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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영화였다> 신상옥 지음 l 랜덤하우스 펴냄
세상 어떤 감독이 영화라는 거대한 신전 앞에서 고개 숙이지 않을까. 한술 더 떠 자신의 존재를 영화와 동일시하는 감독이라면. 오만하게까지 여겨지는 책 제목에서 누군가는 ‘피∼’ 하고 코웃음부터 칠지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발화의 주인이 신상옥이라면 수긍 못할 일도 아니다. 스스로 술회하듯 그는 “영화에 미친 놈”이었다. 한국영화사 연구자인 조영정의 표현대로 그는 “영화라면 무엇이든 저지를” 사람이었다. 남한과 북한, 그리고 미국을 돌며 그가 남긴 전설을 한번이라도 귀동냥으로 들어본 적 있는가. 그렇다면 그가 마지막 남긴 글의 첫머리에 ‘난, 영화였다’라는 서명을 남기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해 4월 타계한 고(故) 신상옥 감독의 자서전은 “부모의 돈을 훔쳐 고물 영사기를 샀던” 함경북도 청진 출신의 꼬마의 꿈으로 시작한다. <악야>(1952)로 충무로에 뛰어든 뒤 <어느 여대생의 고백>
영화로 존재한 생(生)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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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풍경> <감염된 언어> 고종석 지음/ 개마고원 펴냄
신문 이름 ‘한겨레’는 시대착오적이다. 발음하기 어렵고 제대로 쓰기 힘들며 글의 맵시까지 어정쩡하다. 영어로 번역하면 ‘one-nation’ 또는 ‘one-ehtnic’쯤 될 터인데, 파시스트 매체에나 어울릴 이름이다. 인간, 시민, 인류, 생명 따위가 아니라 ‘겨레’에 주목한 그 기의(記意)는 정치적으로도 올바르지 않다. 이 신문사에서 ‘씨네21’이라는 외국어 제호의 자매지가 탄생한 것은 그래서 기적에 가깝다. <한겨레>의 ‘궂긴 소식’(부음란)과 <씨네21>의 ‘컬처잼’(바로 이 지면)의 공존은 한겨레 사옥에서 일어나고 있는 ‘말들의 풍경’이다. 보수주의 언어와 대당하려는 <한겨레>의 말과 집단주의 언어와 긴장하려는 <씨네21>의 말은 어쩌면 서로 상극이다.
심지어 같은 신문사 안에서도 말과 말을 싸움 붙이고, 말을 말에서 해방시키며, 말로 말을 죽이
학자적 논객의 말, 문학적 언론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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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니아> 온다 리쿠 지음/ 비채 펴냄
책을 덮자 순간 주변의 온도가 낮아진 것 같다. 후텁지근했던 장마가 끝난 뒤 숨막히는 더위가 이어지고 있는데도 그렇다. 온다 리쿠의 <유지니아>는 2006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인데, 책의 분위기는 추리물보다는 미스터리한 환상소설 정도로 에둘러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유지니아>를 구성하는 퍼즐 조각들은 마치 유기체처럼 움직이고 그 모습을 바꾸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여기 하나 저기 하나 끼워맞춰서는 커다란 그림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서들이 들어맞지 않는 데서 오는 다소간의 불안, 빈틈처럼 보이는 곳에 들어찬 상념들이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주변의 온도를 낮춘다.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데서부터다.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말을 듣는 사람인지 궁금해하면서 책장을 넘기다보면 20년 전 살인사건의 이야기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호쿠라쿠 지방의 K시에서 어
한없이 불투명에 가까운 미궁의 매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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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창비 펴냄
물난리에 물자난에 초토화된 90년대 북녘 이야기가 해외뉴스로 들려오는 아프리카의 슬픈 풍경처럼 느껴진다, 고 해도 누굴 탓하랴. “개새끼들.” 북한 소녀 바리의 아버지가 험한 일을 당하고 내뱉는 유일한 욕설이 누구를 향해 있는지 소설 안에서는 비교적 분명하지만, 세상에는 크고 작은 개새끼들이 너무 많다는 걸 소설은 국제적으로 체험케 해준다. ‘개새끼들’이 빚어내는 비극의 향연을 당장 중지할 방도는 없어 보인다. 외과수술로는 어림없는 그 상처들을 어루만져주고 싶어 영혼의 씻김을 끌어들인 걸 체념의 제의라고 시비걸 여지 역시 없어 보인다. 바리와 그의 할머니에게 영혼을 보고 대화할 수 있는 신묘한 능력을 준 건 판타지스럽지만, 겪지 않은 비극의 풍경도 멀찍이 선 자에겐 일종의 판타지일뿐이다. 바리가 하필 식량난에 줄줄이 죽어나가는 북녘의 소녀이고, 두만강을 건너 중국 옌지로 흘러들어가는 것도, 잘살아보겠다고 영국으로 목숨 건 밀항을
