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4년, 사이타마현 산속에서 고가의 장기말과 함께 신원 미상의 사체가 발견된다. 경찰은 수사를 이어간 끝에, 혜성처럼 등장한 천재 장기 기사 케이스케(사카구치 겐타로)를 용의자로 지목한다. 곧 시신이 전설적인 도박꾼 토묘(와타나베 겐)로 밝혀지고, 내기 장기의 세계에 잘못 발을 들인 케이스케의 기구한 삶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파이널 피스>는 국내에서는 아직 생소한 일본식 장기(쇼기)를 소재로 삼은 미스터리 스릴러다. 영화는 대국의 내용보다 인물의 표정과 감정선에 주목한다. 숨 막히는 두뇌 싸움을 기대했다면 다소 맥이 빠질 수 있다. 시종일관 이어지는 비장한 분위기만 견딜 수 있다면 따스한 일본 풍광 속에서 빛나는 사카구치 겐타로의 눈망울이 반겨줄 것이다.
[리뷰] 수읽기는커녕 바둑알로 사람을 패던 모 영화가 떠오른다, <파이널 피스>
-
부유한 엘리트 가정에서 자란 16살 소년 엔조(엘로이 포후)는 오랜 방황 중이다. 적성에 맞지도 않는 건설 현장 견습생 생활은 그가 자유로운 듯하지만 숨 막히는 가정에 할 수 있는 최선의 반항이다. 그는 건설 현장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피해서 온 블라드(막심 슬리빈스키)에게 미묘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제78회 칸영화제 감독주간 개막작인 <엔조>는 감각적 퀴어영화를 만든 <120BPM>의 로뱅 캉피요의 신작이다. 고 로랑 캉테와 오랜 파트너로 활동한 캉피요가 고인의 유작 프로젝트를 이어받아 완성했다. 거장 다르덴 형제와 자크 오디아르가 제작으로 참여했다. 이번 영화에서는 기성 사회에 저항하는 청년의 초상이 여름의 계절감과 어우러져서 서정적으로 그려진다. 사운드와 미장센이 인상적이다.
[리뷰] 이제는 아지랑이로 다가오는 꿈, 사랑, 그리고 반향을 여름에 담다, <엔조>
-
버스 기사 사와이(야쿠쇼 고지)와 나오키(미야자키 마사루), 코즈에(미야자키 아오이) 남매는 6명이 죽은 버스 납치극의 생존자다. 사와이는 트라우마로 2년 동안 방황하다가 규슈로 돌아온다. 그의 가족은 반기기는커녕 연쇄살인 용의자로 의심한다. 가출한 사와이는 고아가 된 나오키와 코즈에 남매의 집에서 동거하기로 한다. 어느 날 그는 남매의 사촌 아키히코(사이토 요이치로)까지 데리고 트라우마를 마주하는 버스 여행을 가기로 한다. 21세기 일본영화의 걸작으로 불리는 <유레카>가 4K 복원으로 국내 최초 개봉한다. 아오야마 신지는 옴진리교 사린가스 테러와 수많은 연쇄살인이 남긴 사회적 상흔을 감싸안는 치유의 서사를 펼쳐간다. 세피아 톤 영상과 경이로운 롱테이크 등 영화는 3시간37분에 달하는 긴 러닝타임 동안 숭고미를 선사한다.
