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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맨> 안노 모요코 지음/ 학산문화사 펴냄
잡지쟁이로 사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야근이나 밤샘 마감이 일상적이기 때문에 체력적인 한계를 느끼는 일도 있지만, 이 시대의 사람들이 알고 싶어하는 문제들을 발빠르게 따라잡는 기획거리를 찾아내는 일이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워킹맨>은 일본어로 ‘시대’라는 뜻의 주간지 <JIDAI>에서 일하는 스물여덟살 여기자 히로코를 주인공으로 그 정신없는 세계를 그려낸다. 히로코는 상사에게는 인정받지만 동료들에게는 경원시되는 일중독이다. 자신이 맡은 일을 똑 부러지게 해내는 게 다가 아니라 남들이 흐리멍텅하게 일하는 꼴을 참지도 못한다. 동료나 후배들은 히로코가 일할 때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 같다며 ‘워킹맨’이라고 부를 정도다. 남자친구와 잠자리를 한 지 3개월이나 지났지만 일하느라 지쳐서 신경쓸 여력도 없다. “워킹맨이 되면 혈액 속의 남성호르몬이 증가해서 평소의 3배 빠르기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동안은 침
바쁘다 바빠, 잡지사 워커홀릭의 좌충우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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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소녀시대> 요네하라 마리 지음/ 마음산책 펴냄
베를린의 벽은 무너졌고, 프라하에는 봄이 왔다. 게다가 그 모든 게 지난 세기의 일이다. TV 오락프로에서는 ‘반공’이라는 말을 몰라서 그 뜻을 문의하는 학생들의 사연이 소개된다. 이런 시대에, 1960년대 초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에 다니던 초등학생 소녀들의 이야기를 읽는 일은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유고슬라비아라는 국가명이 존재하고, 중국 공산당과 소련 공산당은 부분적 핵실험 정지조약을 두고 삐걱거린다. 유럽 각국의, 혹은 모국의 공산주의에 관련한 화제들은 마치 새로 나온 초콜릿 이름처럼 소녀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프라하의 소녀시대>는 저자 요네하라 마리가 겪은 일을 바탕으로 쓴 논픽션이다. 요네하라 마리는 열 살이던 1960년부터 64년까지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를 다녔다. 일본인이던 그녀가 프라하에 살게 된 것은 그녀의 아버지가 공산주의 운동 이론지인 <평화와 사회주의 제문
찬란했던 공산주의의 마지막, 소녀들의 후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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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비의 고양이> 조안 스파르 지음/ 세미콜론 펴냄
<랍비의 고양이>는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말하는 고양이에 관한 만화다. 말하는 고양이가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이유는 주인인 랍비의 딸 즐라비야 아가씨를 사랑하기 때문. 유대인이 되면 아가씨와의 사랑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이 말하는 고양이는 유대의 율법을 배우고 유대식 의식을 치르고자 하지만 주인 랍비의 반대에 부딪힌다. 랍비는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를 어떻게 구분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마치 <탈무드>를 만화로 읽는 듯한 끝없는 문답과 문제제기가 이어지는데, 고양이가 주인공이자 화자이기 때문에 느슨한 듯하면서도 함축적인 대사들이 <랍비의 고양이>를 상징적인 이야기로 만든다. 말하는 고양이는 율법을 따른다고 자처하는 자들의 허위의식을 알고 있지만, 즐라비야 아가씨 곁에 있기 위해서는 절대 아가씨 앞에서 말을 하지 말라는 주인의 말을 충실히 따르며 길거리를 배회하고 생
인생이, 삶이 뭘까? 야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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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빽판 키드의 추억> 신현준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파일로 저장돼 액정화면 숫자로 표기되는 요즈음 음악은, 간혹 들을 수는 있되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유령 같다. “소프트웨어가 보이지 않는 경지”에 이르면서 음악의 물성(物性)은 희미해졌다. 묵직한 포터블 라디오를 져나르느라 어깨가 처지고, LP판의 소리골을 닦고, 손수 녹음한 카세트테이프에 곡목을 꼭꼭 눌러쓰던 세대가 기억하는 음악의 촉감과 무게는 멀어져가고 있다(물론 컬러링과 MP3로 음악을 습득한 세대의 몸은 나름의 방식으로 음악을 새길 것이다).
