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절약상
티끌을 아무리 모아봐야 태산이 될 리가 없지만, 절약하겠다는데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세포 소녀>는 떼로 나오는 배우들에게 일제히 교복을 입혀 규모의 경제를 창출했을 뿐만 아니라 배우 이재용에게 전 과목 선생님을 모두 맡겨 개런티를 절약하는 근검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맨발의 기봉이>는 맨발이니 절약의 선두주자라 할 수 있을 것이고, <구타유발자들>의 배우들은 모두 의상이 한벌인데다 대체로 허름하다. 차예련은 영화 초반에 스타킹마저 벗고 나오니 올이 한번 나가면 한 켤레를 통째로 사야 하는 스타킹 고유의 아픔을 겪지 않아도 좋았을 터. 반면 <린다 린다 린다>는 허를 찌를 절약 정신을 보여주었다. 일본어에 서툰 교환학생으로 설정해 배두나의 대사를 아낀 것이다.
뭔 소리냐, 최악의 제목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 이은 오리무중 제목 3부작의 완결판은 <사랑도 흥정이 되나요?>다. 영어 제목이 <How Much Do You Love Me?>지만, 줄거리로 보자면 <가을동화> 버전으로 “얼마면 되겠니?”라고 묻고 있는 이 영화는, <내겐 너무 이쁜 당신>의 베르트랑 블리에가 연출했고 주연이 모니카 벨루치였다. 제목만 보고 모니카 벨루치를 놓친 남성 관객에게 애도를 표한다. 이 밖에도 컨트리 가수가 주인공이라고 그저 ‘앙코르~!’을 외쳤던 <앙코르>, 백수가 주인공이라고 곧이곧대로 알려주는 <달콤한 백수와 사랑 만들기>, 지옥에서 사는 소녀가 주인공인데 막무가내로 우겨버린 <천상의 소녀> 등이 최악의 제목을 두고 경합을 벌였다. 번역자의 의도가 가장 궁금했던 영화는 <내 남자의 유통기한>. 이 영화의 원제는 <어부와 아내>다.
MUST-HAVE 아이템
<판의 미로…>의 분필만 있다면 100년 만에 책상 청소를 하고선 그 위에 문을 그리고 도망갈 것이다. 거기엔 식인귀가 있겠지만 최소한 편집장은 없다. <자투라>의 마법보드게임 자투라를 내게 준다면 마감을 하느니 자투라 세계의 미아가 되어버리거나, 편집장에게 살며시 보드판을 내밀어보겠다. “선배, 심심하시죠? 이 게임 무지 쉽고 재밌다던데….” 이런 생각은 공상에 불과하지만 나에게 진정한 공상이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프라다’다. 어릴 적엔 다들 프라다 백팩을 메고 다니기에 프라다가 책가방 상표인 줄 알았다. 아쉬운 대로 “네가 부잣집 도련님이냐?”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스윙걸즈>의 키보드라도… 피아노는 칠 줄 모르지만… 이런 푸념을 듣고 있던 남자 동료가 말하기를, “나는 아무것도 욕심나지 않아. <카사노바>의 정력만 있으면 좋겠어.”
올해의 ‘고함’!!!!
