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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덕여자대학교 공학 전환을 둘러싼 그간의 과정을 지켜보며 의문이 끊이질 않았다. 래커를 사용한 학생들의 평화적인 의사 표현을 일부 언론은 왜 폭력이라고 부를까? 여대와 이해관계가 없어 보이는 남자들이 왜 유독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여학생들을 비난할까? 학교는 학생 2889명과 교원 163명, 직원 124명의 의견을 1:1:1로 반영하는 것을 왜 ‘평등’이라고 말할까? 그러던 중 지난 12월3일 발표된 공학 전환 타당성에 관한 연구용역 결과를 전해 듣고 찾아본 50장짜리 슬라이드 자료는 충격적일 정도로 의문투성이였다. 공학 전환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이 자료에서 유일하게 제시된 객관적인 근거는 재정 안정화 시뮬레이션뿐이다. “유학생 증가, 대학 위상 향상에 따른 연구비, 재정지원사업 등 전입 및 기부수입이 매년 2%씩 상승한다고 가정할 경우, 2040년까지 안정적으로 운영될 것”을 보여주는 그래프가 포함된 슬라이드 한장이다. 나머지 공학 전환의 근거는 대부분이 추정일 뿐 실증적인 데이
[임소연의 클로징] 어떤 연구용역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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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 운전사 고로(야마자키 쓰토무)가 조수 건(와타나베 겐)과 한 라멘집에 들른다. 식사 도중 소동이 일면서 고로는 라멘가게의 주인 담뽀뽀(미야모토 노부코)와 가까워진다. 최고의 라멘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담뽀뽀를 고로가 돕기 시작하고, 이들은 라면 대가로 소문난 가게를 방문하거나 미식가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며 고유의 라멘 맛을 찾기 위해 고심한다. 담뽀뽀의 수련 과정이 극의 중심 서사이지만 카우보이 모자를 쓰는 고로와 식당을 찾는 주변인들의 이야기가 덧붙여지고, 이들의 관계가 주요하게 서술되는 등 서부극의 주요 클리셰를 흥미롭게 차용한 작품이다. 섬세한 미각의 욕구는 종종 성욕과 결부돼 그려지며 식사와 관련된 허례허식, 가사노동 문제에 관한 풍자도 극에 녹아들었다. 에둘러 표현하는 법 없이 음식을 경유해 인간의 모든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이타미 주조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다.
[리뷰] 더듬고 삼키며 가능한 모든 신체의 욕망을 탐닉하다, <담뽀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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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를 정비하는 건설 노동자 댄(키스 쿠퍼러)은 아들의 죽음으로 상실감의 파도에 빠져 지낸다. 아내 샤론(타라 맬런)과 딸 데이지(캐서린 맬런 쿠퍼러)와의 관계는 표면적으로 문제없어 보이지만 이들 또한 각자의 생활에서 자꾸만 삐걱댄다. 어느 날 지역 공동체에서 운영하는 극단을 알게 된 댄은 그곳에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준비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연기가 영 낯설었던 그는 무대에 함께 서자는 제안을 거절하지만 이곳에서 사랑을 마주하고 이별을 준비하고 운명을 거스르는 과정이 영 싫지 않다. 예술은 슬픔을 어떻게 승화하는가. <고스트라이트>는 가슴속에 응어리졌던 딱딱한 감정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용해되는지 천천히 흐르는 관점으로 응시하는 작품이다. 댄과 샤론, 데이지 역을 맡은 세 배우는 실제 가족이다.
[리뷰] 인간은 왜 시간을 내고, 비용을 들여, 슬픔을 ‘보고’싶어 하나요?, <고스트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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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성추행 피해자 지은(박율리)을 비난하는 폭로글이 올라온다. 충격을 견디지 못한 지은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자, 언니 소은(강서하)은 천재적 해킹 실력을 가진 사설탐정 준경(김민규)에게 추적을 의뢰한다. 전문적인 기술로 IP 추적마저 가로막힌 상황. 두 사람은 지은의 동급생들을 찾아 나서며 사건의 숨겨진 전말에 다가선다. 홍콩 추리 작가 찬호께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망내인: 얼굴 없는 살인자들>은 누구나 온라인에서 악마가 될 수 있는 시대를 정면으로 겨냥한 작품이다. 범인 색출에서 복수극으로 전환되는 후반부에는 기술 발전으로 나타난 현대의 새로운 범죄 양상이 두드러진다. 누군가의 죽음을 재미로 소비하는 탐정 캐릭터는 관객에게 일정한 거리 두기를 유도하지만, 서사가 지나치게 한 인물의 능력에 기댄 점이 아쉬움을 남긴다.
