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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흡사 난수표와도 같은 이상(李箱)의 시를 단서로 각종 종합 역사적 미스터리를 풀어간다는, 나름대로 기발한 아이디어의 영화였더랬는데, 아이디어만 기발하면 뭐해, 남산식물원을 대저택의 온실로 설정해버린다든지 롯데월드적 풍모의 지하실 세트에서 100년 묵은 일본군 귀신과 대한민국의 국운을 걸고 적인 결전을 벌인다든지 하는 코믹성 짙은 후반부로 인해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했던 영화가 바로 이 이었더랬다.
그런데 그로부터 5년여가 지난 지금, 우리는 태평양 건너 저 머나먼 아메리카국으로부터 온 의 환생을 맞닥뜨리고 있으니, 그 영화 바로 다.
암호 같은 시를 단서로 미스터리 추적 어드벤처를 수행하거나, 도시의 일상적인 지형지물을 결정적인 힌트로 써먹는다든가 하는 기본설정은 물론이요, 결국 ‘최후의 장소’로 지하 토굴을 설정하는 마무리까지 희한할 정도의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는 이 두 영화는, 심지어 그 ‘구림의
[투덜군 투덜양] 어설픈 애국충정, 구리군 구려! <내셔널 트레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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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신의 책상 서랍이나 필통 속에는 아마 지우개가 한두개쯤 들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것을 사용할 일이 거의 없을 것이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연필과 함께 늘 챙겨야 했던 이 보잘것없는 고무덩어리는 글씨를 쓰거나 계산을 할 때 번번이 일어나는 실수를 처리해주는 아주 요긴한 물건이었지만, 학교를 마친 다음부터는 쓸모가 없어진다. 그때부터는 연필이 아니라 검정색 볼펜이나 만년필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이력서나 입사지원서, 부동산매매계약서를 연필로 쓰지 않는다. 한번 기록된 것은 지울 수도 없고 지워져서도 안 되며, 지워지더라도 분명한 흔적을 남겨야 한다. 진술과 약속의 세계에서 연필로 쓴 기록은 무효다.
연필과 함께 지우개도 쓸모가 없어진다. 그리고 지우개의 퇴장과 함께 실수와 잘못을 용서받을 수 있었던 시절은 지나가버린다. 삶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된다. 그것은 더이상 연습이 아니며 틀렸음을 알아차렸을 때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는 받아쓰기가
[이창] 지우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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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호를 만들고 있는 지금은, 아직 2004년이다. 신년에 어울리는 여러 가지 기획기사를 준비했지만 새해를 실감하긴 이르다. 그러다보니 기사를 쓰면서 번번이 실수가 나온다. 2003년을 ‘지난해’로, 2004년을 ‘올해’로, 2005년을 ‘내년’으로 써놓는 식이다. 의식과 달리 몸이 새로운 시간에 적응 못한 탓이리라. 오늘과 내일을 구분하는 것과 달리 새로운 1년을 받아들이는 데는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 내 손에 완성된 신년호가 쥐어지면 그제야 2004년이 끝났다는 걸 실감하겠지 싶다.
영화주간지 기자로 10년을 지내다보니 끝과 시작을 느끼는 방식도 기사 마감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1년의 무게가 50권 무게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지난 50권의 잡지가 1년 삶의 궤적이고 이제 한주 한주 새로운 50권을 만들어갈 일이 남았다.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지루하지만 이런 생활패턴이 주는 중독성 즐거움도 있다. 무엇보다 노동의 결과가 눈앞에 보인다는 점인데 특히 지난 한해를
[편집장이 독자에게] 가늘고 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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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격 인터뷰! 닭, 드디어 부리를 열다
닭띠해를 맞아 인간과 모처럼 인터뷰한다며 인간언어 번역기를 달고 나온 닭은 솔직히 모양새가 처참했다. 그를 끌고나온 이가 살짝 귀띔한 바에 따르면, 치킨집에 가는 길에 “나는 닭이 아니다”고 외치며 분신을 시도하다가, 살짝 그슬리기만 하고 살아남은 전직 바비큐 닭이라고 했다. 앞으로 황우석 박사의 연구실 닭이 돼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포부를 지닌 그 닭은, 정말 닭살이었다. 접대 멘트로 12년 만에 축하 어쩌고 했더니, 닥치고 질문이나 하라고 마구 쪼아댔다. 성질머리 하곤. 누가 닭 아니랄까봐.
