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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이 잃어버린 순수한 사랑의 힘을 보여주다
유진과 준상에게 전통적인 인습, 습관, 질서를 초월하려는 의지는 없다. 그들은 체제에 대해 특별히 찬미도 하지 않으며 반항도 하지 않는다. 그들이 유일하게 흥미를 보이는 것은 상대방의 기분이다. 유진은 준상을 좋아하며 준상도 유진을 좋아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자신의 기분을 스트레이트로 전달하지 않는다. 지각을 하고 학교 벽을 넘는 장면, 두 사람이 나란히 메타세콰이어 길을 걷는 등 이런 소박한 장면을 통해 두 사람은 순수한 사랑을 키워간다.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조차 들게 하는 순수한 사랑이긴 하지만 그런 부분을 철저히 보여주기 때문에 관객을 납득시키는 힘이 있다.
한국과 북한의 긴장관계는 계속되고 있지만 냉랭했던 정치적 계절은 끝나버린 듯하다. 정치적 차원에서의 ‘정의’를 이제는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현대인은 종교적 차원에서의 ‘정의’도 믿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숭고한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인류는 결국 우매한
일본인이 본 <겨울연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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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잃은 순수, 이 드라마에 있었다
2004년의 문화계를 대표하는 키워드는 한류였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피부로 실감할 수 있는 한류는 한국의 문화상품 일반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2004년의 한류는 정확히 말해 일본에서 일어난 붐이라고 좁게 지칭해야 옳다. 욘사마 열풍 또한 없이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 위성방송에서 시작해 공중파인 에서 재방송을 거듭하고 있지만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는 . 일본인들은 과연 이 드라마에서 무엇을 보고 감동하는 것일까? 일본의 문화평론가 시미즈 마사시가 쓴 비평은 이 궁금증을 해결할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시미즈 마사시는 현재 일본대학 예술학부 문예과와 대학원 예술학 연구과 교수로 등 문학·영화·만화를 넘나드는 다양한 저서를 내놓은 인물이다.
이번에 한국에서 한달 동안 유학을 하기에 앞서 특별히 어떤 준비를 하진 않았지만 한국에 간다면 꼭 를 봐두어야 한다는 친구가 있었다. 가
일본인이 본 <겨울연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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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행을 떠나야겠군, 눈을 뜨자마자 그렇게 생각한다. 커피를 내려 텀블러에 담고, 캔버스 끈을 조여 묶는다. 지하철 정액권을 체크하고, 펜과 수첩을 챙겨넣는다. 뉴욕의 겨울 바람과 싸우려면 든든한 목도리도 필요하다. 도시 곳곳에 숨어있는 영화의 흔적들을 찾아나서는 데이-트립은 이 정도 준비물이면 충분하다. 물론 나의 정거장은 같은 블록버스터영화에서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타임스 스퀘어나 유명세 덕에 관광객들로 버글거리는 ‘세렌디피티’ 같은 카페가 아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도, 록펠러 센터도 아니다. 이것은 생활공간의 일부가 되어버려 그냥 스쳐 지나가는 곳, 누군가 여기서 영화를 찍었다고 해도 믿지 못할, 사소한 공간들에 대한 소박한 확인이다. 예전에 드라마 를 왜 그토록 좋아했었나를 생각해보면, 그 이유 중 하나가 드라마를 찍은 장소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내가 밥을 먹고, 술을 먹고, 친구와 잡담을 나누고, 일없이 방황하던 동네의 이야기. 홍대의 낯익은 길가를 터벅터벅
[백은하의 애버뉴C] 2nd street 서른 한 살의 데이-트리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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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요크셔의 풍광
파벨 파블리코프스키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불이 켜졌다. 일어서는 사람들 사이로 조용한 술렁거림이 물결처럼 퍼져나갔다. 2004년 10월 (My Summer of Love) 개봉 첫날 첫회를 소호의 한 극장에서 보고 난 뒤였다. 같은 날 런던 시내의 다른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본 친구는 객석 여기저기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고 했다. 에든버러영화제에서는 최고상을 받았고, 토론토영화제에서는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면서 미국 배급업자들이 경쟁을 벌였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이 작은 영화에 대한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친한 사람들끼리만 소중한 비밀을 나누듯이 그렇게 잔잔하게 퍼져나갔다.
은 두 소녀가 함께 보낸 여름에 대한 이야기다. 펍을 운영하던 모나의 어머니는 죽었고, 10파운드를 주고 엔진이 없는 오토바이를 산 모나는 16살의 여름, 심심하고 무료하고 짜증이 나 있다. 탐신은 그 변두리 타운 근처에 여름 별장을 가진 상류층 소녀. 여름 한철을 거
2004년 우리가 놓친 영화 [4] - 영국,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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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의 진실 다룬 다큐멘터리
레이몽 드파르동의
파리 지방법원 10호실을 배경으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재판 심리 과정을 소개한 실험적 영화인 은 2004년 6월 프랑스 관객과 만났고, 2004년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꼽히게 됐다. 이 작품을 소개하기 위해선, 사진작가이자 다큐멘터리스트인 감독 레이몽 드파르동의 경력과 작품 세계를 먼저 소개해야, 순서가 맞을 듯 보인다.
