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에서 통로 좌석을 좋아합니다. 중앙이나 창가 자리에 앉으면 화장실이라도 가야 할 때 옆 사람에게 부탁하며 나가야 하는 것이 번거로워서, 마음먹으면 언제든 일어설 수 있는 자유를 선택하곤 합니다. 그날은 창가 자리에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로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가, 중앙에는 그 소녀의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앉아 있었습니다. 여행을 가는 것으로 보이는 모녀는 짐을 잘 챙겼는지 확인하며, 도착하면 어디를 들를 건지를 속삭이고 있었습니다. 스마트폰에 얼굴을 맞대고 뭔가를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 옆자리에 앉아 책 한권과 노트 한권, 엽서 한장을 꺼냈습니다. 뭔가를 읽고 쓰다가 준비가 되면 엽서에 편지를 쓸 생각이었지요.
왜 그런지 예열하지 않아도 하고 싶은 말들이 마구 튀어나올 것 같아 아이폰 메모장에 서둘러 편지 초안을 썼습니다. 손수 만든 쿠키를 몇번이나 보내주시고 오늘의 식사 자리까지 초대해준 그의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였습니다. 사실 한번밖에 뵙지 못해 얼굴도 흐릿하고 성함도 모릅니다. 저에 대한 기억의 해상도는 그분도 비슷할 거라 예상합니다. 오직 그의 친구라는 사실만으로 저에게 많은 것을 내어주셨을 겁니다. 그리고 뭔가를 나누어주지 않으면 안되는 마음이셨을 거라 감히 예상해봅니다. 저도 그런 마음이니까요.
언젠가 사두었던 모네의 수련 시리즈들이 담긴 엽서책에서 수수하게 예뻐 보이는 페이지를 한장 떼어 가져왔습니다. 누구를 위한 건지 모르겠는 문장은 엽서 위에 바쁘게 채워지고 있었습니다. 딱딱한 종이를 볼펜으로 가로지르다 보니 새끼손가락 뿌리쪽에 위치한 두툼한 근육 부위가 뻐근해져왔습니다. 엽서를 다 쓰고 나니 그에게도 편지를 쓰 고 싶어졌습니다. 이번에는 가지고 있던 노트의 빈 페이지에 초안도 없이 쓰기 시작합니다. 글을 쓸 때 자주 맞닥뜨리는 감정이 있습니다. 써봤자 이건 좋은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혹은 이 이야기를 해서는 안될 것 같다, 그래서 ‘뭘 써야 할지 막막하다’라는 기분인데요. 그날은 종이 위에 그에게 해서 좋을 것 없을 이야기를 순식간에 써내려갔습니다. 그러면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로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습니다. 순간 승무원이 제 옆을 지나갑니다. 문득 다른 이의 시점에서 보일 이쪽 의자 칸의 풍경이 그려집니다. 모처럼의 여행에 들뜬 어린 모녀 옆에 앉아, 울면서 편지를 쓰는 축축한 여자…. 목적지가 같은 비행기 안의 우리의 모습은 이렇게나 다릅니다. 머리를 쓸어 올리는 척 눈물을 훔치며 새삼 공공장소 옆자리 사람들에게 친절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렌트한 작은 차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가족을 만나서 식사를 하고, 궁금했던 커피집도 갔습니다. 그날은 겨울이라고 말하기엔 멋쩍은 날씨였습니다. 1월에 테라스에서 아이스커피를 마실 수 있을 정도라니 이거 참 이상한 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날씨를 따뜻하게 만들어준 걸까?” 기묘하게 생긴 곤충의 출현에는 “이건 그가 아닐까?” 우리는 별것 아닌 작은 현상에도 이유를 자꾸 만들어냈습니다. 그가 뿌려진 곳에는 바람 한점 불지 않았습니다. 막상 여기에 와보니 알게 되는 건, 그는 여기에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뭐라도 붙잡고 바라보고 싶었는데 그럴 것도 딱히 없었습니다. 네가 여기 있다 갔구나, 하고 멍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다 우리는 각자가 머물고 싶은 곳을 찾듯이 서서히 흩어졌습니다.
저는 근처 바닷가로 나갔습니다. 경사지고 울퉁불퉁한 돌 위를 걸으며 무념무상에 잠겼습니다. 그러다 바다와 맞닿은 어느 바위쯤에 도착해서 앉았습니다. 손을 뻗어 바닷물을 만지며 얼마나 짠지 먹어보고 싶었는데, 그 정도의 상황도 되지 않는 험난한 지형이었습니다. 부서지는 파도의 조각이 불규칙적으로 물을 뿌려댔습니다. 아까의 노트를 꺼내 그에게 썼던 편지 부분을 찢어 반을 접고 삼각형 모양을 만들어 종이접기 배를 만들었습니다. 초라하게 찢긴 노트의 낱장이 조금은 탄탄하게 모양을 갖춰갑니다. 번데기를 만들듯, 혹은 꽃을 펼치듯 본능적으로 형태를 다듬으니 마침내 작은 종이배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배의 표면에는 읽기 어려운 문장들이 제각각의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웃기고 자랑스러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한동안 그걸 쥐고 있다가 바다 위에 출항시켰습니다. 대단히 멀리 항해할 수 있을 거라 상상하지는 않았지만, 이토록 파도에 쉽게 함락당할 줄도 몰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물살에 종이배는 해안선의 돌에 부딪치며, 바다로 나가지도 못하고 육지 방향으로 자꾸만 떠밀려옵니다. 아마 이 편지는 바위 사이에 낀 종이 쓰레기가 되어 서서히 분해될 것입니다. 제가 썼던 원망과 사랑의 문장들은 그렇게 마모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엔 그렇게 읽히는 편지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