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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치 정도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여러분은 훨씬 다양한 영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이 수상 소감을 남겼을 때, 적잖은 한국 관객은 <기생충>의 수상 소식만큼 소감에 깔린 함의에 놀랐을 것이다. ‘뭐야, 할리우드는 자막으로 영화를 안 봐?’ 한국 관객은 자막에 익숙하다. <타이타닉>이든 <어벤져스: 엔드게임>이든 글로벌 흥행작을 극장에서 자막으로 만났을 것이고, 근래엔 자국 언어로 만들어진 콘텐츠까지도 자막 서비스로 감상한다. 자막 문화가 친숙한 데다 전 국민이 영어 공부에도 소홀하지 않으니, 외화 한편이 개봉하면 오역 논란이 따르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이쯤에서 질문을 던져보자. 자막 번역은 누가, 어떻게 담당할까. 15자 내외의 자막 한줄이 관객과 만나기까지 어떤 공정을 거칠까. <씨네21>이 익숙한 듯, 여전히 낯선 자막과 번역의 세계에 여섯 가지 질문을 던져봤다. 함께 1인치의 장벽을 탐구해보자.
[기획] 영화 자막과 번역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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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을 한줄로 ‘대마초 비범죄화에 찬성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축약하려니 그로는 부족하다 싶다. 전작 <재춘언니>에서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의 복직 투쟁을 집요하게 좇았던 이수정 감독의 <풀>은 대마초의 생태적, 치료적 기능에 대해 전하며 비범죄화에 찬성하는 이들의 온화한 표정과 동행한다. 치열한 노동 현장을 분주하게 따르던 그의 카메라가 아주 느리고 친절히 “안녕, 그동안 너의 이름을 선뜻 부르지 못했어”라며 풀에게 인사를 건넨다.
- 대마초가 아닌 풀이라고 영화에서 부르게 된 이유가 있나.
사람들이 대마초 하면 일단 그걸 입에 올리는 것부터 터부시한다. 대마가 일년생 풀인데, 해마다 씨를 뿌려서 다시 살아나는 생명력 있는 풀이라는 게 크게 다가왔다. 김수영 시인의 시에서 풀이 가지는 강인함, 그리고 풀은 민초를 상징하기도 하지 않나. 대마초를 다루는 영화에 대한 관객의 접근을 열어두고 싶었다.
- 비무장지대(DMZ)에서 허가받고 대마를
[인터뷰] 풀을 석방하라, <풀> 이수정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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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박세영’의 탄생
- 목회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유년기를 해외에서 보냈는데.
아버지가 언어학과 바울 신학 공부를 하셔서 가족과 토론토에 살았다. 가난하지만 행복했다. 지금은 대구의 개척교회 목사다. 귀국을 준비할 때 가족들이 내가 일반적인 한국 학교에 다니면 적응하지 못할 거라 고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대안학교에 갔는데 그곳에서도 초반엔 적응이 쉽지 않았다. 아주 힘든 시기를 보냈다. 중학생 때 실질적으로 한국어를 제대로 배웠고, 처음으로 완독한 한국어 소설이 최인훈의 <광장>이었다. 이전까지는 영어가 더 편했고, 소설을 쓰고 싶었다.
- 2024년 발표했지만 촬영 시점으로는 사실상 아버지와 개의 등산을 담은 <땅거미>가 최초로 작업한 영화다.
아버지가 독특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늘 해왔다. 길을 걸으면서 혼자 생각하느라 전봇대에 부딪히는 사람이다. 매일 아침 혼자서 기도하려고 뒷산을 오르는데, 닦이지 않은 길로도 혼자 아무렇게나 올라간다. <
[인터뷰] 감독 ‘박세영’의 탄생, ‘넥스트 시네아스트’ 박세영 감독 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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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무주산골영화제가 기획한 첫 넥스트 시네아스트 기획전의 주인공으로 선정되어 무주에 다녀왔다. 잠시 환기하는 시간을 가졌는지.
