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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의 몽타주>와 <박찬욱의 오마주>, 그리고 <김지운의 숏컷>으로부터 이어지는 마음산책의 세 번째 감독 에세이집이다. 앞서 두 감독과 영화적으로도 끈끈한 동지고, 그들 못지않게 영화광의 왕성한 식탐을 자랑하는 그이기에 <류승완의 본색> 역시 잡다하고 맛깔나는 영화의 성찬이다. 머리말에서 “성격이 산만하니 글도 산만할 것”이라는 귀여운 경고로 시작하더니 <배틀 로얄> <록키 발보아> <지옥의 영웅들> <칠검> 등 인상적으로 본 영화들의 영화평과 더불어 당시 영화월간지 <키노>에 실렸던 ‘액션 명장면 베스트10’과 이대근과 박노식 등 노액션배우들에 대한 예찬론까지 과거와 현재를 종횡무진한다. 폐간하는 <키노>를 생각하며 쓴 ‘굿바이 키노’라는 글에서는 한때 영화잡지 기자를 꿈꾸기도 했던 그의 담담한 소회가 묻어나고, ‘버스터 키튼’이라는 글에서는 자신의 존재와 비전에 대한 조
류승완이 말하는 ‘나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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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을 기술할 필요가 있을까. 아마도. 아르헨티나 여성 아니타는 암투병 중이다. 그녀의 투쟁을 지켜보러 온 것은 친구 베아트리스와 애인 포지다. 하지만 아니타는 도무지 두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다. 중산계급의 딸인 그녀에게 페미니스트 베아트리스와 좌파 변호사 포지는 왠지 어려운 상대다. 도무지 호전될 기미가 없는 투병생활에 지친 그녀는 어느 날 백일몽을 꾼다. 그리고 두 여인을 만난다. 한명은 1930년대의 할리우드 스타 ‘여주인’. 다른 한명은 미래의 전체주의 사회에서 정부의 명령을 받고 남성들에게 섹스를 제공하는 ‘W218’이다. 그 백일몽으로부터 아니타는 30년대 누아르와 거대한 디스토피아적 환상으로 빠져든다. 왕가위의 <해피 투게더>에 영향을 끼친 <부에노스아이레스 어페어>와 <거미여인의 키스>의 작가인 마누엘 푸익은 70년대 페미니즘 운동과 라캉의 정신분석학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아 <천사의 음부>를 썼다. 그러니 질문은 명확하다.
여성의 완전한 자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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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까지 민주노동당 문화정책 연구원으로 일했던 저자가 <레디앙>에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기’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을 포함해 책을 펴냈다. 월경(月經)의 고통을 강요하는 서울을 벗어나 파리에서 월경(越境)의 환희를 베어물었던 10년 전 유학 시절부터 원피스 나풀거리고 집회에 갔다가 전경들에게조차 무시당했던 날라리 여대생이 좌파정당에 잠입해서 활동가 명함을 내밀기까지의 곡절들이 섬세한 문체에 실려 있다. 세금으로 관광하는 한국 공직자들에 대한 날선 비판이나 68세대 좌파 의사들이 만든 프랑스 산부인과 체험도 흥미롭지만, 한국과 프랑스의 이질적인 문화 충돌을 경험한 이의 생생한 진술이야말로 눈에 띈다(사진을 찍은 프랑스 출신 예술가 희완은 저자의 연인이다. 두 사람은 결혼 대신 시민연대계약을 맺었고, 칼리라는 예쁜 딸을 낳았다). 자유와 정치, 문화와 교육의 문제들을 공적 영역에서 제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적 영역에까지 끌어내려 확장하는 독특한 에세이.