개똥밭을 구른 구원의 여신, 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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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피용> 베르나르 베르베르 글, 뫼비우스 그림, 열린책들 펴냄
<파피용>은 마치 그래픽 노블을 글로 읽는 것 같은 책이다. 그래픽 노블을 글과 그림으로 분리해, 글은 더 많이, 그림은 더 함축적으로 만든다면 이런 책이 될까. <개미> <나무>를 비롯해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 작가로 자리잡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파피용>은 뫼비우스의 그림과 환상적인 이야기가 어우러지는 매력적인 책이다. 철저한 조사를 통해 다져진 디테일을 꼼꼼히 쌓아 거대한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 보여주었던 작품이 <개미>라면, <파피용>은 우주를 향해 ‘파피용’이라는 이름의 노아의 방주, 즉 우주선을 띄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의 세계를 바라보는 베르베르의 시선을 보여준다.
이브 크라메르는 항공 우주국 소속의 엔지니어다. 그는 최고의 요트 선수인 엘리자베트 말로리를 차로 치는 사고를 내고, 그녀는 하반신 불수가 된다. 그 일로 두
베르베르가 쓴 노아의 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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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마을은 돌아간다> 이시구로 마사카즈 지음/ 서울문화사 펴냄
<그래도 마을은 돌아간다>는 이상한 메이드물이다. 메이드 카페가 아닌 메이드 다방이 주무대고, 이 다방의 첫 번째 메이드인 여고생 호토리는 손님이 오면 “다녀오셨어요, 주인님” 대신 “어서 옵쇼”라고 인사한다. 게다가 이 다방의 주인이자 메이드장은 음산한 인상의 할머니다. 메이드 카페가 인기라는 말을 듣고 다방 간판에 ‘메이드’라는 이름만 얹어 살짝 업종변경(?)을 한 주인할머니는, 10년간 공짜로 카레를 먹어 온 호토리를 메이드로 아르바이트하게 만든다. 메이드가 뭔지도 모르는 할머니와 호토리가 메이드복을 입는다고 다방에 손님이 들끓을 턱이 없다. 손님은 호토리를 짝사랑해 매일 출근도장을 찍는 소꿉친구 사나다뿐. 어느 날 호토리의 급우 타츠노는 자신이 짝사랑하는 사나다가 매일같이 다방에 드나든다는 사실을 알고는 ‘메이드 다방 씨사이드’의 메이드 2호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엠마&g
그 다방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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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거절할 수 없다> 쓰치야 겐지 지음/ 좋은책만들기 펴냄
다운시프트족이 유행이라고 한다. 밤을 새운 만큼 보장되는 높은 연봉, 사람들에 치이지만 남들 다 알아주는 직책보다 돈 덜 받더라도 삶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말이다. 하지만 다운시프트족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여유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월급이 적고 일은 고되고 많은 직장을 누구인들 선택하고 싶겠는가. 원치 않았으나 제멋대로 빡빡해지는 인생, 지칠 때면 나른한 말투로 장동민처럼 “그까이꺼, 대충”이라고 내뱉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쉽게 거절할 수 없다>의 저자 또한 그런 사람이다. 쓰치야 겐지는 도쿄 오차노미즈여대의 철학교수인데, 자신이 제자들과 가족들에게, 지인들에게 얼마나 무시당하며 사는지,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은 얼마나 효율적으로 명예와 일로부터 도망다니며 살고 있는지를 들려준다. 끊임없는 투덜거림의 연속인 듯, 느슨한 듯 보여도 뼈가
사회적 허약체질의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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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릿파크> 존 치버 지음/ 문학동네 펴냄
교외지역에 사는 중산층 주부들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에는 “누구나 더러운 빨랫감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위기의 주부들>이 더러운 빨랫감들을 고급스런 패션과 화려한 연애행각들로 눈속임해 보여주었다면, 존 치버의 <불릿파크>는 아무것도 미화하거나 왜곡하지 않고도 탈현실적인 현실을 보여준다. 외계의 존재가 등장하지도,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지도 않지만, 인물들의 삶은 탈현실적이다.