에무시네마에서 영화제측과 첫 공식 미팅을 가졌는데, 권위의 주체로서 감독 한 사람만을 조명하지 않으려는 시각을 느꼈다. 영화 만들기에 관해 감독이 단독자로 나서는 게 아니고 후반 작업자들, 다양한 기술 스태프들과 공동의 논의를 가질 수 있는 라운드 테이블이 있다는 게 특히 기뻤다. 하루에 두어 시간 일정을 소화하고는 할 게 없어서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무주로 향할 때 당면한 모든 것을 성실히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대충 버스 타고 졸면서 가지 말고 오토바이로 가보자 해서 6시간 정도 국도를 탔다. 한국의 대륙을 횡단한다는 것에서 오는 느낌, 무슨 의미 같은 게 있을 줄 알았는데 그냥 춥고 배고팠다. 서울로 돌아올 땐 용달을 불러서 오토바이를 싣고 돌아왔다.
- 인터뷰에 앞서 <누가 내 십자가를 훔쳐갔나?>의 가편본을 보여주기에 조금 놀
[인터뷰] 불안의 발로, ‘넥스트 시네아스트’ 박세영 감독 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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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가 창작 환경 악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금, 기성 시스템 밖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개발해온 차세대 작가들이 마련한 돌파구에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13회 무주산골영화제가 올해 첫선을 보인 ‘넥스트 시네아스트’는 이런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기획이다. 장편영화 경험을 보유한 한국 감독 중 장르를 넘나들며 독창적 세계관을 구축하는 재능 있는 작가를 발굴하는 이 프로그램의 첫 주인공으로 낙점된 이는 박세영 감독. 64분 분량의 개봉작 <다섯 번째 흉추>와 국내외 영화제를 순회한 약 19편의 단편영화로 그는 동시대 한국영화의 전선에서 자신만의 인장이 가장 뚜렷한 실험가로 각인됐다. 실험, 호러·스릴러 장르를 유영하며 2017년부터 20여편의 다양한 작품을 발표해온 박세영은 <다섯 번째 흉추>를 기점으로 뚜렷한 진화를 보여주고 있다.
전통적인 의미의 미장센보다 포스트프로덕션에서의 미학적 개입을 통해 작가성을 구현하는 박세영의 창작력을 들여다보기 위해 올
[기획] 변형과 해체로 - 영화의 매체적 가능성을 실험하는 ‘넥스트 시네아스트’ 박세영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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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3일 대선투표일. 출구조사 발표를 앞둔 MBC 개표방송에 친숙하지만 의외인 두분이 등장했다. 유명 과학 유튜버 궤도와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였다. 무려 ‘민주주의 이즈(is) 사이언스’라는 제목과 함께. 두 이과 남자가 설명하는 민주주의가 과학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과학의 역사를 보자. 궤도가 과학계의 “위대한 큰 형님”으로 소개한 아이작 뉴턴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의법칙’을 발견한 과학자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절반의 이야기일 뿐. 뉴턴의 질문은 “사과가 왜 떨어질까?”에서 그치지 않고 “달은 왜 떨어지지 않을까?”까지 나아갔다. 그리고 이 질문은 지상계와 천상계에 공히 적용되는 보편적인 물리법칙으로서, 질량을 가진 두 물체는 서로를 끌어당긴다는 만유인력의법칙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천상계의 달과 지상계의 사과가 평등한 뉴턴의 물리학은 왕과 백성의 위계적 구분 대신 평등한 시민으로 구성된 민주주의 사회와 일맥상통한다. 이어서 김상욱
[임소연의 클로징] 민주주의 이즈 슬로 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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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귤레귤레>팀이 튀르키예 출국을 한달 앞둔 어느 날, 서예화는 배우 이희준의 캐스팅 콜을 받아 여주인공으로 낙점되었다. 전화 통화를 마친 뒤, 대본을 펼쳐보기도 전에 그녀는 성당으로 향했다. 무엇이 됐든, 일단 감사하다고 기도드리고 싶었다. “너무 사랑하는 동료랑 작업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대에서 함께해 행복했던 이와 현장에서 다시 만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등학생 시절, 학교가 있던 일산에서 매일 혜화동 대학로를 오가며 극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이하 ‘간다’)의 작품들을 보았고 그렇게 무대에 빠져들었다. 서예화를 “연극에 미치게” 만들었던 배우들이 당시 극단의 얼굴이었던 이희준과 진선규였다. “‘간다’의 공연을 한회차라도 놓친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매회차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게 얼마나 좋은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연극·뮤지컬계의 ‘회전문’ 팬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그 회전문 팬의 시초 중 한
