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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Civil War)은 대한민국의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여전히 너무 멀거나 너무 가깝다. 한반도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심각한 내전을 겪었고, 그것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채 ‘냉전적 내전’의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마치 다른 국가인 양 살아온 지 너무 오래다 보니, 하루빨리 이 내전을 끝내고 하나의 국가를 복구해야 한다는 당위도 그럴 수 있다는 희망도 엷어져버렸다. 내전의 종식은 고사하고, 그냥 외국으로서 맞대어 살 뿐, 전쟁만 안 났으면 좋겠다는 (실은 설마 전쟁이 날까 하는) 생각으로 산다.
한국전쟁이라는 예외적 상황을 제하고, 근대적 의미에서의 내전을 겪어본 적이 없는 우리의 집단기억은 그래서 다소 어리벙벙한 감각으로 내전을 대하곤 한다. 그런데 내전은 의외로 거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대단히 실존적이고 실제적인 문제이다. 민족, 인종, 종교, 기타 이해관계 등에 의한 가파른 대립을 경험했던 나라들이 내전 상태에 처했던
[정준희의 클로징] 내란을 내전으로 바꾸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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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거사를 다룬 대작 <하얼빈>이 흥행 중이다. 뛰어난 영상미와 압도적인 화면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극단적인 명암 대비로 17세기 명화를 보는 듯한 장면들, 광활한 자연을 담은 아이맥스 화면, 부감숏 등 촬영이 훌륭하다. 그러나 단선적인 캐릭터와 연극적인 대사는 지적할 만하다. 가장 큰 문제는 서사이다. <하얼빈>은 안중근의 고결함에 집중하다 안중근이란 인물에게서 놓치지 말아야 할 주제인 ‘만국공법’과 ‘동양평화’를 고찰하지 못하고, 영상미에 도취되어버린 패착을 저질렀다.
하얼빈 총격이 갖는 세계사적 의미를 놓치다
<하얼빈>의 화면은 아름답지만, 배경용 걸개그림일 뿐 서사에 밀착하는 맛이 없다. 인물은 평면적이고 대사는 뮤지컬적이다. ‘거룩한 아이맥스!’랄까. 지나친 험구라고? 구체적으로 풀어보자면, 이런 식이다. 안중근(현빈)이 얼어붙은 강을 헤매다 동지들에게 돌아왔을 때, 첨예한 갈등이 오가는 장면이지만, 대사와 장면
[비평] 오늘날 안중근을 기린다는 것은, <하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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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안은수)은 전과가 있다. 이 정보는 영화 초반부, 지각한 영진이 진현(윤혁진)에게 핀잔을 들은 뒤 밖으로 나가면 옆자리 이 과장의 빈정대는 대사(“전과 하는 애들은 다 이유가 있어”)로 전달된다. 이런 대사가 영화의 도입에 한번 기입되고 나면 관객은 그 내막을 궁금해할 수밖에 없다. 움직임은 굼뜨고 말은 어눌하며 늘 무표정한 영진은 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걸까? 복지관장이 매일 캠코더를 들고 다니는 영진을 수상하게 여기며 ‘몰래카메라’를 연상하듯이, 자신을 변호하기는커녕 모든 종류의 오해와 왜곡에 스스로를 내놓는 이 미심쩍은 청년에게 혹시 험악한 폭력의 과거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우리는 내내 은밀하게 짐작한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는 진현의 말마따나 “잡범”이었다. 텔레마케팅 일을 하던 친구의 작업대출에 연루되어 6개월간 징역을 살다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행위는 공적인 언어로는 사기이고 불법이지만, 동시에 제도의 사각지대에서 벌어진 유감스러운 사태의 일면
[비평] 모눈을 벗어나는 얼음처럼, <부모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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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거>
디즈니+ / 감독 유선동 / 출연 김혜수, 정성일, 주종혁 / 공개 1월15일
플레이지수 ▶▶▷ | 20자평 - 긴장감을 무기 삼을 수 있을까, 일단 웃음으로 마무리
