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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7.24
문제의 사랑가 장면. “이리 오너라. 업고 노자”로 시작되는 이 대목은 아마도 <춘향뎐> 전체에서 가장 어려운 장면의 하나일 것이다. “5, 6일이 지나니 두 남녀는 부끄럼을 잊고….” 서로의 몸을 알게 된 어린 남녀는 이제 수줍음을 버리고 서로 수작하다가 병풍 뒤로 들어가 옷을 벗어던지고 몸을 맞대야 한다. 문제는 그 전과정에 소리가 흐르고 모든 동작이 한컷에 담겨야 한다는 것. 3분 가까이 한 호흡으로 소리의 리듬을 타는 고도의 사랑놀이. 수줍은 첫날밤을 찍은 22일분은 무난하게 넘어갔지만, 이 장면에선 조승우가 눈에 띠게 굳어 있다. 경험이 없는 16살 소년이 하긴 어떻게 능청맞게 여자의 몸을 희롱할 수 있으랴. 조승우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할 뿐 리듬감도 절실함도 없어보였다. 처음엔 조용히 타이르기만 하던 임 감독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속절없이 이틀이 흘러가고 전 스탭은 초긴장상태. 임 감독이 폭발했다. “니네 어리광을 언제까지 받아줘야
<춘향뎐>과 임권택 [2] - 제작기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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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맨하탄에서 즐겁게 생존하기 위한 필수품이 있다면 바로 작은 돗자리나 비치타월이다. 그도 아니라면 두툼한 신문지라도 상관없다. 엉덩이를 깔 수 있는, 혹은 몸을 누일 수 있는 ‘마법의 양탄자’만 있다면, 굳이 바닷가에 가지 않아도 센트럴 파크에서 비키니를 입고 선탠을 즐길 수 있고, 고가의 오페라나 뮤지컬 표를 사지 않아도 <베로나의 두 신사>나 <맘마미아>를 만날 수 있으며, ‘드라이브 인 극장’에 갈 차가 없다 해도 쩌렁쩌렁한 사운드로 둘러싸인 야외극장에서 영화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이 무료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단연코 여름의 맨하탄은 가난한 여행객들이나 배고픈 학생들에게 천국도 이런 천국이 없을 정도다.
특히 매주 월요일을 ‘시네마’ 천국으로 만드는 주인공은 브라이언트 파크의 ’썸머필름 페스티벌’이다. 이 대중적인 행사는 <추억> (The Way We Were) 같은 연인용 영화부터, 오슨 웰스의 <악의
[백은하의 애버뉴C] 30th street / 알프레도 아저씨, 여전히 시네마천국에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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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이라는 것은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다. 아무리 도망가고 싶어도 자기 자리로 돌아와서 결국 그 삶이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임권택 감독은 먼길을 돌아 <춘향뎐>의 입구에 도착했다. 스스로 휴지같다고 표현한 1960년대, 동시대인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애정을 드러낸 1970년대, 그리고 방황과 구도의 1980년대를 보낸 뒤, 우리 것의 뿌리를 탐사한 90년대의 끝자락에서 그는 마침내 불멸의 고전 ‘춘향뎐’과 만난 것이다. 이것은, 그러나, 회귀이면서 동시에 혁신이다. 서구적 영화문법을 훌훌 털어내고 그를 전율케 했던 판소리의 감흥으로 모든 형식적 규율을 제압하는 미학적 도전이다. <춘향뎐>은 그래서 임권택 영화 이력의 결산이라기보다, 새출발처럼 보인다. 막 데뷔한 신인감독처럼, 그는 솟구치는 흥분과 불안을 눌러가며 판소리 춘향가를 조심스럽게 영화로 옮기기 시작했다.
1998. 9.16
“춘향전 판소리로 영화할 거야
<춘향뎐>과 임권택 [1] - 제작기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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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극에 고증이 필요한가?
