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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보그>의 인기 모델이자 수많은 사진가들의 예술적 영감이었던 리 밀러(케이트 윈슬럿). 그는 더 이상 누군가의 피사체가 되길 거부하며 직접 카메라를 든다. 사진기자로서 리 밀러가 향한 곳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장 한가운데다. 군인들은 리 밀러를 여성이라는 이유로 동등한 일원으로 취급하지 않지만, 리 밀러는 이에 굴하지 않고 <라이프>의 기자 데이비드(앤디 샘버그)와 함께 프랑스와 독일을 오가며 전쟁의 참상을 카메라에 담는다. <리 밀러: 카메라를 든 여자>는 리 밀러의 파란만장한 70년 인생 중 그가 종군기자로 활동한 시기에 집중한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히틀러의 욕조에서 목욕하는 리 밀러 본인의 사진은 물론,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던’ 전쟁을 여성주의적 시선에서 기록한 여러 사진이 영화의 문법으로 재현된다. 각 사진에 얽힌 에피소드 또한 리 밀러의 평전에 기초해 실제로 일어났을 법한 서사로 각색됐다. 영화의 태도에도 주목할 필
[리뷰]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던 전쟁을 여성주의적 시선에서, <리 밀러: 카메라를 든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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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의 시애틀에도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는 두 연인이 있다. 레즈비언 커플 안젤라(켈리 마리 트란)와 리(릴리 글래드스턴)는 임신에 또 한번 실패한다. 둘에겐 시험관시술을 재시도할 경제적, 심리적 여유가 없다. 게이 커플 크리스(보웬 양)와 민(한기찬)은 관계의 지속을 고민한다. 한국인 유학생 민은 크리스에게 청혼하지만 크리스는 제도의 안정성 안에서 관계를 이어갈 자신이 없다. 안젤라와 민은 혈연 가족에 대한 고민까지 머리에 이고 있다. 안젤라는 앨라이 캠페인(차별을 겪지 않는 비당사자가 차별 당사자를 후원, 지지하는 운동.-편집자)을 펼치는 엄마 메이(조앤 첸)가 부담스럽다. 민은 할머니 자영(윤여정)으로부터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가업을 승계할 것을 압박받는다. 이때 민이 안젤라에게 위장결혼을 제안한다. 민과 안젤라가 서류상 부부가 된다면, 민은 보수적인 한국 원가정에 자신의 성정체성을 밝히지 않고도 영주권을 얻어 미국에서 크리스와 살 수 있다. 안젤라와 리는 결혼의
[리뷰] 포용적 사회통합에 필요한 요건을 변화구 삼는 스크루볼코미디, <결혼 피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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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영화는 과학과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공간적으로는 우주를 향해, 시간적으로는 미래를 향해 허구적 상상을 펼친다. 그리하여 때로는 현실과 거리가 멀어 보이고 때로는 현실을 거울로 비춰 상상적으로 변주한 듯한 세계의 모습들을 펼친다. 이러한 세계들의 형상은 다양하지만 당대의 배경에 비추어 매우 이질적인 요소들로 채워진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서사의 주인공은 대체로 인간이므로, 상상적 존재들은 인간 주체의 인식론적 시선을 경유하여 신비와 불온함을 품은 이물(異物)들로서 어떤 방식으로든 타자화되기 십상이다. SF영화의 역사는 상상적 타자들의 다양한 형상들을 제시하는 시도들로 채워져왔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 형상들이 창의성과 새로움이라는 가치를 어필하는 SF적 매혹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것도 사실이다.
SF의 상상적 타자들의 목록에 우선 올라갈 이름은 인간에게 가장 본능적인 공포를 자아내는 외부자인 외계인일 테지만, 좀더 미묘한 층위의 철학적 성찰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들도 있다.
[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 SF영화 속 AI 기계의 존재론적 변화 - 기술적 타자에서 포스트휴먼의 주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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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강혜인이 2018년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에 캐스팅된 과정은 운명적이다. 오디션 서류 심사에서 탈락했지만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절박함을 담아 제작사에 메일을 보냈고 마침 합격자 중 한 자리가 비어 기회가 생겼다. 그렇게 인간을 돕기 위해 제작된 헬퍼 봇-6 클레어 역을 따내며 <오! 당신이 잠든 사이> <문스토리>에 이어 무대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영화 <어쩌면 해피엔딩>은 그의 올곧은 뮤지컬 여정에 산뜻한 옆걸음이 되어준 작품이다. 옆집에 사는 또 다른 헬퍼 봇 올리버(신주협)를 만나 새로운 감정을 배워가는 클레어처럼 강혜인 역시 낯선 장르에 도전하며 자신만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 <어쩌면 해피엔딩>이 첫 영화라고.
