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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밤의 세상, 빛 한줌 들지 않는 상품들의 소우주.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에 맞춰 부드럽게 유영하는 지게차의 안무와 함께 영화의 최면적 시간이 열린다. 이력이 모호한 청년 크리스티안(프란츠 로고스키)은 창고형 슈퍼마켓에 견습사원으로 입사한다. 선임자 브루노의 가르침하에 그가 애써 배워야 할 일은 물류 운반용 지게차를 운전하는 일. 우연히 일터에서 마주친 여직원 마리온(산드라 휠러)에게 첫눈에 반한 크리스티안은 휴게실과 복도에서 그녀 주위를 배회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창문 하나 없는 창고에서 진행되는 야간근무자들의 일상을 담는다. 행동과 대화의 미니멀리즘, 속내를 알 수 없는 과묵한 주인공, 군더더기 없는 서사. 감독 토마스 슈투버의 스타일은 한껏 템포 느린 자크 타티 혹은 멜랑콜릭한 정서에 젖은 아키 카우리스마키를 연상시킨다. 곳곳에 배치된 코믹한 설정의 바탕엔 근원적 비애감이 깔려 있지만 영화는 사회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는 부적응자들의 초상을 더디고도 온정 어린 시선으로
<인 디 아일> 창문 하나 없는 창고에서 진행되는 야간근무자들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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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2월 3일. 대한민국은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함으로써 경제 주권을 잃었다. 대규모 구조조정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증가를 야기한 IMF 금융위기는 한국 사회의 풍경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아시아의 신흥 강국으로 평가받던 대한민국이 순식간에 국가 부도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 1997년 겨울의 급박한 상황을 재구성한 작품이다. 다른 이들보다 한발 앞서 금융위기를 직감한 한국은행의 한시현 통화정책팀장(김혜수)은 국가 부도 사태를 막기 위한 비공개 대책팀에 합류한다. 대응 방식을 두고 재정국 차관(조우진)과 번번이 충돌하던 시현은 IMF 총재(뱅상 카셀)가 협상을 위해 비밀리에 입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편 금융맨으로 일하며 한국 경제의 거품을 깨달은 또 다른 인물 윤정학(유아인)은 위기를 기회 삼아 국가 부도의 위기에 투자할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국가 부도를 일주일 앞두고 위기를 막기 위한 사람과 위기에 베팅하는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
<국가부도의 날> 국가 부도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 1997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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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란 무엇인가?” 1998년 9월 18일, 한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는 창립선언문에서 이렇게 물었다. 그리고 “이 난처하고 진부한 질문을 다시 시작하는 건 시대에 따라 독립영화의 겉모습이 변하더라도 그 밑바닥 정신만은 이어지고 지켜져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급변하는 한국 현대사의 물결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싸워온 1950~60년대생 영화인들을 필두로 1990년대 이르러 사회변혁 운동으로서의 영화가 거센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새로운 영화들의 생존 방식, 발전적 대안 모색을 위해선 근거지가 필요했다. 세기 말, 그렇게 거스를 수 없는 흐름 속에서 한독협이 탄생했다. 독립영화 정신을 사수하려는 수많은 개인과 단체가 속한 한독협은, 운영 체계를 세분화해 극영화, 실험영화, 다큐멘터리, 비평, 배급 등으로 분과를 구분함으로써 다양한 포지션의 영화인들이 뜻을 도모할 수 있게 했다. 서울독립영화제(이하 서독제),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 독립영화 배급지원센터와 인디스페이스