[리뷰] 익명성 뒤에 숨어 자라난 폭력의 시대, ‘빙고’, <망내인: 얼굴 없는 살인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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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후 사랑하는 딸마저 남편에게 빼앗긴 도아(권아름). 이혼소송과 양육권 분쟁, 불안정한 직장 생활에 지친 그녀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감정을 닫고 바위가 되는 법을 터득한다. 그러던 어느 날, 표현예술 치료 교실에 참여한 도아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치료 세션을 받던 중 마음 깊숙이 감춰두었던 트라우마와 정면으로 마주한다. <프리즘 오브 그레이 락>은 한국에서는 아직 낯선 그룹 치료를 소재로 다룬 작품이다. 주인공을 향한 폭언이 철저한 숏-역숏 구도 속에서도 인물들 사이의 단절감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감정선이 양극단을 오가며 몰입을 방해하는 지점도 있지만, 창작 안무와 잔잔한 명상음악이 맞물리는 순간만큼은 관객에게 분명한 치유의 파동을 전한다. 섬세한 감정 연출로 주목받은 곽민영 감독의 첫 장편이다.
[리뷰] 함께 부딪히며 균열을 내는 우리들의 생존 방식, <프리즘 오브 그레이 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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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파리에선 많은 것들이 변하는 중이다. 라디오의 시대가 완전히 저문 뒤 TV의 점령기가 왔고, 사람의 감수성보단 냉랭한 지식이 우선시되며, 엘리자베트(샤를로트 갱스부르)는 이혼 후의 삶을 맞닥뜨리고 있다. 엘리자베트는 딸 주디트(메건 노덤), 아들 마티아스(키토 라용리슈테르)를 책임지기 위해 평소 애청하던 라디오프로그램의 전화교환원으로 일하기 시작한다. 차근차근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던 엘리자베트의 가족은 정처 없이 떠도는 소녀 탈룰라(노에이 아비타)를 집에 들이며 또 다른 변화의 문턱에 선다. 1980년대 파리의 아름다운 정경에 녹아든 한 가족의 과도기를 잔잔한 속도와 낭만적인 필름의 질감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밤 무렵 센강의 물결처럼, 은은하고 어렴풋한 서정성이 영화 전반에 스며 있다. 제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상영작이다.
[리뷰] 1980년대 파리의 감성은 아픈 마음도 아름답게 바꿔낸다, <파리, 밤의 여행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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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집을 매개로 백년 동안의 독일사를 관통하는 <사운드 오브 폴링>에서 추락하는 것은 시간이다. 마샤 실린슈키 감독이 데뷔작 이후 8년 만에 완성한 두 번째 장편영화로, 알트마르크 지역의 한 농장 마을에 사는 네 소녀의 이야기가 비선형적 편집을 통해 응축되어 있다. 1910년대의 알마(하나 헤크), 1940년대의 에리카(레아 드린다), 1980년대의 앙겔리카(레나 우르첸도브슈키), 2010년대의 렌카(라에니 가이젤러)는 혈연이 아니라 오래된 벽의 기억으로 연결된다. 인물들은 프란체스카 우드먼의 사진처럼 종종 초현실적으로 묘사되고 카메라는 열쇠 구멍과 마룻바닥의 틈새에서 유령적 시선을 던진다. 나치 징집을 피하기 위해 자녀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부모, 근친 성폭력 등 시대가 묵인한 폭력과 트라우마는 <사운드 오브 폴링>에서 세대를 순환하며 전염된다. 거시사의 이면에 소거된 여성의 고통을 신체적, 내면적 증언으로 정화하는 기념비적 영화. 2025년 칸영화제 심사위
[리뷰] 순환하는 여성의 역사. 예리한 지각과 대담한 시간관으로 압도한다, <사운드 오브 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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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류현경 감독의 장편 데뷔작. 배우로 익숙했던 류현경이 연출·각본·주연을 맡고 배우 김충길과 함께 호흡을 맞췄다. 대본 없이 이야기의 큰 흐름만 공유하고 배우들의 즉흥적인 선택과 반응에 운명을 맡긴 이 영화는 우연과 자연스러움을 중심축으로 놓고 서사를 이어나간다.