한 좌파 활동가의 반자본주의 처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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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연애는 맛으로 기억된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 둘이 함께 먹었던 음식, 그 사람이 해주었던 음식 같은. 상대의 입맛에 맞추느냐, 상대를 자신의 입맛에 맞추느냐의 여부는 관계를 통찰하는 단초를 제시하기도 한다. 다이라 아스코의 <오늘의 레시피>는 미각으로 이야기하는 사랑 이야기 모음집이다. 버터밥이 드러내는 남녀의 나이 차, 카레우동에 집착하는 애인을 참을 수 없는 여자의 이별과 만남을 비롯해 음식에 얽힌 사연이 남녀관계에서 힘을 행사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특정 음식이 어떻다고 설교하기보다 한 인간이 애인에 앞서 어떤 음식을 내세우는 이유나 심리의 근간을 들여다보기 때문에 모르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라 해도 공감하게 된다. 왜 남자는 어렸을 때의 맛에 집착할까? 내가 싫어하는 게 이 남자일까 이 남자가 고집하는 음식일까? 이 권태는 음식문제일까 인간문제일까? 다이라 아스코의 또 다른 단편집 <사랑 보존법>에는 워낙 특이한 유형의 연애담이 등장하기 때문에
당신의 입맛에 맞는 사랑을 찾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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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새로 나오는 책을 읽고 소개하던 한 문화부 기자가 있었다. 그는 책만큼이나 그 책을 쓴 이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한국의 글쟁이들은 어떤 환경에서 글을 쓰며,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던 기자는 직접 그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결심한다. 정민, 한비야, 이원복, 공병호 등 현재 대한민국 책시장을 주도하는 18명의 글쟁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한국의 글쟁이들>은 그렇게 탄생했다. 한겨레신문사에서 10년째 출판담당 기자를 맡고 있는 저자의 개인적인 관심을 반영하듯 작가들의 글쓰기 노하우와 자료 보관법, 평소의 생활패턴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흥미로운 건 ‘글쓰는 사람은 불규칙적이고 즉흥적인 삶을 살 것’이라는 일반적인 인식이 고정관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저술가들은 정해진 시간 안에 규칙적으로 글을 쓰는 모범생 스타일이었다. 또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그 자리에서 기록하는 지독한
신간 담당 기자, 글쓰는 사람들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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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초원의 한가운데 앉아 동서남북 하늘 가득한 별에 둘러싸여 똥을 싼다. 그 해방감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이렇게 죽어도 좋을 것 같은 쾌감… 완전히 오르가슴이다.” <러브 앤 프리>의 저자인 일본의 괴짜여행가 다카하시 아유무가 몽골의 대초원을 여행하고 남긴 말이다. <그날 밤 게르에선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는 이 ‘초원방분’의 전설을 좇아 몽골을 찾은 한국의 여덟 여행가가 그곳에서 겪은 경험을 담은 공동 여행기다. 몽골에서 어찌나 ‘미칠 듯한’ 경험을 많이 했던지 공동집필명도 ‘초원광분’이다. 인천공항에서 수도인 울란바토르까지 3시간밖에 걸리지 않지만 절대 쉽사리 갈 수 없는 곳인 몽골을 향해 그야말로 ‘무작정’ 떠난 이들은 누군가에게 그 경험을 알리지 않으면 입이 근질거려 미칠 것 같아 이 책을 냈단다. 책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여정을 함께 하다보면 몽골이란 곳이 얼마나 따뜻하고도 현명하게 여행자들을 품어주는지 자연스레 알게 된다. 두개의 달을 만들 정
초원방분의 전설을 찾아 몽골로 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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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시장의 신이여, 나에게 책 속의 지식이 아니라 현실의 윤택함부터 달라. 지식은 그런 뒤에 줘도 된다.” 첫눈에 반한 아가씨 뒤를 쫓아 헌책시장에 간 청년의 마음속에 책의 바다는 무료할 따름이다. 한없이 달려나가는 상상 속의 로맨틱 엔진만으로 코피를 내뿜는 청춘의 응시를 느끼지 못한 아가씨는 교토 거리의 모험에 사뿐사뿐 발을 디딘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매우 기묘한 환상담이다. 교토에 사는 모리미 도미히코에게 있어 교토는 술과 웃음이 흘러넘치는 판타지의 무대. 하늘에서 잉어가 떨어지고 밤길에는 남의 팬티를 벗기는 술버릇으로 유명한 술꾼이 돌아다닌다. 청년의 사랑은 결실을 맺을 기미가 안 보이고, 봄에서 겨울로 시간이 흘러간다. 최근 출간된 <다다미 넉장반 세계일주>와 더불어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모리미 도미히코의 기묘한 청춘 모험담을 만끽할 수 있는 최고의 이야기로, 작가의 능청스런 수다가 곳곳에서 웃음을 자아