미술- 잃어버린 대륙의 역사, 로드무비의 특성 살린 상징적 면 부각
고증 자료가 많지 않은 과거의 어느 시대를 시각화하는 건 곤혹스러운 일이다. 발해가 배경인 <무영검>의 미술팀은 자료가 부족한 까닭에 고증보다는 상상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작업해야 했다. “영화미술이 재현의 목적을 가진 건 아니”라고 믿는 하상호 미술감독은 자료에 연연하기보다는 “잃어버린 대륙의 역사, 로드무비라는 드라마에 기여하는 상징적인 미술”을 구현하려 했다고 설명한다. 발해의 역사와 고구려의 미술을 검토하고 그가 내린 결론은, 발해의 미술은 ‘화려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시대적인 정서나 분위기상 브라운 계열의 어둡고 차분한 색감이 어울린다고 봤다.” 마치 필터를 쓴 것처럼 모노 톤으로 보이는 화면은 이런 컨셉을 형상화했기 때문. 발해와 거란의 갈등 구도가 중요한 만큼 시각적인 대비에도 공을 들여, 거란의 경우 어둡고 탁한 붉은색을 주조로, 짐승
<무영검> 중국 촬영현장을 가다 [3] - 미술·합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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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시내 한복판에서 길을 잃은 한 소녀. 마법연수를 위해 시골마을에서 갓 상경한 여고생 키쿠치 유메는 자신에게 도움을 준 소년에게 마법으로 막대한 돈을 안겨주지만 고맙다는 소리를 듣기는커녕 꾸중 섞인 핀잔을 듣는다. 마법을 함부로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남의 친절을 마음이 아닌 물질로 보답하려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유메. 이후 그녀는 연수지도원인 마사미 선생의 가르침과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마법사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차츰 배우게 된다.
중세시대나 혹은 판타지 세계가 아닌 우리가 사는 현재에 마법사들이 존재한다는 식의 이야기라면 흔히 <해리포터> 시리즈를 먼저 떠올리겠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에선 비교적 오래전부터 그러한 내용들을 다뤄왔다. <요술공주 샐리>에서부터 <밍키모모> <샛별공주> 등 이른바 마법소녀물들이 어린 시절 우리의 동심을 자극해왔던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12 에피소드로 제작된 TV 애니메이션 &l
<마법사에게 소중한 것> 따스한 음악의 감성 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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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발해의 여자 무사인가?
서사- 미지의 여백인 발해사에 관한 대담한 상상
<무영검>은 무려 4년 동안 ‘김영준 무협 프로젝트’로 기획, 준비됐던 작품이다. 5년 전 데뷔작 <비천무>가 흥행은 나쁘지 않았지만, 완성도의 문제를 아프게 지적당한 만큼, 김영준 감독이 같은 장르로 복귀한 것은 의외다. 이 배경에는 <비천무> <무영검>의 제작사 태원엔터테인먼트 정태원 대표의 ‘설득’이 있었다. “<비천무>를 너무 급하게 진행해서 감독한테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홍콩팀과 일하면서 액션에 대해 배운 것도 있고, 중국 로케이션 때 바가지 쓰면서 큰 경험을 했다. 다시 찍으면, 더 적은 비용으로 더 좋은 장소에서 더 잘 찍을 수 있을 것 같더라. 비법을 알고 있는데, 안 하려니 억울했다. 그래서 감독을 설득했다. 이번엔 준비 기간과 비용을 충분히 주겠다고.” 이제는 말할 수 있는 <비천무> 제작의 비화. 정태원 대표가 &l
<무영검> 중국 촬영현장을 가다 [2] - 서사·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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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푸둥공항에서 차로 달리기를 네댓 시간. 40도에 육박하는 더운 날씨에 헐벗은 남자들이 우글대는 도시 무석의 세트장에 다다랐다. 고궁처럼 생긴 입구를 지나니, 지도 없이는 다닐 엄두가 안 나는 너른 세트장이 펼쳐져 있다. 이 세트장에선 장나라가 출연하는 중국 드라마를 비롯해 서너편의 영화와 드라마가 동시에 촬영되고 있다고 한다. 세트장 안쪽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호수에 인접한 낡고 허름한 가옥들의 거리가 나타난다. 바로 여기서 김영준 감독의 두 번째 영화 <무영검>의 막바지 촬영이 7월4일부터 이어져오고 있었다. 102회차 촬영이 있던 7월5일, 취재진이 찾아갔을 때는 발해의 마지막 왕자 대정현(이서진)과 그를 지키는 무사 연소하(윤소이)가 거란족의 침탈로 폐허가 된 발해 마을을 지나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었다. 말쑥한 복장에 움직임이 거의 없는 이날의 장면은 무협물인 <무영검>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정적인 촬영이었다.
