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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1980년 5월20일 <전남매일신문> 기자 일동.” 1979년 12월12일 군사 반란 이후 전두환을 중심으로 구성된 신군부는 민주화 열기를 억누르고자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일으킨다. 이듬해 4월부터 반민주적인 정권에 저항하는 규탄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1980년 5월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 시민들에 의해 대규모 민주화운동이 일어난다. 5·18민주화운동은 오명과 누명을 딛고 있다. 모든 시민이 민주주의를 실현하겠다는 목표 하나로 광장에 모였지만 정권과 언론에 의해 폭도, 폭동, 간첩 같은 단어를 뒤집어쓰며 지역적으로 철저히 고립된 채 인권탄압과 민간인 학살, 불법 처형과 성범죄에 노출돼야 했다.
장선우 감독의 <꽃잎>(1996)은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과 계엄군이 자행한 대규모 학살의 처참한 그림자를
우리를 구원한 빛고을의 시간,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들 -<꽃잎> <화려한 휴가> <택시운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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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사상 대한민국엔 총 17차례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그중 16번은 이승만, 박정희로 대표되는 독재정권이 대한민국을 압제하던 20세기에 자행되었다. 마지막 계엄령 선포 이후 45년 만인 2024년 12월3일. 윤석열 대통령은 17번째 계엄령을 기습 선포했다. 이승만 정부는 1948년 제주도에서 벌어진 제주 4·3사건과 여수와 순천에서 벌어진 여수·순천 10·19 사건을 반란으로 간주해 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군은 제주도 중산간마을 주민들을 반동분자로 몰아 학살했고 여수와 순천에서도 대규모 군사 작전과 민간인 탄압이 이루어졌다. 이중 4·3사건은 다양한 영화를 통해 재현됐다. 조성봉 감독은 1996년 4·3사건을 다룬 최초의 다큐멘터리 <레드헌트>를 연출해 이듬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했다. 하지만 <레드헌트>는 여러 고초를 겪었다. 경찰은 조성봉 감독을 이적표현물 제작을 이유로 체포했고, 서울인권영화제에서 <레드헌트>를 상영한 당시 서준식 서울
권력자가 악용했던 계엄의 비극사, 계엄령과 한국의 영화들 - <레드헌트>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 <그때 그사람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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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이후부터 1980년대 후반 민주화가 꽃피기까지 한국은 길고 긴 독재와 검열의 시대를 지났다. 이 어둠의 시간은 한국의 영화사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수많은 영화가 국가의 주도하에 여기저기 잘려나갔고, 수많은 영화인이 억압당했다. 그럼에도 한국영화는 그 명맥을 이어 현재에 당도했다. 작금 한국영화가 있기까지의 그 어려움을 되살피는 일은 지금의 우리가 마주한 위기에 경종을 울리는 동시에 영화예술의 꺼지지 않는 생명력을 긍정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시민의 힘으로 대한민국 제1공화국을 타도한 1960년 4·19 혁명은 민주주의의 승리와 함께 한국영화의 풍요를 불렀다. 혁명 이후 5월부터 정부는 국가기관 주도의 영화 검열을 철폐·완화했고 6월엔 헌법 개정을 통해 언론, 출판을 비롯한 영화에 대한 검열을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8월부터 민간기구인 영화윤리전국위원회가 출범해 영화 심의를 시작했고 정부와의 협의를 통해 완전한 자율성을 보장받기 위해 노력했다. 잠깐의 자유
