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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만났던 감독들 중 몇몇에 대한 인상이 내게는 남아있다. 예컨대, 싱가폴의 신예 로이스톤 탄은 재미있게 해주겠다고 자기 영화에 나오는 토끼 모자를 쓰고 인터뷰 장소에 나와서는 살짝 춤도 췄고, 그렇게 사진도 찍었다. 귀여웠지만, 조금 불쌍하고 철없어 보였다. 타이의 펜엑 라타나루앙(내가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다음으로 좋아하는 타이의 감독)은 잘 배운 양아치처럼 삐딱하게 스스로를 깎아내렸다. 그에게는 뭔지 모를 자학적 경계심이 있어 보였다. 일본 감독들은 대체로 신중하고 나른하다. 하지만, 최양일은 단정적이면서도 거만했다. <피와 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알지만, 이 영화는 기타노 다케시의 마적인 염력을 제외하곤 볼 게 없는 영화다. 고레다 히로카즈와는 어쩌다 오즈 야스지로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그럼 다음 영화를 만들고 나서 다시 만나 오즈에 대해서 토론해 보자면서 끝맺었다. 그때는 내가 다소 무모했다. 영화처럼 기괴할 거라고 여겼던 캐나다의 가이 매딘은
[잊지 못할 게스트] 왕차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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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몽콜 소나쿤은 타이 독립영화 감독들에게는 든든한 ‘왕언니’다. 미국에서 사진과 영화를 공부한 뒤 타이에 돌아와 친구가 만든 영화사 파이어크래커에서 잠시 일을 도와주던 그는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첫 번째 영화 <정오의 신비한 물체>의 프로듀서를 맡게 되면서 “싸구려 상업영화 일색이던” 타이영화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킨다.
타이 인디그룹의 1세대에 속하는 그는 이후 핌피카 토위라의 <하룻밤의 남편>, 지라 말리쿤의 <틴 마인>, 최근에는 펜엑 라타나루앙의 <보이지 않는 물결> 등 인디와 메이저를 오가며 자국 유명 감독들의 영화 제작을 도맡았고, 올해는 <세 친구>라는 영화를 들고 부산에 왔다. 이번엔 프로듀서가 아니라 감독이다. 이미 3편의 장·단편영화를 연출한 그는 유명 섹스심볼인 마미와 그의 여자친구들이 해변을 찾았다가 벌어지는 사건들을 “스타 리얼리티 쇼를 연상시키는” 형식으로 묶어냈다.
두명의 영화동지와 함께 공
<세 친구>의 밍몽콜 소나쿤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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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헌과 츠마부키 사토시가 만났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있을까. 두 사람의 오픈토크가 열리게 되어 있던 파라다이스호텔 야외 가든 인근은, 행사 시작 한 시간 전부터 인산인해였다. 일본과 한국의 취재진 뿐 아니라 양국의 팬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줄을 서서 행사장 입장을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두 사람이 나타났을 때 퍼진 요란한 환호 소리는, 유난히 뜨거운 정오 햇살 아래 앉은 한일 슈퍼스타의 머리 위로 작열하는 햇살을 후광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한국의 츠마부키 사토시 팬들은 목청껏 “사토시! 아이 러브 유! 아이시테루(사랑해)!”라고 외쳤고, 일본에서 온 이병헌 팬들은 분위기를 망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듯 작은 소리로 “병헌씨, 멋져요!”라고 애정을 고백했다. 이날 행사는 한일 양국의 취재진과 팬을 위해 한국어와 일본어로 진행되었다.
서로의 영화에 대한 감상
이병헌/ 가식적이지 않은 순수하고 신선한 느낌이 좋았다.
츠마부키 사토시/ <달콤한 인생>에서 남자답고 쿨
<달콤한 인생> 이병헌과 <봄의 눈> 츠마부키 사토시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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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설쳤나보다. 퉁퉁부은 눈으로 인터뷰룸에 들어온 이강생이 ‘늦어서 죄송하다’는 말을 눈으로만 전한다. 이번으로 도합 8번째 방문. 이 수줍은 청년은 대체 몇번이나 부산에서 인터뷰를 했을까. “한국관객들의 시각이 시작보다 훨씬 높아진 것 같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서는 부산국제영화제의 지난 10년을 지켜본 산증인의 울림이 느껴진다. 올해 그는 신작 <흔들리는 구름>으로 부산을 찾았다. 질펀한 수박 섹스로 시작해 (아마도)영화사상 가장 긴 사정 장면으로 막을 내리는 <흔들리는 구름>은, 언제나처럼 소통불능의 영혼을 위로하는 차이밍량의 영화다. 그리고 차이밍량의 영화에는, 언제나처럼 영화적 동반자이자 페르소나인 이강생이 있다.