-씨네21 | ‘닭대가리’라는 말 아나?
=닭 | (기자의 머리를 쳐다보며) 그게 바로 요 아니냐? 그 말을 만든 건… 아무래도 소머리의 음모 같다. 지렁이도 있고, 아메바도 있다. 아무렴 우리가 걔네들보다도 못하단 거냐? 머리통 크기 작다고 머리 나쁜 줄 아는데 우리는 연예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속담은 아나? “닭대가리가 될지언
2005년 닭띠해 기념 프로젝트, 닭살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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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하는 가수는 억울하다. ‘짧고 굵게’ 활동하다 간 요절 음악인에 대한 대중의 과도한 추앙을 곁눈질하면 더 그렇다. 그런데 ‘장수하면서 롱런하는’ 가수가 드문 것도 사실이다. 아니, 드물지는 않더라도 자의 반 타의 반 ‘과거형’에 머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캐나다 출신의 음유시인(bard) 레너드 코언은 ‘롱런하면서 현재형인’ 빛나는 예외에 속하는 가수다. 그는 1960년대에 <Suzanne>과 <Bird on a Wire>, 1970년대에 <Famous Blue Raincoat>, 1980년대에 <I’m Your Man> 같은 신곡을 히트시키며 꾸준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금도 비오는 날이면 라디오에 종종 나오는 제니퍼 원스의 커버곡 <Famous Blue Raincoat>(1987)나 윤설하가 노래한 번안곡 (1991)은 1990년을 전후해 레너드 코언을 ‘우회하여’ 접근하게 한 계기였다. 특히 <Everybody Knows>가 인상적으로 나온
40년간 이어온 음악의 혼, 레너드 코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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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심상치 않다. 싸울 때마다 진다는 뜻이다. 18연패와 원정경기 21연패의 기록을 세운 삼미 슈퍼스타즈의 전설 아닌 전설이 떠오른다. 이 책은 물론 일본판 삼미 슈퍼스타즈에 관한 책은 아니다. 2000년 가을 도쿄대학 대학원에서 행한 5회의 연속 강의를 바탕으로 한 이 책의 저자 안도 다다오(1941∼)는 세계적인 건축가다. 예일대, 컬럼비아대, 하버드대 객원교수와 도쿄대 교수를 역임한 그는 오사카에서 빈민의 아들로 태어나 고교 졸업 뒤 프로 권투 선수 생활을 했고,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학으로 건축을 공부했다.
우리 못지않은 학력 위주 사회인 일본에서 그도 학력 콤플렉스를 겪었지만, 책을 읽고 생각하고 걸어다니면서 건물을 직접 보고 스케치하면서 배웠다. 고전 건축에서 첨단 건물에 이르는 무수한 건물들은 그에게 살아 있는 교과서이자 대학 강의실이었다. 이 책에서도 그는 반드시 과거의 훌륭한 건축을 봐야 한다고, 건축 공간을 직접 체험해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한
창조는 도전 정신에 있다, <연전연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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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바쁜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차기작 목록이 또 하나 늘었다. 이번엔 제16대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에 관한 영화다. 드림웍스가 퓰리처상수상자인 역자학자 도리스 컨스 굿윈이 쓴 링컨 전기의 영화화 판권을 2001년에 구입했고 이때부터 스필버그가 연출 의사를 표했다. 이 책은 < The Uniter: The Genius of Abraham Lincoln >라는 제목으로 올해 가을쯤 선보이게 된다.
영화제작 관계자는 2006년 1월경 제작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말했지만 스필버그의 대변인은 “스필버그가 이 영화의 캐스팅이나 제작시기에 대한 계획을 확정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만약 예정대로 2006년 1월 제작에 착수한다면, 스필버그의 또다른 프로젝트인 와 (Vengeance: 1972년 뮌헨 올림픽 테러사건에 관한 영화)는 더 뒤로 미뤄지게 된다. 지금 현재 스필버그는 을 6월 말 개봉 목표로 톰 크루즈와 촬영 중이다.
