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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을 읽으면 목욕탕이 생각난다. 책 속에는 냉탕처럼 정신을 버쩍 들게하는 냉소와 조롱, 온탕처럼 후끈한 삶에 대한 정열과 우정이 공존한다. 가네시로 가즈키는 아웃사이더를 다루지만 그의 주인공들은 쉬이 고개를 숙이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그는 여학교 축제를 습격하듯이 경쾌한 문체와 기발한 농담으로 일본사회에 상존하는 차별과 소외라는 무거운 주제를 꿰뚫는다. 가네시로 가즈키가 일본 대중문화의 새 얼굴로 주목받은 또 다른 이유는 영화, 드라마화에 적합한 화법과 필치 때문이다. 그가 내놓은 다섯권의 책 중 네권이 영화와 드라마로 영상화됐다. 현재 충무로에 걸려 있는 <플라이 대디>의 원작자인 그가 이번 인터뷰를 통해 답변한 자신의 집필방식은 빈번한 영상화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을 다소 해소해줄 듯하다. 폭주하는 마이너리티의 대변자, 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세계로 당신을 초대한다.
재일동포로서의 삶은 힘들다. 코리안 재패니즈라고 불러도, 재일 코리안이라고 불러
가네시로 가즈키 소설의 매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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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할 때 움직이세요. 자자, 갑니다. 하나, 둘~!” 가슴이 방망이질친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암시를 걸 듯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긴다. 다리라도 엉켜서 넘어지면 어떡하지? 숨통을 죄듯 따가운 햇볕이 온몸을 찔러댄다. 제대로 하고는 있는 걸까? 뜨끈뜨끈 달궈진 등줄기에 땀 한 방울이 주르륵 미끄러져 내린다. “컷~!!!” 생애 첫 영화 출연에 마침표를 찍는 시원한 외침. 작품명은 <바람 피기 좋은 날>. 역할은 행인3 혹은 행인4, 아니 행인7?
‘기자의 보조출연 체험’이라는 미션이 떨어진 것은 3주 전. 벼룩시장을 비롯해 갖은 구인구직 사이트를 전전했으나 건진 것이라고는 ‘야시시한 분위기의 여자’, ‘글래머 여성’ 등 엄두조차 안 나는 몇개의 채용공고뿐. 결국 보조출연자를 공급하는 업체를 직접 통하는 식으로 결론이 났다. 몇몇 업체에 끼어들 만한 자리가 생기는 대로 연락 달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다시 대기하기를 2주일여. 기다림 끝에 행인이라는 역할이 떨어
보조출연자 24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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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시간 촬영에, 햄버거랑 콜라 한끼만 준 곳도 있대
잠깐 웃고 떠드는 사이 리허설이 시작됐다. 팀장이 대강 얼굴을 확인하더니 연출부가 알려준 배치대로 인력을 나누기 시작했다. 아침 촬영은 주막집 손님으로, 평상이며 멍석에 앉아 국밥 먹는 한컷이 전부인 모양이다. 진짜 밥을 먹는 건 아니지만 무거운 장창을 쥐고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는 전쟁장면에 비하면 A급이라고 할 만한 편한 촬영이다. 물에 뜨기는 하지만 수영이 서툰 K는 병졸로 분장하고 배를 탔더니 부두는 한없이 멀어지고 아무리 둘러봐도 안전요원을 찾을 수 없는 현장에 나가본 다음 그 드라마는 접기로 했었다. 그래도 나중에 듣기로는 불화살 떨어지는 무서운 장면보다는 나았다고 했다. 다행히 부상자는 나오지 않았다지만 K의 동료 한명은 권총 맞는 장면을 연기하다가 정말 화상을 입은 적도 있었다. 불꽃을 뿜는 폭죽이 가슴에서 터지면 그 반대쪽으로 쓰러져야 하는데 그런 걸 해본 적이 없어 엉겁결에 폭죽을 깔고 쓰러졌던 것이다. 다행히
보조출연자 24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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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너무 많은 정보가 찰나에 지나가기 때문에 같은 영화를 다시 보아도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는 매체다. 놓치고 지나갔던 누군가의 표정, 처음엔 보지 못했던 어느 구석의 그림자, 자신만의 존재감을 지닌 소품 하나. 그러나 영화를 몇번이고 다시 보면서도 배경처럼 흩어진 보조출연자들까지 눈여겨보기는 힘든 일이다.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을 그저 스치듯이 영화 속의 보조출연자도 그처럼 흘려보내곤 한다. 그러나 그들이 없다면 영화는 세상 최후의 날에 홀로 떨어진 쓸쓸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고 말 것이다. 멜로영화의 연인이 정담을 나누는 카페에서, 형사영화의 추격전이 벌어지는 거리에서, 그들은 어떻게 영화를 찍고 있었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몇몇 영화의 현장을 찾아 ‘보조출연자’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던 그들 한명 한명을 만났다.
