸 보니, 기분 좋더라는 얘기를 전해왔다. 그 감독이 그런 얘길 할 정도니, 그날은 정말 한국의 축제일임에 분명하다.
또 한통은 아는 후배로부터 왔다. 축구를 아주 잘하고 정말 좋아하는 친구인데, 포르투갈이 떨어진 게 속상해서 술을 마시고 있다고 했다. 몰매 맞을 소리인지 모르나, 나는 후배의 심정에 조금 가까웠다. 경기를 보는 내내 제발 무승부로 끝나기를 빌었다. 피구를 따라붙는 송종국의 수비력은 경이로울 정도였으니, 그날 한국 선수들의 플레이는 최상급이었다. 결국 미국 대신 포르투갈이 떨어지고 말았고, 나는 한숨이 나왔다.
고개를 떨군 피구의 눈물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는 스포츠 재벌이니 그를 내가 동정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편집장이 독자에게] 미국 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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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학자이며 축구광인 장원재 교수의 저서 <속을 알면 더 재미있는 축구이야기>는 빌 샨클리라는 원로 축구학자의 발언으로 말문을 연다.“어떤 사람들은 축구를 국가간의 전쟁에 비유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축구를 사람이 죽고 사는 일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치솟아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길이 없다. 왜냐하면, 축구는 그런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이건 정신나간 소리다. 아무리 축구가 좋다한들 사람이 죽고 사는 일보다 더 중요할 순 없다. 당연히 전쟁보다 더 중대할 수 없다. 이건 설명할 의욕조차 들지 않는, 상식이다. 그런데, 누구나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겠지만, 이 원로를 그 상식으로 설득한다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 그는 축구에 ‘미친’ 사람이기 때문이다.따지고보면 우리도 정신나간 한달을 보내고 있다. 한 경제연구소는 한국의 월드컵 첫승이 14조원에 이르는 경제적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그게 얼마나 타당한 수치인
사소한 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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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을 앞두고 가장 불쾌했던 일은, 내게는, 차량 2부제다. 미리 밝혀두는 게 좋겠다. 나는 축구를 싫어하지 않는다. 광팬은 아니지만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다. 작년 9월 티켓 2차 예매 때, 거금 85만원을 들여 16강전과 8강전 티켓을 두장씩 샀다. 네덜란드나 아르헨티나의 경기를 보는 게 내 바램이었고(두 팀을 정말 좋아한다), 그건 이런저런 이유로 실패했지만 또 카드빚 메꾸느라 헉헉거렸지만 별로 후회되진 않는다. 또 나는 차를 거의 몰지 않는다. 내 면허는 흔히 말하는 장농 면허다.그렇지만, 거리 곳곳에 붙은 ‘차량 2부제 위반시 벌금 5만원’이라는 안내판은 아주 불쾌했다. 그 목적을 모르는 바 아니니, 이게 2부제 강력 권장 캠페인이었다면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벌금’이라니. 여기엔 나쁜 국가주의의 냄새가 난다. 월드컵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 아주 화창한 날에 차를 몰고 바람을 쐬러 가는 일을 강제로 막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뭐 그런 사소한 일로 이
사소한 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