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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 피터스 지음 이진 옮김 비채 펴냄
이 인물을 내가 이해하고, 좋아할 수 있을까. <디트랜지션, 베이비>의 첫장부터 이러한 의문에 봉착한다. 이 소설에는 무작정 긍정할 수 있는 주인공이란 등장하지 않는다. 죄다 어딘가 불안정하고 결함이 있으며 이해불가한 선택을 연속한다. 트랜스젠더 여성 리즈는 아이가 갖고 싶다. ‘이 섹스로 인해 임신을 할 수도 있다’는 위험을 느끼고 싶어서 버그체이싱(성행위를 통해 의도적으로 HIV바이러스 감염을 추구하는 행동)을 시도한다. 리즈는 과거 엄마가 될 준비를 한 적이 있다. 에이미라는 트랜스 여성과 레즈비언 커플로 사귀던 시절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려 했지만 에이미는 트랜스 여성으로 사는 것을 포기하고 디트랜지션(Detransition)을 결정하며 다시 남성으로 돌아갔다. 지금 그의 이름은 에임스다.
에임스는 트랜스젠더를 대하는 혐오 사회와 주변인의 태도에서 피로감을 느꼈고, 더불어 이도 저도 아닌 자신의 애매함을 환멸해 원래의 성
씨네21 추천도서 - <디트랜지션, 베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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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3>신종원 글 한규현 그림 소전서가 펴냄
신종원의 장편소설 <불새>를 읽기 시작한 것은, 공교롭게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하고 새 교황 선출을 위한 콘클라베가 예정되어 있던 시기였다. 공교롭다고 말한 까닭은 이 소설이 젊은 사제 바오로를 주인공으로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양을 찾아 떠나지만, 드물게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들도 있다. 오히려 양들이 그들을 찾아오기 때문이다. 노아가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또 그리스도가 그랬듯이, 이렇게 어떤 사람들은 빚어질 때 이미 목자로 명명되어 일생 양들을 이끈다.” 이 대목에서 바오로 신부가 등장한다. 그는 비행기에 타고 있다. 그런데 성당에 다니냐는 옆자리 사람의 말에 그는 “네, 그런데 이제 그만두려고 합니다”라는 비밀을 누설한다. 비행기에 탄 이유는 곧 밝혀진다. 성직을 내려놓겠다는 바오로 신부에게 아버지 신부인 베드로는 “네 눈으로 직접 성배를 보고 돌아오라”고 했던 것이다.
일의 발
씨네21 추천도서 - <불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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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사랑일까? 처음 사랑을 느낀 상대는 엄마도 아빠도 아닌 여자 친구였다. 여자애들은 자라면서 여자 친구에게만 속삭인다. 꼭 너에게만 할 수 있는 비밀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지. 아무도 몰라줬던 내 속마음은 꼭 그 애에게만 수신되었으니까. 내가 입을 열어 단어를 꺼내기만 해도 뒤이어질 다음 말을 잡아채서 겹치는 목소리로 “이 말 하려고 그랬지?”라고 대화의 바통을 낚아채던 여자 친구들. 그게 뭐 그리 웃긴지 끅끅대며 허리를 접고 웃어댔던 수다. 10대 소녀들이 낙엽만 굴러가도 웃는다는 건 낭설이다. 낙엽이 굴러간다는 사실보다 소녀와 소녀가 함께란 사실이 앞선다. 이건 여자들만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우리는 모두 교환일기를 가슴속에 방탄조끼처럼 품고 다른 반을 기웃대던 누군가의 첫사랑이었으니까.