이야기는 영화 촬영장에서 시작한다. 충길(김충길)과 현경(류현경)은 함께 출연한 영화의 촬영을 마친 뒤 뒤풀이에 참석하고 충길은 그곳에서 현경에게 고백을 한다. 이 고백은 흔히 기대하는 오래된 감정의 폭발이나 용기낸 결심과 거리가 멀다. 충분히 준비한 말도 아니고 고민 끝에 내린 결론도 아니다. 타이밍과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마음이자 말로 꺼내는 순간 어긋나버리는 감정에 가깝다. 현경 역시 그 고백을 편안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명확한 거절이나 대답 대신 설명할 수 없는 어색함이 두 사람 사이에 남는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건 고백 자체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백
[리뷰] 대본 없이 흘러가다 만나는 뜻밖의 힐링, <고백하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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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정과 동작이 크지 않은 인물인데도 ‘이’만의 얼굴이 각인된다. 책상에 앉아 오래 쓰는 사람만의 기색을 표현하는 것이 배우에겐 어떤 과제였나.
일상에 맞붙어 있는 영화다 보니 무언가를 부연 설명하듯 표현하면 오히려 넘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객이 이를 통해서 자신을 비추어보도록 내가 거울이 되길 바랐다. 캐릭터가 주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이야기하던 중 감독님이 버스터 키턴의 무표정에 가깝지 않겠냐고 던져준 게 좋은 단서가 됐다. <제너럴> 등 키턴의 영화들을 다시 찾아봤다. 긴박한 상황에서 그의 몸은 바쁘지만 얼굴은 절대로 인상을 쓰거나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는다. 이 무표정의 설득력을 영화에 잘 녹여내보고 싶었다. 작품을 준비할 때 여러 참고 자료를 보면서 캐릭터의 밑그림에 나름대로의 덧셈과 뺄셈을 해보는 단계가 있다. 이번에 도움을 받은 또 다른 영화는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가 주인공인 영화 <맹크>였다. 이의 입장이 되어 <
[인터뷰] 말부터 시작하는, <여행과 나날> 배우 심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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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현장의 심은경은 버스터 키턴을 떠올렸다. 무성과 무표정을 비집고 나오는 존재의 생명력이 <여행과 나날> 속 내성적인 시나리오작가 ‘이’에게 스미길 바라왔던 터였다. 창작의 슬럼프와 스승의 죽음을 동시에 마주한 이는 눈 덮인 야마가타의 작은 마을로 모처럼 휴가를 떠난다. 인생의 관문처럼 등장하는 여행지의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턱 막혀 있던 작가의 덩어리(writer’s block)에도 슬슬 반가운 균열이 생긴다. 2003년 아역으로 데뷔해 <써니> <수상한 그녀> 등에서 일찍이 주역으로 자리 잡고 2019년 <신문기자>로 한국 배우 최초로 일본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기까지, 배우 심은경 역시 자기를 깨고 재생하는 시간들을 거듭해왔다. 천생 배우로 달려온 지금까지의 그에겐 “매 순간, 매 신을 100%의 최선으로” 해내는 것이 너무도 중요했다. 30대가 되어 차츰 ‘나다움’에 편안해지는 법을 배우는 지금, 미야케 쇼 감독이 구현하는 오롯한
[커버] 나로서 조화로운 날들, <여행과 나날> 배우 심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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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발라드의 모든 것’을 다룬다고 감히 말해도 좋지 않을까. 음악평론가 김영대의 <더 송라이터스>는 ‘송라이터’와 ‘(노래라는) 이야기’를 두루 아우른다. 작사와 작곡의 역할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이야기되는 가요의 경향성에도 불구하고, 김영대는 글과 멜로디가 분리될 수 없음을 짚으며 ‘송라이터’라는 개념을 끌고 들어와 책을 쓴 것이다. 한국 발라드. 실연당하면 다 자기 마음을 읽어낸 것처럼 들린다는 그 장르 말이다. 지극히 통속적이어서 분석할 거리라고는 한줌 남아 있지 않은 듯 느껴지는 한국 발라드의 세계를 짚은 <더 송라이터스>는 그 자체로 끝내주는 플레이리스트의 구실을 한다. 첫곡이 나미가 처음 불렀고 후일 015B가 다시 부른 <슬픈 인연>이다. 1984년 일본에서 발표된 <키즈나>라는 곡을 일본 활동 당시 나미가 작곡가에게 받아와 한국에서 발표한 이 곡은 ‘발라드’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통용되던 1985년이라는 시대와 맞물린다. 유