드파르동은 1968년 5월 항쟁, 프라하의 봄, 베트남전 등 인류의 격동기를 따라잡으며 카메라의 자율성과 책임성을 진지하게 고민해온 사진작가다. 사진작업 경험을 바탕으로 작업의 영역을 영화로 넓혀가기 시작한 그는, 1969년 소련의 체코 점령 반대 항쟁에서 희생된 대학생의 장례식을 영상화한 것을 시작으로,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프랑스 전 대통령의 선거 캠페인(), 미디어의 기능과 영향(, 1981)과 의료 시설(, 1988), 그리고 농촌의 실상(, 2000) 등에도 눈을 돌렸다. 1985년 과 1
2004년 우리가 놓친 영화 [3] - 프랑스, 홍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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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살 감독의 빛나는 독립영화 정신
신도 가네토의
노년의 예술가의 작품이라면 그것은 젊은 날의 분노를 용서와 화해로 삭인, 세상을 관조하는 고요한 것임에 틀림없다. 흔히 ‘노예술가가 말하는 인생의 교훈’이라 불리는 것 말이다. 부끄럽지만 나에겐 그런 선입견이 있었다.
이런 굳어진 머리를 신도 가네토(新藤兼人) 감독의 (ふくろう)가 내리쳤다. 는 등을 통해 일본 독립영화의 상징으로 살아온 신도 감독이 91살인 2003년 감독, 미술, 시나리오를 도맡아 완성해 2004년 일본 전국에서 순차 개봉한 작품이다. 좀더 놀라운 건 90대 감독의 작품에 넘치는 비판정신과 저항의 에너지다. 저예산영화라는 조건에 맞춰 무대극 같은 1세트 형식을 끌어오며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웃음’이 많은 블랙코미디를 만들어냈다. 평론계나 영화저널리즘이 이 현역 최고령 감독의 신작에 “고개를 숙인다”며 존경의 글을 앞다퉈 내보낸 것도 이 지칠 줄 모르는 실험정신 때문이다.
1980년 일본 도
2004년 우리가 놓친 영화 [2] -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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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타게 걸작을 찾아서
연말연시 해외 영화전문지들을 뒤적이다보면, 그해 최고 영화들의 순위를 매기거나 긴 페이지를 할애한 결산 특집에 유독 자주 등장하는, 그러나 우리에겐 낯선 영화 제목들을 발견하게 된다. 몇해 전, 영어권 국가에 ‘패스트 러너’라는 제목으로 소개됐던 가 그랬었다. 현지평자들이 2002년 최고 혹은 최선의 영화로 앞다퉈 소개한 이 영화에 대한 궁금증은 2년이 지난 2004년 이 영화가 국내에 소개될 때까지 꾹꾹 눌러두어야 했더랬다. 그래서 올해는 조금 적극적으로 나서보기로 했다. 2004년 한해 동안 해외 각지에서 소개된 영화 중에서, ‘걸작’으로 추어올리거나 ‘발견’으로 꼽을 만한 성과가 있었는지, 알아보기로 한 것이다. 의 해외 통신원들이 ‘강추’해온 영화 8편에는 하나로 아우를 만한 특별한 기준은 없다. 90대에 접어든 일본의 거장 신도 가네토의 부터 영국의 신예 파벨 파블리코프스키의 까지, 장르영화의 귀재 두기봉의 화려한 액션 부터 단돈 200달러로 찍은
2004년 우리가 놓친 영화 [1] -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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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련된 인간들이 넘치는 도시의 갑부들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가지지 못한 것, 혹은 잃어버린 가치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의 온갖 호들갑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거대함을 모방하기보다는 그와는 정반대에서 소박함의 가치를 설파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는 이 유사한 두 논리에 의해 지탱되는 영화다. 이 두 논리의 실질적인 효과, 혹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판단은 잠시 미뤄두자. 이 영화에서만큼은 그 전략이 유치할지언정 나름대로 코믹한 순간들을 잡아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시리즈의 완결편이라 할 수 있는 이번 3편 역시 순진한 마초 던디(폴 호건)와 지적인 기자 수(린다 코즐로스키) 부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영화의 시작은 마치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호주의 야생을 비추는 데 할애된다. 자연과 인간의 공생에 초점을 둔 도입부는 던디의 가족이 수의 직장 때문에 옮겨온 LA의 빌딩 숲과 명확한 대조를 이루며 이후 영화
진짜 사나이 영웅에 대한 묘한 향수, <크로커다일 던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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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말 개봉한 는 기계문명으로부터 가장 멀리, 신화로부터 가장 가까이서 살아가는 동시대 에스키모를 보여줬다. 그러므로 불시착한 캐나다인 비행기 조종사 찰리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삶의 지혜를 대변하는 에스키모 소녀 카날라의 교감을 그린 가 의 그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자연과의 교감에 천착했던 자연과학자 팔리 모왓의 단편 를 영화화한 는 외부자의 시선을 견지한다. 스스로를 성찰한 와는 태생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영어를 금세 익혀 관객의 불편함을 덜어주는 카날라의 명민함, 찰리의 상처를 치유하는 카날라의 손길을 따라잡는 여성적이며 토속적인 음악이 불편한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는 섣불리 이해했다고 자만하거나 이유없는 경외로 오해의 불씨를 키웠던, 서구영화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백인 남자와 원주민 처녀의 순결한 사랑 이야기도 아니다. 로맨스 따위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 단호함이 매력적이고, 우리를 둘러싼 문명의 허구와 인간의