새벽까지 잘 버티면, 9만원은 들어오려나
어느 4년차 보조출연자 K의 하루
새벽 여섯시로 맞추어둔 자명종이 “하나, 둘, 셋, 일어나세요!”라며 금
보조출연자 24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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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5.19/ 초고를 읽은 차승재 대표가 말했다. “돈 냄새가 나는 시나리오가 있고 기분이 좋아지는 시나리오가 있는데, 이 작품은 후자다. 기분 좋게, 한번 잘해보자. 노력하면 200만 못하겠냐.” 이런 말을 해주는 제작자라니, 감동이다. 그의 구두에 불광이라도 내주고 싶다.(이해영)
2005.8.11/ 역시 관건은 동구였다. 키 180cm 이상의 거대한 물살의 소유자. 우락부락한 외모이면서 어딘지 귀여움을 살짝 감추고 있을 것. 무엇보다 중요한 건 섬세한 목소리. 게다가 춤과 노래도 수준급인, 고등학생을 연기할 수 있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나이 어린 배우. 음, 첫 데뷔는 아무래도 애니메이션으로 해야 하는 게 아닐까….(이해준)
2005.10.4/ 아무 계획없이 보러간 <웰컴 투 동막골>에서 류덕환을 발견하다. 무엇보다 이 친구의 무표정이 좋다. 그저 가만히 있는 얼굴에, 이야기가 있다. 그 속에, ‘진짜’가 있다. 간단한 오디션을 치르고 나니 더욱 확신이
발견! <천하장사 마돈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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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처럼 아버지를 한번 던져봤으면 했다”
-여고생 씨름부라는 소재에서 출발했다.
이해영=2003년 늦봄 아니면 초여름이었을 거다. 이만한 바퀴벌레가 날아다니는 월세방에서 오후 3시쯤에 아침을 먹다가 TV에서 여고생 씨름부 이야길 봤다.
이해준=재밌겠다면서 같이 노가리를 깠는데 여고생보다는 여자가 되고 싶은 소년이면 어떨까 싶었고 곧바로 1시간 정도 시놉시스를 썼다. 천하장사라고 대강 이름을 붙여놓고 썼던 시놉시스가 지금 영화의 얼개가 됐다.
-연출에 욕심을 낼 만큼 이야기가 매력적이었나.
이해준=좋은 이야기는 무엇보다 한궤로 짜맞춰지는 느낌이 있는데, <천하장사 마돈나>가 그랬다. 전엔 기획을 받거나 누가 쓴 걸 각색해야 해서 그런 경험을 해볼 수도 없었고.
이해영=우리 오리지널 아이템으로 영화화된 건 <안녕! 유에프오> 하나밖에 없다. 나머지는 습작이거나 없어졌으니까. <천하장사 마돈나>는 첫눈에도 뭔가 메이킹의 가능성이 보이는
발견! <천하장사 마돈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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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31일 개봉하는 <천하장사 마돈나>는 시나리오 작가 출신 이해영, 이해준의 감독 데뷔작이다. <신라의 달밤> <품행제로> <아라한 장풍대작전> 등에 녹아 있던 감성과 재기는 본인들이 직접 연출한 <천하장사 마돈나>에서 극대화해 있다. “단지 여자가 되고 싶을 뿐인” 뚱보 소년 오동구가 씨름을 통해 꿈을 이룬다는 독특한 설정 때문만은 아니다. 그럼 뭣 때문에? <천하장사 마돈나> 영화평과 이해영, 이해준 감독 인터뷰, 그리고 제작기를 모아서 내놓는다.
