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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고백>의 나카시마 데쓰야 감독이 호러영화를 만든다니 기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22회 공포소설대상을 받은 사와무라 이치의 <보기왕이 온다>가 원작이다. <보기왕이 온다>를 먼저 읽었다. 사와무라 이치는 호러영화와 소설을 좋아하는 마니아였고, 데뷔작인 <보기왕이 온다>에 자신이 좋아하며 무섭다고 생각하는 호러의 요소들을 모두 산뜻하게 담았다. <불량공주 모모코>(2004),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006), <고백>(2010), <갈증>(2014)은 모두 원작이 있었다. 원작의 매력을 살리면서, CF 감독으로 유명한 이력답게 현란하고 강렬한 이미지의 영화를 만들어왔던 나카시마 데쓰야 감독이 호러라는 장르에서 어떤 이미지 그리고 장면을 만들어낼 것인지 궁금했다.
인간의 마음을 잃어버리면
호러는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한 장르다. 유명한 호러영화의 오싹한 장
나카시마 데쓰야 감독의 영화들과 그 연장에서 살펴본 공포영화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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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보며 느낀 첫인상은 영화가 ‘예쁘다’는 것이었다. 미추의 개념에서 비롯된 아름답다는 느낌이라기보단 귀여움이라거나 흐뭇함쪽에 가까운 마음이었던 것 같다. 매력적인 주인공 찬실(강말금), 그녀를 스쳐 지나가는 여러 인물들, 그녀가 오가는 여러 장소들, 시네필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소품들과 대사들…. 무엇 하나 비뚤어진 것이 없게 느껴질 만큼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런데 엔딩 시퀀스까지 보고 난 후 오프닝을 떠올려보니 새삼 이 영화의 기저에 전혀 다른 정념이 깃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찬실은 왜 눈물을 흘렸을까
높은 볼륨의 쇼팽의 <장송 행진곡>과 함께 시작하는 영화는 우스꽝스러울 만큼 갑작스러운 죽음을 포착한다. 그 죽음은 다름 아닌 찬실이 수년간 프로듀서로 일했던 지 감독(서상원)의 죽음이다. 물론 죽음으로 시작하는 영화들은 많다. 혹은 이 영화를 하나의 성장 서사로 받아들인다면, 주인공의 기존 세계나 과거를 상
'찬실이는 복도 많지'와 할머니의 집이라는 공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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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워터스>의 스크린에선 카메라가 수평이동하는 경우가 잦다. 유난하다 싶을 정도다. 쓰임새도 다채로워 ‘수평 트래킹의 뷔페’라 일컬어도 됨직하다. 토드 헤인즈의 카메라가 왜 이리 자주 트랙을 타는 걸까. 고다르가 뜻한 것처럼 카메라가 옆으로 움직일 때 소실점은 끊임없이 바뀐다. 삼각대 위에 멈춰 있을 때 한개의 소실점만 갖는 카메라는, 그렇게 트랙 위에서 자신의 숙명을 넘어선다. 1인칭 시점만으로는 온전히 담을 수 없는 시각적 진실. 이동하는 렌즈는 시시각각 초점 대상을 바꾸며 사태의 실체에 다가서려 안간힘이다. 여기까지라면 수평 트래킹에 대한 고전적 정의일 수 있겠다. 토드 헤인즈 감독과 에드워드 래크먼 촬영감독의 횡적 움직임에는 추가되는 것이 있다. 눈앞의 피사체들에 의해 자꾸만 저 먼 곳이 가려지는 데 대한 안타까움이 얹어진다. 오프닝숏을 비롯해 숱한 장면들에서, 이동하는 카메라 바로 앞 사물들은 화면을 몽땅 가렸다가 겨우 프레임 밖으로 나간다. 카메라가 멈춰 있
'다크 워터스'가 보통 사람들의 전쟁을 말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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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 나는 같은 학원에 다니는 친구 H와 종종 하교를 함께하곤 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진입로를 지나 학교 아래에 다다랐을 때 빨간 소형차를 보았다. “혹시 너희 2학년이니?” 차 앞에 서 있던 한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물었다.“네.” “나, 6반 제일이 엄마인데, 6반은 아직 안 끝났니?” 6반이라면 우리 옆 반이었다. 우리 반이 종례가 늦게 끝나서 하교 때 이미 그 반은 아무도 없었다고 답했다. 아주머니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우리에게 집으로 가느냐고 물었다. 우리가 시내에 있는 학원에 갈 거라고 하자, “제일이 데리러 온 건데, 제일이는 먼저 갔나 보네. 대신 아줌마가 너희들 학원까지 태워줄게”라고 했다.
