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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교환학생으로 서울에 온 재일동포 3세 여성과 강의를 같이 들은 적이 있다. 그때 그녀는 한국어를 잘하지 못했는데, 며칠 전 이화여대 아시아여성학센터가 주최한 ‘한일여성지식인교류프로그램’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한국어로 논문을 발표할 정도로 한국말이 유창했다. 그런 그녀가 내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다가왔다. 재외동포가 한국에 왔을 때 “우리말도 못하면서…”식으로 무시, 비난당하는 경우가 많아서 나도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은 아닐까 싶어 내심 겁이 났다. 그녀에 의하면 내가 당시 한국어로 말하다가 중간에 “아리가토(고마워)”라는 일본어를 사용했는데, 그 말이 자기가 유일하게 알아들은 단어였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때는 저를 너무 미워했어요”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르면서도’ 그녀에게 힘을 줄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 언어(생각)가 없으면 상투적으로 말하게 된다. “저도 영어를 못 알아들어 비참한 적이 많은걸요”, “꼭 한국어를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2개 ‘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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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TV드라마 <고스트 앤 크라임>의 주인공 알리슨은 죽은 이들과 대화하고, 영혼을 읽어내는 특수한 능력으로 범죄 수사의 자문 역할을 한다. 꿈을 통해 피해자의 메시지를 수신받곤 하는 그녀는 종종 그들의 위치에서 사건을 체험한다. 단지 사태의 전말을 파악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고통과 두려움, 아픔 전부를 자신의 것인 양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고스트 앤 크라임>에는 알리슨 이상으로 비범한 인물이 있다. 바로 남편으로 등장하는 조 드부아다. 매일같이 새벽 3시에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는 아내에게 “잠 좀 자자” 짜증을 부릴 법도 하건만, 그가 건네는 첫마디는 언제나 “무슨 일이야? 괜찮아?”다. 자전거 헬멧을 쓴 채 먹고, 자고, 학교를 가는 둘째딸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속이 타오를지언정 강제로 헬맷을 벗기려 하지 않는다. 악몽에 시달리는 아내의 고통과 새 헬멧을 향한 딸의 귀여운 애착을 헤아리는 그는 어떤 초자연적 능력도 갖고 있지 않지만, 상대방의 마음에
[오픈칼럼] 역지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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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타임즈>의 원제는 ‘최호적시광’, 즉 최고의 순간이다. 허우샤오시엔은 1966년의 허름한 당구장과 1911년의 고급 유곽, 2005년의 테크노바를 오가며 세 가지의 연애를 통해 대만의 역사를 성찰했다. 그 세 가지 색 사랑의 주인공의 이름은 모두 ‘첸’. 장첸은 1966년의 첸처럼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당구를 쳤고, 2005년의 첸처럼 로모카메라로 장난을 치곤 한다. 2005년의 첸이 자신의 집 한쪽 벽을 장식한 사진은 평소에 장첸이 찍었던 사진을 그대로 활용했다. 또한 첫 번째 에피소드의 배경이 된 60년대는 그가 16년 전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통해 이미 ‘경험’했다. 소년 장첸은 에드워드 양의 긴 작업시간 동안, 실제 그 시절을 회상하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60년대를 느꼈다.