릴리 댄시거의 우정에 관한 에세이 <여자의 우정은 첫사랑이다>는 그의 여자 친구들, 그리고 자매애에 관한 책이다. 릴리는 언제나 여자 친구들에게 보호본능을 느꼈다. 그리고 그들에
씨네21 추천도서 - <여자의 우정은 첫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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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5박6일 일정으로 전주국제영화제에 다녀오는 짐을 싸면서 한강의 <빛과 실>을 넣었다. 150여쪽에 불과한 이 책을 읽는 데 5박6일은 너무 짧았다. <빛과 실>은 머릿속에 있는 한강의 모든 소설과 함께 읽어야 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완성까지 아무리 짧아도 일년, 길게는 칠년까지 걸리는 장편소설 작업은 한강의 삶의 상당한 기간들과 맞바꿈된다. “바로 그 점이 좋았다”고 한강은 쓴다. 그렇게 맞바꿔도 좋다고 결심할 만큼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 속으로 들어가 머물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장편소설의 아름다움. 질문들을 견디며 그 안에 산다는 일. (대답을 찾아내서가 아니라) 질문들의 끝에 이르러서야, 소설을 완성할 수 있음을 인식하기. 소설을 시작하던 때와 같은 사람일 수 없는 누군가가 되기. 질문을 포개고, 책을 쌓아가기. <빛과 실>에는 그러한 소설 쓰기에 대한 경험이 차례로 언급된다. <채식주의자>의
씨네21 추천도서 - <빛과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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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실> - 한강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여자의 우정은 첫사랑이다> - 릴리 댄시거 지음 송섬별 옮김 문학동네 펴냄
<불새> - 신종원 글 한규현 그림 소전서가 펴냄
<디트랜지션, 베이비> - 토리 피터스 지음 이진 옮김 비채 펴냄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 홍세화 지음 창비 펴냄
<씨네21>이 추천하는 5월의 책 - 문장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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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심 고취 콘텐츠 크리에이터로 성공을 꿈꾸는 견우는 희주(설인아)의 권유로 팀 ‘무진스’에 합류해 노무진(정경호)과 함께 몰랐던 한국 사회를 마주한다. 그런 견우를 연기한 차학연은 종종 “지금까지 연기한 배역 중 가장~”으로 운을 떼며 자신의 배역을 설명했다. 아마 시청자 또한 <노무사 노무진>을 보고 나면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차학연의 새로운 재능을 발견할 것이다. <노무사 노무진>의 백미는 배우 차학연이 발휘하는 발군의 코미디 감각이다. 애매한 정적을 코미디의 타이밍으로 활용하고, 지극한 외향성과 순수함을 웃음 포인트를 넘어 끝내 캐릭터의 독보적 매력으로 선점해내는 차학연의 모습은 가히 올해의 재발견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 고견우는 그간 배우 차학연이 보여준 적 없던 얼굴을 꺼내 보이는 배역이다. 배우 본인도 흔쾌히 도전해보고 싶었을 것 같은데.
배우로 활동하며 접할 기회가 드문 캐릭터였다. 대본을 읽는 내내 무진, 희주와 함께 움직이고 싶은
[인터뷰] 유쾌함의 이목구비, <노무사 노무진> 배우 차학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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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실장, 홍보 마케팅, 영업, 재무회계, 비서. 한 사람이 이 많은 업무를 다 소화할 수 있나 싶지만 <노무사 노무진> 속 희주(설인아)는 이 모든 일을 거뜬히 해낸다. 희주의 여러 직무에 반드시 동반하는 필수템이 있다면 그건 호통일 것이다. 외국인노동자를 착취하는 공장주에게, 현장실습 도중 사고를 당한 학생을 나 몰라라 하는 교사에게 희주는 우레와 같은 불호령을 내리며 무뢰한들의 양심을 일깨운다. 희주의 영업력, 결단력은 배우 설인아의 야무진 어조와 만나 살아 숨 쉬고, 설인아 특유의 공간을 가득 울리는 저음은 희주의 선의에 힘입어 시청자의 마음에 메아리친다.
- 처음 <노무사 노무진> 대본을 읽고 받은 인상은.
임순례 감독님과 김보통 작가님의 작품이라고 하니 참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내 캐릭터를 봐야 하지 않나. 대본 속 희주의 매력이 상당했다. 단순한 듯 단순하지 않고, 저돌적으로 문제 속으로 쳐들어가다가도 기가 막히게 빠져나온다.
[인터뷰] 자신만만, 매력적으로, <노무사 노무진> 배우 설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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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언제나 경쾌하고 진중하다. 얼핏 조합이 어려워 보이는 두 단어는 배우 정경호의 많은 것을 보여준다. 비트코인 투자로 인생 2막을 꿈꾸던 노무진은 오로지 갱생을 위해 노무사가 된다. 어렵게 시험에 합격했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은 더할 나위 없이 가혹하다. 다달이 쌓여가는 사무실 월세에도 그는 조화에 물을 주고 잎사귀를 닦으며 다소 어이없는 희망을 찾는다. <노무사 노무진>은 노동 현장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고발성 에피소드를 보여주는 동시에 냉혹한 사회를 유머 코드로 재출력해내는 힘을 지녔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웃음을 손에 꼭 쥔 채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배우 정경호가 있다.