[WHO ARE YOU] 꿈을 모아서, <귤레귤레> 배우 서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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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장뤼크 고다르의 9번째 영화 <미치광이 피에로>가 필름 복원을 거쳐 미국에서 재상영된 순간. 영화평론가 조너선 로젠봄은 <시카고 리더>에 당대 주류영화를 향한 질책을 경유해 고다르를 향한 흠모를 남긴다. “끝없는 장난기, 하지만 그것이 의존하는 과부하의 미학은 대부분의 현대영화들의 단순화된 과잉 살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1989)의 감각적 폭격은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전제에 근거하지만 <미치광이 피에로>의 창조적 과부하는 모든 것이 아직 해야 할 일로 남아 있다는 전제에 근거한다.” 로젠봄의 감상으로부터 35년이 훌쩍 넘은 지금, <미치광이 피에로>의 국내 개봉에 관해 어떤 말을 적어야 할까. 여전히 관객의 해방에 기여하는 이 고전은 영화가 무의미와 광기를 포착하는 가장 적절한 매체일 수 있다고 말을 건다. 우리는 페르디낭(장폴 벨몽도)과 마리안(아나 카리나)이 충
[리뷰] 재개봉 영화 <미치광이 피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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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그동안 너의 이름을 선뜻 부르지 못했어. 너에 대해 무지했지.” 대마를 ‘풀’이라 부르며 오래된 친구를 소개하듯 시작하는 다큐멘터리 <풀>은, <재춘언니> 등으로 노동자의 파업 현장을 기록해온 이수정 감독의 신작이다. 의사였던 권용현은 공황장애에 CBD가 효과가 있음을 스스로 경험하고 아픈 이에게 대마초를 건넸다가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농부 천호균은 남북 접경지역에서 ‘평화’라는 구호 아래 대마를 재배한다. 일년생 풀인 대마는 물과 비료 없이도 빠르게 성장하여 탄소를 흡수하는 친환경적 식물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대마는 ‘금지된 식물’이라 높은 철망으로 둘러싸인 밭에서 재배해야 하고 수확한 대마는 공무원의 참관 아래 줄기를 제외하고 땅에 묻어야 한다. <풀>은 대마 합법화에 찬성하는 사람들의 대안적 삶을 따라가며, 해외 사례와 전문가 인터뷰, 애니메이션 등을 통해 그간 금기시되어온 대마의 진실을 친근하게 풀어낸다.
[리뷰] 목가적 풍경과 평온한 얼굴로 대마초라는 금기를 깨다, <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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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 유튜버 호준(김호원)이 촬영차 지방의 한적한 낚시터를 찾는다. 곧이어 영화감독인 남 감독(성환), 그리고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먼 길을 떠나온 배우 희진(임채영)이 등장한다. 호준은 처음엔 둘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보이지만 머지않아 그의 과거가 밝혀지며 조용했던 낚시터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박중하 감독의 <잔챙이>는 하고 싶은 말을 에두르지 않는 영화다. ‘잔챙이’는 선택받는 것을 기다려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 인물에 대한 노골적인 비유이며, 감독과 배우라는 특수 관계에 얽혀 있는 세 인물의 대화는 어차피 ‘영화 이야기’로 귀결된다. 다 필요 없고 하고 싶은 말 원 없이 뱉고 싶은 심정의 배우들을 응원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한정된 장소에서 펼쳐지는 세 인물의 대사 주고받음이 인상적이다. 주연이자 각본, 제작을 맡은 김호원 배우는 24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에서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했다.
[리뷰] 일찍이든 늦게든 일어난 낚시꾼에게 기회가 온다, <잔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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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에츠코(아마미야 소라)는 초등학생 시절 달리기 선수를 목표로 살아왔으나 이제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날 그녀가 다니는 미츠히가시 고등학교에 도쿄에서 전학생 타카하시 리나(다카하시 리에)가 온다. 그녀의 꿈은 조정부를 부활시키는 것이다. 조정부가 부활한다는 소식에 곧바로 부원이 모이고 이들은 다 함께 대회에 나가려 한다. <기빗올: 우리들의 썸머>는 사쿠라기 유헤이 감독의 애니메이션으로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등 여러 영화제에 초청되었다. <최애의 아이>에서 호시노 아이로 분한 다카하시 리에 등 유명 성우가 참여했다. 작품은 3D로 연출되었으며 전형적인 스포츠 동아리 영화의 공식을 따라간다. 해안가 풍광을 살리는 작화와 인물의 감정선을 과장하지 않는 소박함이 인상적이다. 조정을 사실적으로만 그려 애니메이션만 줄 수 있는 쾌감이 살아나지 않아서 아쉬움이 남는다.
