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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월레스와 그로밋을 찾아온 때는 월레스가 경제적으로 곤궁한 형편에 처했을 시기였다. 발명가 양반은 자신의 영감을 주체할 수 없기에 늘 과하게 발명을 해댄다. 체납 고지서는 쌓이고, 여윳돈은 없다. 그나마 변통할 수단이라면 방치된 방 하나를 세놓는 것. 그래서 세입자를 들이는 광고를 냈다. 그리고 그가 찾아왔다. 과묵하고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는 자신에게 할당된 허름한 방 대신 그로밋의 방을 차지한다. 굴러온 돌은 너무나 당당하게 박힌 돌을 빼냈다. 집주인 월레스는 당황했지만 당장 한푼이라도 아쉬웠기에 받아들였다. 그는 무례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전략적으로 살갑게 굴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월레스에게는 살갑게, 그로밋에게는 무례하게 굴었다. 월레스와 그로밋의 관계에 파고들어서 둘을 떼어놓는 것, 이간계는 적중했다. 이제 월레스의 집은 그의 거사를 위한 베이스캠프가 되었고, 월레스는 범죄의 대리 수행인으로 조종될 운명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에게는 <기생충
[기획] ‘오락영화의 물리법칙이 거꾸로 작동할 때’, 설 연휴 추천 OTT <월레스와 그로밋: 복수의 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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끓어오르는 네명의 여자가 있다. 준비 태세를 갖추더니 곧이어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손에 든 망개나뭇가지, 털실, 립스틱, 권투 글러브를 카메라 너머로 힘껏 날리며 포효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연출의 드라마 <아수라처럼>의 오프닝을 처음 본 이후 매일 수없이 영상을 돌려보았다. 진창 난 내면을 배회하다 이윽고 촉발되고 끝내 화르르 불타버리는 그런 여자들을 도저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짐승과도 같은 그녀들의 울음소리에 응답할 준비를 하며 며칠을 보냈다. 1월9일 목요일 <아수라처럼>이 오픈되고 그주 주말에 뒤늦은 시청을 하였는데, 결론은 나는 그녀들의 포효에 응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네 자매가 정말로는 포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프닝의 장면들은 실상 본편에서는 없는 장면들이었다.
간략한 줄거리는 이러하다. 도서관에 근무하는 삼녀 타키코는 도서관이 오픈되기도 전인 이른 시간에 출근해 차녀 마키코에게 전화를 건다. 할 얘기가 있다며 자매들을
[기획] ‘아수라처럼, 진짜 아수라는 아닌’, 설 연휴 추천 OTT <아수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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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에는 늘 볼거리로 넘쳐난다. 극장가뿐 아니라 OTT에서도 흥미로운 콘텐츠들이 긴 연휴를 풍성하게 채워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다양한 작품들의 리스트를 정리해보는 게 이 무렵의 정석이겠지만 때론 꼭 집어 한편만 골라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을 것이다. <씨네21>에서는 이번 설 연휴에 꼭 챙겨봐도 좋을 시리즈와 애니메이션을 각각 한편씩 꼽아보았다. 기준은 하나다. 이 작품이 지금 왜 다시 만들어졌을까.