엉뚱한 비유 같지만, <천하장사 마돈나>는 <미션 임파서블>과 비슷한 시나리오 작법을 구사한다. 남자 고교생 동구(류덕환)의 미션은 여자, 그것도 관능적인 개성이 흘러넘치는 마돈나처럼 되는 것이다. 이 미션이 만만치 않은 또 하나의 설정, 동구는 자신의 발이 하이힐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는 비대한 몸집의 소유자다. 소년
발견! <천하장사 마돈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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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가 품을 수 없는 단편의 매력
까다로운 롱테이크를 선택한 것이 독특한 비주얼을 선호하는 촬영감독 출신 감독의 도전이라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인 라이브즈>는 롱테이크의 대단함을 관객에게 웅변하지 않는다. 별도의 설명이 없다면 이 영화가 원신 원컷으로 이루어졌음을 알아차리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또한 그의 영화 속 클라이맥스는 지극히 담백한 비주얼을 자랑한다. <그녀를…>의 모든 주인공은 점성술사, 부랑자, 가르치는 아이 등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 말에 치부를 가격당한다. 무안하고 슬프지만 진심을 드러낼 수 없는 맨 얼굴을, 가르시아의 카메라는 클로즈업으로 응시했다. <나인 라이브즈>는 한발 더 나아간다. 유방절제 수술을 앞둔 긴장감, 묵묵히 곁을 지키는 남편을 향한 이유없는 애증에 시달리는 중년 여성 카밀의 드라마틱한 감정변화를 정밀묘사한 단편 <카밀>. 시종일관 짜증으로 일관하던 그녀의 표정은 마취약에 취해
<나인 라이브즈>의 로드리고 가르시아 감독의 영화세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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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영화를 꿈꾸는 아시아의 젊은 영화학도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지난해에 이어 부산영화제와 한국영화아카데미, 동서대학교가 공동주최하는 영화교육 프로젝트, 아시아 영화아카데미(AFA)가 최종선발자를 발표했다. 20개국 143명의 지원자들 중에서 선발된 19개국 24명의 면면을 살펴보면 참가자들 간의 실력편차가 컸던 지난해와 달리 모두들 일정 수준 이상을 겸비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단편 영화 한 편 이상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으로 지원 자격을 제한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올해 참가자들이 지닌 다양한 경력은 지난해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는다. AFA는 법대 졸업반 학생인 아프가니스탄의 로야 사다트(여, 25세), 영문학 석사 출신인 인도의 탕겔라 마하비(여, 29), 경영학도 출신인 말레이시아의 찬푸이 총(남, 34세), 연극인 출신인 필리핀의 크리스토퍼 고줌(남, 30세) 등은 독특한 배경과 함께 자신의 영화가 각종 세계 영화제에서 상영 및 수상한 경력을 지
AFA2006 참가자 명단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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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가는 햇살 속, 한적한 교외 묘지에 두 모녀가 찾아든다. 대단할 것 없는 이들의 소풍에는 왠지 모를 슬픔이 감돈다. 그 슬픔의 정체는 마지막에 밝혀진다. 모든 것을 한순간에 설명하는 반전 아닌 반전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산드라, 다이애나, 홀리, 소니아….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그녀들의 이름 아홉개를 제목 삼아 아홉개의 짧은 이야기를 만들고 이를 통해 삶과 세상을 말하는 영화 <나인 라이브즈>의 마지막 단편 <매기>의 내용이다. 일찍이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을 통해 차분히 인물을 응시하는 섬세함으로 나른한 일상을 마법처럼 빛나게 만들었던 로드리고 가르시아는 이 영화에서 자신의 화법을 한층 밀어붙였다. 촬영감독에서 시나리오작가, 영화감독에서 TV 연출자, 그리고 다시 작가 겸 감독으로 수시로 정체성을 바꾸어온 그는, 인간을 우주로 바라보는 진심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그를 보기만 해서는 알 수 없을, 그의 삶과 영화를 전한다. 그