“여기는 드라마국처럼 큰돈은 못 벌어도 PPL은 받지 않는 지조와 자존심이 있고 그리하여 지난 10년간 시청자들이 가장 신뢰하는 프로그램 1위, 대한민국 탐사보도 프로 중 단연 시청률 1위의 <트리거>예요.” 강제 마약 투입이 포착된 기이한 살인사건과 광적인 사이비의 어두운 진실을 고발하기 위해 오소룡 팀장(김혜수)이 취재를 나섰다. 명실상부 탐사보도의 명맥을 이어온 오 팀장의 비법은 바로 잠복과 잠입이다. 위험이 도사리는 현장에 직접 나간 그는 원하는 ‘그림’이 나올 때까지, 듣고 싶은 진실을 발견할 때까지 죽치고 대기한다. 진실을 은닉한 장소를 호기롭게 탐색하고 촬영하고, 교주와 광신도를 위협하기까지 하는 저돌적인 면모는 오소룡의 중심축이자 저널리즘의 실낱같은 희망이기도 하
[OTT 리뷰] <트리거> <브라이언 존슨: 영원히 살고 싶은 남자> <컬러 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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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본 영화 중 가장 쇼킹하고 강렬한 영화 <서브스턴스>. 이 영화를 만든 코랄리 파르자 감독을 첫 장편 데뷔작인 <리벤지>로 2018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방문했을 때 만난 적이 있다. 그때 난 전날엔가 후배 기자의 추천으로 막 <리벤지>를 본 후였는데 너무나 강렬하고 화끈한 영화에 홀딱 빠져서는 <리벤지>의 강렬한 핏빛 컬러의 배경천을 준비해두고 감독을 맞이했던 기억이 난다. <리벤지>는 그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대상 격인 부천초이스: 장편부문 작품상을 수상했다. <리벤지>와 <서브스턴스> 사이에 30여분 짜리 단편영화 <리얼리티+>가 있었던 걸 최근에 알게 되었는데 바로 그 영화를 CGV아트하우스 숏츠하우스에서 볼 수 있다니(아쉽게도 1월14일까지만 상영한다) 기대된다.
[archive] 코랄리 파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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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로스코 지음 김주영 옮김 위즈덤하우스 펴냄
마크 로스코는 예일대학교를 중퇴하고, 1920년대 초반 뉴욕에 정착하기로 결정한 후 줄곧 그림을 그렸다. 특히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를 지나면서 그림을 쏟아냈고, 1940년에서 1941년 사이 작품이 눈에 띄게 달라졌으며, <예술가의 창조적 진실>이라는 책이 될 글을 썼다. 현대 미술가 마크 로스코의 예술에 대한 생각을 만날 수 있는 책으로, 로스코의 아들이 상속받은 원고를 편집해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은 마크 로스코의, 예술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며 무엇일 수 있는지에 대한 사유를 담고 있다. “예술에 관해서 우리 사회는 진실을 취향으로 대신해버렸다. 우리 사회는 유쾌하면서 책임감은 덜한 것을 찾아냈다. 그래서 모자나 신발을 바꾸듯이 자주 취향을 갈아 치운다.”
그에게 예술은 행동의 형태이자 사회적 활동의 형태이다. 예술은 의사소통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살아남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다른 전통들과
[culture book] 예술가의 창조적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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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영상 콘텐츠에 대한 대중의 반응에는 무의식적인 소망, 세대적 염원이 담겨 있다. 한때 사람들은 냉철한 여성 캐릭터를 “걸크러시”라며 환호하고, 갈등을 극적으로 뒤집는 이야기를 “사이다 마신다”고 표현했다. 이 현상의 뒤편에는 여성 중심 작품이 가뭄이거나, 극적 카타르시스로 대리만족을 느끼길 원하던 시대상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최근 유독 눈에 많이 띄는 반응은 바로 “사람들이 정말 순하다”이다. 특히 90년대 초중반,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진행한 깜짝 카메라 영상 아래에는 붙여넣기를 한 듯 비슷한 반응이 쏟아진다. SBS <초특급 꾸러기 대행진>의 한 코너인 ‘깜짝 비디오’는 일상 곳곳에서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만들고 사람들의 반응을 살핀다. 분식집에서 계산을 하려 하니 라면 한 그릇에 2만원이라고 하고, 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아저씨는 “저 아가씨가 대신 계산할 거예요”라고 말하고 나가버린다. 또 물수건이 없다는 식당 주인은 뻔뻔하게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내어온다.