“가장 힘든 에피소드는 청 말기를 배경으로 지식인 남자와 고급 창녀의 사랑을 다룬 두 번째 것이었다. 낯선 시대이기도 했고, 너무 위대한 사랑이라 나 같은 사람
이 남자의 最好的時光, <쓰리 타임즈> <숨> 배우 장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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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6일부터 16일까지 시네마테크 부산서
“당신이 신선한 공기를 원한다면 여기에서는 찾지 말아요.” 존 휴스턴의 <아스팔트 정글>(1950)에서 변호사 에머리히가 자기 부인에게 하는 이 유명한 대사는 그 자체로 필름 누아르의 ‘공기’를 간명하게 일러준다. 불안, 부패, 타락, 욕망의 기운이 짙게 깔려 있는 곳이 그 영화들의 세계였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1940년대와 1950년대의 필름 누아르가 바로 그런 흐릿한 공기 속에서 혹은 그 덕택에 시선과 형식 면에서 이전까지의 할리우드산 영화들로부터 멀리 나아갈 수 있었다는 점이다. 2월6일부터 16일까지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열리는 ‘필름 누아르 걸작선’은 ‘불안의 향취’ 가득한 필름 누아르의 매혹적인 세계로 안내하는 자리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선 필름 누아르의 원형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제 더이상 이야기할 거리가 남았을까 싶을 정도로 너무나도 유명한 영화사의 고전 <시민 케인>(Citizen Kane,
불안의 매혹에 취하다, 필름 누아르 걸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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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1월30일
장소 서울극장
이 영화
80년대 헤비급 챔피언으로 이름을 날렸던 록키는 은퇴 후 동네에서 조그만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손님들은 그의 흥미진진한 과거사를 들으며 즐거워하고, 아들 로버트는 자기가 퇴물 복서 록키의 아들이란 꼬리표가 싫다. 아내 잃고 아들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외롭고 소박하게 살던 록키는 TV에서 젊은 복서 메이슨 딕슨과 자신의 가상 경기를 만들어 보여주는 광경을 본다. 이것이 큰 돈이 될 거라 생각한 딕슨 쪽 프로모터가 록키를 찾아와 친선경기를 제안하고 록키는 이를 받아들인다.
100자평
<록키 발보아>는 지극히 예상 가능하고 당연한 결과로 흐르는 영화다. 마치 실존인물 같은 착각도 간혹 일으키는 복서 캐릭터 록키의 관점에서 봐도 그렇고, ‘록키’ 외에 아무것도 되지 못했던 할리우드 배우 실베스터 스탤론의 관점에서 봐도 그렇다. 스탤론은 현실이 녹록치 않음을 배운 환갑의 남자다. 동시에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있음을 믿고 사는
실베스타 스탤론의 귀환. <록키 발보아> 첫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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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에는 비영어권 영화로는 드물게 감독의 음성해설과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훌륭해서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만들기에 대한 많은 궁금증이 술술 풀려나간다. 그렇지만 ‘왜 항상 붉은색이 잔뜩 나올까?’ 같은 식상한 질문은 묻어두자. 기자들이 왜 그런 질문을 계속하는지 모르겠다고 감독이 먼저 말해버리니까 말이다. 한때 섹스와 스릴러를 작업의 한축으로 삼았으나 여성멜로드라마의 대가로 변신한 지금, 그는 음성해설 내내 여성에 대한 애정을 늘어놓기에 바쁘다. 알모도바르는 바깥세상 남자들과 분리된 채 가사를 돌보는 여자들 사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한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성인 여자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던 그에게 남자들과의 기억이 자리할 곳이 없음은 당연했고, 그때의 행복하고 즐거운 추억은 이후 알모도바르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는 걸 우린 듣게 된다. 그가 자랐던 라만차의 가부장적인 전통과 엄숙하고 조용한 거리 풍경에 대해 그는 자주 언급하는데,
