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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는 비밀>의 제목은 동의중복인 동시에 모순형용이다. 비밀은 원래 밝혀지지 않아야 하는 내용이므로 구태여 말해져서는 안된다는 말로 수식할 필요가 없는 단어다. 하지만 누구든 비밀은 들추어내 알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말할 수 없는’은 ‘비밀’과 상충한다. 두 덩어리의 말이 부조화를 이루는 동시에 끝내 같은 길을 걸어간다는 점은 영화 속 서로에게 가닿으려는 두 남녀의 궤적과 은근하게 포개진다. 주걸륜 연출 및 주연, 계륜미 출연으로 대만과 대한민국 모두에서 파란을 일으킨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한국판 리메이크로 돌아온다. 천재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떨치는 중인 유준(도경수)은 유학 도중 팔목 통증을 느껴 급히 한국으로 귀국한다. 아버지(배성우)가 교수로 재직 중인 학교에 교환학생으로 다니게 된 유준은 학교를 방문한 첫날 무언가에 홀린 듯 음악대학의 낡은 연습실로 이끌린다. 유준을 홀린 건 피아노 소리였고, 피아노를 연주하던 사람은 유준과 같은 3학
[리뷰] 음악을 통해 얻는 힘, <말할 수 없는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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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회화 시대를 연 불멸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이탈리아의 화가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그는 자신의 파격적인 그림만큼 범상치 않은 삶을 산 것으로도 유명하다. 영화 <카라바조의 그림자>는 1606년 살인죄로 기소된 카라바조가 로마에서 달아나 도피 생활을 하던 시기를 중심으로, 작가적 상상력을 통해 그의 삶을 재구성한다. 야수 같은 영혼의 카라바조(리카르도 스카마르초)와 그를 뒤쫓는 수사관 ‘그림자’(루이 가렐)의 추적극 형식으로 전개되는 영화는 카라바조의 남다른 예술관은 물론 고통과 고뇌에 휩싸인 내면을 조명한다. 이탈리아 배우이자 감독인 미켈레 플라치도의 작품으로, 카라바조의 그림을 보는 듯 명암 대비를 극적으로 활용한 연출이 흥미롭다. <메두사> <성모의 죽음> <성 마태오의 소명> 등 카라바조의 대표작을 스크린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로, 현재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진행 중인 카라바조 전시 못지않은 감동을 선사한다.
[리뷰] 예술, 고통, 내면, <카라바조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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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했던 사람이 죽은 뒤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언데드의 모습으로 돌아온다면 그것마저 반가울 수 있을까. 오슬로 전역에 정전이 발생한 바로 그날, 죽은 사람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는 제보가 이어진다. 아들을 잃은 안나(레나테 레인스베),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은 데이빗(아네르스 다니엘센 리), 반려자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토라(벤테 뵈르숨)는 상상해본 적 없던 숨 막히는 재회의 순간을 마주한다. 통상 언데드를 소재로 한 영화의 박진감 넘치는 전율과 쾌감 대신 <언데드 다루는 법>은 느린 템포로 죽음의 상실에 반응하는 인물과 그들 각자의 선택에 더욱 집중한다. 이 영화에서 언데드는 살아 있는 시체의 모습으로 죽음을 전시하는 호러영화의 장르적 기능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언젠가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모두에게 내재된 공포의 표현에 더 가깝게 자리한다. <렛미인>으로도 알려진 작가 욘 A. 린드크비스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각본가로 참여했다.
[리뷰] 죽음의 상실과 재회의 순간, 각자의 선택, <언데드 다루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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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뉴욕의 어느 서점, 책 발간 기념회에서 저자인 제프 해리스(제프 골드블럼)는 우연히 듣게 된 보사노바 음반에서 뛰어난 피아노 연주자 테노리우 주니오르를 알게 된다. 그가 홀연히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제프는 홀린 듯 그의 실종을 추적하며 테노리우의 행적에 관한 온갖 추측을 마주한다. 테노리우와 교류한 당대의 뮤지션, 아내와 연인, 그의 자녀와 목격자를 만나며 수집한 각기 다른 기억과 증언이 모자이크처럼 이룬 진실 하나는 아르헨티나에서 민주주의가 사라지면서 테노리우도, 보사노바의 황금기도 함께 죽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피아니스트를 쐈다>는 손으로 직접 그린 듯한 작화에 유수의 보사노바 뮤지션들이 직접 목소리 출연했다. 장소와 시대적 감각을 따르는 컬러 팔레트로 미국과 남미 재즈 선율의 황홀경을, 보색 대비로 독재 시대의 암울한 진실을 전한다. <치코와 리타>를 만든 페르난도 트루에바와 하비에르 마리스의 신작.