-<흔들리는 구름>의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
=극단적인 시나리오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조금 놀란정도?(웃음). 촬영때는 내가 꼭 성행위를 하는 기계가 된 것처럼 느낀적도 있었다. 하지만 완성된
<흔들리는 구름>의 이강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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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글쓴이를 반영하듯, 영화는 감독을 닮는다. <컨벤셔니어즈>와 모라 스티븐즈의 관계도 그렇다. <컨벤셔니어즈>는 공화당원 남자와 민주당을 지지하는 여자가 정치적 입장 차이로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비극적인 멜로드라마이되, 양당 중 어느 한 쪽을 이성적으로든 심정적으로든 지지하지 않는다. 차분한 말투로 신중한 어휘 구사를 노력하는 모라 스티븐즈는 실제로도 사적인 정치적 견해를 밝히기를 꺼려했다. “그런 것은 내 영화에 편견을 심어줄 것 같다. 난 영화를 통해 실제 공화당과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있을 법한 갈등을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컨벤셔니어즈>는 모라 스티븐즈의 장편 데뷔작이다. 그의 친구가 알고 있는, 공화당 전당대회 중 있었던 실제 이야기를 감독이 마음에 품고 있었던 <로미오 줄리엣>류의 멜로구조에 얹어 재구성했다. 지난해 가을, 뉴욕의 공화당 전당대화 장면을 영화 안에 담기 위해 촬영하다 감독을 포함해 일부 스
<컨벤셔니어즈>의 모라 스티븐즈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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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숄의 마지막 날들>은 독일내 반정부단체 ‘백장미단’의 일원이었던 21살의 대학생 소피 숄이 대학 내에 유인물을 유포하고 체포된 뒤 사형되기까지의 6일간을 담담하게 그린 영화. 1968년생인 마르크 로테문트 감독은 “나는 전쟁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세대다. 앞 세대가 정치적인 영화를 만들었다면, 우리는 감성적인 영화를 만든다”고 말한다. 살기 위해 혐의를 부인하던 소피 숄은 계속되는 심문 과정에서 자신의 행동을 인정하고 남아있는 동료를 구하기 위해 전력투구하며, 아버지뻘 되는 나치 장교에게도 당당히 맞선다. 어찌보면 지나치게 영웅적이어서 비현실적으로 여겨질 법한 그녀의 변화는,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율리아 옌치의 연기를 통해 관객에게 설득력있게 다가간다. 실제로 “감독이 하는 일은 배우의 연기가 믿음을 주는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믿을 수 없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고민한 뒤 배우와 함께 이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라는 로테문트 감독에게 있어, 관객의
<소피숄의 마지막 날들> 마르크 로테문트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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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잠이 덜깬듯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장첸이 들어왔다. 개막작 <쓰리 타임즈>의 배우로 부산을 찾아온 그는 1966년과 1911년, 2005년을 살고 있는 세 젊은이를 연기했고, 시대마다 다를 수 밖에 없는 사랑을 조용한 움직임으로 보여주었다.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그리하여 이해할 수 없는 시대까지도. “출연을 결정하고 나서야 제목을 알게 됐는데 바로 마음에 와닿았다. 사람은 자신이 속한 시대에 따라 운명과 처지가 결정된다. 허우샤오시엔 감독은 그 시대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발견한 듯하다” 그렇다면 그에게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언제였을까. 장첸은 섬광처럼 사라지는 보조개를 만들며 웃더니 고등학교 시절이었다고 답했다. 어른이 된 것 같았고, 여자친구가 생겼고, 어느 곳에서도 재미있게 놀 수 있을 듯 했다면서.