첫 번째 작품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연출을 맡은 넷플릭스 일본 드라마 <아수라처럼>이다. 1979년 <NHK>에서 방영돼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무코다 구니코의 동명 드라마를 리메이크한 이 작품을 위해 미야자와 리에, 오노 마치코, 아오이 유우, 히로세 스즈 등 일본의 대표적인 여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무엇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첫 번째 넷플릭스 드라마 연출작이라는 점에서 국내 팬들의 주목을 모으는 중이다. 서로 다른 삶을
[기획] 보고 또 보고 – 연휴에 챙겨볼 만한 시리즈 <아수라처럼>과 애니메이션 <월레스와 그로밋: 복수의 날개>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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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라 나바로 지음 엄지영 옮김 비채 펴냄
결혼을 원하지 않는 남자 이스마엘과 결혼을 원하는 여자 ‘나’가 결혼을 더이상 언급하지 않기 위해 결혼한 척하기로 한다. 가짜 결혼식을 핑계 삼아 “섬에 가서 모래사장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해변가에서 보낸 첫 나흘 동안은 시간이 녹아 흘러내리듯 흐른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이스마엘의 통증이 시작된다. 음식 찌꺼기가 잔뜩 낀 잇몸이 부어올랐지만 식욕은 여전히 왕성한 이스마엘의 모습을 보며 ‘나’는, 삿갓조개 껍데기가 이스마엘의 잇몸을 관통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가짜 남편의 입냄새는 점점 더 심해져 간다. 이스마엘은 갑작스레 고백한다. “사실 나, 벌레로 변하고 있어.” 이즈음에서 카프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겠지만, 단편소설 <잇몸>은 결혼과 불운이라는 테마로 이 이야기를 끌어들인다. 표제작 <토끼들의 섬>에서도 악취가 중요하다. 강에서 시체를 발견한 남자는 한 섬에 텐트를
씨네21 추천도서 - <토끼들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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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중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서울리뷰오브북스>의 ‘이마고 문디’에 연재된 사회학자 김홍중의 영화 에세이가 책으로 출간되었다. 영화에 대한 글 7편이 묶였다. 아피찻퐁 위라세타꾼,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나루세 미키오, 지아장커, 켈리 라이카트, 코언 형제와 아키 카우리스마키, 박찬욱과 박해영의 총 7장으로 영화 작가들의 이름이 나열된 목록만으로도 풍성함이 전달되는 듯하다.
최근 개봉한 <쇼잉 업>의 켈리 라이카트 감독에 대한 글을 먼저 살펴보면 좋겠다. “켈리 라이카트는 미국 독립영화계의 독보적인 감독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켈리 라이카트의 스타일은 흔히 “느린 보폭의 리얼리즘”이라고 불린다. 특별한 사건이나 스펙터클, 극적 전개가 거의 없이 관조적이고 섬세하고 미니멀한 카메라가 이야기를 이어간다. 인물의 본성이나 이력 또한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에게 느림은 단순한 미학적 효과나 아방가르드적 실험의 의미를 넘어서, ‘영화가 아니었다면 놓
씨네21 추천도서 - <세계에 대한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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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 지음 문학동네 펴냄
“1992년 신년 세일!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에서 배달된 편지봉투 속에는 채시라가 모델인 그 옛날의 전단지가 고이 들어 있다. 엄마는 인쇄물을 보자마자 이건 아빠가 보내온 게 틀림없다고 확신한다. 기민하게 미래를 내다본 투자를 하고 부자가 되었다면 좋았겠지만, 우리의 주인공 ‘에스’의 아버지는 종이 인쇄가 사양산업의 길목으로 들어서기 직전 인쇄소를 무리하게 확장하다가 일거리가 뚝 끊겨 파산한다. 그쯤에서 멈췄으면 좋았으련만 아빠는 성공의 기억이 있는 을지로 인쇄골목을 떠나지 못하고 엄마의 인감도장으로 빚을 내 연거푸 파산한 후 잠적한다. 아니, 여기서 멈췄으면 또 나았을 것이다. 에스의 엄마는 이번엔 에스의 이름으로 빚을 내 홍제동에 작은 옷가게를 열고 카드 네개로 생활비를 돌려막으면서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부모의 빚을 자식이 이어받아 개인회생과 파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스무살의 이야기. 암담하기만 할 것