친구와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차에 올랐다. 제일이라는 친구의 존재를 그날 처음 알았다. 학원까지 가면서 아주머니는 우리의 이름을 물었고,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아들 제일이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우리에게 했다. 사는 곳이며, 아들이 나온 초등학교, 그가 가장
사월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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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무엇을 위해, 무슨 자격으로 영화를 감히, 비평하는 것일까. 이 잉여롭고 비생산적인 작업을 시작한 지 어느덧 10년째지만 여전히 헤매고 있다. 때론 몸살에 걸린 듯 온몸이 아팠고 그 진통을 믿으며 글을 끄적여보기도 했지만 한번도 만족스러웠던 적은 없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고 나면 참을 수 없기에, 쓴다. 감히 영화비평의 최전선에서 뒹굴어보겠다는 무모한 심정으로 김소희·김병규·안시환 평론가와 함께 프런트 라인에 섰다. 재난(disaster)은 그리스어로 ‘별’(aster)이 ‘사라진’(dis) 상태를 뜻한다. 여전히 헤매고, 숱하게 구르고, 끊임없이 실패하겠지만 별을 향한 우리의 방황을 지켜봐주길 바란다.
재난에 얽힌 세 가지 풍경
마음을 다지고 최전선에 섰더니, 영화가 사라졌다. 상투적인 표현으로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코로나19로 사람들이 외출을 삼가고 있는 요즘 기묘한 사진 몇장이 눈에 들어왔다. 텅 비어버린 뉴욕의 타임스스퀘어 광장, 사람이 사라져 물이 맑
영화가 사라진 자리에서 영화를 기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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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를 매료시킨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스트리밍 서비스에서도 위상을 떨치고 있다. <기생충>은 지난 4월8일 디즈니가 소유한 스트리밍 서비스 ‘훌루’에 공개됐으며, 일주일 만에 훌루에서 가장 많이 시청된 비영어 영화로 자리매김했다. 거기에 현재 공개 중인 훌루 영화 중 두 번째로 많은 스트리밍 시간을 기록했다. 이는 <콰이어트 플레이스>, <드래곤 길들이기 3> 등 훌루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할리우드 영화들의 누적 스트리밍 시간을 뛰어넘은 기록이다.
훌루는 공식 트위터를 통해 <기생충>을 “오스카에 역사적 순간을 남긴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봉준호 감독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다면?”이라는 문구와 함께 <괴물>, <마더>, <플란다스의 개>를 언급하기도 했다. 또한 지난 4월9일에는 훌루가 비영어 영화에 대한 편견에 일침을 날리며 화제가 됐다. 한 네티즌은 훌루 공식 트위터에 “그 누
<기생충> 스트리밍 서비스 ‘훌루’에서 비영어 영화 최고 스트리밍 기록 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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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빵과 진저브레드라…. 역전 앞이나 호화로운 럭셔리처럼 동어반복이다. 하지만 영미 문학의 진저브레드를 생강빵으로 번역해서 읽을 때 그것은 왠지 다른 맛, 다른 음식처럼 느껴진다. <생강빵과 진저브레드>는 그 다를 수밖에 없는 번역의 맛에 대해 번역가가 쓴 에세이다. <빨강 머리 앤> <작은 아씨들> <하이디> <소공녀> 등 지금의 2030 여성들이 어린 시절 읽었을 명작 소설 속 음식들에 대해 설명하는 요리책이나 에세이들이 여럿 출간됐다. 아마도 ‘그때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책 속 음식과 의복에 대해 이토록 할 말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로망의 영역에 여전히 머물기 때문일 것이다. <빨강 머리 앤>에서 앤이 딸기술을 주스로 오인해 다이애나에게 대접한 후 다이애나 엄마로부터 앤과 절교하라는 말을 들은 에피소드를 읽고, 도대체 얼마나 달콤하기에 술인지도 모르고 두잔을 연거푸 마셨는지 그 맛이 너무 궁금했던 게