[20주년 대담②] 한국독립영화협회, 표현의 자유가 상식이 되었고 여전히 영화가 재미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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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1월 11일 독립영화 배급사 인디스토리가 태어났다. 2005년부터는 <팔월의 일요일들>(감독 이진우, 2005), <눈부신 하루>(감독 김성호·김종관·민동현, 2005)를 제작하며 독립영화 제작사로서의 위용도 갖추기 시작했다. <지구에서 사는 법>(감독 안슬기, 2008),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감독 윤성호, 2010), <티끌모아 로맨스>(감독 김정환, 2011), <최악의 하루>(감독 김종관), <걷기왕>(감독 백승화, 2016) 등이 모두 인디스토리에서 제작한 영화들이다. 2008년엔 배급작 <워낭소리>(2008)가 극장 관객 295만명을 동원하며 독립영화의 동화 같은 성공을 일궈냈다. 인디스토리를 20년 동안 꾸려온 곽용수 대표는 그러나 20주년을 맞은 올해는 차분히 생일을 맞기로 했다. “20년 동안 버텼다”라는 곽용수 대표의 말에선 그간의 고생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20주년 대담①] 인디스토리, 자생적 변화의 한계 보완 위한 정책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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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와 독립영화 제작·배급사 인디스토리가 올해로 20주년을 맞았다. 독립영화 진영의 터줏대감 같은 두 단체는 1998년에 나란히 문을 연 이후 꾸준히 독립영화의 담론 형성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송환> <워낭소리>의 배급을 성공시키고,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최악의 하루> 등을 제작한 인디스토리는 그동안 재능있는 감독과 배우를 발굴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인디스토리 20주년을 축하하기 위한 대담 자리에 참석한 장건재(<한여름의 판타지아>), 백승화(<걷기왕>), 임대형(<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감독도 모두 인디스토리가 주목하고 발견한 감독들이라 할 수 있다. 인디스토리의 곽용수 대표와 세 감독이 한데 모여 나눈 이야기는 인디스토리의 역사는 물론 독립영화의 가치를 되묻는 자리로 이어졌다. 한편 독립영화 단체와 영화인들을 한데 묶는 구심점 같은 존재인 한독
20주년 맞은 한국독립영화협회와 독립영화 제작·배급사 인디스토리 ① ~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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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7월 25일 무솔리니가 잡혔다. 9월8일 이탈리아는 혼란을 가져올 미국과 휴전 협정을 맺는다. 군은 더이상 적과 동맹국을 구별하지 못한다. 막시밀리아노 에르난도 브루노 감독은 영화 <레드 랜드>(Red Land)에서 이 시기의 한 사건을 영화화한다. 당시 반이탈리아 세력인 티토를 중심으로 하는 빨치산은 이탈리아를 등지는 여정을 떠난다. 한편, 노르마 코세토는 파도바대학의 여학생이었다. 그녀는 이탈리아 사람이었고 파시스트 정당의 지역 당수의 딸이라는 이유로 비참한 죽임을 당했다. 이탈리아 역사에서도 전쟁 피해를 말할 때 자주 거론되는 침울하고도 슬픈 사건이었다. 이 역사적 사건을 에르난도 브루노 감독은 용감하게 마주한다. 감독은 잔인한 사건을 담담하게 영화로 옮겨놓았는데, 이 사건을 영화화하게 된 이유로 “그날들의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한국에서는 이스트라 반도라고 알려져 있고 이탈리아어로는 이스트리아라고 알려진 이곳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로마] <레드 랜드> 전쟁의 피해자로 죽은 노르마 코세토를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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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구로사와 아키라 / 출연 미후네 도시로, 야마다 이스즈 / 제작연도 1957년
아무리 사랑해도 오랜 시간 잡히지 않고 돌아봐주지 않으면 그 사랑은 지치고 식기 마련이다. 2010년 무렵의 내겐 영화라는 존재가 그랬다. ‘영화 만드는 게 내 길이다’ 라는 호기로운 확신으로 이 ‘바닥’에 뛰어든 지 약 10년째 되던 해였다. 친구들은 직장에서 월급받으며 ‘인간구실’을(우리 부모님의 표현으론) 하고 있는데 벌이도 없이 주야장천 같은 시나리오만 고치고 또 고치던 나, 난 누구이며 여긴 또 어딘가, 영화가 대체 뭐길래, 뭐 어쩌겠다고 이러고 살고 있나 하는 근원적 고민부터 자학까지…. 결승점의 실체도 보이지 않는 안개 자욱한 숲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영화와 권태기와 슬럼프에 빠진 채 어딘가 시나리오를 던져놓고 기약 없는 답변을 기다릴 때마다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보며 식어버린 애정에 다시 불을 붙이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때, 영상자료원에서 ‘구로사와 아키라 탄생 100주년 특별전’을 했