시대가 만든 바보들, 검열, 독재 시대의 한국영화 - 중앙정보부의 검열부터 블랙리스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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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영화는 참극의 기록과 보존, 재현이 시청각 매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저항이라 믿으며 카메라를 들고 독재와 검열의 시대에 목소리를 드높였다. 2024년. 대한민국 국민들은 12·3 내란이 벌어진 지 11일 만에 대통령의 직무를 정지시켰다. 촛불과 응원 봉을 들고 무장한 계엄군과 경찰에 맞서 “윤석열 퇴진”을 외친 풍경은, 분명 지난 70년간 세계 각지에서 터져나온 민중의 분노가 시대를 넘나들어 서로를 돕고 구하는 매치컷과 다름없다. 지금 <씨네21>은 영화가 관객과 함께 민주주의와 혁명을 부르짖은 역사를 되새기려 한다. 먼저 대한민국과 프랑스, 독일과 칠레와 이란에서 총칼로도 꺾을 수 없었던 혁명의 횃불을 영화가 어떻게 지피고 수호했는지 정리해보았다. 이어 서울 용산과 여의도를 오가며 현실과 영화 모두가 스러지지 않도록 목소리를 드높인 이들의 르포르타주를 담았다. 영화가 앞서서 나가며 깃발을 나부꼈으니, 산 자인 우리가 따르며 뜨거운 함
[특집] 영화로 돌아보는 민주주의 혁명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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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위기론을 마주하는 지금, 거장들이 건네는 안부에 우리는 결국 손 내밀게 되는 것일까. 2023년 스티븐 스필버그의 <파벨만스>가 <씨네21> 선정 올해의 해외영화 1위로 꼽힌 데 이어 2024년의 영화로는 <클로즈 유어 아이즈>가 다수의 고른 지지를 받아 1위에 올랐다. 필름영화의 물성, 그리고 목격과 기억의 성소로서 극장의 아름다움을 되새기는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동시대 관객이 잃어버린 많은 것들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빅토르 에리세 감독이 어둠 속 스크린 앞에 기꺼이 앉아줄 것을 요청했다면, 2위를 차지한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영화적 태도로 절망을 뚫고 전진하는 애처롭고도 씩씩한 보법을 선보인다. 전쟁과 경제위기, 심화된 고독 속에서 사랑하는 연인을 그리는 헬싱키의 프롤레타리아 드라마는 불쑥 찰리 채플린의 그림자를 이식해 찬란한 결말로 나아간다. 앞선 두 작품 위로 다시 검은 잿빛을 드리우는
[특집]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올해의 해외영화 총평, 6위부터 10위까지의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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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클로즈 유어 아이즈>
과작의 감독이 31년 만에 내놓은 영화를 향한 메시지,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 다수의 표가 모였다. 노년의 영화감독 미겔이 자신의 미완성 영화와 사라진 배우를 수십년 만에 다시 마주하려는 여정을 담은 영화다. 잊힌 것을 되살리기 위해 방랑하는 자의 여정은 동시대에 빅토르 에리세가 전하는 “망각을 위한 비망록”(김예솔비)으로 자리 잡는다. 16mm 필름으로 촬영된 영화 속 영화 <작별의 눈빛>이 스페인 내전 직후를 가리킨다면, 디지털 화면으로 전환된 영화의 몸통이 위치한 시대는 TV 범죄 수사 프로그램의 인기가 한창인 2012년이다. 종국에 기억을 잃은 훌리오를 찾아낸 미겔은 영사기사 친구의 도움으로 옛 필름을 꺼내어 그의 앞에 데려다놓는다. 그것도 아주 오래된 극장에서.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OTT 서비스의 등장으로 영화 보는 형태가 바뀌면서 영화관이 사라지고, 영화 관객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오늘날의
[특집] 2024 올해의 해외영화 베스트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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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제작자 <파묘> 김영민 프로듀서
<파묘>는 한국을 넘어 해외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국내외에서 이같은 호응을 이끌어냈다는 것만으로도”(문주화) <파묘>의 제작자는 “흔치 않은 기획을 여하튼 성공시킨 대담함”(김영진)을 지녔다. “창작자의 세계를 보호하며 넓힐 줄 아는” (이유채) 김영민 프로듀서의 섬세함이 빛을 발한 것이다. 김영민 프로듀서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안고 <씨네21>을 읽어온 독자로서 ‘올해의 제작자’에 내 이름이 호명됐다니 영광스럽고, 뭐라고 말씀드리기 어려울 정도로 감사하다”고 소감을 전했다. 김영민 프로듀서는 <파묘>를 준비하며 “우리만의 ‘험한 것’이 무엇일지 스태프들과 정말 많이 고민”하고 “‘이게 실제로 벌어지는 일일 수 있겠다’고 관객들이 영화를 믿게 할 방법을 수없이 강구했다.” 결과적으로 <파묘> 작업의 시작부터 끝까지 현실과 쉽게 타협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견지했다.