[서플먼트] 강인한 여성들에 대한 알모도바르의 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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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정혜>를 보다 ‘그녀의 아픔을 당신이 어떻게 알아?’라고 묻고 싶었다. 여성의 내밀한 트라우마에 다가서려는 남자가 왠지 괘씸하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이후 이윤기는 여성드라마 작업을 계속해왔고, 이쯤에서 무례에 대한 용서를 빌어야겠다. 비록 그의 영화가 여성에 대한 성찰에까진 이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대상으로 욕망되지 않는 <여자, 정혜>의 정혜와 <러브토크>의 써니와 영신 그리고 <아주 특별한 손님>의 보경은 한국영화에서 분명 낯선 여자의 이름이며, 아마도 이윤기는 여성의 포르노그래피를 시도하지 않는 한국의 유일한 상업영화 감독일 것이다. <아주…>는 ‘가짜 부녀의 하룻밤 상봉기’에서 ‘잃었던 자아를 되찾는 여자의 이야기’로 바뀌는 영화다. 타인의 양말을 신어봤다가 결국엔 자기 양말 안으로 발을 넣는 것처럼, 남의 이름을 돌려준 뒤 마침내 자기의 이름을 말하는 것처럼, 두개로 나뉜 혹은 타자가 설정한 정체성으로부터 꼭 숨겨
자기 마음속으로 다가가는 걸음을 따라, <아주 특별한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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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은 올바른 것일까? 무쓸모 의심은 무쓸모 행동을 낳았다. 몇해 전 누군가가 “뉴욕에서는 ‘호모’라는 말이 쿨한 말이 됐대”라고 말하자, 나의 언어생활은 망가지기 시작했다. 성소수자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가 “호모”라는 말을 쓰기가 다반사. 처음엔 이랬다. 한국사회의 언어생활이 그래도 교정돼서 상식이 있는 사람과 매체라면, 더이상 ‘호모’라든가 ‘동성연애자’라는 말을 쓰지 않게 되자(아직도 쓰는 용감한 분들도 있다), 괜히 반감이 일었다. 이건 너무 쉽잖아, 말이 바뀌면 뭐하나 진심은 바뀌지 않았는데. 이렇게 ‘게이’라는 말에 묻은 겉치레 시민적 상식에 짜증이 났었다. 정치적 올바름으로 포장했지만 진심은 여전히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혐의를 품었다. 그러니까 때이른 언어의 허무주의에 빠졌다고 포장하자. 정치적으로 포장을 하자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으면서 올바른 체하는 자신에 대한 조롱도 없지는 않았다고 해야겠다. 물론 남들과 같아졌다는 짜증이 2할, 쿨하다는
[이창]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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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1월28일치 일간신문에는 제7회 동계올림픽 출전단에 대한 기사가 일제히 떴다. 이탈리아 코르티나담페초에서 열린 이 대회에는 36개국에서 947명의 선수들이 참가했다. 한국은 전란 통에 전 대회에 불참한 터. 그래선지 임원 3명, 선수 4명, 모두 합해서 고작 7명인 단출한 선수단이었지만, 감격과 관심은 예상보다 높았다. 언론은 “파란 빤-쓰에 황갈색 코―트”를 휘날리며 보무 당당하게 입장하는 한국선수단이 현지 관중에게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고 썼다. 하지만 할리우드에 입성하게 된 25명의 고아들에게 쏟아진 스포트라이트에는 비할 바가 못 됐다. 해맑게 웃고 있는 고아들의 표정과 한 미군의 얼굴을 합성한 이 사진은 “국경을 초월한 인류애의 아름다운 결정(結晶)”이라 불린 사연과 함께 같은 날 각 신문의 톱을 모조리 차지했다.
주인공은 제주도 한국보육원에 있는 아이들과 한국전쟁 당시 이들을 수송기를 통해 피신시켰던 딘 E. 헤스 대령이었다. 헤스 대령은 한국전쟁 당시 미
[한국영화 후면비사] 기브 미 초콜렛의 씁쓸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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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영화를 ‘즐감’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대로 보면서 웃었다 울었다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언젠가부터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각성이 스크린과 관객 사이에 필터처럼 끼워지더니 이제는 그 ‘정치적 올바름’의 상투성이나 위선까지 감식함으로써 불경하기 짝이 없는 영화의 ‘전복성’을 끄집어내 열광할 수 있어야 진정 수준있는 관객으로 거듭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건 타르코프스키 영화를 보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것만큼이나 난이도가 높은 작업이다.