술꾼의 충고를 들어 아가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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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각각 서로 다른 문을 통해 세계에 도달하며 이 문 가운데 하나는 전적으로 소설의 몫이다.” 밀란 쿤데라는 <커튼>에서 소설에 주어진 문제의 ‘몫’을 규명한다. 삶의 산문성과 대결하는 데에 탁월한 소설의 본질과 그것이 문학사와 역사 속에서 어떻게 출렁거렸는지 돌아본다. <커튼>은 소설이 아니지만, 드라마보다 엄격한 통찰로 독자를 매료해온 쿤데라의 소설 <농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불멸>이 그린 포물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저자는 다시 한번, 예술이 역사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브라스밴드가 아님을 명백히 한다. 두쪽에서 네쪽 사이 분량의 아담한 에세이들은 네개의 장으로 분류됐으나, 독서의 리듬을 제어하는 것 외에 딱히 구획의 의미는 없다. 유럽 문학 지형도에 관한 균형잡힌 통찰은 저자가 중부 유럽 출신이기에 독자가 얻는 선물이다. 톨스토이와 카프카의 성취에 대한 해설은 어떤 비평가의 그것보다 명쾌하다. 그럼 왜
유럽 문학 지형도에 대한 균형잡힌 통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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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이 몸이 제 조국이에요.”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권력은 아무것도 구할 수 없어.” 한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 이렇게도 다르다. 시점이 다르다면 가능한 일이다. 여자가 말하는 여자는 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제 한몸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지만, 지인들의 눈에 비친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지독한 에고이스트다. 김선우는 조선의 천재무용가 최승희의 삶을 그린 <나는 춤이다>에서 시점의 차이로부터 발생한 빈틈을 무한한 상상력으로 채운다. 소설의 밑바탕이 되는 건 인간 최승희에 대한 사실적 기록이지만, 그녀의 주변을 맴도는 사람들과 그녀의 분신이기도 한 춤에 대한 묘사는 작가의 펜끝에서 새롭게 태어나 생명력을 얻는다. 보는 내내 뛰어난 무희가 등장하는 한편의 영화를 연상하게 되는 이유는 이 소설의 모태가 시나리오이기 때문이고, 작가의 본업이 이미지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아야 하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시집 <내 몸 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펜끝으로 재탄생시킨 무희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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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년간 발밑만 쳐다보며 살아온 남자가 있다. 반경 1미터 안에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만 없다면 그 너머에 훨씬 흥미롭고 재미있는 존재가 있다고 한들, 그 반경 속에서만 안전하게 살아왔다. 혼자서 밤을 꼬박 새야 하는 고독한 야간 경비원 일도 그런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직업이다. 그러다 보니 이 양반, 32살이 되도록 친구 하나 없다. 후루야 미노루의 신작 <심해어>는 32년간 깊은 바닷속의 심해어처럼 고독하게 살아온 한 ‘찌질’한 주인공 토미오카의 처절하도록 ‘찌질’한 친구 사귀기의 기록이다. <렛츠고! 이나중 탁구부>의 후루야 미노루는 엽기적인 캐릭터와 변태적인 배설개그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사회소외계층에 대한 세심한 관찰이 더 돋보이는 작가다. <심해어> 역시 관찰의 대상이 청소년에서 어른으로 바뀌었을뿐,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유령처럼 살아가는 비주류에 대한 따뜻하고 세심한 묘사가 돋보인다. 개그적