불릿파크는 시내로 통근이 가능한, 화이트칼라들이 모여 사는 동네다. 불릿파크에는 엘리엇 네일즈와 그의 아내 넬리, 그리고 그들의 십대 아들 토니가 살고 있다. 이들의 삶은 겉으로는 어느 곳 하나 어그러진 곳 없어 보이지만 그 안은 잔뜩 녹슬어 있다. 네일즈는 오로지 아내를 위해서만 육체적으로 흥분하는, 자의 반 타의 반의 일부일처제 신봉자이며, 넬리는 다른 남자를 보고 흥분한 적이 꽤
우리 모두의 더럽고 적나라한 빨랫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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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주앙의 잃어버린 일기> 더글러스 에이브람스 지음, 랜덤하우스 펴냄
돈 주앙의 일기가 발견되었다. 스페인의 황금시대인 1593년 세비야에서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일기다. <돈 주앙의 잃어버린 일기>의 첫 대목, 저자인 더글러스 에이브람스의 이름으로 적힌 일종의 서문은 ‘진짜일까?’ 하는 호기심을 유발한다. 사실 돈 주앙이 실존 인물인지가 여전히 명백히 밝혀지지 않은 상황임을 감안하면 돈 주앙의 친필 일기 존재는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분명한 것 한 가지는 <돈 주앙의 잃어버린 일기>가 소설이라는 점이다. <돈 주앙의 잃어버린 일기>는 진짜일까 아닐까 궁금하게 만드는 도입부부터 팩션 특유의 호기심 자극에 능하다.
“여자의 욕망은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죽지 않아.” 돈 주앙은 그런 여자들과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남자다. 36살이 된 돈 주앙은 일기에 삶을 기록하는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시작한다. 그는 열정의 기술과 여성의 성스
돈 주앙이 알려주는 작업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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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화사-달력, 시계 그리고 문명 이야기> 앤서니 애브니 지음/ 북로드 펴냄
시간은 보편적 개념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고유의 특성도 지니고 있다. 문화권에 따른 문학작품들 속의 시간은 각기 다르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하루는 새벽에서 저녁까지의 변화였고, 한해는 여름에서 겨울까지의 변화였다. 로마인들에게 시간은 날씨처럼 흐르는 것이었다. <시간의 문화사-달력, 시계 그리고 문명 이야기>는 시간을 비교문화의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책으로, 생물학에서 문학, 문명, 역사 등 시간과 관련한 다양한 문헌들과 자료를 통해 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간은 사실상 측정 불가능한 존재지만, 그것을 파악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은 달력과 시계를 낳았다. 그리고 인간은 시간에 의미부여를 하기 시작했는데, <시간의 문화사…>가 보여주는 문화권별 시간 해석법은 풍속화를 보는 듯한 재미를 주기도 한다. 세계에서 가장 놀라운 구조물 중 하나라고 불리며 5세기가
측정 불가능한 존재에 대한 측정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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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기 전에> 레이날도 아레나스 지음/ 이룸 펴냄
1990년 12월, 쿠바의 하층민으로 태어나 작가이자 동성애자이자 반체제 인사로 살았던 레이날도 아레나스는 뉴욕에서 스스로 생을 마쳤다. 에이즈 말기로 생사를 넘나들던 나날은 그렇게 끝났다. 아레나스가 쓴 자서전 <해가 지기 전에>의 서문은 같은 해 8월에 쓰여졌다. 1990년은 록 허드슨이 죽은 뒤였고 프레디 머큐리가 죽기 전으로 에이즈에 대한 인식은 미미했다. 아레나스에게 에이즈는 “걸리면 노년을 거치지 않고 생을 마감한다”는 병 정도였다. 거의 모든 인간에 대한 보복을 담은 마지막 소설을 마무리할 때가 되자 그는 “나의 종말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 책의 서문 말미에 적어 넣는다. 그리고 다음 장에서, 아레나스는 기억하는 첫 번째 ‘맛’의 기억, 두살 때의 그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가 외부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한 첫 번째 순간부터의 삶을 새로 쓰기 시작한다.