[리뷰] 색채로 그린 삼바 재즈의 선율을 따르다 도착한 시대의 명암,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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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포켓몬이 어울려 사는 세계, 포켓몬 마스터를 꿈꾸는 소년 지우(이선호)는 로타마을에서 열리는 포켓몬 배틀 대회에 참가해 ‘파동의 용사’로 인정받는다. 이윽고 지우가 지닌 신비한 파동의 힘이 먼 옛날 봉인되었던 포켓몬 루카리오를 깨운다. 그러던 중 로타마을 근처 ‘세계가 시작하는 나무’에 사는 환상의 포켓몬 뮤가 나타나 지우의 파트너 포켓몬인 피카츄를 데리고 사라져버린다. 지우와 친구들, 루카리오는 피카츄를 찾으러 떠나고 ‘세계가 시작하는 나무’에 얽혀 있는 뮤와 루카리오의 비밀을 알게 된다. 메가 IP <포켓몬스터> 시리즈의 8번째 극장판으로 인간과 포켓몬 사이의 내적인 유대 관계를 강조하는 이야기다. 인간에게 상처받았던 루카리오가 지우와 피카츄의 깊은 우정에 감응하는 과정이 주로 그려진다. 포켓몬들의 귀여움 그리고 우정과 감동까지 <포켓몬스터> 시리즈 특유의 여러 정수가 담겨 있다. 4K UHD로 리마스터링되어 국내 첫 극장 개봉한다.
[리뷰] 20년이 지나도 설레는 포켓몬과의 만남, 힘찬 이별, <극장판 포켓몬스터 AG: 뮤와 파동의 용사 루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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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계 형사로 승승장구하던 현준(신현준)은 지금은 집안의 골칫거리 신세로 전락해 엄마 수미(김수미)의 집에 얹혀살고 있다. 5년 전의 한 사건으로 인해 직급이 강등된 채 작은 지구대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현준의 일상은 수미의 구박을 듣는 것으로 시작된다. 수미가 무엇보다 안타까워하는 것은 현준이 무려 5년 동안 자신의 딸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현준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오는데, 그건 어느 날 현준이 벼락을 맞은 다음부터 타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초능력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현준은 이를 통해 꼬인 자신의 인생을 되돌려놓으려 한다. <귀신경찰>은 노련한 두 배우의 익숙한 티키타카를 확인할 수 있는 코미디영화다. 배우 고유의 특성으로부터 비롯된 웃음이 영화의 명확한 장점이긴 하지만, 누군가는 영화가 내미는 구수한 개그들을 진부하게 느낄 가능성도 크다. 지난해 10월 세상을 뜬 김수미 배우의 유작이다.
[리뷰]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어떻게 쓸 것인가, <귀신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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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정희(황지아)는 늘 가족 탓만 하는 엄마가 불만이다. 때늦은 엄마의 ‘사춘기’를 끝내기 위해 모든 불행의 시작인 할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할아버지를 만나는 데 성공하지만 생전 처음 마주한 엄마의 아버지에게 선뜻 말을 걸기가 쉽지 않다. 정희가 가족 상봉의 문턱에서 주저하는 사이 악의에 찬 어둠의 그림자가 성큼 그녀에게 다가온다. 신현규 감독의 첫 장편영화 <문워크>는 아직 어른들의 세계가 낯선 어린 딸의 시선으로 위 세대의 갈등을 바라본다. 불행의 대물림을 자기 손으로 끊어내겠다는 당찬 포부가 시골의 정경과 어우러지며 따스함을 자아낸다. 감각적인 시퀀스로 막을 올린 영화는 이후에도 도전적인 연출을 이어나간다.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에서 배우상을 수상한 황지아는 다양한 톤을 출중하게 소화해낸다. 다만 ‘힐링’을 표방하는 영화에서 납득하기 힘든 거북한 대사와 사건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며 옥에 티로 느껴진다.