<빽판 키드의 추억>은 촉감과 노이즈가 살아 있는, 한 40대 평론가의 음악 편력기다. 팬에서 출발해 애호가를 거쳐 평론과 연구를 업으로 삼은 저자는 다시 ‘팬심’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경지에 이르러 이 책을 썼다. <쇼쇼쇼> 무대에 매혹되고, 식구들의 비협조와 싸우며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녹음하고, 통과의례처럼 통기타를 독학한 저자의
촉감과 노이즈가 숨쉬는 음악 편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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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보니 타워> 존 파울스 지음 | 정영문 옮김 | 열린책들 펴냄
<에보니 타워>는 <콜렉터> <프랑스 중위의 여자>의 존 파울스가 중편과 단편을 엮어 1974년 발표한 단편집이다. 1926년에 태어난 파울스는 전후(戰後)에 소설가로서 활동을 시작했고, 대표작인 <프랑스 중위의 여자>는 1969년에 발표됐다. 그런 연표를 떠올리며 예술과 소설과 창작에의 질문이 어른대는 <에보니 타워>를 읽는다면 이 소설들이 품고 있는 긴장을 좀더 밀접하게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파울스가 애초 <변주>라고 이름 붙이고 싶어했던 <에보니 타워>는 개별 작품의 줄거리를 나열하는 행위가 부질없게 느껴지는 소설집이다. 예를 들면 타이틀작인, 상아탑인 아이보리 타워와 대비되는 용어인 <에보니 타워>는, 노화가를 방문한 젊은 화가 겸 작가가 겪는 이틀과 에필로그 비슷한 찰나의 느낌이 전부인 소설이다. <
무너질 듯 위태롭게, 행간은 변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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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출간된 뒤 절판되었던 <핑퐁>은 최고로 손꼽을 수 있는 스포츠물 중 하나인 동시에 잊을 수 없는 성장물이다. 무대는 가타세 고교. 페코라고 불리는 호시노는 탁구에 재능이 있지만 노력을 하지 않고, 스마일이라고 불리는 츠키모토는 천재적 재능을 타고났지만 승부근성이 없다. 어려서부터 친구인 둘은 같이 탁구를 하지만, 스마일은 페코를 격려할 뿐 나서서 실력을 키울 생각이 없다. 스마일의 재능을 알아차린 탁구부 코이즈미 선생은 ‘언젠가 그 애는 괴물이 될 거야’라는 생각으로 스마일을 다그치고 다그쳐 연습을 시킨다. 전국 고등학교 체육대회가 다가오고, 둘은 나란히 출전한다. 스포츠는 이기는 게 전부인 세계다. 진 선수는 실력뿐 아니라 인격까지 부정당할 수도 있고, 결국 좌절로 이어진다. 절대 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이기는 것뿐이니, 승부근성이야말로 재능만큼이나 중요할 수밖에 없다. 천재적 재능은 있지만 탁구에 목숨을 걸고 덤비겠다는 마음이 없는 스마일은 탁구에 대해 “
인생은 탁구 플레이처럼, <핑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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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하는 19세기 말은 기계문명의 기적과 눈앞에 다가온 20세기에 흥분한, 모두가 앞으로 달리고 있는 시대일 것이다. 그러나 제롬 K. 제롬과 그의 친구들은 사람들이 진정 바쁘게 살기 시작한 시대에 게으른 자로 남아 있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증기선을 미워하고, 성미 급한 갑문지기를 비판하고, 파인애플 통조림을 따기 위해서만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한 게으른 녀석에 대한 게으른 생각>으로 작가가 된 제롬 K. 제롬은 세 게으른 녀석과 게으른 개 한마리에 대한 이야기 <보트 위의 세 남자>로 많은 이들에게 마음껏 게을러져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여유를 주고 있다.
화자인 J는 폭스테리어 몽모렌시와 두 친구와 함께 휴식을 위한 2주간의 템스강 보트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조지는 아침부터 오후까지 은행에서 잠을 자다가 오는 직업을 가지고 있고, 다시 말하면 은행원이고, 해리스는 어느 지방에 가도 괜찮은 위스키를 파는 모퉁이 술집을 찾아내는 능력을 지닌 남자다. 첫
게으르게, 어설프게 여행해보면 어때? <보트 위의 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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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모리슨이 <파라다이스> 이후 5년 만에 쓴 <러브>는 시점과 시대를 자유롭게 오가며 노래처럼 써내려간 소설이다. 50년 가까운 세월을 아우르는 <러브>는 이미 죽은 요리사의 회상과 혼잣말로라도 진심을 발설하지 않는 여인들의 이야기와 트럭에 발가락에 뭉개지면서 마음도 함께 무너진 소녀의 사연을, 차가운 물에 잉크가 퍼지듯,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한 어조로 들려준다. 부유한 흑인으로 호텔을 소유하고 있던 빌 코지의 미망인 히드와 손녀 크리스틴은 저택에 은둔해 살면서 서로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한다. 이제 노인이 된 그들은 같은 또래다. 유배지나 마찬가지인 이 집에 구인광고를 보고 흑인 소녀 주니어가 찾아온다. 어릴 적에 가출해 소년원을 전전했던 주니어는 영악하고 야성적이고 생존본능이 강한 아이다. 세 사람의 만남으로 시작된 <러브>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토막토막 들려주면서 마지막 순간에야 진실을 드러낸다.