그러나 쉬운 촬영은 없는 법이다. 비
<무영검> 중국 촬영현장을 가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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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작품 가운데 특히 <플라이, 대디, 플라이>를 시나리오 데뷔작으로 택한 이유는? <레볼루션 No.3>도 가능했을 텐데.
=<플라이…>는 먼저 시나리오 초고를 쓰고 그걸 바탕으로 소설화했던 작품이다. 가장 영화적이지 않나 싶었다. 영화를 한다면, 어렸을 때 좋아하던 성룡의 <취권>이나 이소룡의 작품 같은 액션 엔터테인먼트 영화를 하고 싶었다. <플라이…>는 판타지적인 분위기도 있지만 출발은 굉장히 현실적이다. 일본 영화계엔 요즘 절대 없는 작품이다. 출발 자체가 비현실적인 SF영화 같은 거야 있지만. 내가 다른 분야(소설계)에서 온 사람이기에 나름대로 힘있게 이런 기획을 밀어붙일 수 있겠다 싶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이 기획을 냈으면 대번에 뭉개졌을 거다. 남자들만 나오는 얘기야? 연애 이야기는 어디 있는 거야? 이런 식으로. 사실 <레볼루션…>에 대해선 한국을 포함해 수많은 영화화, 드라마화 제안이 있었지만
가네시로 가즈키 [2] -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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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고(Go)>의 원작자로 널리 알려진 재일동포 3세 작가 가네시로 가즈키가 시나리오를 쓴 영화 <플라이, 대디, 플라이>가 지난 7월9일 일본에서 개봉했다. 또 최근 <레볼루션 No.3> <플라이, 대디, 플라이>에 이은 ‘좀비스’ 삼부작 <스피드>를 출간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영화화된 그의 작품이 벌써 <Go> <꽃> <연애소설> 3편에 달한 데서 알 수 있듯 그의 작품은 언제나 ‘영상적’이란 말을 들어왔다. 작품마다 옛날 영화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 가네시로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꿈꿔왔다고 한다. 영화 개봉을 핑계로 지난 7월1일 도쿄의 도에이 영화사에서 가네시로를 만났다. 영화와 문학, 정치가 비슷한 비율로 뒤섞인 인터뷰였지만 그의 희망대로 정치 이야기는 많이 자제한 결과다.
가네시로 가즈키(37)의 이야기는 <Go>에서 출발한다. 가네시로 자신이 가장 닮았다고 꼽는
가네시로 가즈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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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칼에 맞는 걸 상상해 본 적 있어? 목에서 피는 계속 올라오고, 아무리 고통을 참아봐야 소용없지. 이제 곧 죽을 것을 아니까 말이야. 아예 죽으면 좋으련만 죽지도 않아. 넌 그 때 무슨 생각 할 거야?"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야 네가 느끼는 굴욕감이 더 커질 것이야."
이런 살벌하기 짝이 없는 대사들을 빨간 장미를 들고 미소를 머금은 채 날리는 등장인물이라면 분명 악역일 것이다. 더욱이 그러한 피와 살인을 이 세상의 그 어떤 쾌락보다도 귀중하게 여기는 자라면 악역 중에서도 거의 최악에 속하지 않을까.
기타무라 류헤이 감독의 영화 <소녀검객 아즈미 대혈전>에서는 바로 그 '최악의 악당'이 등장한다. 이름하여 모가미 비조마루. 우리나라에는 <밝은 미래> <피와 뼈> 등으로 잘 알려진 젊은 배우 오다기리 조가 연기했다.