이지원 감독의 <거미의 성> 욕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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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이 철저한 건물 21층 천장에서 교복 입은 한 아이의 시체가 발견된다. 이후 전개를 이해하기 위해 기본 설정을 잠깐 이야기하자. 2026년. 첫 번째 배터리가 전주에 나타나고 전 인류가 배터리에게서 에너지를 얻는 초능력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람들은 다들 슈퍼히어로가 되리라 예상했지만 대체로 고만고만한 능력들뿐으로, 염동력이나 정신감응력 같은 특정 능력에 쏠린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이제 세상은 초능력이라는 말을 쓰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능력의 배합 여부에 따라 특별한 복합능력자들이 나타났고, 극소수는 독심술사들처럼 네트 속으로 잠입해 그 일부가 되었다. <민트의 세계>는 민트와 민트 갱의 활동을 한편에, 그리고 그들을 추적하는 이들의 수사 과정을 다른 한편에 두고 이야기를 엮어간다. 영화 <엑스맨> 시리즈에 등장하는 자비에 영재학교를 흑화한 버전 같은 LK 특수학교는 가난하거나 보육원 출신의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는 아이들을 사회가 ‘용도에 맞게 써먹기
씨네21 추천도서 <민트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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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펼쳤을 때 텍스트의 질만큼이나 책의 크기, 디자인, 가지고 다닐 때의 편의성 등이 중요해졌다. 정돈된 디자인의 문고판이나 컬러풀한 시집 한권을 가볍게 들고 다니는 독서인들을 지하철에서 부쩍 자주 만난다. 문고판 시장을 주도해온 문학과지성사(이하 문지)의 스펙트럼 시리즈 역시 새로운 책들과 돌아왔다. 사실 돌아온 스펙트럼 시리즈의 표지를 보고 시간의 흐름이 새삼스러워 웃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황순원까지 폭넓은 작가 선정, 함성호의 건축 에세이나 드니 디드로의 배우론, 릴케의 시집 등 문학과 비문학을 넘나드는 작품의 다양성이 돋보였지만 차마 표지가 세련되었다고는 말하기 어려웠던 이전 시리즈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시리즈의 연결성보다는 해당 작품에 대한 친절한 설명과 심플한 접근(작가의 얼굴 사진만으로 표지를 채운다거나, 책 제목이 <추리소설>이라고 해서 표지에 온통 물음표를 채웠던 표지)만이 전부였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디자인’이 전면에 드러난다는 점에서 세월의 변화
씨네21 추천도서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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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도의 링컨>을 읽기 위해서는 사전에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일단 ‘바르도’는 티베트의 불교 용어로, 이승과 저승 사이의 공간이다. 죽은 영혼이 사후 세계로 가기 전에 잠시 머무는 곳,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으로는 연옥이나 림보 정도가 되겠다. 2017년 맨부커상을 받은 <바르도의 링컨>에 쏟아지는 찬사 중 가장 자주 언급되는 것이 ‘창의적이고 독창적’이라는 평인데, 이는 아마도 이 소설의 형식 때문일 것이다. 일단 특정한 시점으로 사건이 진행되지 않고, 화자가 달리 없으면서도 대화들은 분절되어 있다. 어느 장은 희곡처럼도 느껴지고 또 어느 장에서는 서사시처럼도 느껴진다. 바르도에 머무는 여러 영혼들이 혼잣말을 하다가, 어느 책이나 신문의 문장을 인용하기도 한다. 낯선 형식이라 20페이지 정도 읽다가 다시 앞으로 돌아가 “이게 소설이 맞나?” 들춰보기도 했다. 다행히 작가조차 “이 소설을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라고 생각했다고 하니, 독자는
씨네21 추천도서 <바르도의 링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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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춤을 춘 적이 있습니까? 아마 대부분은 “예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최근 1년 사이, 라는 가정을 더하면 아마도 대부분은 고개를 내저을 것이다. 어른이 된 후 자발적으로 취미 활동을 하지 않으면 일상에서 ‘춤’을 접할 일은 사라지고 만다. 몸으로 하는 모든 일에 서툴러 자타공인 ‘몸치’라고 자신을 인식한다면 더더욱 춤은 멀고 먼 단어다. ‘춤이 건강에 좋다. 춤이 치매에 좋다’는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건강이나 치매 예방을 위해 뭔가 해야만 한다면 춤은 나에게 예비 번호 순위에도 안 들어가는 활동이다. 뇌과학자 장동선과 신경과학자 줄리아 F. 크리스텐슨이 함께 쓴 <뇌는 춤추고 싶다>는 익히 알고 있었던 춤의 효과가 ‘뇌’의 영향 때문임을 증명한 책이다. 앉아서 뇌파를 연구할 것 같은 이 두명의 뇌과학자는 직접 춤을 추며 우리 뇌가 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연구했다. 뇌는 춤을 추는 동안 행복해졌고, 그로 인해 우리 몸 곳곳에 즐거운 신호를 보냈다. 재
