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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아 감독의 <두번째 사랑>에서 만나는 불륜은 격정적이며 아름답다. 그것은 영화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이 엇나가지 않고 자기 몫을 톡톡히 해내는데서 비롯된다. 복잡한 인물의 심리적 상태를 세심하게 이끌어낸 감독의 연출과 유려한 촬영, 결정적 감정의 순간을 그대로 피아노 선율에 담아낸 마이클 니만의 음악, 그리고 외도를 하면서 남편에 대한 죄책감과 새로운 사랑에 눈을 떠가는 소피 역의 베라 파미가의 눈부신 열연이 긴 여운의 그림자를 남긴다. 불륜 영화의 품격이 있다면 딱 요런 영화가 아니겠는가.
김종철/ 익스트림무비 편집장(http://extmovie.com)
[전문가 100자평] <두 번째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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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7일부터 대학로에서 공연되고 있는 양동근 연출의 <관객모독>이 홍대에도 둥지를 마련했다. <관객모독>은 작가 페터 한트케가 쓴 작품을 지난 1978년 연출가 기국서가 초연해 한국에 소개한 작품이다. 기국서의 동생인 배우 기주봉을 비롯해 송승환, 오광록 등이 출연했으며 양동근은 지난 2005년 공연에 참여해 인연을 맺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배우들이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전통적인 연극에 대한 비판과 관객을 조롱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 <관객모독>은 같은 말을 반복하거나, 돌림노래를 부르듯이 대사를 이어가고 의도적으로 띄어읽기를 교란시키기도 한다. 또한 극중극을 삼입해 상업적인 연극이 배우들을 이용하려는 모습을 드러내며 극의 마지막에는 관객을 향해 욕설을 던지는 등의 파격적인 설정을 가지고 있다. 오는 6월 8일부터 홍대 벨벳 바나나 클럽에서 공연될 <관객모독>은 기존 버전과는 달리 클럽의 분위기를 가득 담아내
"할머니 앞에서 바지 한 번 내리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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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퇴근 인생을 접은 뒤에도 의식(衣食)까지 접을 수는 없어 한 출판사의 군식구가 된 게 두 해 전이다. 한 달에 한 번 출판사에 나가 기획회의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이 내 일이다. 이 출판사는 서평용 책을 조선일보에 보내지 않는다. 새 천년 앞뒤로 안티조선운동이라는 것이 본격화하기 전부터 그랬다. 안티조선이 시민적 양식의 상징이었던 시절엔 조선일보에 책을 보내지 않는 출판사들이 더러 있었다. 그 운동이 시들해지면서(거기 두드러진 공훈을 세운 이들이 대통령과 소위 ‘노빠’들일 게다) 그런 출판사들이 하나둘 줄어들었고, 이젠 내가 한 다리 걸치고 있는 출판사가 거의 유일하게 조선일보와 데면데면 지내는 모양이다.
객식구라는 인연도 작용해,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나는 이 출판사에서 책을 낸다. 내 책은 조선일보만이 아니라 동아일보와 중앙일보에도 보내지 않는다. 내가 그리 부탁했다. 안티조선운동이 시작될 무렵에는 이 두 신문이 조선일보와 어딘지 달라 보이기도 했지만, 언제부턴가 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경계긋기의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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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로제타>로 단편 경쟁부문에 참여했던 양해훈 감독이 칸영화제를 다녀온 소감을 적어왔다. 그가 칸에서 느낀 신 귀족사회, 또는 ‘계급투쟁’에 대한 단상을 소개한다.
이것이야 말로 무(모)한 도전이다. 해외에 처음 나가보는 촌뜨기 둘이서 전혀 준비도 없이 프랑스로 가는 짓 같은 것 말이다. 인디포럼이 끝나자마자 나와 정희성(촬영감독)은 무작정 비행기에 올라탔다. 짧은 영어 실력을 가진 우리에게 칸영화제 기간은 그야말로 민폐요, 재앙이요, 도전이다. 나는 이제부터 이 도전을 무(모)한 계급투쟁이라고 부르겠다.