공식적으로는 그렇다. 비공식적으로는 <우아한 밤>이라는 단편영화가 있다. 대학에서 뮤지컬을 전공했는데 영화 전공 친구들이 뮤지컬영화를 찍고 싶다고 찾아와 참여했었다. 이원회
[인터뷰] 고요하게 밀어붙이기, <어쩌면 해피엔딩> 배우 강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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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뮤지컬 <니진스키> <데카브리>, 드라마 <무인도의 디바> <졸업> <노무사 노무진>, 영화 <검은 수녀들>까지 2017년 뮤지컬 <난쟁이들>로 데뷔한 이래 배우 신주협은 다매체에서 열의 있는 행보를 펼쳐왔다. “연기를 시작할 때부터 경계 없이 활동하고 싶었다”는 그는 그 꿈을 현실로 이어갈 수 있음에 감사함을 전했다. 영화 <어쩌면 해피엔딩>은 두 번째 올리버 도전기다. 2018년 재연된 동명 뮤지컬에서 처음 사람과 흡사한 ‘헬퍼 봇-5’ 올리버 역을 연기한 그는 스크린에 전보다 더 사실적이고 섬세한 로봇을 불러냈다.
- 영화 제안을 받았을 때를 어떻게 기억하나.
처음에는 거절했다. 큰 사랑을 받는 작품이니 욕심 내면 안된다고, 그러다가 체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주변에서 용기를 많이 줬다. 올리버라는 좋은 캐릭터를 영화로도 보여줄 기회이니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응원에 부담을
[인터뷰] 이토록 사실적인 열정, <어쩌면 해피엔딩> 배우 신주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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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8년 한국, 제주 이주 정책이 시작돼 한적한 서울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남자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정체는 ‘헬퍼 봇-5’ 올리버(신주협). 사람을 돕기 위해 제작됐지만 주인 제임스(유준상)가 떠나 홀로 살고 있다. 외롭기보단 평화로운 올리버의 생활은 이웃 로봇 ‘헬퍼 봇-6’ 클레어(강혜인)가 충전기를 빌리러 오면서 소란하고 예측 불가능해진다. 급기야 제임스를 찾으러 가는 제주행이 결정되고 베스트 드라이버인 클레어가 이 여정에 동참하면서 두 로봇은 뜻밖에도 사랑을 배워간다. 영화 <어쩌면 해피엔딩>은 동명의 저명한 대학로 뮤지컬을 스크린에 펼친 작품이다. 2018년 재연 무대를 함께한 배우 신주협과 강혜인이 다시 한번 올리버와 클레어로 분했다. 이미 친한 누나 동생 사이인 두 배우는 <씨네21> 스튜디오에 일찍 도착해 놀랄 만큼 어색함 없이 대기시간을 보냈다. 촬영을 시작하자 서로가 더 근사한 포즈를 취할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편안히 호흡을 맞췄다
[커버] 서로가 더 알고 싶은 우리의 결말은, <어쩌면 해피엔딩> 배우 신주협, 강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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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회를 맞이한 부산국제영화제는 올해 부산 어워드 (Busan Award)를 신설, 경쟁 영화제로 전환한다. 경쟁부문에 오른 14편의 아시아 작품에 대상, 감독상, 심사위원 특별상, 배우상, 예술공헌상 등 총 5개 부문의 시상을 진행한다.