씨네21 추천도서 - <이렇게 바삭한 카사바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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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 스탠딩 지음 안효상 옮김 창비 펴냄
‘시간은 금이다’라는 그 유명한 관용구를 끌어오지 않더라도, 시간에 관련한 대부분의 격언들은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충실히 아껴 쓸 것을 조언한다. 이른바 ‘갓생’이라 불리는 시대 정서 역시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자기 계발에 열중하는 이들을 위해 탄생했다. 주말에 10시간을 누워서 휴식을 취한 사람과 회사에 출근해 일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전자의 경우처럼 시간을 보내면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거나 주변에서도 허송세월한 것으로 치부한다. 최저임금이 시간당 금액으로 책정되는 것만 봐도 현대사회에서 시간은 곧 노동력이기 때문이다. 주어진 시간에 얼마만큼 자본주의사회에 충실한 노동력을 제공할 것인가가 그 사람의 가치로 평가되는 것이다. <시간 불평등: 시간의 자유는 어떻게 특권이 되었나>의 원제는 ‘시간의 정치’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시간이 왜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제이며, 산업사회에서 시간이라는 규율을 정함으로써 어떻게 계급과 불평
씨네21 추천도서 - <시간 불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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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불평등> 가이 스탠딩 지음 안효상 옮김 창비 펴냄
<이렇게 바삭한 카사바칩> 이경 지음 문학동네 펴냄
<세계에 대한 믿음> 김홍중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토끼들의 섬> 엘비라 나바로 지음 엄지영 옮김 비채 펴냄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1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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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에는 영웅도 주인공도 없다. 강물 위에 여객기를 비상착륙시켜 수많은 목숨을 안전하게 지켜낸 비행기 기장(톰 행크스)이 나오기는 하지만, 막상 영화에 비친 그의 모습은 복잡한 소송과 주택담보대출로 골머리를 앓는 삶에 찌든 평범한 생활인이다. 대신 화면을 가득 메우는 것은 무표정하고 무뚝뚝한 채로 그저 자기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하는 보통 사람들, 무수한 ‘우리들’이다. 위험천만의 대형 사고에서 한명도 죽거나 다치지 않는 기적은 이들 덕분에 가능했다. 어떻게 보면 미국 찬가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현대 산업사회에 대한 찬가로 읽힐 수도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람들을 더 많이 생각하게 또 더 지혜로워지게 만들고 거기에서 느슨한 합의를 효과적으로 이끌어내는 유능한 지도자는 필요하지만, 이 비뚤어진 세상을 자기가 나서서 한번에 ‘바로잡겠다’는 ‘백마 탄 초인’ 따위는 별로
[홍기빈의 클로징] 스머프 민주주의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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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체의 피부처럼 영화의 질감도 영화마다 다 다르다. 한편의 영화에서 ‘룩’을 구현한다는 것은 질감을 결정하는 일이다. 질감을 표현하는 방법은 카메라의 매체적 특징뿐만 아니라 렌즈의 특이성, 빛의 성질인 광질과 광량, 빛을 통한 색의 사용과 미술에서 색의 활용, 공간과 소품의 소재 특성, 영화 안 의상의 소재와 표면 성질 등 다양하다. 이런 요소들은 영화 안에서 작용하고 있지만 서사에 가려 잘 인지되지는 않는다. 영화를 보면서 질감으로 인지되는 요소는 화면의 거침과 부드러움, 선명함과 지저분함과 같은 인상일 것이다. 그것을 결정짓는 가장 큰 요소가 화면 위 그레인, 필름에서는 입자, 디지털에서는 노이즈라는 질감이다. 디지털의 입자는 말 그대로 노이즈라 배격되지만 필름의 입자는 디지털 시대에 점점 더 선호되고 있으며, 디지털 안에서 필름의 입자를 표현하려는 시도까지 늘고 있다. 필름의 입자는 화면을 거칠고 지저분하게 보이게도 하고 때로는 피사체의 형태를 선명하지 않게 하기도 한다.