[리뷰] 누군가의 트리거가 될 수도 있는 장면을 너무도 손쉽게, <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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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제시카 채스테인)는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의문의 남성 사울(피터 사즈가드)을 만난다. 사울은 실비아를 미행하는 것으로 모자라 문 앞에서 밤새도록 앉아 있는다. 밤새 공포에 사로잡혔던 실비아는 아침에서야 그가 치매 환자임을 알게 된다. 며칠 뒤 실비아는 사울에게 오해로 인해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메모리>는 과격하고 논쟁적인 상상력으로 무장한 젊은 거장 미첼 프랑코의 신작이다. 돌봄과 사랑의 이분법을 무너뜨리는 감독의 날카로움은 여전하다. 대신 일부러 불편함을 자아내는 인위적인 설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관객이 두 사람의 트라우마와 멜로드라마에 자연스럽게 몰입할 수 있도록 여백을 내어준다. 감독 특유의 건조한 카메라는 감정의 과잉을 절제하며 거리를 유지한다. 제80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피터 사즈가드와 제시카 채스테인의 호연이 더없이 아름다운 순간을 만든다.
[리뷰] 돌봄과 사랑을 넘어서 서로를 치유하는 유토피아적 관계를 상상하는 성숙한 멜로, <메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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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암살 요원 생활을 청산한 준(권상우)은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린 웹툰 <암살요원 준>으로 공전의 히트를 친다. 웹툰 작가 김상혁으로 재탄생한 그는 기대를 한껏 받으며 <암살요원 준> 시즌2를 공개한다. 신작이 혹평에 시달리고 딸도 자신을 외면하자 절치부심해 연필을 다시 쥔다. 고심 끝에 그린 웹툰이 호평받는 와중에 그 웹툰을 모방한 범죄가 일어난다. <히트맨2>는 B급 감성과 첩보물을 더한 영화 <히트맨>의 속편이다. 숏폼으로 만들기 적당한 단발성 콩트와 코믹스를 보는 듯한 애니메이션 연출 등 전작의 개성을 계승하나 전작에 비해 유머가 시대착오적이며 타율마저 낮아서 아쉬움을 남긴다. 전작보다 스케일이 확장되고 액션도 진일보했지만 전작 특유의 잔재미가 휘발되었다. 결론적으로 ‘왜 프랜차이즈화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리뷰] 프랜차이즈화인가 억지 밈인가, 판단은 관객의 몫, <히트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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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아시아 땅에 살고 있는 판다 팡과 용 지에롱. 누구보다 절친한 그들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바로 아프리카에서 온 사자들에게 지에롱이 납치당한 것이다. 겁이 많지만 의리 있고 선한 마음을 지닌 팡은 납치범들이 남긴 지도를 발견하고 친구를 찾아 나선다. 물론 모험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다. 착한 팡을 이용하려는 다른 동물들이 있었으니, 그중 팡을 가장 먼저 발견한 건 원숭이 조조다. 조조 역시 처음엔 나쁜 마음을 품었으나 이내 팡의 진심을 느끼고선 그를 돕기 시작한다. 한편 사자들은 지에롱의 능력을 활용해 앙숙 하이에나를 공격할 계획을 짠다. <꼬마 판다 팡의 아프리카 대모험>은 동물을 좋아하는 어린 관객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애니메이션영화임이 분명하다. 다양한 동물들의 개성을 영리하게 활용한 캐릭터 설정이 돋보이며, 아이들에게 특정 종에 대한 나쁜 선입견을 심지 않으려는 제작진의 노력 또한 칭찬할 만하다.