남북전쟁을 북쪽의 승리로 이끈 링컨 대통
스필버그가 링컨 영화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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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아침에 잘생긴 변호사에서 못생긴 변호사로 전락한 당신, ‘못생긴 게 죈가요?’ 라고 물으셨죠? 물론 죄가 아니죠. 하지만 솔직하게 말 할게요. 신석기 변호사님, 당신 그렇게 심하게 못생긴 거 절대 아니거든요? 뽀글거리는 머리칼. 그게 뭐 대순가요. 정 맘에 걸린다면 스트레이트파마를 하거나 헤어 젤 발라서 정리하면 되지요. 삐뚤삐뚤한 치열과 웃을 때 사정없이 드러나는 잇몸. 가까운 교정전문 치과를 방문해 보세요. 소정의 시간과 금액을 투자하면, 숙련된 전문의가 당신의 스마일라인을 몰라보게 바꿔 줄 테니까.
아, 비용이 문제시라고요? 당신은 최저 생계를 유지하기도 빠듯한 생활을 하고 있으니? 이런 이런, 법전만 들입다 파시느라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시나 봐요. 잊지 마세요. 당신은 대한민국 사법부가 인정한 변호사자격 보유자랍니다. 억만금을 주고도 못사는 바로 그것 말이에요. 당신은 무담보, 무보증으로 얼마든지 신용대출이 가능하다고요. 변호사, 의사, 회계사에게는 특별우대 금리를
[정이현의 해석남녀] 신석기 블루스의 ’신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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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정의 연기는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10년만에 컴백해 출연한 드라마 에서 그는 같은 섬마을에 사는 자기 또래의 유부녀가 가출하려는 걸 붙잡는다. 그 유부녀가 자기 손목을 꽉 잡고 놓지 않는 고현정의 손을 피가 나도록 깨문다. 아픔을 씹어 삼키며 손목을 놓지 않는 고현정의 표정은 많은 걸 담고 있었다. 상대방에 대한 진심, 단호하고 고집 센 성격, 깨물린 손의 아픔 따위는 능히 견딜 수 있을 만큼 그 스스로 깊은 아픔을 지니고 있다는 암시까지. 순식간에 자기가 연기하는 극중 인물에 대한 시청자의 연민과 신비함을 끌어내는 그 표정은, 우리가 좋은 배우에게 열광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이런 고현정의 연기는 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세파에 대처하는 내성을 갖추지 못한 여자의 자기 방어벽이 역으로 타인의 연민과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유형이다. 연기를 중단했던 10년 동안 고현정은 20대에서 30대가 됐지만, 그의 연기 유형은 20대 여자에게 더 어울리는 것이다. 그의 얼굴도
[팝콘&콜라] 세속에 발 담그고 요동치는 30대 여주인공을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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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사람들>로 10년 만에 만난 백윤식-한석규
<그때 그사람들>로 10년 만에 만난 백윤식-한석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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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의 등에 날개가 돋았다. 이런 상상에서 <eden>은 출발한다. 그리고 이 상상이 커다란 3절지 260장에 옮겨졌다. 보통 만화 원고의 몇배가 되는 큰 사이즈에 스크린 톤 대신 먹의 농담과 직선적 펜 선 대신 붓의 유려함으로 표현된 흑백의 매력은 열정적인 탐구자인 작가가 일궈낸 성과다. 꽤나 미련스러워 보이는 이 작업을 끝끝내 마무리한 끈기에 박수를 보낸다. 이두호 선생의 말을 빌리자면, 만화는 손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로 그리는 것. 무거운 엉덩이가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고 한다.