씨네21 추천도서 <생강빵과 진저브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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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일제강점기 경상도 어진말에 사는 18살 버들이에게 중매가 들어온다. 훈장이었던 아버지가 의병으로 죽은 후 끼니를 걱정하며 살던 버들 애기씨에게 들어온 선 자리는 무려 태평양 건너 포와(지금의 하와이)의 낯선 사내다. “거 포와를 낙원이라 안 캅니꺼. 거 가기만 하면 팔자 피는 기라. 애기씨 거 가면 공부도 할 수 있습니더.” 재외동포와 사진만 교환하고 혼인하는 ‘사진 결혼’ 이건만 버들은 미국서 공부도 하고 영어도 배울 수 있다는 중매쟁이의 말에 혼례를 받아들인다. 혼인한 지 석달 만에 과부가 되어 집에만 갇혀 살던 버들의 친구 홍주, 무당 손녀라고 돌팔매질 당하던 송화까지, 세명의 소녀는 ‘여기보다 더 나은 미래’가 있을 거란 기대를 품고 포와를 향해 길을 떠난다. 부푼 꿈을 품고 이국땅에 도착했지만 이들이 마주한 것은 사진보다 서른살은 더 들어 뵈는 신랑감과 아시안을 향한 일상적 차별, 그리고 허리 펼 새 없이 이어지는 노동이다. 더구나 버들의 남편은 첫사랑을 잊지 못
씨네21 추천도서 <알로하, 나의 엄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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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사의 새로운 인문 시리즈인 ‘채석장’ 시리즈의 첫권은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과 알렉산더 클루게의 글을 묶은 <'자본'에 대한 노트>다. 에이젠슈테인은 <율리시스>가 블룸씨의 하루를 다루듯, 영화 <자본>에서 한 사람의 하루를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그 과정에서 연상되는 사물들과 역사적 사건들을 이어 붙여 세계 전체를 그릴 참이었다. 이 대담한 생각은 구상만 남았다. 알렉산더 클루게의 글은 에이젠슈테인의 구상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소화한다. 해고당한 프랑크푸르트 노동자의 일화부터 미국 자본의 투자 일화까지 연상의 조각들을 모은다.
<아카이브 취향>은 18세기 파리 형사사건 기록을 종일 읽는 역사가의 에세이다. 훼손된 종이 자료에다 구두점이 없고 알아보기 어렵게 쓴 글을 해석하는 답답한 시간. 하지만 경찰 문건 사이에 농담 가득한 개인적 편지가 튀어나오기도 하고, 광장의 교통체증을 참지 못하고 진짜 칼을 빼든 인물이 사드 후작이었다는 뜻밖
씨네21 추천도서 <'자본'에 대한 노트>, <아카이브 취향>, <정크스페이스 |미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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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특별한 관문>은 명문대 졸업생일수록 소득이 수직 상승한다고 딱 잘라 말한다. 그리고 하나 더, 명문대일수록 빈곤층 학생이 들어가기 어렵다고 한다. 이 책은 교육 수요자 말고 공급자, 즉 대학의 입장을 해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성이 있다. 대학은 다양한 계층의 학생을 선발하고 있다는 공정한 이미지를 갖고 싶어 한다. 하지만 소수집단 우대정책 같은 건 말뿐이고, 빈곤층 출신 고학력자 학생들은 전체 입학자 가운데 극소수다. 현재 미국 대학은 4분의 1가량이 재정위기에 빠져 있는 가운데 미국 대학 순위를 높이려면 비용 지출을 늘려야 하는 형편이라, 대학 입학 사정관들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등록금을 꼬박꼬박 내줄 부유한 집안의 고득점자 학생들을 찾는다. 트럼프의 사위 재러드 쿠슈너도 아버지가 하버드대학교에 250만달러를 기부하여 입학했다 하니, 애초에 대학이 빈곤층 출신의 고학력 학생에게 문턱을 높인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래서 빈곤층 출신의 명문대 입학생들은 부유