[리뷰] 러닝타임에 비례하는 생의 의지와 윤리, 트라우마 회복의 정도(正道)를 개척한 압도적 걸작, <유레카>
-
1979년 10월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향해 총을 겨눈 순간은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크게 바꾼 사건으로 남아 있다. <1026: 새로운 세상을 위한>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난 1946년부터 1979년까지 이어진 33년을 따라간다. 당시 뉴스 화면과 기록 자료, 재연 장면을 엮어 조선경비대 시절부터 유신체제와 부마민주항쟁에 이르기까지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균열을 차근차근 비춘다. 장준하 등 여러 인물의 삶도 함께 담아내며 권력 안에서 벌어진 갈등과 시대 변화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다큐멘터리와 드라마를 결합한 형식 위에 AI 기술과 퍼포먼스 요소를 더해 기존 역사 다큐멘터리와 다르게 실험적으로 연출한 점이 특징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우리가 맞이한 민주주의가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지 그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리뷰] 역사 다큐의 경계를 넓히는 새로운 시도, <1026: 새로운 세상을 위한>
-
-
쇼타(오타니 료헤이)가 식사를 하던 라멘집에 대성(진영)이 들어온다. 돌연 눈물을 보인 대성은 헤어진 연인과의 화해를 위해 그녀의 고향 에노시마에 찾아왔다고 말한다. 쇼타 역시 마음의 짐을 안고 한국으로의 출장을 준비하던 차였고, 허심탄회하게 대성과 술잔을 기울인다. 둘의 인연은 CEO인 쇼타가 쓴 사직서와 여자 친구에게 건네려던 대성의 편지가 바뀌면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쇼타씨의 마지막 출장>은 여행과 출장 명목으로 두 인물이 서로 삶을 바꿔 살아본 것과 다름없는 이야기다. 두 사람이 오랜 기간 끌어안고 있던 문제는 타인의 시선에서 새롭게 해석된 채 다음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쇼타와 대성에게도 자신의 삶을 회고할 시간이 주어진다. 일본, 한국을 배경으로 이방인까지 끌어안는 관계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무난하고 따뜻한 영화다.
[리뷰] 길을 헤매야 출구도 찾을 수 있다, <쇼타씨의 마지막 출장>
-
생명공학자 권세정(전지현)이 전남편 규성(고수)과 함께 서울 도심의 한 빌딩에서 개최된 체인스바이오 회사의 콘퍼런스에 참석한다. 이 회사의 CEO에게 앙심을 품은 동료 서영철(구교환)이 콘퍼런스 현장을 찾아와 자신의 몸에 백신을 투여하고는 무차별 바이러스 테러를 가한다. 순식간에 빌딩 전체가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로 가득해지고 건물 전체가 격리, 통제된다. 세정을 비롯해 안전요원 현석(지창욱)과 거동이 불편한 그의 누나 현희(김신록) 등 몇몇 생존자가 외부의 도움 없이 건물 어딘가에 숨어들어 있는 백신 보균자 영철을 찾아내 함께 탈출해야만 한다. 감염자 모두 하나의 지성체처럼 연결되어 군체를 이룬다는 설정이 인상적이다. 연상호 감독의 작품 전체가 하나의 군체를 이루듯 영향을 주고받으며 진화 중이다.
[리뷰] 죽으면 뭉치고 살면 흩어진다, <군체>
-
교외의 한적한 낚시터에 도착한 성철(정승민). 우연히 로드킬 사고를 낸 은별(류지민)을 도와주고 식사 약속까지 잡지만, 끝내 연락은 오지 않는다. 한편 통제 성향이 강한 영화감독 성민(손준영)은 이별 직후 새롭게 사귄 여자 친구와 여행길에 오른다. 하지만 그녀가 잠든 사이 몰래 펼쳐본 그녀의 일기장은 충격적인 내용으로 가득하다. 잡힐 듯 잡히지 않던 이야기는 정웅(강정웅)이 성철을 찾아오며 기묘한 변곡점을 맞이한다. 김경래 감독의 세 번째 장편 <이인>은 삶에 밀착해 있으면서도 미묘하게 어긋나는 정서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사건의 내막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으며 관객을 밀고 당기는 맛이 일품이다. 홍상수의 세계를 연상시키는 반복 구조는 건조한 톤을 구사하며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교묘하게 흐려놓는다.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리뷰] 그렇게 영영 영화 속을 헤매이고 말았답니다, <이인>