용호상박의 혈투 끝에 올해의 고함상 타이틀을 당당하게 가져간 작품은 근미래 SF영화 <한반도>. 청각이 실종되는 버뮤다 삼각관계트리오(안성기, 문성근, 차인표)의 성대를 내지르는 열연은 관객의 고막이 감내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서고 말았다. 고함이 중요한 대화법의 하나인 조폭들은 언제나처럼 시끄러운 법. 황정민, 류승범(<사생결단>)과 조인성(<비열한 거리>)이 폭발적인 목청 연기를 펼쳐야 했던 것은 이해를 하자. 진짜 문제는 연애를 하면서도 고함을 빽빽 질러야 분통이 풀린다는 우리의 구질구질한 연애영화들이다. <사랑을 놓치다>는 설경구의 고함 덕에 연애영화의 본분을 잊어버렸고,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실제 제목은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시끄러움’이었다는 근거 불충분한 제보도 있다. 다만 <내 청춘에게 고함>에는 고함이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최고의 컴백, 최악의 컴백
“저어서 드릴까요 흔들어 드릴까요?” “내가 그딴 거에 신경쓸 것처럼 보여?” 이 한마디로 제임스 본드는 다시 태어났다. 탄광 노동자 아내의 놈팡이 정부 같은 면상의 대니얼 크레이그를 내세운 <007 카지노 로얄>은 크리스천 베일의 <배트맨 비긴즈>에 비견할 만한 프리퀄이다. 가히 예상치 않았던 올해의 컴백. 하지만 2006년이 컴백하지 않아도 좋았을 민망스러운 리메이크와 속편들의 연속이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수천만 영화팬들의 추억을 더럽힌 <오멘>과 <핑크 팬더>는 할리우드의 아이디어 고갈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들이며 <그루지2>는 그 동네나 이 동네나 사다코, 가야코 베껴먹기는 마찬가지라는 세계화 시대의 증언이다. 그럼에도 최악의 컴백상을 받아 마땅한 사람은 <원초적 본능2>의 샤론 스톤 마나님. 보톡스와 전신 성형과 전문 트레이너를 고용할 돈으로 제대로 된 각본가를 기용하는 편이 나았을 게다. 혹은 다리를 한번 더 꼬아주시거나.
심금을 울리는 의상
후배 하나 잘못 들이면 샅바가 사라진다. <천하장사 마돈나>의 동구는 빨간 샅바, 파란 샅바를 섞어 빨다가 보라색 샅바로 만들어버리는데, 혹시 여기에는 빨간편 파란편 다투지 말고 우리 씨름부는 모두가 하나 되자는 동구의 깊은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인가! 그러나 어떤 의상보다도 심금을 울렸던 옷은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주먹다짐 벌이다 피묻은 이니드의 셔츠였다. 빨래방망이 두들기기에 깔끔한 줄만 알았던 잭, 지저분한 이니드 셔츠를 빨지도 않고 자기 셔츠 위에 걸어놓고선… 훌쩍! 가장 심금을 울린 한국영화 의상은 <다세포 소녀>의 여학생 교복이었다. 이 교복은 불특정 다수의 심금을 울리진 못했지만 불특정 중년 남성들의 심금을 무지하게 울렸다는 후문이다.
올해의 퀴어커플
2006년은 퀴어영화의 원년. 수많은 게이커플들이 편견과 욕망의 갈림길에서 헤어지고 만나며 관객(특히 세상의 동인녀 여러분)의 마음을 훔쳤다. 그러나 잭과 에니스의 시대와 편견을 극복하지 못한 비극적 사랑도, 수민과 재민의 계급을 극복한 대담한 사랑도, 히미코와 하루히코의 세대를 극복한 마지막 사랑도, <폭풍우 치는 밤에>의 가브와 메이가 처한 무시무시한 장벽 앞에서는 다 농담처럼 들린다. 가브는 숫늑대, 메이는 숫염소. 이들은 심지어 종의 차이를 극복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저 산 너머에 가는 건 어떨까. 거기라면 늑대와 염소가 같이 살 수 있을 거야.” 감독인 스기이 기사부로가 조금만 더 솔직했더라면 메이의 대사가 나오는 순간 주디 갤런드의 <Over the Rainbow>를 삽입했을 것이다.