특유의 엽기캐릭터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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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인간 수컷보다 반려동물이 백번 나을 때가 많다. 함께 사는 인간 수컷은 먹은 그릇을 개수대에 쌓고 제 방으로 쏙 들어가버리기 일쑤인데, 흰 가슴털이 아름다운 동거묘 고랑은 설거지가 끝날 때까지 곁을 지켜준다. 물론,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물방울 튀기는 가느다란 물줄기들이 신기해서다. 그래도 꿈보다 해몽이다. 모시고 사는 입장에선 골골골 기분 좋은 소리가 들릴 때까지 수도를 틀어 비위맞추기를 계속한다. <인간 수컷은 필요없어>는 러·일 동시통역사이며 번역가, 작가인 요네하라 마리네 포유류 가족 이야기다. 가족 구성은 이렇다. 독신인 작가와 기억을 잊기 시작한 어머니, 어미 잃고 방황하다 구출된 고양이 남매 무리와 도리, 러시아에서 입양한 고양이 자매 쏘냐와 타냐. 여기에 붙임성 좋은 유기견 겐이 합류했다. 동물과 살아본 경험이 있다면 수명이 짧은 이들과의 만남이 언제고 통곡할 일을 만든다는 걸 알겠지만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 슬픔이 곳곳에 숨겨져 있지만 그보
남편 따윈 필요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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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름, 제 삶, 제가 이룰 가족. 모두 이 부족 안에서 온전히 자리잡기를 바랍니다. 제가 용의 비늘을 찾아 돌아왔을 때, 그때부터 저는 이 부족의 온전한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최지혜, <용의 비늘>) 사람과 용 그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자식. 한국에서 환상문학이 처한 현실도 이와 다르지 않다. 환상문학은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 PC통신이라는 태생적 배경으로 인해 문단과 인터넷 사이에서 표류하는 존재였다. <한국환상문학단편선>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전진해온 한국 환상문학의 현재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색깔과 성격이 다른 아홉편의 수록작을 하나의 범주로 묶기는 불가능하지만, 공통적으로 환상문학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캐릭터를 교묘하게 비틀고, 새로운 이야기 방식을 고민하려는 시도가 돋보였다. 뱀파이어를 사회적 약자로 묘사한 <사육>과 동양 설화의 형식을 빌려 뱀의 혀를 가진 남자의 원한을 얘기하는 <목소리
신묘하도다! 한국의 환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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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헬렌은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느낀다. 단순히 느낌만이 아니었다. 헬렌의 호스트인 브라운 씨가 가르치는 학생 중 하나가 그녀를 보고 들을 수 있었다. 소년 빌리의 몸 안에 제임스라는 남자의 혼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헬렌은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는 인간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두려움과 설렘이 그녀에게 찾아온다. 제임스를 좋아하게 된 헬렌은 인간으로 함께 있기 위해 영혼이 떠나버린 소녀의 몸으로 들어간다.
죽음 이후에 영혼은 어디로 갈까. 그런 호기심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고스트 인 러브>의 이야기에 솔깃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옛날 <사랑과 영혼>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죽은지 오래 지나 이 인간 저 인간을 떠돌며 지내는 유령들의 사연을 보여주는데 신인인 로라 위트콤은 헬렌과 제임스를 슬프고 아련한 이야기로 끌어들인다. 이 책에서는 퀵과 라이트라는 용어를 써 인간과 이계의 존재 방식을 나누는데, 인간이 인지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존재
유령들의 서늘한 러브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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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로렌 와이스버거가 2005년에 발표한 두 번째 소설이 출간됐다. <누구나 알 권리가 있다>는 홍보회사의 화려하면서 정신없는 일상에 유머 조금, 상상력 조금, 낭만을 듬뿍 넣어 버무린 달짝지근한 칙릿이다. 맨해튼의 투자은행에서 하루 종일 책상을 떠나지 못하던 베트는 홧김에 사직서를 던지고 백수로 돌아간다. 바빠서 쌓여만 갔던 통장잔고, 축적해둔 지방으로 연명하던 베트는 멋진 게이 삼촌 윌의 소개로 홍보회사 대표 켈리와 만나고 취직까지 한다. 그리고 사건은 새 동료들과 친해질 겸 찾아간 클럽에서 일어난다. 모든 여자가 사귀고 싶어 안달하는 남자 필립 웨스턴의 무릎에 앉아 정신 놓을 때까지 술에 취해버리고 사진까지 찍힌 것. 즉시, 베트는 뉴욕 사교계의 유명인사로 떠오른다. 베트가 담당하는 파티는 문전성시를 이루고, 필립과의 애정행각은 고정적으로 가십란을 달군다. 그러나 정작 베트는 필립과 아무 관계도 아니며 섹스 한번 하지 못했다고 주장
뉴요커들의 달짝지근 러브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