[박홍열의 촬영 미학: 물질로 영화 읽기] 필름 질감의 미학, 필름의 ‘룩’과 우연성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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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리>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매캐한 매연과 천둥 같은 엔진 소리, 세상 쿨한 카레이서들의 목숨을 건 경주와 사업가들의 냉철한 비즈니스 담판…, 같은 것들보다 진정 즐거운 <페라리>의 순간은 바나나 한개에 있다. 페라리사의 명운을 건 1천 마일 레이스 ‘밀레 밀리아’ 도중 페라리사의 카레이서 피터(잭 오코넬)는 주유 지점에 내려 잠깐 쉬면서 바나나 한개를 까고 급히 한입, 두입 해치운다. 그리고 반쯤 남은 바나나를 엔초 페라리 회장(애덤 드라이버)에게 마치 버리듯 툭 건네준다. 평소 꽤 권위적인 엔초이지만 경주 중인 선수에겐 별다른 말도 못한다. 대신 엔초는 이 바나나를 자연스레 회사 직원에게, 직원은 정비공에게, 정비공은 카레이싱 구경 나온 동네 아이들에게 떠넘긴다. 130분짜리 <페라리>에 겨우 10초쯤 차지하는 이 웃긴 바나나 숏, 일련의 자그마한 몸짓들에 어떤 의미를 덧댈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거창한 의미나 상징을 이 바나나 자체엔 부
[비평] 장난질과 낙관, <페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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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그림 찾기. <리얼 페인>의 시작과 끝은 수미상관의 구조를 이룬다. 카메라는 동일한 동선을 따라 뉴욕 공항 로비를 훑고 동일한 좌석에 앉아 있는 벤지(키런 컬킨)의 얼굴로 다가간다. 차이점은 셔츠 착의 유무, 가방의 위치, 쇼팽의 곡, 영화 타이틀의 위치 등이 있다. 여기에 추가할 것은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다. 공항은 목적지를 둔 사람들의 설렘, 긴장감 그리고 피곤함이 교차하는 장소다. 사람들 자체가 계속해서 바뀌는 풍경으로 존재하는 이곳에서 벤지 혼자 멈춰 있다. 통유리창으로 내리는 햇볕 때문에 달라진 그의 낯빛에서 시간대가 달라졌음을 알 뿐이다. 원테이크로 촬영된 이 두개의 장면 중 무엇을 기준 삼아 ‘다름’을 판별할 수 있을까? 두 얼굴 사이에 놓인 것은 사촌 데이비드(제시 아이젠버그)와 함께 떠난 폴란드 여행이다.
이토록 특이한 우울감
<리얼 페인>은 한국 시장을 겨냥한 느낌이 들 정도로 한국인이 사랑해 마지않는 MBTI적인 캐릭터로 두 인물
[비평] 타인의 고통, <리얼 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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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리 라이카트의 세계는 길 위를 유동해왔다. 인물들은 좀더 나은 환경을 찾아, 설령 그곳의 실체를 확신하지 못해도, 이미 길 위다. 일시적인 이탈(<초원의 강>(1994), <올드 조이>(2006), <어떤 여자들>(2016))이건, 필연적인 여정(<웬디와 루시>(2008), <믹의 지름길>(2010))이건 그 행로는 주로 생존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은유가 아닌 현실 구조의 문제이면서도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인간의 내적 초상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세계의 심상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에서 고독한 방랑은 대체로 덜 가진 자의 고된 몫이지만 그 과정은 해결을 도모하는 대신,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길의 시간에 머문다. 그 길의 현재성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느린 호흡과 찬찬한 시선이 라이카트 세계의 육체적 리듬이자 태도다. 회한이나 향수, 낭만과 분노는 이 길의 속성과 거리가 멀다. 빈곤과 불안, 쓸쓸함을 피할 수 없으나 운이 좋으면 얼마간
[남다은 평론가의 RECORDER] 어제와 다른 오늘, <쇼잉 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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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만이 인간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 바오로 의사 신부(이진욱)의 제자 미카엘라 수녀(전여빈). 그가 병실을 떠나면 사람들은 수군거린다. “무슨 AI 같아.” 그만큼 원칙대로 행동하며 경직된 분위기를 풍기는 그의 앞에 유니아 수녀(송혜교)가 나타난다. 악령 들린 소년 환자 희준(문우진)을 구하겠다는 유니아를 얼떨결에 도왔으나 그는 아직 금기를 깰 자신이 없다. 그렇지만 죽어가는 소년에게 동질감과 유니아의 간절한 의지를 느낀 미카엘라는 그의 계획에 동참하기로 한다. 현재 배우 전여빈은 극장가의 타오르는 여인이다. <하얼빈>의 독립투사 공부인 역으로 가슴을 뜨겁게 했던 그가 이번엔 <검은 수녀들>의 미카엘라 수녀로 분해 다시 한번 속에 있는 무언가를 끓어오르게 한다.
- 한 생명을 살리겠다는 사람들의 합심으로 뭉클한 시나리오가 아니었을까 싶다. 대본에 대한 감상을 나눠준다면.
재밌게 본 <검은 사제들>의 세계관을 다시 잇는 이야기
[인터뷰] 자유로운 해방, <검은 수녀들> 전여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