- <노무사 노무진> 촬영이 진행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렸다고.
임순례 감독님이 <노무사 노무진>을 연출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꼭 함께하고 싶었다. 감독님도 일찍이 만나뵈었다. 그게 드라마 <일타 스캔들> 촬영이 끝난 이후니까 실제 촬영에 돌입하기까지 약간
[인터뷰] 조화의 몫을 지켜낸다는 것, <노무사 노무진> 배우 정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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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산업재해 사망률 3위, 한국. 23년 동안 1위를 차지했던 과거에 비하면 이마저도 나아진 현실이다. 2023년 기준, 한국의 노동자 1인당 연간 노동시간은 1872시간으로 OECD 평균보다 130시간 길다. 우리는 일터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동시에 위험에 쉽게 노출돼 있다. 길 위를 좀비가 점령해도 출근만큼은 해야 한다는 쓰디쓴 농담은 우리의 슬픈 현실을 가리킨다. 김보통·유승희 작가와 임순례 감독이 만난 <노무사 노무진>은 비탄 가득한 우리네 이야기를 직면하면서 모두가 시나브로 익숙해진 것을 재점검한다. 다만 경쾌하고 즐거운 박자로, 카타르시스와 코미디를 유연하게 뒤섞은 리듬감으로 무를 조정했다.
충동적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비트코인에 올인했지만 계획만큼 평탄치 않은 세상살이.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노무진(정경호)은 최근 전망 좋다는 노무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정의 구현이나 세상 개혁 같은 원대한 목표는 없다. 오
[커버] 열심히 일한 당신, 안전하라! <노무사 노무진> 배우 정경호, 설인아, 차학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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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셰프인 세실(쥘리에트 아르마네)은 돌연 일터를 떠나 고향으로 향한다. 요리 경연 서바이벌 우승 후 레스토랑 개업을 준비하던 차에 원치 않은 임신 소식으로 혼란스러워진 탓이다. 처음으로 셰프의 꿈을 키웠던 가족의 식당에서 숨을 돌리며 그는 주변을 둘러본다. 나이든 부모, 가정을 이룬 친구들이 시간의 흐름을 체감케 하는 동시에 세실이 택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삶을 가늠하게 한다. <리브 원 데이>는 아멜리에 보닌 감독이 2023년 세자르상을 수상한 동명의 단편을 각색해 내놓은 첫 장편이다. 칸영화제 개막작으로 신인감독의 첫 장편영화가 선정된 최초의 사례다. 지난해 칸영화제 개막작 <더 세컨드 액트>가 형식적 실험에 충실했다면 <리브 원 데이>는 목표 지향적인 인물이 본원지 에서 과거 인연들을 만나 영감을 얻는다는 익숙한 구성을 취한다. 장소를 세실의 레스토랑에서 고향으로 옮김에 따라 한 개인에서 세실의 관계 성으로 초점이 옮겨가고, <리브 원
[기획] 칸영화제 개막작 <리브 원 데이> 리뷰, 개인의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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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회 칸영화제는 화려함보다는 불편함을 택했다. 장기화된 전쟁, ‘뉴 스트롱맨’ 시대가 만들어낸 세계적 불안 속에서 열린 올해 칸은 영화제가 동시대 정치와 예술의 접점을 성찰하는 공간임을 다시 한번 환기하고자 한다. 심사위원장 쥘리에트 비노슈를 필두로 한 올해 경쟁부문 심사위원단은 인도 감독 파얄 카파디아, 이탈리아 배우 알바 로르바케르, 미국 배우 핼리 베리와 제러미 스트롱, 모로코계 프랑스인 작가이자 활동가인 레일라 슬리마니, 멕시코 감독 카를로스 리에가다스, 차드 다큐멘터리스트 디외도 아마디, 그리고 홍상수 감독으로 구성됐다. 이들의 첫 공식 석상인 개막 기자회견 직전 벌어진 두개의 사건이 질문 공세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먼저 개막 전야에 가자 지구 출신 예술가 파티마 하수미의 죽음을 애도하는 할리우드 및 유럽 영화계 인사 350여명이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을 통해 공개 서한을 발표했다. 이스라엘 공습으로 일가족 10명과 함께 목숨을 잃은 하수미는 올해 칸 사