<나인 라이브즈>의 로드리고 가르시아 감독의 영화세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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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가끔 학교나 길에서 믿음 없이는 건널 수 없는 어떤 절벽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들이 건네는 작은 수첩 크기의 그 팸플릿에는 우리의 인생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그림이 있는데, 맨 끝부분엔 인간의 힘으로 절대 건널 수 없는 절벽이 있다. 인간이 그것을 건너려면 자만심을 버리고 신(그들이 말하는 신은 기독교적 유일신이다)에게 존재를 의탁하며 믿음을 가져야만 한다. 나는 <유레루>에서 타케루와 미노루 형제가 건넜던 그 낡고 흔들리는 다리를 보며 그 그림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믿음을 통해서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되거나, 보지 않은 것을 보게 된다. 반대로 자신이 한 행동을 부정하거나, 본 것이 사실임을 시인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 영화 안에서 ‘사실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반복적으로 제기되지만 실제로 감독은 사실에는 관심이 없다. 중요한 것은 사실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태도이며, 무엇에 의해 사실이 인정되거나 거부되는가의 문제이다
인간의 기억과 믿음은 진실일까? <유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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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리버>는 무엇보다 먼저 <천국보다 낯선>과 <파리, 텍사스>를 떠올리게 하는 로드무비이다. 후나하시 아쓰시 감독은 짐 자무시 감독을 가장 좋아한다고 공언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연상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게다가 짐 자무시는 빔 벤더스가 <사물의 상태>를 찍고 남은 필름 일부를 얻어 <천국보다 낯선>을 찍었으니 이러한 기억의 연쇄 고리는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후나하시는 후나하시이고 자무시는 자무시이다. 지금부터는 자무시도 벤더스도 잠시 제쳐두고 후나하시 아쓰시의 <빅 리버>를 자유롭게 유영하고자 한다.
균질적 공간 vs 이질적 공간
유클리트 기하학의 공간은 절대적인 공준에 의해 동일하고 불변하는 공간을 상정하지만 현대의 물리학은 이러한 전통적인 공간에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관점을 제기한다. 관점들의 수만큼 서로 다른 공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비단 과학적 논증에 의해 밝혀지는 것만이 아니라 현대 시각
모호함의 공간 시학, <빅 리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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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잔혹한 얼굴
작가 밀란 쿤테라는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에 대한 책 <화가의 잔인한 손>의 서문을 썼다.
소멸해가는 주체의 형상이라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 앞에서 밀란 쿤테라는 우리가 연인을 연인으로 알아보게 만드는 기호적 최소 단위에 의문을 던진다. 그 의문을 <시간>이라는 영화에 맞춘 질문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연인을 연인으로 알아보게 되는 최소 단위는 무엇일까? 얼굴이라면 구체적으로 얼굴의 어떤 선, 주름 아니면 윤곽! 입술의 색, 눈빛이나 위를 향한 아니면 아래를 향한 눈 꼬리…. 얼굴이 아니라면 함께 지낸 시간만큼 누적된 공유된 기억. 몸이나 냄새, 소리? 손을 잡았을 때의 느낌은. 이 연쇄적 질문을 시작할 수 있는 최소 단위로 <시간>은 얼굴을 설정한다. 그러나 <시간>의 서사의 화살은 예컨대 성형으로 얼굴이 바뀌었을 때 나는 그 변화의 경과를 알고 있지만, 그 경과를 알지 못하는 내 연인은 나를 어떻게
세희의 의식이 빚어낸 판타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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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목표는 영화였다.” <예의없는 것들>의 윤지혜는 말했다.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눈매, 오똑한 콧날은 차갑고 이국적인 느낌. 말투나 태도는 아주 털털하다. 고등학교 때 <어린 왕자>로 처음 무대에 오르고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했지만 그의 눈은 언제나 영화를 향했다. 윤지혜는 “영화연기를 배울 곳이 따로 없고, 연기를 제대로 배우는 공간은 무대라 생각해서 연극과에 갔다”고 한다. <델리카트슨 사람들> <성스러운 피>에 열광했던 대학생 윤지혜가 <여고괴담>에 탑승한 과정은 흥미롭다. <여고괴담>의 박기형 감독과 오기민 PD는 “오디션 없이 사진 한장만으로 윤지혜의 출연을 결정”한다. 본인도 “이미지로만 캐스팅됐다. 갑자기 불려간 탓에 연기력이 있을 리 없었다. 째려보며 분위기만 잡는 게 전부”였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렇게 강렬한 인상을 남길지 상상도 못했던” <여고괴담>의 정숙 역은 그녀를 단박에 호
고양이과 배우의 가능한 변화들, <예의없는 것들>의 윤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