[특집] 2024 올해의 제작자, 올해의 신인감독, 올해의 시나리오, 올해의 촬영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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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감독 <파묘> 장재현 감독
<파묘>를 빼놓고 2024년의 한국영화계를 되돌아보기란 어렵다. 그만큼 “2024년 1분기는 내내 <파묘>에 대한 이야기, 패러디, 정보 공유로 가득한 시기” (이자연)였다. “오컬트의 장르 기조는 유지하면서 이를 한국적 상황에 맞게 이식”(허남웅)한 <파묘>는 “‘천만을 위한’ 기획 영화가 결코 주지 못하는 체험을 안긴다”(김소미). <검은 사제들> <사바하> <파묘>로 이어지는 “장재현의 오컬트 삼부작 여정은 한국 관객을 겨냥하는 장르 전개의 어떤 정반합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남선우)기도 한다. “뚜렷한 색깔, 대중적 호흡”(김소희)의 접점을 적절히 찾아낸 “혼종의 영화를 밀어붙이는 뚝심의 스토리텔러”(김소미)란 지지를 받으며 장재현 감독은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됐다.
장재현 감독은 “한해를 마무리하는 입장에서 올해의 감독으로 호명되니 뿌듯하고, 차
[특집] 2024 올해의 감독, 올해의 배우, 올해의 신인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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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한국영화계에선 거장들의 신작과 신인감독들의 장편 데뷔작이 고루 주목받았다. 홍상수 감독의 두 장편이 이번에도 이변 없이 높은 순위에 올랐고 <무뢰한> 이후 근 10년 만에 돌아온 오승욱 감독의 <리볼버>도 평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 밖에 <장손> <미망>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딸에 대하여> 등 네편은 모두 신인 연출자의 장편 데뷔작이며 <아침바다 갈매기는> <파묘>가 기성감독의 두 번째, 세 번째 장편영화임을 감안하면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는 창작자들의 작품 세계를 스크린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셈이다.
1위를 차지한 <여행자의 필요>는 홍상수 감독의 대체 불가한 작가성이 발휘됐다는 점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2위의 <파묘>는 뚝심 있게 오컬트 장르를 밀어붙여온 장재현 감독이 자신의 개성과 대중성을 균형 있게 녹여냈다는 점에서 호평받았다. 3위에 오른 &l
[특집] ‘영화가 알려줄 거야’, 올해의 한국영화 총평, 6위부터 10위까지의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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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여행자의 필요>
“언어와 언어 사이의 시간을 물색하는, 번역가의 영화.”(이보라) 홍상수 감독의 31번째 장편영화 <여행자의 필요>가 2위와 크게 격차를 벌리며 1위로 올라섰다. 극 중 이리스(이자벨 위페르)는 프랑스어 교습을 통해 인물 개개인의 감정을 깊게 어루만지는데 “그건 홍상수가 영화를 찍고 보여줌으로써 시도해온 무엇과 다르지 않은 듯”(남선우) 느껴진다. 윤동주의 시비 앞에서 이리스가 멈춰 섰을 때 생겨나는 정동, “이자벨 위페르와 윤동주의 신기한 결합”(듀나)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외국인 배우를 기용해 외국어로 극 전반을 채운 영화를 한국어를 하는 한국인으로서 겪을 수 있어 충만”(남선우)함을 느끼게 하는 한편 “<다른나라에서> <클레어의 카메라> <여행자의 필요>로 연작을 묶어본다면, 이번 작품은 홍상수 영화의 여행자로서 이자벨 위페르의 필요 또한 절감케”(김소미) 한다.