그에게 십대의 마지막은 부담도 억압도 없는 ‘최호적시광(最好的時光, <쓰리 타임즈>의 중국어 제목)’이었다. 열네살에 <고령가소년 살인사건
<쓰리 타임즈>의 장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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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독은 의자에 앉아서 정치가처럼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관객들과 접촉하고,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질문들을 그들과 공유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나는 영화를 하나의 매개체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는 단지 화자에만 머물고 싶지는 않다. 나는 사진작업도 오래 해왔는데, 그 둘 모두를 내 삶과 별개로 생각하지 않고있다. 때문에 영화 세계가 변해간다고 해도 거기에는 연관성이 있는 법이다. 가령, <체리향기>는 내가 처음으로 자연을 대상으로 만든 영화다. 그리고 최근 영화 <텐>과 방금 여러분이 본 <길>이란 영화도 그렇다(마스터클래스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요청으로 그가 직접 가져온 <길> DVD를 상영한 후에 시작됐다). 그런 것들은 모두 내 마음에 어느 순간 떠오르는 것들이다.
예컨대, 나는 자동차라는 공간에 매우 익숙함을 느낀다. 자동차는 나의 집이고, 사무실이다. 내게는 그곳이 사적인 장소이자 대상이고, 나만을 위한 공간이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 마스터 클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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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그리너웨이(1942~)는 낯선 아티스트다. 그의 영화미학은 전통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일반적인 미학이 논리적인 이야기 전개와 자연스런 편집에 기초를 두고 있다면, 그리너웨이는 정반대로 간다. 이야기는 비논리적이기 십상이고, 편집도 문법을 자주 위반한다.
그는 미술학교 출신이다. 원래 영화학교에 가려고 했는데, 진학에 실패하는 바람에 미술학교로 방향을 돌렸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미술학교에서의 생활이 그의 영화 미학에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그의 영화는 언뜻 보면, 전부 그림을 보는 듯한 착각을 줄 정도로 탐미적인 취향에 경도돼 있다.
그는 바로 이런 미술 취향으로 데뷔하자마자 주목을 받았다. 1982년 발표한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이 바로 장편 데뷔작인데, 미술학교 출신답게, 화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예술과 권력’ 사이의 관계를 박진감 넘치게 그리고 있다. 영화의 중요한 부분이 모두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작업으로 전개된다. 드로잉을 하는 화가의 손
반전통의 탐미주의자, 피터 그리너웨이의 작품세계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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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7일 오전 9시30분, 뉴커런츠 부문 심사위원 기자회견이 파라다이스호텔 파노라마룸에서 개최되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싱가폴 감독 에릭 쿠, 핀란드 감독 마키 카우리스마키, 칸 영화제 프로그래머 크리스티앙 전과 영화배우 이혜영이 참석했고, 심사위원장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비행기 연착으로 입국이 늦어져 기자회견에 참석하지 못했다. 심사위원단 소개에 이어 30여분간 진행된 기자회견에서는 심사위원들의 심사기준에 대한 질문들이 줄을 이었다. 에릭 쿠 감독은 “개인적으로 어떤 영화가 얼마만큼 나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느냐가 기준”이라고 밝혔고, 마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한 개인으로서 어떻게 영화에 반응하는지가 중요하다. 각각의 심사위원들의 반응을 지켜본 뒤 토론과 합의를 통해 선정할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영화는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명확한 심사기준을 말하는 건 가능하지 않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영화 배우 이혜영에게는 고 이만희 감독에 대한 질문들이 쏟아졌다. 그는 “생전에 이름
이혜영, 뉴커런츠 부문 심사위원 기자회견에서 감사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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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문제가 아니다. 국제영화제에서 영화를 중간에 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관객들이 흥분했습니다. 1996년, 그러니까 부산영화제 첫 해에 중국영화 <조용한 마을>이 상영 도중 자막 사고로 상영을 중단시키며 환불조치를 안내하자 객석이 들썩입니다. 30분뒤 재상영된 극장 안에는 관객이 20여명밖에 남지 않았다죠. 부랴부랴 달려온 당시 집행위 사무국장 오석근 감독은 “영화제를 처음하다보니 예기치 않은 경악스런 일을 많이 겪게 된다”며 “장비 부족으로 필름 상태를 일일이 확인하지 못했다”고 열악한 상황에 대한 이해를 구했습니다.