그래서 내가 <보랏: 카자흐스탄 킹카의 미국 문화 빨아들이기>를 보고 곤혹스러웠냐 하면 그런 건 아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이거 참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내 말에 “선배가 제일 많이 웃던데요”라고 옆의 후배가 대꾸했으니 피해갈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이 영화의 전투적인 풍자정신과 전복적 성향에 환호했다고 둘러댈 만큼 내가 ‘위선적’인 건 아니다. ‘정말 그렇게 많이 웃었나, 내 웃음소리가
[투덜군 투덜양] 열받는 걸 열받는다 하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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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랏: 카자흐스탄 킹카의 미국 문화 빨아들이기>는 미국에서 흥행에 이어 평단의 극찬을 받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정치적으로 불공정해짐으로써 오히려 정치적으로 공정해지는 종류의 영화’(<씨네21> 587호 55쪽)라는 호평을 받고 있다. 흔히 <보랏…>의 조롱이 소수자(유대인, 동성애자, 여성, 제3세계인)를 경유하여 궁극적으로는 미국 중심 사회를 향하고 있다는 이유로 호평을 내리며, 소수의 평자들이 미국 중심 사회를 비판한다는 명목으로 일어나는 소수자에 대한 조롱을 불편해하며 ‘양날의 칼’이자 ‘무차별적인 방식의 조롱’이라며 비판을 덧붙이는 추세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보랏…>의 현실정치적 맥락은 그보다 훨씬 심오(?)하다. 조롱은 (무차별적이 아니라) 대상에 따라 차별적으로 이루어지며, 온갖 비하발언 속에서 오직 유대인만이 ‘고상한 피해자’로 영광스럽게 부활한다. 결국 <보랏…>의 정치성은 놀랍게도 ‘유대주의’이다. 이는
[영화읽기] <보랏..> 1세계인의 오만과 무지에 치가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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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은 언제나 공부를 하는 곳이었다. 시험을 앞둔 수험생과 취업 준비생들은 새벽같이 열람실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치러왔다. 참고서가 아닌 책을 보기 위해 도서관에 가는 것이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지는 주객전도의 상황. ‘공부방’이 아닌 도서관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규모는 작지만, 특별한 다섯곳의 도서관을 찾아갔다. 미술 작품을 감상하고, 도자기를 굽고, 공원을 산책하며, 만화책에 파묻힐 수 있는 곳. 하나의 문화 공간으로 도약 중인 신나는 도서관, 즐거운 도서관의 세계로 들어가보자.
책 테마파크
책을 들고, 미술품 한번 보고, 숲 향기 한번 마시고
이용시간: 10:00~18:00(월요일, 법정 공휴일 휴관)
찾아가는 길: 지하철 분당선 서현역에서 내려 119, 1500-2, 1005-5, 3, 22, 17, 3-1번 버스 이용
이용문의: 031-708-3588, www.snart.or.kr
겨울의 공원은 소슬하다. 잎을 떨군 나무들, 차갑게 굳어진 흙바닥은 가슴속
책 읽는 즐거움은 기본, 문화 체험까지 즐길 수 있는 도서관 다섯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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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마이클(애덤 샌들러)은 일중독자다. 그는 현재를 희생해야만 미래의 안정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일은 거절하지 못하고, 그 일에 대한 스트레스는 패스트푸드로 달랜다. 성격은 점점 포악해지고 가족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횟수는 늘어간다. 그런 그에게 일상을 컨트롤할 수 있는 ‘만능 리모컨’이 생긴다. 말 그대로 클릭 한번만 하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리모컨. 그러나 쾌감도 잠시일 뿐, 반환 불가능한 이 리모컨은 마이클의 인생을 겉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이끌고 만다.
소음으로부터 차단되고 싶다면 볼륨 키를 누르고, 과거의 어떤 추억을 다시 보고 싶다면 되감기를 누르고, 현재의 시간을 건너뛰고 싶다면 빨리감기나 스킵 버튼을 누르면 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경험하고 싶은 것만 경험하는 방식으로 인생 메뉴를 설정하기. 마이클은 이러한 방식으로 인생의 모든 지루한 과정들을 인내하고 견뎌내지 않고도 승
<클릭> 가장 할리우드적인 드라마 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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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밀림에서 종전을 맞은 겐타로(하기와라 마사토)는 군악대 선배였던 조(마쓰오카 슌스케) 등과 함께 밴드 럭키 스트라이커를 만들어 미군 클럽에서 재즈를 연주한다. 그와 동료들에게 재즈는 전쟁을 잊고 삶을 견디도록 해주는 동력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에 동생을 잃은 미군 러셀은 미국 음악을 연주하는 겐타로를 경멸하며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어온다. 러셀은 겐타로가 분노하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뛰어난 색소폰 주자이기도 하다.
재즈영화로 착각하기 쉬운 <클럽 진주군>은 황폐하면서도 떠들썩했던 전후 도쿄의 스케치에 가까운 영화다. 발붙일 데가 없는 참전용사와 지하도를 누비는 부랑아, 미군한테 몸을 팔며 언젠가 바를 열겠다는 꿈을 꾸는 호스티스, 밤을 새우며 등사기를 미는 사회주의자 그룹, 엉성한 영어 간판. <클럽 진주군>은 그처럼 1947년 즈음 도쿄에서 보았을 법한 인물과 사건들을 느슨하게 지나쳐가곤 한다. 그 때문에 <클럽 진주군>
<클럽 진주군> 한순간 마음을 건드리는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