줄리안 슈나벨 감독이 연출한 &
어느 게이 작가의 투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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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호로역 다다 심부름집> 미우라 시온 지음/ 들녘 펴냄
심부름집 혹은 심부름센터는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해주는 곳이다. 다다 심부름집을 운영하는 다다 게이스케는 도쿄지만 도쿄 같지 않은 마호로 지역에 살고 있다. 가끔 심부름집을 청부업자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의뢰를 하는 일도 있지만 그가 보통 하는 일은 자잘한 집수리, 학원에서의 귀가가 늦은 학생 집에 바래다주기 등이다. 하지만 그의 심부름집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생각지도 않았던 소도시 삶의 이면들이 드러난다. 찹쌀떡처럼 동그랗게 몸이 굽은, 아흔살이 다 되어가는 할머니에게 친아들인 척하고 병문안을 가는 일이나 가세가 기울어 야반도주하는 마당에 키우던 개를 그냥 버릴 수 없어 심부름집에 며칠 맡겨놓고 사라진 사람들이 그렇다. 게다가 선량한 소시민인 듯하던 다다 본인의 삶도 어딘가 위태롭게 기울어 있다.
어느 날 다다는 길에서 고등학교 동창 교텐 하루히코를 만난다. 고등학생 시절, 우연한 사
자잘한 심부름이 비추는 삶의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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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지음/ 이레 펴냄
알랭 드 보통은 영민한 수다쟁이다. 그는 일상적인 화제를 도마에 올려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풀어놓지만 언제나 무릎을 치게 하는 데가 있다. 일상이 낳은 작은 생각거리는 우리에 앞서 세상을 살고 간 사람들의 글로 이어지게 마련이며, 우리는 소소한 것의 즐거움과 권태를 발견하는 데 있어 결코 외롭지 않음을 알게 된다.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보다 덜 현학적이면서도 사랑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데 게으르지 않았고, <여행의 기술>은 남들에게 자랑하는 여행의 즐거움 이면에 도사린 귀찮음과 짜증까지 유쾌하게 보여주었다. <행복의 건축>은 제목 그대로 건축에 대한 이야기인데, 건축물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는 사람이라면 보통의 입담에만 기대 책을 끝까지 읽기란 쉬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건축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는 말은 아
건축에 관한 영민한 입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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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나무 그늘 아래> 타리크 알리 지음/ 미래 M&B 펴냄
타리크 알리는 <술탄 살라딘>에서 승자의 관점에서 왜곡되어 알려져온 패자의 역사를 들려주었다. 언월도를 들고 요란한 굉음이나 내면서 설치는 할리우드적 영상 속의 아랍인들이 아닌, 진짜 아랍인들의 삶이 어땠는지를 집요하게 들려주는. 그렇다고 해서 그가 선택한 소재가 ‘안전’한 것은 아니다. 기독교 세계와 분쟁이 있는 시대를 빼고 신화와 우화를 맛깔나게 들려주는 데 만족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미 그는 <술탄 살라딘>에서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충돌 상황, 즉 십자군전쟁의 이야기를 그려냈었는데, 이번에 소개되는 <석류나무 그늘 아래>는 스페인 내 무어인의 역사가 무너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그 중심에는 한 이슬람 귀족 가문이 있다.
기독교 군대에 의해 한 마을이 초토화된다. 이슬람 문명을 상징하는 책들이 일순 잿더미로 내려앉는다. 코란 수천부와 더불어 그 장
잊혀진 세계의 종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