파리를 경유해 니스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같은 비행기에 탄 한국 사람들에게 칸까지 어떻게 가느냐, 같이 택시를 타면 안 되느냐, 기차는 어디서 타야 하느냐를 연신 물어보고 다녔다. 대답은 각양각색이었다. 버스를 타겠다는 사람, 삼삼오오 택시를 타겠다는 사람, 그중 나는 마음씨 좋아 보이는 어떤 아가씨에게 택시를 타자고 졸랐다. 그분도 꽤나 당황했을 것이
[제60회 칸영화제 결산] 칸은 ‘무(모)한 계급투쟁’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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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거리를 오가며 마이클 잭슨 복장을 하고 마이클 잭슨 춤을 추는 그는 외로운 남자다. 그의 삶을 진정으로 이해해주는 이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던 그에게 새로운 친구들이 생긴다. 어느 날 마릴린 먼로와 똑같은 차림을 한 여인이 그를 스코틀랜드의 어떤 마을로 데려간 것이다. 여기에는 교황, 영국 여왕, 링컨 대통령, 마돈나, 찰리 채플린, 셜리 템플(을 모사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하모니 코린이 8년 만에 만든 <미스터 론리>의 설정은 코미디를 연상케 하지만, 그의 전작을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고작 24살 때 <검모>(1997)로 충격적 데뷔를 했던 그는 이 영화에서 더욱 성숙한 내면을 드러낸다.
-칸에 와서 기분이 어떤가. 어제 첫 시사 이후로 잘 잤나.
=이 영화제에는 너무도 많은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잠을 잘 못 잤다. 그저 살아남을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미국에 돌아가면 잠을 잘 잘 수 있겠지.
[제60회 칸영화제 결산] <미스터 론리>의 하모니 코린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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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고생이었을 때. 지금 생각해보면 나른한 오후의 교실과 과학책 밑에 숨기고 읽었던 하이틴로맨스 몇권만 떠오르는 여고 시절. 등하굣길 출몰하는 ‘바바리맨’의 풍문만으로도 꺅꺅 소리를 지르던 때. 목덜미에 대일밴드를 붙인 날라리들이 어쩐지 특별해 보이던 때. 키스나 섹스라는 말만 들어도 몸이 배배 꼬이던, 아마도 사춘기였을 18살 무렵.
그때 내가 접한 성과 사랑에 대한 정보는 <숲속의 장미>나 <해변의 연가> 같은 하이틴로맨스류의 책들, 입담 좋은 계집애들이 전해주는 음담패설, 그리고 몰래 보던 18세 관람가 영화가 전부였다. 당시 제일 야하다고 소문난 영화 비디오를 빌려 부모님이 안 계시는 빈집으로 몰려가곤 했었는데, 그것은 나와 내 친구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것들 사이의 간극은 컸다. 하이틴로맨스는 낭만적이고 부드럽고 환상적인데 비해, 남자 중심으로 진행되는 음담패설은 더럽고 구질구질하고 역겨웠다. 그리고 영화는 너무
[내 인생의 영화] <피아니스트> -소설가 천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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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수난의 장면은 길지 않아 네 복음서 속에서 기껏해야 두어개 장(章), 서너쪽 분량일 뿐이다. 그나마도 모두 AD 60년 이후에 기록된 것들. 물론 추종자들에게는 분명 잊지 못할 체험이었겠지만, 복음서가 쓰였을 때쯤에 예수의 수난은 이미 30여년 전의 희미한 기억일 뿐이었다. 그나마 그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텍스트로 된 기억. 그리하여 글자를 모르는 민중을 위해 중세 장인들은 ‘읽는’ 텍스트를 ‘보는’ 이미지로 번역해야 했다.
중세의 영화
레싱의 구분에 따르면 공간예술은 장면을 공간적으로 확장하고, 시간예술은 서사를 시간적으로 전개한다. 영화는 사진에 움직임을 주어 그것을 시공간의 예술로 만든다. 하지만 아직 그림이 움직이지 않았을 때는 어땠을까? 성서 텍스트를 이미지로 번역하려 할 때 중세의 장인들은 매체의 차이에서 오는 한계를 느꼈을 것이다.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사실을 말하자면, 중세에도 나름대로는 그림에 움직임을 주는 방법이 있었다.