<eden>은 주류만화와 비주류 만화의 미묘한 선상에 있다. 원고가 만들어진 이력이나 출판된 책의 모양새는 비주류지만, 담아낸 이야기는 주류와 닮아 있다. 날개 달린 괴수나 이 괴수에게서 공격을 당한 뒤 날개가 돋게 된다는 설정은 장르만화의 그것처럼 드라마틱하지만, 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주류의 문법에서 벗어난 독특한 모양새를 보여준다. 특히
대안적 만화의 시금석, 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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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캐릭터로 이루어진 영화지만 캐릭터를 설명하기가 난감한 영화이기도 하다. 인물이 매우 많고 배분이 고르기 때문이다. 돼지촌의 선한 고수들과 도끼단의 악당들이 있고, 한때 잊혀졌던 액션배우들과 막 떠오르는 신예들이 있다. 그들 중에서 네명이 주성치와 함께 한국을 찾았다. 전계문과 진국곤, 임자총은 에 주성치의 사형과 사제로 출연해 낯이 익은 배우들. 이들에게 고모뻘 되는 원추는 홍금보, 성룡과 함께 칠소복의 일원이었던 배우로 에도 출연했지만 결혼하면서 사라졌었다. 일년 넘는 시간을 함께한 이들은 인터뷰 사이 잠깐 시간이 났을 때도 떠들썩하게 장난을 치면서 동대문으로 쇼핑하러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전계문과 임자총은 와 달리 액션연기가 없다. 심심하지 않았나.
=전계문 | 에서 이미 우리 무공이 얼마나 출중한지 보여주었기 때문에 서운한 마음은 없었다. (웃음) 우리가 무술연기를 하면 원추가 할 일이 없어지지 않았겠는가.
임자총 | 나는 를 찍는 내내 거의 공중에서 연기를
‘성치 패밀리’ 배우 4인 - 전계문, 진국곤, 임자총, 원추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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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치는 잠깐 마을나온 동네 청년 같은 옷차림이었다. 메이크업도 하지 않고 카메라 앞에 선 그는 재킷을 벗어달라는 요청에 잠깐 멈칫했지만 “티셔츠 예쁘다”는 칭찬을 듣고선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편안한 스포츠 재킷, 소매 색이 다른, 축구공이 그려진 티셔츠, 조연배우들의 인터뷰 자리에 끼어 스탭처럼 앉아 있다 일어서는 친근한 태도. 짤막하면서도 단호하게 대답을 하곤 했던 주성치는 자신을 꾸미지 않아도 좋다는 자신감을 가진 인물이었다.
-당신은 홍콩 최고의 배우이지만 한국에서는 마니아들 사이에서만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와 은 좀더 많은 대중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는 영화다. 이 두 영화와 지금까지 만든 영화들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 은 내가 처음으로 제작한, 그것도 매우 진지한 쿵후액션영화다. 감독으로서, 배우로서, 나는 이 영화가 스토리를 풀어나가는 방식과 연출기법이 모두 마음에 든다. 이전의 어떤 영화보다도.
-어린 시절부터 이소룡의 팬이었고 액션배우가 되
<쿵푸 허슬>로 국내 팬들 찾은 주성치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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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치가 쿵후영화를 들고 한국을 찾아왔다. 2002년 로 처음, 폭이 넓은 한국 관객과 만났던 주성치는, 다시 한번 쿵후의 부흥을 꿈꾸는 그만의 소망을 스크린 위에 비급처럼 펼쳐 보이고 있다. 주성치가 3년 만에 내놓은 신작 은 갱이 되고 싶은 청년 싱이 희생과 정의와 생명의 가치를 깨닫고 전설로만 전해지던 무공 여래신장을 터득하는 영화. 중국 상하이에서 극비리에 촬영된 은 이소룡을 숭배해서 무도인이 되고자 했던, 그리고 결국엔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던, 주성치의 오랜 꿈이 결정으로 맺힌 영화다. “진지한 쿵후액션영화” 에 홍콩영화 사상 최대의 제작비를 부어넣은 그는 지금 또 무엇을 꿈꾸고 있을까. 의 사형사제들과 칠소복의 일원이었던 원추를 거느리고 한국에 도착한 주성치를 만났다. 편집자
나는 주성치 마니아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주성치를 좋아한다, 믿는다. 그의 영화가 나온다면, 장르가 무엇이건 본다. 어떤 이야기이건 무조건 본다. 주성치가 출연한다면, 일정 정도의 즐거움은 확
눈물의 의미를 아는 희극지왕, <쿵푸허슬>의 주성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