끊임없이 어디론가 이동하는
[특집] 2024 올해의 한국영화 BEST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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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극장가의 희비는 극명하게 엇갈렸다. <파묘> <범죄도시4> 두편의 천만 영화가 탄생했지만 그에 따른 낙수효과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영화 관련 예산의 삭감, 영화상영관 입장권 부과금 폐지 등의 소식도 잇따랐다. 그러나 언제나 그래왔듯 창작자들은 새 이야기를 길어올리고 역사의 순간에 카메라를 비췄다. 어려운 시기에도 영화인들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연말을 맞아 <씨네21>은 2024년 개봉작들을 회고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씨네21>이 선정한 2024 올해의 영화’를 추리기 위해 진행한 설문에 총 39명의 영화 평론가와 기자가 화답해주었다(본 설문은 2023년 12월1일부터 2024년 11월30일까지의 극장 개봉작, IPTV 및 스트리밍서비스 최초 공개작을 대상으로 했으며 재개봉 영화는 포함하지 않았다). 한국영화와 해외영화 모두 거장들의 신작이 고르게 호평받았는데 특히 한국영화에서는 신인들의 장편 데뷔작이 다수 호명됐다는 점
[특집] 2024 올해의 영화 한국영화·해외영화 베스트, 올해의 감독, 올해의 배우, 제작자, 시나리오, 촬영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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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교섭권은 부부가 이혼한 후에도 양육권 없는 부모와 친자가 만날 수 있는 권리다. 미성년 자녀의 정서 안정을 위해 보장되어야 하나 이 권리가 제대로 이행되기 위한 법적 장치는 아직 미흡하다. 이주아 감독의 데뷔작 <면접교섭>은 법적 사각지대에 있는 두 남성 김재훈과 배문상의 사연을 통해 면접교섭권 문제를 다룬다. 김재훈은 여성이 이혼 후 300일 안에 임신할 때 그 아이가 전남편의 아이로 추정되는 친생추정 원칙의 피해자이며 배문상은 양육자가 친자를 정신적으로 조종해 비양육자의 면접교섭권을 빼앗는 부모 따돌림의 피해자다. 영화는 면접교섭권을 둘러싼 복잡한 문제를 효율적으로 압축한다. 법적 분쟁을 이어가는 두 피해자의 에피소드를 담아내되 신파를 최대한 덜어낸 담백한 연출도 인상적이다. 다만 법적 해결 자체에 집중해 면접교섭권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문화적인 맥락을 더욱 깊숙이 건드리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리뷰] 온화함에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갔더라면, <면접교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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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록 니코(옹성우)는 아버지를 따라서 산타의 썰매를 끄는 산타 비행단의 일원이 되기로 한다. 입단식을 가지려는 순간, 검은 순록 스텔라(김지은)가 날아와 도전장을 내민다. 두 차례의 시합을 치른 둘은 다음날 마지막 승부를 겨루기로 한다. 니코는 스텔라와 친해지려는 순진한 마음에 산타의 썰매를 보여준다. 다음날 썰매가 사라지고 크리스마스가 취소될 위기에 처한다. <니코: 오로라 원정대의 모험>은 2008년부터 제작된 아동용 크리스마스 애니메이션 <니코> 시리즈의 3편으로 크리스마스영화로 완성도가 빼어나다. 두 순록의 성장을 그린 플롯은 군더더기가 없으며 크리스마스영화 특유의 종교적 색채를 덜고 용서와 성숙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담백하게 전달하는 화법도 인상적이다. 수준급의 캐릭터디자인과 더빙, 비행전을 보는 듯한 썰매 추격전의 긴장과 스펙터클은 어린이 관객을 즐겁게 하기에 충분하다.
[리뷰] 5살 나에게 선물하고 싶은 다정하고 지혜로운 성탄절 동화, <니코: 오로라 원정대의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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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엘리자베스(레나테 레인스베)는 아들 아르망의 담임 교사인 순나(테아 람브렉트스 바울렌)로부터 이유 모를 연락을 받고 학교로 향한다. 학교에 간 엘리자베스는 자초지종을 일방적으로 전해 듣는다. 아르망이 급우 욘에게 불미스러운 일을 가했고 이를 좌시할 수 없는 욘의 부모 새라(엘렌 도리트 페테르센)와 앤더스(엔드레 헬레스트베이트)가 문제를 공론화한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아들에게 드리운 추문을 확신하는 상대 부모와 학교측에 분노하고, 상대 부모는 당연한 조처라며 엘리자베스를 몰아붙인다.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는 극접 촬영, 통제된 조명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폐소적 환경에 관객과 캐릭터를 가둔다. 매년 칸영화제에서 첫 번째 장편영화를 만든 신인감독에게 수여하는 황금카메라상 수상작이다. 감독인 할프단 울만 퇸델은 리브 울만과 잉마르 베리만의 손자이다.
[리뷰] 발작적으로 웃기라도 할 수밖에 없는 실험실에서,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