3회 때는 16mm 장편영화 상영관에서 잇달아 사고가 터졌습니다. <소무> <하우등> <둘 하나 섹스> 등의 영화가 롤을 갈아끼울 때마다 끊겼습니다. 16mm 필름을 온전히 영사하려면 영사기 2대가 필요한데, 두 상영관에 한 대씩만 들어갔기 때문이랍니다. 이 해에 부산영화제는 16mm 영사기를 두 대밖에
[PIFF 타임캡슐] 2. 상영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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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무라 쇼헤이의 1966년작 <인류학입문>은 억압적인 사회를 뛰쳐나간 주인공이 배 위에서 완벽한 합일을 꿈꾸며 이상적인 여성의 인형을 만드는 장면으로 끝을 맺었다. 아마도 자신만의 세계가 이뤄진 그 배가 흘러 들어감직한 곳, 2년 후에 만들어진 <신들의 깊은 욕망>은 바로 그 곳에서 시작이 된다. 이번에 이마무라의 발길이 닿은 그 곳은 ‘세련된’ 도시 세계와는 달리 동물적인 에너지가 살아 숨쉬는 고대적인 세계이다. 여기서 이마무라는 내내 그를 사로잡았던 문제, 즉 진정으로 일본적인 것의 기원과 정수는 어떤 것인가, 라는 문제를 다시 한 번 탐구할 기회를 갖는다.
영화는 일본 최남단에 위치한 섬 쿠라게지마로 우리를 데려간다. 신화적인 기운마저 느끼게 하는 그곳의 후토리 집안 사람들은 마치 일본 땅을 만든 오누이신 이자나기와 이자나미의 현신인 듯이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할아버지와 어머니 사이로부터 태어난 네키치는 누이 우마와 사랑하는 사이이다. 정신 지체상태인
이마무라 쇼헤이의 <신들의 깊은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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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인가 싶었다. 11살된 소년이 말을 꺼내면 금발에 푸른 눈을 한 남자가 맞장구를 쳐주고 동양인 여자가 말을 보탠다. 부산국제영화제 APEC 특별전 상영작 <새장>의 그래함 스트리터 감독과 주연 여배우 탄 켕 후아, 아역 배우 딕슨 탠 등 세 사람이 둘러앉은 자리는 갓 구운 핫케이크 한 접시만 테이블 위에 놓이면 단란한 가족의 티타임이 될 것 같다. <새장>은 싱가폴의 도시 근교를 배경으로 20년간 헤어져 살았던 부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영화는 시각장애인 아들을 둔 여자 알리와 그녀의 아버지 사이에 패인 긴 세월의 상처를 드러내고 다시 보듬어낸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20년간 쌓아둔 말을 아버지 앞에 쏟아내는 장면의 촬영이 가장 힘들었다고 켕은 말한다. 주연 배우에 대해 칭찬을 해달라고 하자, 스트리터 감독은 켕을 향해 “돈부터 내놔요”라며 웃는다.
오랜 친구마냥 사이좋은 감독과 배우 사이에 앉아, 딕슨은 쉴새없이 끼어들기를 하고 있었다. 딕슨은
<새장>의 그래함 스트리터 감독과 배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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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파노라마 부문에 초청된 오석근 감독의 <연애>는 17년차 배우 전미선의 첫 주연작이다. 캐스팅 제의를 받고서 “내가 1시간 40분을 끌고 갈 수 있을까” 싶어 처음엔 망설였다는 그녀는 <연애>에서 생활고에 내몰려 몸을 파는 30대 주부 어진으로 나온다. 어진은 현실의 벼랑 끝에서 마지막 연애의 상상을 붙잡는 여인, 그러나 그 파국의 상처를 온몸으로 다시 받아내야 하는 여인이기도 하다. “부족한 것 투성이다. 일찍 연기를 시작했지만, 따지고 보면 출연작이 많지 않다”는 그녀의 겸손이 실은 거짓말임은, 한 인물의 마음 속 결을 섬세하게 그려낸 <연애>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캐스팅 제의를 받았을 때 망설였다고 들었다.
=<살인의 추억> 끝나고 나서 차승재 대표(싸이더스 FNH)가 나에게 어울리는 역할이 있다면서 시나리오를 줬다. 그런데 내가 과연 처음부터 끌고 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때 차 대표
<연애>의 전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