15세기의 목판화를 보자
[진중권의 이매진] 영상의 스티그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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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칸영화제에는 유독 일본 기자들이 많았다. 크루아제트와 해변 곳곳에서 시종일관 예의 가득한 “스미마셍”이 들려온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일본 언론의 칸영화제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 언론이 시종일관 촉각을 곤두세우는 대상은 경쟁작인 가와세 나오미의 <애도의 숲>이 아니라 감독 데뷔작 <대일본인>을 들고 칸을 찾은 코미디언 마쓰모토 히토시다. 기타노 다케시의 <모두 하고 있습니까>를 연상시키지만 그보다 더욱 멀리 나아가는 <대일본인>은 일본의 특촬 괴수물과 일본사회에 대한 무심한 듯 예리한 풍자가 절묘하게 결합한 코미디이며, 만든 자의 정신상태를 차분하게 분석해보고 싶어지는 괴작이다. 민감한 성격인데다 칸의 프리미어를 내심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마쓰모토의 뒤를 두번에 걸쳐 밟았다. 한번은 일본 언론만을 위한 깜짝 인터뷰 자리였고, 또 한번은 ‘감독주간’에서 주최한 조촐한 공식 회견이었다.
-대체 이
[제60회 칸영화제 결산] <대일본인>의 마쓰모토 히토시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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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속물인가?
그것이 세상의 속된 기준에 민감한 사람을 뜻하는 말이라면, 흠흠, 쉽게 부정하지 못하겠다. 친구가 아파트를 샀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쩔 수 없이 현재 시세가 궁금해지고, 그저 그렇다고 여겼던 작품이 유수한 문학상을 탔다는 말을 들으면 부박한 내 취향을 의심하게 된다. 스무살 때부터 쭉 좋아하던 전도연이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던 날, 무슨 남다른 선구안이라도 타고난 양 괜스레 우쭐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무엇보다 내가 속물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없는 매우 강력한 증거는, 늘 내 안의 속물성을 의식하면서 남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한다는 점일 것이다. 네이버의 부동산 카테고리를 검색할지언정 당사자 앞에서는 “그래서 그 집 정확히 얼마에 계약했는데?” 하고 물어보지 않으며, 남들은 다 좋다지만 내 눈에는 도무지 별로인 예술가의 이름은 공석에서든 사석에서든 절대로 밝히지 않는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전도연의 연기를 품평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면, 칸의 ㅋ
[냉정과 열정사이] 이런 사랑도 정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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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동포 2세 리 아이작 정(정이삭·28)의 장편 데뷔작인 <문유랑가보>는 소름끼치는 대학살의 생채기로 고통받는 르완다의 심장으로 향하는 여정이다. 고아 소년 문유랑가보는 친구 상그와와 함께 자신의 부모를 죽인 자를 처단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하지만 상그와의 부모가 살고 있는 집에 잠시 들르게 되면서 계획은 틀어지기 시작하고, 결국 문유랑가보는 복수를 위해 홀로 길을 떠난다. <문유랑가보>는 겨우 3만달러의 제작비로 거칠게 찍은 영화다. 하지만 <문유랑가보>는 이상할 정도로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데가 있으며, 빛바랜 필름에 찍힌 르완다의 거친 대지를 뒤쫓다보면 결국 거의 시적으로 아름다운 대륙의 아름다운 인간들을 발견하는 데 이른다. 진심 하나로 만들어낸 초저예산 장편 데뷔작으로 칸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에 오른 감독의 기분은 어떨까. “여전히 믿기지 않는 일이다. 그저 작은 영화제에나 초청받기를 기대했다. 세상을 바꾸려는 이야기가 아니라
[제60회 칸영화제 결산] <문유랑가보>의 리 아이작 정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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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된 리양의 <눈먼 산>(盲山)은 데뷔작이었던 <눈먼 광산>(盲井)에 이어 중국사회의 현실을 고발하는 영화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던 슈에메이(황루)는 인신매매범들에 속아 산골마을 한집의 신부이자 며느리로 팔려간다. 인신매매범들에게 돈을 주고 남편이 됐다는 남자는 부모의 협조 속에서 슈에메이를 강간하고 마을에 눌러앉히려 하지만, 그녀는 이에 굴하지 않고 끊임없는 탈출을 감행한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대대적인 협조 탓에 슈에메이는 번번이 붙들리고 만다. 그 뒤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은 매질이다. <눈먼 산>의 러닝타임 97분 중 96분은 한없는 괴로움의 나락이지만, 번개 같은 마지막 순간은 ‘올해 칸영화제 최고의 라스트 신’이라 할 만한 쾌감을 선사한다. 이 덕분에 <눈먼 산>은 상영 때마다 5분 이상의 기립박수 세례를 받았다. 독일 방송국 등에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다가 44살의 나이에 <눈