[culture tview] ‘깜짝 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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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살 소녀 카린은 엄마를 여의고 아빠와 함께 지내고 있다. ‘엄마 기일 전까지 돌아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아빠가 떠난 뒤, 혼자 남은 카린의 삶에 37살 고양이 요괴 앙주가 등장한다. 앙주와 함께 지내면서도 카리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힘들어하고, 결국 앙주와 카린은 엄마를 만나기 위해 저승으로 여행을 떠난다. 고양이 요괴와 소녀의 특별한 여름 여행을 기록한 <고스트캣 앙주>는 이마시로 다카시 작가의 만화 <고양이 요괴 안즈 짱>이 원작이다. 실사 영상에 애니메이션을 입히는 로토스코핑 기법으로 연출된 <고스트캣 앙주>는 <린다 린다 린다> <심야식당>시즌2, 3 등을 연출한 야마시타 노부히로가 실사 연출을 맡고, <짱구는 못말려> 시리즈와 <하나와 앨리스: 살인사건>의 애니메이터로 활동한 구노 요코가 애니메이션 연출을 맡았다. 따뜻한 분위기의 작화 속에서 일면 엉뚱해 보이는 앙주가 까칠한 카린과 만들어나가
[coming soon] 고스트캣 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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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황금곰상은 어떤 영화에 돌아갈까. 제75회 베를린국제영화제(이하 베를린영화제)가 2월13일부터 23일까지 열린다. 올해 영화제는 신임 집행위원장 트리시아 터틀이 취임한 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행사다. 지난 5년간 베를린영화제는 두명의 집행위원장이 경영과 예술을 나누어 운영되는 등 진통을 겪었다. 다시 1인 집행위원장 체제로 운영되는 영화제가 어떤 새로운 모습을 선보일지 기대를 모으고 있다. 당장 눈에 띄는 변화는 ‘퍼스펙티브’ 섹션의 신설이다. 터틀은 전임 집행위원장 중 한명인 카를로 카트리안이 실험영화를 위해 만들었던 ‘인카운터스’ 섹션을 폐지하고 신인감독들의 데뷔작을 모아 상영하는 퍼스펙티브 부문을 새로 선보인다. 심사위원장은 <벨벳 골드마인> <캐롤> <메이 디셈버> 등을 연출한 영화감독 토드 헤인스다. 평생 공로상에 해당하는 황금명예곰상의 주인공은 배우 틸다 스윈턴이다.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룸 넥스트 도어&
[베를린] 틸다 스윈턴이 공로상 받는다, 제75회 베를린국제영화제 2월13일 개막… 개막작, 심사위원장 등 라인업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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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6일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가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비상임 위원 6인을 새로 임명하면서 영화계가 각종 우려를 표하고 있다. 영진위 의사결정 기구인 9인 위원회에 합류할 신임 위원들이 영화산업 현장의 목소리를 제대로 대변할 수 있을지에 의문이 쏠린 것이다. 6명의 신임 위원은 강내영 경성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교수, 길종철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교수, 김정기 신정회계법인 이사, 이정향 영화감독, 이현송 스마트스터디벤처스 대표, 조혜정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교수다. 영진위 9인 위원회의 전 관계자 A씨는 “현재 영진위 사업 중에 가장 영향력이 있는 것은 독립영화 지원 부문이고 갑자기 폐지된 지역 영화 사업까지도 품어야 하는 대목”인데 “현재 신임 위원 명단엔 해당 분야에 적절한 인사가 있는지 모르겠다”라며 인사의 방향성에 의문부호를 던졌다. 또한 영화정책 주요 관계자 B씨는 “한국영화의 각종 위기 상황을 빠르게 포착하고 대응해야 하는 자리에 최근 영화 현장과 스킨십이
균형성, 시기, 소통력 괜찮은가?, 영진위 신임 위원 6인 임명에 영화계의 우려 잇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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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그 자체는 고통이 아니지만 변화에 저항하는 것은 고통 그 자체다.” 알다가도 모를 알고리즘의 세계, 첫 번째. 요즘 계속 마음을 다스리는, 특히 불교 관련 명언들이 SNS 상단에 뜬다. 왜 그런지 가만히 생각해보니 정치 관련 영상과 게시물을 자주 봤던 게 시작이었던 것 같다. 도처에서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와 몰상식한 저항이 충돌 중이다. 시민의 목소리를 수렴하는 민주주의는 원래 느린 법이라 변화의 과정마다 우리에게 더 많은 인내심을 요구한다. 어떤 논객은 불안해할 이들을 달랠 신경안정제를 자처하고, 또 다른 논객은 북받쳐오는 감정에 눈물을 터트리며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답답한 소식이 뉴스를 도배하는 시기인 만큼 해독제가 되어줄 지혜의 한마디가 절실한데, 그걸 또 유튜브나 SNS 등의 알고리즘이 귀신같이 캐치해서 정치 관련 이슈에 종교·인문학적 격언을 세트 메뉴처럼 묶어놓았다. 뜻밖의 감사.