[리뷰] 청춘이여 청량한 오늘과 쨍쨍한 내일을 향해 노 저어 나가라, <기빗올: 우리들의 썸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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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식민시대인 21세기에도 언어가 정치 투쟁의 도구로 자리할 수 있을까. <니캡>을 보고 나면 누구든 민족 고유의 언어를 힙합 비트에 실은 채 세상을 향해 소리치고 싶을 것이다. <니캡> 속 항거의 주체는 니시(모 차라)와 리암(모글리 밥) 그리고 오도허티(DJ 프로비)다. 아일랜드 벨파스트에 사는 니시와 그의 친구 리암은 영어가 아닌 아일랜드어를 수호하며 아일랜드어로 랩메이킹을 한다. 이들은 우연히 아일랜드어 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일하는 오도허티과 연을 맺고, 힙합 밴드 니캡을 결성해 아일랜드에 파란을 일으킨다. <니캡>은 힙합과 마약, 섹스가 내러티브 내에서 질펀하게 뒤엉키고 불안정한 청춘의 1인칭 내레이션과 힙노시스풍의 타이포그래피가 범람하는 영화다. 이같은 특성으로 인해 <트레인스포팅>의 추억을 떠올리는 관객도 적지 않을 것이다. 영화 속 세 주인공은 실제 2017년부터 활동 중인 밴드 ‘니캡’의 멤버들이다.
[리뷰] 필요한 도발, 유효한 저항. 우리 시대의 <트레인스포팅>이 될 자격이 충분해, <니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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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강사 유정(한채영)은 지인에게 명품 의류를 수입하는 CEO 선희(현우성)를 소개받는다. 선희의 정체는 불법을 일삼는 건달이다. 그는 유부녀인 유정에게 명품 의류를 선물하는 등 적극적으로 다가간다. 유정의 친한 동생 강수(장의수)는 선희의 사악한 계략을 알아차리나 때는 늦었다. <악의 도시>는 아침드라마의 황태자로 불린 현우성 배우의 입봉작이다. 한채영 배우가 8년 만에 스크린으로 복귀했다는 사실만으로 이목을 끈다. 영화의 만듦새는 전반적으로 아쉽다. 우선 범죄물로의 매력이 떨어질뿐더러 각 캐릭터의 이야기가 제대로 그려지지 않는다. 플래시백으로 캐릭터의 서사를 보충하려고 애쓰지만 되레 서사의 중심을 흩뜨려뜨는 역효과를 낳는다. 약물 강간 등 성폭력을 재현하는 태도도 문제다. 성폭력이 용인 되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다루는 대신 인간에 대한 믿음이란 추상적인 문제로 갈무리하며 아쉬움을 남긴다.
[리뷰] 인간혐오로 논점을 얼버무리기, <악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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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북부 산골 마을에 흉흉한 소문이 번진다. 물귀신에게 잡혀간 사람들이 머리가 잘린 채 발견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탐정 키엔(꾸옥 후이)이 조사를 시작한다. 문 부인(응옥 지엡)의 잃어버린 조카 응가를 찾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 수사를 이어가던 키엔은 이 사건에 생각보다 많은 마을 사람들의 과거가 얽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마을에서의 체류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귀신이 키엔까지 노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빅터 부 감독의 신작 <탐정 키엔: 사라진 머리>는 베트남 산골 마을이라는 독특한 배경에서 펼쳐지는 미스터리 추리극이다. 탐정 캐릭터의 매력을 돋보이게 하려 노력하는 대신 이야기 자체에 공을 들여 정면 승부를 꾀한다. 극이 다소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전개되지만 배경 특유의 음산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이를 보완한다.
[리뷰] ‘넥스트 키엔’을 기대하게 만드는, <탐정 키엔: 사라진 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