씨네21 추천도서 <인생의 특별한 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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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예술원 명예교수이자 큐레이터, 작가인 토마스 기르스트가 쓴 <세상의 모든 시간>은 ‘느리게 사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초연결, 실시간 피드백의 시대에 누구나 ‘지금 당장’, ‘잠깐만’이라는 말로 시간을 쉼 없이 분절해 받아들이는 이들을 위한 쉼표가 되는 책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기르스트는 작가 비르지니 데팡트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 사회의 모든 것이 즉각적인 만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가장 대표적으로 SNS 서비스의 ‘좋아요’ 기능이다), “즉각적인 만족은 인간의 심오한 행복을 방해한다. 한 가지 강렬한 감각에 예민해질수록 다른 감각에는 무뎌지게 된다”. 이런 화두는 독특하거나 드문 것이 아니다. 느린 삶을 ‘어떻게’ 생활로 끌어들일지가 사유의 특이성을 반영하게 되는데, 기르스트는 큐레이터라는 전문성을 십분 발휘해 기원전 이집트의 조각상부터 보이저 1호에 실어보낸 LP레코드에 이르는 예술 작품들을 통해 이야기를 끌어간다. 예술 작품들은 하나하나가 전부 타임캡슐
씨네21 추천도서 <세상의 모든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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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년에 비해 현저히 적은 인파 사이에서 봄꽃이 한창 피고 졌다. 봄인데 하늘이 매일 맑다. 선거운동은 조용하게 마무리되었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투표에 참여했다. 연휴가 다가오지만 여행을 꿈꾸기 어렵다. 코로나19 시대의 달라진 풍경 속에 시간이 흐른다. 시간을 붙잡아두려는 애달픈 마음으로 책을 쌓아두고 읽는다. 당신의 마음을 울린 책은 무엇인가.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4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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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5일 개봉한 <캥거루 연대기>는 나흘 만에 관객 37만5천명을 불러모았고 개봉주 독일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흥행대성공을 예감했다. 하지만 그다음주 코로나19 여파로 관객수가 줄면서 9만명을 기록했고, 곧 코로나19 확산 방지 조처로 모든 영화관이 문을 닫았다. 그런데도 이 작품은 2주의 상영기간 동안 총 54만 관객을 동원하는 기염을 토했다. <캥거루 연대기>의 원작은 베스트셀러다. 마크 우베 클링이 2009년부터 팟캐스트와 민영 라디오에서 방송하다가 인기를 끌자 책으로 냈다. 정치풍자개그에 끌린 젊은이들의 인기를 얻어 2018년까지 네권의 책으로 출판되었고, 2018년 10월에 영화 제작에 들어갔으며, 원작 작가인 마크 우베 클링이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
주인공은 말하는 캥거루다. 캥거루가 영화의 동선을 이끌며 관객을 기이한 상황으로 끌어들인다.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이 캥거루는 자칭 공산주의자다. <캥거루 연대기>는 현재 독
[베를린] '캥거루 연대기' 코로나19 속 흥행 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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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Baby), 동물(Beast), 미녀(Beauty)가 등장하면 실패하지 않는다는 광고계의 ‘3B 법칙’처럼 한국 예능계에는 ‘남자, 아기, 백인’을 등장시키면 망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는 듯하다. 마침 MBC every1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이하 <어서와~>) 벨기에 편에 등장한 세 살짜리 아기 ‘우리스’는 이 세 가지 조건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출연자다. 벨기에의 식민지배에서 비롯된 90년대 르완다 대학살을 다룬 르완다 편 직후에 벨기에 편을 편성한 제작진의 무지와 무신경에 대한 비판이 슬쩍 묻혔을 만큼, 예능에서 귀여움은 강력한 무기다. 그러나 <어서와~> 벨기에 편에서 드러난 건 또 다른 측면의 무지와 무신경이다. 여행에 참여하지 않은 우리스의 엄마는 원래 자신보다 남편이 아이를 많이 돌보기 때문에 둘이 같이 잘 지낼 거라며 걱정 없다는 태도를 보였지만, 제작진은 계속 ‘엄마의 부재’를 강조하며 ‘아빠 육아의 한계’를 웃음 포인트로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아빠가 애 보는 거 처음 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