상황은 이렇다. 주인공 아즈미와 함께 자객으로 길러진 소년 휴가는 우연히 만난 곡예단의 소녀 야에
<아즈미> 최악의 악역, 비조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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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가 살아 있다고 설정하면 어떨까”
미스터리 심리썰렁물이라는 부제가 붙은 <아파트>는 사람 잡는 아파트에 대한 이야기다. 청년 ‘고혁’은 맞은편 동에서 밤 9시56분만 되면 여러 집의 불이 동시에 꺼지는 현상을 목격한다. 불가사의한 암전현상과 연속적으로 발생한 의문사 사이에 어떤 연관성을 발견한 고혁은, 항상 외로이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이름 모를 여인을 구해내기 위해 죽음의 아파트로 뛰어든다. 2004년 5월19일부터 포털사이트 다음(Daum)에 연재되었던 <아파트>는 화면의 스크롤을 내리며 감상하는 인터넷 만화의 독창적인 재미를 제대로 보여준 작품이다. 새로운 회가 업데이트되는 날이면 다음(Daum)의 서버가 느려질 만큼 많은 독자들이 몰려들었고, 일본에 판권도 두둑하게 팔았으며, ‘공포영화 전문감독’ 안병기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하지만 다양한 캐릭터들의 시점으로 옮겨가며 진행되는 <아파트>의 각색이 쉬울 리가 없다. “지금 시나리오
원작자와 감독이 만났을 때 [5] - <아파트>의 강풀+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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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하기만한 역사는 가짜 같다”
엘리베이터와 달라서 비행기는 종종 완벽한 타인을 향해 말문을 트게 만든다. 1996년 즈음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이재한 감독(<컷 런스 딥> <내 머리 속의 지우개>)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이재한 감독의 우연한 대화 상대는 한국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한국 혈통의 승객이었고, 이민사의 아마추어 연구자였던 그는 감독에게 20세기 초 멕시코에 계약노예로 팔려간 조선인들이 밀림에 세운 이상한 소국 ‘신대한’의 설화를 들려주었다. 이 이야기는 몇해 뒤 이재한 감독과 시나리오 작업을 같이한 김영하 작가의 품에 소설의 씨앗을 심었고, 2003년 여름 장편 <검은 꽃>이 출간됐다. 김영하가 민족과 국가가 초래한 운명적 비극의 대하서사를 썼다는 사실에 그의 오랜 독자 대부분은 약간 놀랐다. 그리고는 그중 대부분은 책장을 덮은 뒤 납득했다.
<검은 꽃>은 지금부터 꼭 100년 전인 1905년 제물포항에서 일포드
원작자와 감독이 만났을 때 [4] - <검은 꽃>의 김영하+이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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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22일부터 일본에서 발매가 시작된 국산 애니메이션 <원더풀 데이즈>가 현지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일본의 AV 전문 사이트인 ‘왓치 임프레스’의 리뷰에 따르면, 한류 붐을 일으키고 있는 드라마나 영화처럼 높은 완성도를 지닌 한국산 대작 애니메이션이라는 평.
특히 미니어처로 제작된 실사 배경에 2D 캐릭터와 3D CG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독특한 영상에 주목하고 있는데, 할리우드 수준을 목표로 하고 있는 한국 영화계의 저력을 느끼게 해준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다만 작품 내용에 관해서는 국내에서의 비판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반전 없이 너무 뻔한 스토리를 다루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DVD에 관해서는 별다른 단점이 없는 고화질 영상이며, 실내 장면에서의 잔향음이 인상적이라고 소개했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판에 특별히 수록된 일본어 더빙에 관한 평가다. <카우보이 비밥>으로 유명한 야마데라 코이치가 주인공 수하 역을, <디지캐럿> 등
일본판 <원더풀 데이즈> DVD 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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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짜는 화투장을 든 사무라이”
<비트> <사랑해> <타짜> <식객>의 창조자 허영만은 1947년생, 일명 해방둥이 세대다. <범죄의 재구성>으로 한국형 사기꾼 영화의 탄생을 알린 최동훈 감독. 그의 아버지도 1947년생이다. <비트> 이후 오랜만에 <타짜(타짜꾼의 준말,노름판에서 속임수를 잘 쓰는 사람)>로 싸이더스와 재회하는 원작자 허영만과 이 작품을 연출할 최 감독은 이날 처음 만났다. <오자병법> 치병편을 보면, 이순신 장군이 자주 되뇌던 “필사즉생, 행생즉사”(必死則生,幸生則死 죽기를 각오하면 살 것이요, 요행히 살려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필사즉생의 ‘각오’, 행생즉사의 ‘방심’은 만화 <타짜>라는 우주를 꿰는 씨줄과 날줄이다. 지리산 두메산골에서 태어났고, 우연히 화투판에 뛰어들어 한순간에 인생의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주인공 곤. 그는 숨은 타짜 평경장을 찾아
원작자와 감독이 만났을 때 [3] - <타짜>의 허영만+최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