씨네21 추천도서 <뇌는 춤추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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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포비의 데뷔작. FBI 요원으로 최초의 프로파일러였던 존 더글러스의 <마인드헌터>를 비롯해 실제 범죄 사례를 섭렵했다고 하는데, <블러드맨> 역시 그런 잔혹한 연쇄살인자와 그를 잡으려는 FBI 요원에 대한 이야기다. 오랫동안 연을 끊고 살았던 아버지가 일으킨 사고 때문에 고향을 찾은 FBI 특별수사관 제이크 콜은 과거 그의 삶을 엉망으로 만든 과거와 꼭 닮은 사건을 만난다. 젊은 여성과 그의 아들이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져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 것. 30여년 전, 제이크의 어머니가 그렇게 살해당했고, 범인을 찾지 못했다. 초강력 허리케인 딜런이 다가오는 뉴욕주의 외딴섬 몬탁(작가 로버트 포비가 작품 활동을 위해 머문 곳이기도 함.-편집자)으로 제이크의 아내와 어린 아들이 도착하는 동시에 같은 수법으로 살해당한 피해자들이 발견된다. 사실 제이크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범죄현장을 보면 살인이 일어나기까지의 상황을 마치 영화를 보듯 생생히 떠올리는 일이
씨네21 추천도서 <블러드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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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의 정리, 한달의 정리, 지난 시간의 정리…. 모두들 정리를 말하는 때이지만 새로운 영화는 매주 개봉하고, 읽을 만한 책도 매일 출간된다. 1년은 얼마 남지 않았지만 매일은 새롭게 갱신된다. 2017년 맨부커상 수상작인 <바르도의 링컨>은 링컨 대통령이 죽은 셋째아들 윌리를 그리워하며 아들의 주검을 안아주기 위해 납골소를 찾았다는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작가는 아들의 주검을 안고 있는 아버지의 이미지에서 착안해 사후 세계 영혼들과의 대화를 써내려갔다. <씨네21>과는 영화평론으로 만나고 있는 SF작가 듀나의 <민트의 세계>는 초능력을 가진, 그러나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이 세계는 초능력자라는 말 대신 이들을 복합능력자들이라 부른다. 주인공들은 익숙한 한국 이름을 쓰고 서울과 인천, 전주 등의 지역도 등장해 능력자들의 설정만 받아들이고 나면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큰 무리는 없다. 초능력을 가졌음에도 사회에서 차별받고 이용당하는 처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11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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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어 댄 블루> More than Blue
제작 굿 무비, MM2 엔터테인먼트 / 감독 가빈 린 / 출연 류이호, 진의함 / 배급 오드(AUD) / 개봉 12월 12일
어느덧 단단한 마니아층을 형성한 대만 멜로영화가 올겨울 또 한번 관객과 만난다. 이미 <안녕, 나의 소녀>(2017)의 멜로 연기로 한국 관객에게 눈도장을 찍은 류이호와 <청설>(2009), <신 보보경심>(2015) 등 로맨스 장르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진의함이 호흡을 맞췄다. 가족에게 버림받은 케이(류이호),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은 크림(진의함)은 10년간 서로의 빈자리를 채워준 가족 같은 사이다. 서로 좋아하지만 친구처럼 지내던 둘의 관계는 케이가 백혈병에 걸리면서 위기를 맞는다. 크림이 다시 가족을 잃는 아픔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케이는 자신의 병을 숨기고, 자신이 죽은 후에도 크림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다. 애써 우회하지 않고 정공으로 눈물샘을 자극하는 스토리와
[Coming Soon] <모어 댄 블루>, “언제나 네 곁에 있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