[기획] 제78화 칸영화제 개막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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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은 드물게 높은 계단으로 향하는 길목에 레드카펫을 설치하는 영화제다. 올해는 심사위원장 쥘리에트 비노슈, 명예 황금종려상 수상자 로버트 드니로, 경쟁부문 심사위원으로 초대된 홍상수 감독, 개막작을 연출한 아멜리에 보닌 감독 등이 가장 먼저 계단을 올랐다. 뤼미에르 대극장이 위치한 팔레 드 페스티벌 정문에 위치한 24 계단은 초당 24프레임인 전통적인 필름영화에 대한 경외를 뜻하며 카미유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가 흘러나오는 영화제 타이틀 필름은 이 계단을 기어코 천상까지 펼쳐 올린다. 매년 5월 중순의 약 2주간, 프랑스 남부 칸섬은 오직 영화만을 위한 숭고한 성소가 되고자 한다. 올해 영화제는 그러나, 예술이라는 초국적의 영토를 숭배하기보다 현실과의 관계 맺음을 직시하는 목소리들이 더욱 각광받는다. 개막 기자회견에서 성폭행 혐의로 기소되었던 동료 배우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유죄판결을 받은 것에 대한 입장을 밝혀주기를 요구받은 쥘리에트 비노슈의 대답처럼. “그는 더이상
[기획] 칸의 과제, 제78화 칸영화제 개막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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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대표곡 <행운을 빌어요> <21세기의 어떤 날> 등. 영화 <페퍼톤스 인 시네마 : 에브리씽 이즈 오케이> 출연
나이트 스킨케어
이장원 아내 (배)다해 덕에 관심을 갖게 됐다. 저녁이면 둘이 나란히 앉아 팩을 붙이고 이어서 LED 광선을 쬐는 시간이 소중하고 즐겁다. 어릴 땐 피부에 무얼 바르는 일을 무척 귀찮아 했는데 요새 아내가 권유하는 크림도 곧잘 얼굴에 발라본다. 그래서 현상 유지는 한다. (기자를 향해) 자세히 뜯어보진 마시고요!
스포츠 중계
신재평 스포츠야말로 각본 없는 드라마 아닌 가. 상대를 이기고 싶어 하는 사람간의 열정이 맞붙는 과정 속에 한치 앞을 모르는 결과를 기다린다. 스테픈 커리와 르브론 제임스, 노바크 조코비치, 루이스 해밀턴까지. 노익장들이 자웅을 겨루는 광경을 보면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며 자극도 얻는다.
기계식 키보드
이장원 유튜브 알고리즘에 ASMR 영상이 뜨길래 우연히 접속했다.
[LIST] 페퍼톤스이 말하는 요즘 빠져있는 것들의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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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국립영화영상센터의 통계와 칸 국제 시리즈 페스티벌의 쾌거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영화계의 불황이 지속되며 ‘한국영화의 보릿고개’와 같은 헤드라인이 연일 문화계 뉴스를 장식한다. 여러 가설이 제기되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은 OTT의 약진이 극장 흥행 수익의 부진을 가져온다고 믿는 것 같다. 프랑스영화계 또한 이에 관한 연구를 진행한 바 있다. 프랑스국립영화영상센터(CNC)에서 지난해 말 발표한 결산 자료에 따르면 2024 년 프랑스의 극장 관객수는 1억8130만명으로, 전년 비교 약 100만명이 증가했는데 이는 팬데믹 이전과 비교했을 때 12.8%가 하락한 수치다. 올해 4월 동 기관에서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지난 한해 동안 총 309편의 영화가 CNC의 자국 영화 인증을 받았으며, 총 14억4천만유로(약 2조2800억원)의 투자가 이루어졌다. 이는 전년 대비 7.5%가 증가한 수치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중 유료 스트리밍 플랫폼을 포함한 방송사들의 투자금이 전년과 비교해 7.
[파리] 영화계의 침체는 OTT 때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