BIFF #6호 [별점] 경쟁작 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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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오/한국/2025년/105분/비전-한국
9.22 L10 20:00 / 9.23 L3 15:30 / 9.24 C3 19:00
무명 배우 정미는 홀로 사는 아버지 철택을 데리고 병원에 갔다 심각한 이야기를 듣는다. 이제 그녀는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나 막막함을 느낄 여유도 없이 아버지를 간병해야 한다. 이혼 후 자유로운 삶을 꾸려가고 있는 현숙에게도 기어이 또 다른 미션이 주어진다. 간만에 찾아온 형제자매들은 현숙에게 구순이 되어가는 노모를 떠넘기려 한다. 그런데 실은 노모에게도 인생의 다음 장을 위한 새로운 계획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철들 무렵>은 시놉시스와 등장 인물들의 설정만 보면, 다소 분위기가 예상되는 영화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예상은 단 몇 분 만의 오프닝으로 기분 좋게 박살난다. 독특한 리듬의 편집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노련한 배우들의 연기가 어우러진 결과물이 인상적이다. 앞으로의 한국 독립 영화에서 자주 보고 싶은 기발함이다. 가족으로 인해
BIFF #6호 [씨네초이스] 철들 무렵 Coming of 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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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시간이 모자를 정도로 다채로운 이벤트들로 가득했던 주말의 끝자락. 어느덧 부산국제영화제도 전체 일정의 딱 절반에 해당하는 5일 차를 맞이했다. 문화계 명사들과 극장에서 인생 영화를 보고 직접 이야기를 듣는 두 차례의 까르뜨 블랑슈와 뜻밖의 케미스트리를 선보인 오픈 토크까지. 이 정도면 관객들에겐 알차다 못해 배부를 정도로 든든한 고봉밥 같은 하루가 아니었을까.
까르뜨 블랑슈: <뜨거운 오후> X 손석희
<뜨거운 오후>의 북미 개봉일이었던 1975년 9월 21일에서 딱 50년의 시간이 지난 오늘. “저조차도 큰 화면으로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는 것은 처음”이라며 언론인 손석희는 인생 영화를 관객들과 함께 본 소감을 객석과 공유했다.
관객과의 질문을 가지는 시간 중 베테랑 앵커였던 손석희마저 허를 찔린 날카로운 질문들이 속속히 등장했다. 그 중의 백미는 “만약 언론인 손석희가 <뜨거운 오후>에 대한 보도 헤드라인을 정한다면”이었다. 긴 고
BIFF #6호 [화보] 알차도 너무 알찬 BIFF의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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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장과 영화의 의미를 되새기는 단편 앤솔로지 기획에 참여하게 된 배경은.
윤가은 신작 <세계의 주인> 편집이 막 끝나가고 있을 때 앞서 두 편의 장편 영화(<우리들> <우리집>)를 함께 만들었던 제정주 대표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열심히 영화 작업을 마치고 난 뒤 아직 시동이 꺼지지 않은 시점이라 무엇이든 좀더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차였다. 마음이 자칫 헛헛해지려고 할 때에 이 작품을 만나 다행이었던 셈이다. 씨네큐브는 개관 당시부터 지금까지 실제로 내가 가장 많이 찾은 극장이기도 하다. 여러 의미가 뒤섞여, 조금 이례적으로 무턱대고 뛰어들게 됐다.
이종필 나도 <파반느> 후반작업이 거의 완성되어가는 시점에 제안을 받았다. ‘극장의 시간들’을 말하는 작품에 왜 침팬지 이야기냐고 물으신다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 영화의 상당 부분이 실제로 내가 겪었던 일이다. 2000년 즈음에 어느 책을 접한 것을 계기로 동물원에 가서
BIFF #6호 [스페셜] 우리가 출발하는 곳, <극장의 시간들>이 남긴 풍경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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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회를 맞이한 부산국제영화제에 방문한 이재명 대통령과 영부인 김혜경 여사가 “영화 산업 지원”을 약속하는 자리로 선택한 영화가 <극장의 시간들>이란 점을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겠다. 가볍게 시작하자면 두 개의 단편을 묶은 앤솔로지 영화의 길이는 62분. 우선 너무 길지 않은 영화라는 점도 무관하지는 않아 보인다. 진지하게는, 동시대 산업의 중심에 있는 밀레니얼 세대 감독들이 극장과 영화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작품이라는 의미가 마침 절묘히 맞물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2013년 <전국노래자랑>으로 데뷔한 이종필 감독은 5번째 장편영화인 신작 <파반느>의 개봉을 준비 중이고, 2016년 <우리들>로 데뷔한 윤가은 감독은 신작 <세계의 주인>을 토론토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선보인 뒤 바쁘게 부산을 찾았다. 신작 투자와 흥행의 이중고에 시달리는 영화산업의 위기론이 만연한 시기에 단단한 차기작을 완성해 낸 두 감독에게 앤솔로지를 위해 뭉칠