-
가족이라도 구성원마다 처한 상황과 고민의 정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세 가족은 상실의 아픔을 간직한 채 아무 연고도 없는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다. 그곳에서 아버지 광선(김재현)은 유능한 들개 사냥꾼으로 인정받지만, 정작 그는 자신이 죽인 들개와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는 자신의 가족이 포개짐을 느낀다. 장남 하준(남단우)은 사춘기 성장기의 자신을 이해하는 친구를 만난다. 막내딸 하나(진세인)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그리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아들은 아들대로, 딸은 딸대로 저마다 다른 고충과 고민을 안은 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간다. 아버지에서 시작해 아들을 거쳐 딸로 이어지는 서사를 따라가면 여러 겹으로 포개진 가족의 사연이 해소되지 않은 슬픔으로 연결된다. 가족구성원마다 각기 다른 화면비와 촬영 컨셉으로 설계한 것도 그런 의도가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이야기 곳곳에 숨겨둔 온갖 메타포들을 찾아내는 재미도 있다. 모든 장면이 흥미진진한데, 그중에서도 세 번째 챕터
[리뷰] 이민, 성장, 그리움 등 해소되지 않는 애틋함으로 홀린 듯이 끌어들이는 마술, <몽그렐스>
-
합창 4중주단의 멤버인 콜린(해리 멜링)은 공연할 술집으로 향하며 생각했을 것이다. 평소처럼 노래하고 관객들에게 팁을 받은 뒤 적당히 취한 채 집으로 돌아가는 하루를. 그러나 그날 처음 만난 레이(알렉산데르 스카르스고르드)에게 강렬하게 끌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콜린은 더는 익숙한 방식으로 살지 않는다. 뒷좌석에서 남이 이끄는 대로 가다가 직접 운전대를 잡고 원하는 방향으로 향할 때의 해방감이 이런 걸까. <뒷자리에 태워줘>의 카타르시스는 삶의 주도권을 자신이 잡고 있다고 자각하는 순간에서부터 시작한다. 부모와 함께 살며 말하기보다는 듣기를, 행동하기보다는 머뭇거리기를 택해온 콜린은 자유분방함을 넘어 파괴적이기까지 한 레이를 만나 견고했던 자기 규칙을 스스로 허문다. 상상만 하던 성적 만족을 좇아 움직이고, 지금 느끼는 이 감정에 솔직하기로 한다. 등만 잡아도 둘의 지금 분위기를 알 수 있는 예민한 촬영과 역학 관계의 긴장과 이완을 능숙하게 오가는 신예 해리 라이턴 감독의 역량
[리뷰] 내가 내 삶의 주도권을 쥐고 있음을 실감할 때, <뒷자리에 태워줘>
-
<만달로리안과 그로구>는 디즈니+의 TV시리즈 <만달로리안>의 극장판이다. <스타워즈> 시리즈 중에서는 7년 만에 등장한 극장용 영화다. <스타워즈 에피소드 6 - 제다이의 귀환>에서 5년이 지난, 신공화국 체제가 시작된 이후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현상금 사냥꾼으로 일하던 만달로어인 딘 자린(페드로 파스칼)이 그로구를 만나 새로운 인생 여정을 시작한다. 주로 악당들 목에 매겨진 현상금만 노리던 딘 자린이 신공화국군의 편에 서서 체제 전복을 꿈꾸는 제국군 잔당 무리를 처치하는 일을 맡게 되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은하계 전체가 신공화국 체제로 들어서긴 했지만 아직은 과도기라서 포스의 균형을 어지럽히는 제국군은 어디든 존재한다. 은하계 변방에 속하는 아우터 림이란 곳에서 제국군이 자주 출몰한다는 것을 알게 된 신공화국 소속 워드 대령(시고니 위버)은 딘 자린과 그로구를 불러 새로운 임무를 하달한다. 정체가 묘연한 코인 장군이란 사람을 찾아