[제60회 칸영화제 결산] <눈먼 산>의 리양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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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노이드 파크>는 구스 반 산트의 새로운 영화일까. ‘죽음 3부작’으로 불리는 <제리> <엘리펀트>와 <라스트 데이즈> 이후, 사람들은 반 산트의 다음 작품이 3부작의 그늘을 벗어난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라 믿었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신작 <파라노이드 파크>는 지난 3부작과 거리가 먼 영화인 동시에 3부작의 자장 속에 여전히 발목을 잡힌 영화이기도 하다. 구스 반 산트는 우연히 살인을 저지르게 된 스케이트 보더 소년의 ‘사고 뒤’ 일상을 따른다. 비극의 외상과 내상은 전혀 설명되어지지 않는다. 소년의 트라우마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관객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반 산트는 3부작과는 조금 다른 접근법으로 소년에게 접근한다. 엘리엇 스미스에서 (심지어) 니노 로타에 이르는 사운드 트랙은 거의 촌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소년의 내면적 갈등을 음악적인 효과로 치환해내고, 크리스토퍼 도일과 (스케이드 보딩 장면을 맡은)
[제60회 칸영화제 결산] ‘60주년 특별상’ 수상한 구스 반 산트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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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의 주인공 잭 스패로우에 관한 풍문 중 흥미로운 점 한 가지는 이 캐릭터가 게이일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2편의 라스트신에서 엘리자베스가 키스로 잭을 유혹하고 거기에 속아 넘어간 잭이 돛대에 묶여 바다 괴물 크라켄의 먹이가 되면서, 영화는 결국 스스로 유도했던 그 소문을 교묘하게 다시 거둬들이며 3편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유희와 해명에도 불구하고 잭은 여전히 모호하고 탄력적인 캐릭터다.
“잭은 누구 편이죠?”라고 물었던 자가 “현재 상황에서 말인가요?”라고 반문받는 일은 당연하며, “그는 운이 좋은 걸까요, 명석한 걸까요?”라는 질문에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있는 방도란 없다. 당신의 싸움은 공정치 않다고 윌이 불평할 때 잭은 “내게 공정한 싸움이란 별로 중요하지 않아”라고 말하거나, 누군가 그럴싸한 전통을 강조할 때 “나는 전통을 좋아하지 않아”라고 못박는다. 그를 선인과 악인 중 어느 하나로 이분법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규범적 전통
[영화읽기] 위반의 욕망으로 가득찬 블록버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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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인가? 신애는 딸의 자리와 아내의 자리(나중에는 엄마의 자리에서도)에서 밀려나 밀양이라는 비밀의 햇볕 속으로 왔다. 그녀는 꼬리 잘린 과거를 지녔다. 영화는 출발한 곳을 보여주지 않고, 이렇게 신애가 도착한 곳에서 시작한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서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강변하지만, 그녀는 과거의 풍문에서 떠나왔거나 혹은 쫓겨났다.
<밀양>의 신애는 흔한 검정 구두를 신는, 가르마를 타지 않는 부스스한 여자다. 이 여자가 고통을 겪는다. 고통은 그것이 극적으로 연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 상(像)이 그려지지 않으며, 좀처럼 언어화될 수 없다. 이 낯설고 이질적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란 말인가. 영화는 인물이 갖는 적의의 실체를 모호하게 흐려놓았다. 그렇다고 악의 불가지성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들에게 무관심하다.
아이의 우울증으로 은폐된 신애의 광기
신애라는 이방의 여자가 도착한 밀양이라는 도시는 풍문과 신앙의 공간이다. 미용실과 거리와
[영화읽기] 구성된 피해의식, 부질없는 구원의 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