BIFF #6호 [스페셜] 우리가 출발하는 곳, <극장의 시간들>이 남긴 풍경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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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 로즈니차. 이 이름의 무게는 우리가 사는 현실의 풍경이 전쟁의 이미지로 휩싸이고 있는 지금, 더 무겁다. 1964년 벨라루스에서 태어나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자란 그는 2000년 무렵부터 꾸준히 인류의 폭력을 다큐멘터리로 목도하고, 극영화로 전환해 왔다. 비극의 현장을 비극 그 자체로 진술했던 그의 마스터 클래스 제목이 ‘증언의 방식: 바라보고 기억하다’임은 세르게이 로즈니차의 경력을 일약 압축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 발생한 인간들의 고통과 시체 더미를 보여준 다큐멘터리 <봉쇄>(2005), 한 러시아 트럭 운전사의 시선을 빌려 인간의 갖은 악행을 로드 무비 형식으로 풀어낸 극영화 <나의 기쁨>(2010) 등 세르게이 로즈니차의 세계는 늘 우리의 비극적 감각을 일깨우는 파문으로 이어져 왔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아이콘 섹션에 초청된 그의 신작 <두 검사>(2025) 역시 1937년 스탈린 체제의 권위적 부조리를
BIFF #6호 [스페셜]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 마스터클래스 ‘세르게이 로즈니차, 증언의 방식: 바라보고 기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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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오즈 야스지로 탄생 100주년 회고전에서 처음 그와 사랑에 빠진 대니얼 라임 감독.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오즈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그와 함께 성장하는 수련을 이어오고 있다. 영화 거장들과 영화 현장의 “숨은 영웅”들을 탐구하는 단편 에세이나 다큐멘터리로 채워진 그의 필모그래피는 그는 “작곡가, 프로덕션 디자이너, 촬영 감독 같은 장인들”의 일상과 개인적인 경험이 어떻게 작품으로 발현되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다뤄왔다.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전까지는 그 사람을 온전히 알 수 없다’는 철학을 극한까지 밀어붙여 ‘메소드 다큐멘터리 감독’이라 불린다는 그는 이번엔 오즈의 발자취를 따라 일본을 여행하고, 오즈가 시나리오를 썼던 곳에서 영화를 편집하며 사랑하는 사람의 본질에 다가서고자 했다. 그렇게 완성한 신작 <오즈 야스지로의 일기>는 오즈의 생을 이루는 많은 구성요소 중 그 삶에 있던 ‘진흙’, 즉 전쟁에서 겪었던 고통과 상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
BIFF #6호 [인터뷰] 보이지 않는 붉은 실을 따라, <오즈 야스지로의 일기> 대니얼 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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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밤 자정 세 편의 영화를 연달아 상영하는 부산국제영화제의 ‘미드나잇 패션’은 밤샘마저 각오한 가장 열정적인 영화 팬들이 모이는 자리다. <프로텍터>의 월드 프리미어를 앞두고 마주 앉은 밀라 요보비치는 진지한 목소리로 “이후 편집 과정에서 부산 관객들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고 싶다”라며 “영화를 위해 개선할 점 세 가지만 말해달라”는 이례적인 요청을 건넸다. 데뷔 40년 차. 틴에이지 모델로 시작해 <제5원소>(1997)의 히로인이 되었고,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를 15년간 이끌어온 배우에게 신작 <프로텍터>는 또 다른 분기점이다. 프로듀서로서의 역량을 시험하고, 한국 제작진과의 협업을 통해 가능성을 모색하며, 동시대 여성 액션의 현실적인 의미를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길어 올린 밀라 요보비치의 진솔한 목소리를 전한다.
- 부산에 온 소감은.
밀라 요보비치 정신없지만 흥미진진하다. 우리가 마음과 영혼을 쏟아부은 이 작은 영
BIFF #6호 [인터뷰] ‘다른 할리우드 영화’이자 ‘다른 한국 영화’가 되기를. <프로텍터> 배우 밀라 요보비치, 애드리언 그런버그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