씨네21 추천도서 - <더 송라이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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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가 소멸했다는 의미다. 그 세계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을 테지만,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붕괴가 된다. 나탈리 레제의 <창공의 빛을 따라>는 2018년 급작스레 작고한 남편, 극작가 장루 리비에르를 위한 애도의 책이다. “나는 미치지 않았다”라고 쓰는 나탈리 레제는 집에 들어서면서 세상을 떠난 남편의 콧노래를 듣고 기침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이어 적는다. “너는 곧 내게 올 것이다.” 미치지 않았지만 미치기 일보 직전이다.
<창공의 빛을 따라>는 세상을 떠난 남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회고하는 글은 아니다. 애도 자체를 화두로 삼아 뒤에 남은 자의 삶, 매일 상실을 절감하며 앞으로 힘겹게 밀고 나아가는 삶을 글로 쓴 것이다.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남긴 기록인 <애도 일기>, 조앤 디디온이 남편의 죽음에 대해 쓴 <상실>과 같은 책을 눈여겨본 독자라면 나탈리 레제의 <
씨네21 추천도서 - <창공의 빛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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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사고팔고 원하는 신체에 기억을 주입해 새 삶을 살아가는 플롯은 SF영화에서도 유구한 소재다. <토탈 리콜>이나 <셀프/리스>와 같은 영화는 물론이고 로맨스인 <이터널 선샤인>이나 최근작인 Apple TV+ 시리즈 <세브란스: 단절>도 기억과 신체의 복잡한 관계를 다루고 있다. 무엇이 나를 나답게 하는가, 라고 했을 때 어쩌면 외모나 신체적 특징보다는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이 진짜 나를 증명하는 특질이기에 무수한 작가들이 기억을 소재로 미래 세계를 그리는 것일 테다. <데드 헤드 대드>는 2057년 인간의 뇌를 스캔해 기억 정보를 저장해두는 시냅스 칩을 개발해 인류가 죽지 않고 살게 된 근미래를 그린다. 신체가 병들어 사망 선고를 받더라도 자신의 기억을 칩에 저장해두면 복제된 신체로 기억을 옮겨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주인공 현은 의체 개발을 하는 회사의 엔지니어로 일하며 전투용 의체를 개발하고 있다. 능력을
씨네21 추천도서 - <데드 헤드 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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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문제를 생각하면 문명 전체가 선택의 갈림길에 멀뚱히 서 있는 것만 같다. 지난여름 갑작스레 쏟아진 폭우도 그렇고, 이번 겨울은 또 예전보다 춥지 않으면서 변칙적으로 심한 추위가 닥치는 등 이상기후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더는 변덕이라는 말로는 품을 수 없을 듯한 변화가 닥칠 것 같다. 이 책도 그렇고 기후와 생태 문제를 다룬 책들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부분이 바로 자본주의가 약 200년 동안 지구의 자원을 추출하여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사이클을 돌려왔으나 이제 더는 자원을 뽑아다 쓸 수 없는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이다. 자원이 유한한데, 인류의 무한한 자유를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히 선진국 상류층 소비자들의 영향력이 크다고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소비를 자발적으로 줄여야 하고, 문명 자체의 변화를 유도해야 한다. 그런데 이 조별 과제 같은 문제를, 인류가 다 함께 힘을 모아 해낼 수 있을까? 대학 조별 과제 같은 작은 일도 갈등이 벌어지기 일쑤인데 하물며 인류 전체가 다 같
씨네21 추천도서 - <불타는 지구에서 다르게 살 용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