[리뷰] 희망을 등에 업은 스페이스 카우보이, <만달로리안과 그로구>
-
<씨네21> 창간 30주년 특별 연재 ‘시네마 오디세이: 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의 다섯 번째 키워드는 ‘전승된 몸짓들’이다. ‘20세기의 기억’, ‘인간의 조건’, ‘통과하는 공간’, ‘생태 변이’에 이어 21세기 영화가 20세기로부터 전승하거나 변주하거나, 혹은 새로이 만든 영화 속의 움직임들이 무엇인지 살피고자 한다. 숏과 리버스숏이라는 문제의 계보, 깨어난다는 영화의 모더니즘적 특질을 짚은 뒤에 이어지는 것은 포스트-시네마를 두고 논해지는 ‘무엇을 어떻게 찍을 것인가?’의 이야기다. 디지털영화의 시대가 도래할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된 각종 촬영 장치의 작동 방식과 그 예시를 김지훈 중앙대학교 영화미디어학센터 디렉터가 설명한다. 영화의 몸짓이란 끝나거나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갱신되고 분화함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후엔 20세기풍의 시선 교환이 21세기 영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현기증>을 중심으로 이야기할 계획이다. 영화 속의 몇몇 움직임으로
[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 다수의 카메라, 새로운 현실성
-
날짜 2007년 11월13일
장소 서울
사진 <씨네21> 사진팀
2008년 <추격자> 개봉 직전인 2007년 겨울, 서울독립영화제에 출품한 12분짜리 단편영화 <汗>을 연출한 나홍진 감독을 인터뷰했다.
[Archive] <추격자> 개봉 직전
-
인디플러스 포항은 홍상수 감독의 신작 <그녀가 돌아온 날> 개봉을 기념해 그의 직전 작품인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를 함께 틀고 있다. 3월부터 관객을 만난 이탈리아영화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도 계속 상영 중이다. 규모는 작지만 심지 굳은 프로그래밍을 선보여온 이곳은 포항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독립영화전용관으로, 2017년 개관 이래 관람료 3500원을 유지해왔다. 직접 GV를 기획하고, 매거진을 제작하는 관객 동아리 ‘시너지’도 인디플러스 포항의 한축. 2024년에는 ‘꿈꾸는 어린이 영화제’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시도로 식구를 늘리고 있는 극장에 들러 시원한 바다 내음까지 맡고 가시길. 매주 월·화 휴관.
로타리냉면
인디플러스 포항 바로 맞은편, 붉은 벽돌 건물의 로타리 냉면을 알아보기란 어렵지 않다. 60년 전통에 걸맞은 예스러운 외관을 통과하면 오랜 시간 포항 시민들에게 사랑받아온 냉면을 맛볼 수 있다. 메뉴는 평양식 물냉면,
[씨네트립] 인디플러스 포항
-
5월16일과 17일 양일에 걸쳐 <신극장판 은혼: 요시와라 대염상>(이하 <요시와라 대염상>) 편집자 내한 GV가 열렸다. 소라치 히데아키 작가의 만화 <은혼>의 초대 편집자이자, 현재는 <주간 소년 점프>의 미디어 프로듀스실 실장으로 재직 중인 오니시 고헤이 편집자가 게스트로 초청됐다. <은혼>의 팬들 사이에서 오니시 편집자는 <은혼>의 또 다른 아버지로 불린다. 소라치 히데아키 작가와 함께 <은혼>의 초기 세계관, 캐릭터 설정을 구상했고 <은혼> 속 캐릭터로 등장하는 등 20년 넘게 <은혼>과 떼놓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21세기 만화 중 최고의 흥행작인 <원피스>의 편집자를 맡고, <귀멸의 칼날>을 발굴하는 등 동시대 만화·애니메이션 산업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틀간의 대화 자리에서는 <요시와라 대염상>에 대한
[기획] <은혼>은 잊었을 줄 알았습니다⋯ - <은혼> 초대 편집자 오니시 고헤이 내한 GV 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