종은 고사하고 축생들이 동성애를 한다는 증거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 미국 동물학자 부르스 바게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동성애를 하는 동물은 적어도 470종 이상. 미국 캐럴대의 앤 퍼킨스 교수는 동성애 관계만을 즐기는 숫양이 전체의 10%에 이른다는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최고의 노가다
여러분, 1년 동안 수고 많으셨어요! <짝패>의 류승완 감독님, 다른 감독님들은 의자에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던데 1 대 180으로 싸우느라 힘드셨죠? 다른 배우 전부 죽는 동안 끝까지 살아 있느라 고생하셨겠어요. <메종 드 히미코>의 사오리양, 집 나간 게이 아빠네 양로원 가서 청소하고 빨래하느라 열받았겠어, 토닥토닥. 월급은 제대로 주던가? <라디오 스타>의 민수 아저씨, 이제는 곤이 오빠 혼자서 담배가게 정도는 찾아가는 거겠죠? 김밥장사 잘되기를 빌고 있답니다. <도마뱀>의 조강군, 외계인들이나 만드는 미스터리 서클을 가내 수공업적으로 밭을 밟아 만들다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네. 올해의 노가다 여러분, 내년에도 힘내세요!
최고의 각색, 최악의 각색상
안녕하세요 씨네립니다. 아름다운 밤이에요. 그럼 각색상을 발표하겠습니다. 먼저 최악의 각색상 후보들. 창의적인 원작을 클리셰로 도배한 <아파트>와 <이온 플럭스>, 나태한 각색으로 원작의 팬들을 잠에 곯아떨어지게 만든 <게드전기: 어스시의 전설>, 원작 팬들도 종잡을 수 없었던 독창적 실패 <다세포 소녀>. 그리고 최악의 각색상은. 아! 마티 영감님의 내공도 원작의 아우라 앞에서는 소용없었던 <디파티드>에 돌아갔습니다(군중이 박수와 야유로 갈라져 쌈박질을 벌이자 수습하는 씨네리). 아무래도 최악이라기보다는 ‘가장 실망스러운’이라는 말이 어울리겠죠? 다음은 최고의 각색상 후보들입니다. 제인 오스틴 원작을 시대에 맞게 조율한 <오만과 편견>, 성질나서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던 원작을 완벽 업그레이드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그리고 최고의 각색상은. 네! 애니 프루의 단출한 단편을 늘리느라 고생하신 <브로크백 마운틴>의 각색팀한테 돌아갑니다(군중 일동 박수).
개, 수고했어
알고보니 2006년은 개의 해였다. 견공들의 스크린 나들이가 잦았던 것도 그 때문이리라. 이제 ‘개 장르영화’는 <명견 래시>와 <벤지>로 대표되는 개 영웅담에만 머무르지는 않으며 오히려 영화 속 인간들의 지위를 넘본다. 연초 개봉한 <에이트 빌로우>는 썰매개들의 오지 생존기가 <얼라이브> 같은 인간들의 생존기보다 더 감동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동시에 주연배우들을 조연으로 몰락시켰고, <후회하지 않아>와 <마이캡틴, 김대출>은 잘 키운 견공 하나 열 조연 안 부럽다는 말을 절로 내뱉게 만들었다. 물론 병술년 개판의 대표작은 이누도 잇신을 비롯한 일본의 감독들이 하나 같은 견심(犬心) 아래 모여서 만든 <우리개 이야기>다. 섬나라 애견인들에게 사랑받는 견공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무시무시한 죄의식을 떠안고는 구타와 투견의 공포에 질려 몸부림치는 ‘마음이’가 생각난다. 마음이 마이 아파. 컹! 컹!
최고로 불편한 진실상
올해의 최고로 불편한 진실상은 황우석의 사기를 만천하에 공개한 MBC의 <PD수첩>에 돌아가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극영화는 좀처럼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픽션으로 재구성되는 순간 진실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9·11을 다룬 <월드 트레이드 센터>와 <플라이트 93>은 불편한 진실이 아니라 ‘불편한 진실의 재구성’쯤 되지 않을까. 극장에서 경험할 수 있었던 올해의 가장 불편한 진실상은 앨 고어의 <불편한 진실>. 온난화로 지구가 죽어간다는 메시지는 진심으로 불편하고 안쓰럽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불편한 진실이 있다. 관객은 이 똑똑한 유대계 정치인이 전국 득표 수에서 부시에게 이기고도 대통령 자리를 넘겨야만 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하게 될 것이다. 속이 정치적 분노의 온난화로 끓어오르는 다큐멘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