“늙었어. 자넨 늙었어~!” 알다가도 모를 알고리즘의 세계, 두 번째. 드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새해 단상. 견디는 힘과 참는 근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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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이 소개한 21편의 해외영화 신작에 이어, 올해 영화관에서 만날 수 있는 해외영화 신작을 총정리해보았다. 블록버스터도 예술영화도 각자의 방식대로 풍요로울 예정이다. 끝으로 수많은 수입사들이 작품 목록을 <씨네21> 편집부에 전하며 공통으로 덧붙인 메시지를 옮겨 적는다. “아직 올해의 칸영화제 라인업이 남아 있습니다. 아래 영화들의 개봉 시기가 조정될 수 있다는 점 꼭 명시해주시고요!”
*애니메이션 작품은 ‘목소리 출연’을 표기했습니다.
에단 헌트와 마블의 새로운 귀환, 2025년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해외영화 라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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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투어> Grand Tour
감독 미겔 고메스 /출연 크리스티나 알파이아테, 곤살루 와딩그통
“내가 본 아름다운 것들을 관객과 나누기 위해 영화를 만든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회고전을 개최한 미겔 고메스 감독이 <씨네21>에 전한 자신의 연출론이다.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고메스에게 감독상을 안겨준 <그랜드 투어>가 올해 3월 극장에서 정식 개봉한다. 공교롭게 <그랜드 투어>는 고메스 감독의 첫 칸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이자 고메스 영화의 첫 한국 개봉작이 되었다. 1917년 대영제국의 공무원 에드워드는 연인 몰리와의 결혼을 앞두고 도피성 여행을 떠나고 몰리는 에드워드를 쫓아 아시아를 횡단하는 ‘그랜드 투어’를 떠난다. 그랜드 투어는 인도로부터 출발해 중국 혹은 일본에서 끝내는 여정을 일컫는 단어로, 20세기 초 실제로 성행한 아시아 투어의 일종이다. 2019년부터 태국, 필리핀, 베트남, 일본 등을 오가며 영화를 촬영한 고메
씨네21이 선정한 2025년 해외 신작 리스트업 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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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 Superman
감독 제임스 건 /출연 데이비드 코렌스웨트, 레이철 브로스나한
“Look up in the sky! It’s a bird. It’s a plane. It’s a SUPERMAN!”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부작,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 등으로 자신만의 색깔이 담긴 히어로물을 입증한 제임스 건 감독이 이번에는 <슈퍼맨>으로 돌아온다. 올여름 개봉을 예정한 이번 작품은 2분가량의 예고편 공개부터 뜨거운 반응을 얻는 중이다. 특히 고단한 도시 생활을 견뎌나가는 평범한 청년 클라크 켄트와 자신의 초인을 인지하고 유용하게 활용하는 슈퍼맨 사이의 간극이 클수록 관객에게 전이되는 희열이 커지는데, 트레일러에서부터 그 묘미가 전달되어 높은 기대를 받고 있다. 미국 현지에서 진행한 <슈퍼맨> 보고회에서 주연배우 데이비드 코렌스웨트에 관하여 제임스 건 감독은 “그냥 좋은 슈퍼맨이나 좋은 클라크 켄트를 찾은 게
씨네21이 선정한 2025년 해외 신작 리스트업 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