[리뷰] 희망은 언제나 있다, 팡과 함께라면, <꼬마 판다 팡의 아프리카 대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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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곽승일)는 시에서 지원받는 예산을 바탕으로 ‘힐링 캠프’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다. 캠프는 위로와 휴식이 필요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진행되는데, 이번엔 이유를 알 수 없는 예산 삭감으로 인해 준비 과정부터 난항을 겪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캠프에 참가 신청을 하는 시민들이 있다. 프로그램을 통해 얻게 될 것보다 그 과정의 중요성을 중시하는 영서(마영주), 둘만의 여행을 떠나기 위해 동반 참여한 남매 지환(임병주)과 아진(권서연), 그리고 정체를 특정하기 힘든 소희(우리안)가 그 주인공이다. 그렇게 그들은 자연에서 여러 사건들을 겪으며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박용철 감독의 <수호>는 소규모 지원 사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고충과 심리묘사가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영화다. 비록 규모가 작아도, 참가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마음의 평온을 찾아내고야 만다. 수호가 힘든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지켜낸 캠프의 마지막 프로그램이 자아내는 감동이 인상적이다.
[리뷰] 포기하지 않는다면, 신도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것, <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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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온다!” 만나야 할 영화는 끝내 찾아온다. 빅토르 에리세 감독의 전설적인 데뷔작 <벌집의 정령>이 긴 세월을 뛰어넘어 국내 정식 개봉한다. 제21회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 황금조개상을 수상한 이래 수많은 감독들에게 영감을 준 이 작품은 영화의 존재 의미를 되새긴다는 점에서 ‘20세기 영화사의 걸작’이란 수식어에 손색이 없다. 스페인 내전 직후인 1940년 무렵, 스페인의 한 시골 마을에 이동식 영화 트럭이 찾아온다. <벌집의 정령>은 역사의 알레고리를 소녀의 시선으로 풀어나가는 영화다. 아나가 정령을 찾아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는 모습은 어느새 내전으로 엉망이 된 스페인의 아픔과 겹치고, 동화 같은 환상 속에 서늘한 진실이 아른거린다. 보이지 않기에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영화적 마술은 5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여전히 유효한 생기를 발휘한다.
[리뷰] 동화같은 환상 속에 아른거리는 서늘한 진실, <벌집의 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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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엄마를 잃은 11살 소녀 카린(고토 노아)은 아빠 테츠야(아오키 무네타카)와 함께 절을 찾는다. 아빠는 엄마의 기일 전까지는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후 떠나고 카린은 혼자가 된다. 곁에 아무도 없다는 걸 실감하며 기운을 잃어가던 차, 절에 사는 37살 고양이 앙주와 만나면서 일상의 재미를 되찾는다. <고스트캣 앙주>는 타이틀롤을 맡은 캐릭터의 매력을 동력 삼아 움직이는 작품이다. ‘아저씨 고양이’가 가진 느긋함과 잔정이 영화를 포근하게 감싼다. 카린과 앙주가 환상적인 모험을 하다가 만나는 요괴들의 외형이 각기 달라 보는 재미를 안긴다. <린다 린다 린다>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을 만든 야마시타 노부히로의 첫 장편애니메이션이자 그동안 캐릭터 컨셉 디자이너로서 영화작업에 참여했던 구노 요코의 정식 감독 데뷔작이다. 제77회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된 애니메이션영화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리뷰] 비워져도 다시 채워지는 뭉근한 마음, <고스트캣 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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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전역에 원인 모를 변이 바이러스가 퍼진다. 감염자는 동물과 인간의 형상을 한몸에 지닌 수인(獸人)이 되어 격리되거나 사살된다. 소년 에밀(폴 키르셰)의 어머니 역시 수인화를 겪어 보호소에 격리 중이다. 프랑수아(로맹 뒤리스)는 어떻게든 가족을 복원하기 위해 아들 에밀과 함께 보호소 근처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 한데 가족구성원을 수인으로 둔 두 부자와 달리 마을 사람들에게 수인은 혐오의 대상일 뿐이다. 수인을 향한 시민들의 테러가 극으로 치닫던 어느 날, 에밀의 어머니가 호송 중 탈출해 실종된다. 이들이 처한 위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에밀에게도 변이의 조짐이 발현된 것이다.
돌연변이와 인간이 공존하는 세상. <엑스맨> 시리즈 등 소수자 차별을 돌연변이 존재로 은유한 작품은 대개 ‘무엇’(What)이 중요한 질문(“무엇이 정상인가?”,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 등)을 건네며 의제를 서사화한다. 반면 <애니멀 킹덤>이 보다 집중하는 질문은
[리뷰] 무엇(What)보다 어떻게(How)에 집중하는 정치, 윤리적 상상력, <애니멀 킹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