문명의 허구와 인간의 나약함을 성찰하는 솔직함, <스노우 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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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들의 교실은 학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자들이 마음의 서랍에 숨겨둔 판타지에도 있다. 여고 교실로 몰래 들어가 그들의 성장기를 지켜보는 두 번째 시리즈는 남학생 교실의 체험을 길어올린 첫 번째 판과 리얼리티를 다투지 않는다. 는 생리대 하나만 굴러다녀도 모든 감각기관을 동원하는 남학교 학생의 음습한 상상력으로부터 점화된다. 여학생들의 성적 호기심과 성적 취향 그리고 야릇한 장면만 보게 되면 특이한 신체적 반응을 보이는 교생들이 모두 상식적인 생리학과 동떨어져 있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남성 호르몬을 매일 복용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여고생들은 성적으로 매우 왕성하며 시각적인 정보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시대배경인 1990년대 초반은 하이틴 잡지, 영화 포스터, 검표원 따위로 드러나고 있지만 주인공들의 대담한 성적 태도에 파묻혀서인지 잘 보이지 않는다.
테리우스 같은 운명의 남자를 기다리는 성은(강은비)은 마침 체육 수업 시간에 들어온 교생 봉구(이지훈)를 보자마자
여고 교실로 몰래 들어가 지켜보는 그들의 성장기, <몽정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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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47)씨가 10·26 사건을 다룬 영화 에 대한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11일 서울중앙지법에 낼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영화 제작을 맡은 명필름은 명예훼손 소송 등 논란이 일 것에 대비해 법률 검토를 마친 것으로 알려져 결과가 주목된다.
백윤식씨가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한석규씨가 10·26에 동참한 중정 과장 역을 맡아 지난해 9월부터 극비리에 촬영에 들어가 지난달 촬영을 마친 은 오는 설 연휴에 맞춰 개봉될 예정이다. 한편 지난달 영화제작 소식을 접한 진영 한나라당 대표비서실장은 “문화·예술이 과거사를 소재로 삼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사실에 입각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힌 바 있다.
박지만, <그때그사람들>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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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의 새 영화 〈극장전〉의 캐스팅이 끝나갈 무렵 배우 이기우(24)는 영화사로부터 전화를 받고 생각했다. ‘왜 날 불렀을까?’ 언제나 의외의 제목을 선택하고 예측 불가능한 캐스팅을 해 왔던 홍 감독이지만 신인배우 이기우의 선택은 ‘생뚱맞아’ 보인다.
<극장전>에 캐스팅 된 이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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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을 촬영 중인 피터 잭슨 감독의 차기작은 (의 프리퀄)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영화전문사이트는, 예전에 잭슨이 다음으로 1차 세계대전에 관한 영화를 만들거라는 소문이 있었다며, 계획은 또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시사했다. 어쨌든 을 기대했던 팬들은 향후 몇 년간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은 올해 12월 미국개봉 예정이다.
피터 잭슨, <킹콩> 다음 작품은 <러블리 본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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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웹스터의 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고아소녀와 보이지 않는 후원자를 제외한다면 영화 와 J. 웹스터의 소설은 별다른 공통점이 없다. 새벽 꽃시장에서의 데이트와 기억을 잃어버리는 병, 가슴 아픈 짝사랑과 감초 연기로 메워진 는 하지원이라는 스타에 기대고 있는 작은 야심의 기획영화다.
하지원에 의해 솜털처럼 연기되는 영미는 머리 위에 성혼이라도 보일 만큼 선한 인물이다. 그에게 비밀이 하나 있다면, 부모가 없는 그를 위해 방송작가가 되기까지 보이지 않게 후원을 해준 ‘키다리 아저씨’라는 존재. 항상 그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영미는 또한 자료실 직원 준호(연정훈)와 사랑의 감정을 싹틔워나간다. 성선설에 기반을 둔 듯 지나치게 결백한 로맨스가 약간 불편해올 무렵, 는 또 다른 창을 연다. 이전 집주인이 놓고 간 컴퓨터에서 보내지 못한 이메일을 발견한 영미는, 오랜 짝사랑을 고백조차 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집주인의 사연에 감동받는다. 이제 영미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그 사연을 누군지도 모
성선설에 기반을 둔 지나치게 결백한 로맨스, <키다리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