<빌러비드>
증오로도 덮어지지 않는 ‘사랑’, <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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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거스미스>는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우아하고 감상적인 레즈비언 통속소설이다. 비밀과 거짓말, 음모가 곳곳에 숨어 있고 책의 1/3 지점에서 깜짝 놀랄 반전이 등장하기 때문에 추리소설로도 읽을 수 있지만, 연속극을 보는 듯한 드라마로서의 매력 또한 대단하다. 나쁜 피의 망령에 사로잡힌 등장인물들이 운명의 장난과 시대의 분위기에 휩쓸려가는 이야기의 힘이 책장을 절로 넘기게 한다.
고아인 수는 살인죄로 교수형당한 어머니 대신 석스비 부인의 보호를 받으며 자란다. 런던 뒷골목에서 아이들을 매매하는 석스비 부인은 수를 팔아치우지도 않고 험한 일을 시키지도 않으며 유달리 보호한다. 어느 날 젠틀먼이라고 불리는 남자가 석스비 부인의 집을 찾아와 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을 귀족 상속녀 모드를 손에 넣기 위해 수를 모드의 몸종으로 데려가고 싶다는 것. 일이 성사될 경우 상당한 액수의 사례금을 수에게 주는 것은 물론이다. 수는 하녀로서의 행동가짐
우아하고 감상적인 빅토리아 시대 스릴러, <핑거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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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들려줘.” 한 아티스트의 신실한 팬이라면,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씌어진 예술가의 전기를 덮으며 실망을 느낀 적이 더러 있을 것이다. <에곤 실레-세상의 하이페리온>과 <에곤 실레를 회상하며>는 그런 경지에 닿은 애호가들이 반색할 법한 책이다. 1인 출판사 미디어 아르떼의 김기태 편집자는 실레가 성장하고 활동한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직접 방문해 전문가와 관련 인사를 취재하고 자료를 수집해 이 책들을 펴냈다. 특히 편집자는 도판만큼은 세계 수준을 고집했다고 자부한다. 과연 흔히 못 보던 그림도 많고 상태도 훌륭하다. <에곤 실레-세상의 하이페리온>은 두개의 장에 걸쳐 유년기의 원체험을 포함한 화가의 생애와 예술 세계를 정리했다. 3장은 1912년 유아유괴와 포르노그래피 제작 혐의로 수감된 실레가 쓰고 그린 옥중일기와 작품, 편집자의 노이렝박 구치소 방문기로 구성됐다. 감방 실내풍경, 수의를 입은 자화상, 실제 구치소 사진을 볼
연약하고도 예리한, 그 타락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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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M. 슐츠의 만화 <피넛츠>에 등장하는 스누피는 글 쓰는 비글종 강아지다. 개집 지붕 위에 타자기를 놓고 파지를 동그랗게 뭉쳐서 버리는 스누피의 옆모습은 세상 모든 작가의 마스코트다. 떨어지지 않는 첫 문장, 말 안 듣는 캐릭터, 친구들의 신랄한 험담, 출판사의 거절 편지와 싸우며 스누피는 간혹 입꼬리를 당겨 씩 웃는다. 그리고 “레오(톨스토이)의 심정을 알겠군”이라고 중얼거리기도 한다.
이 책은 여러 유명 작가들이 보내는 “스누피야, 이렇게 써봐”라는 조언이다. 에드 맥베인, 다니엘 스틸, 잭 캔필드, 레이 브래드버리, 엘모어 레너드, 시드니 셀던 등 서른세명의 작가들이 작가가 되려는 사람이 유념해야 할 실용적 요령을 충고했다. 각각의 글은 문학론이나 미학을 피력하는 무거운 에세이가 아니라, ‘대화에 녹여내라’, ‘연애소설에서 갈등을 증폭시키는 법’, ‘독자가 건너뛰고 읽을 부분은 아예 쓰지 마라’ 같은 포인트를 지적한다. 제목을 내심 정해두지 않으면 책을 쓸
스누피야, 이렇게 써봐, <스누피의 글쓰기 완전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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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은 해적이 아니었다. 관습적인 삶을 추구하는 대신 영혼의 자유를 꿈꾸긴 하지만 그는 화가였다. 그리고 그는 가난했다. 약혼자 알리스와 살고 있는 이삭은 살아가기 위해 간판을 그려 먹을 것을 사고, 자신보다 어려운 형편에 처한 동료 화가를 돕기 위해 그의 그림을 사주기도 한다. 선량하고 쾌활한 이삭이지만, 궁핍한 생활과 창작의 고통은 그와 알리스의 사이를 멀어지게 한다. 생계를 위해 그림을 들고 나가 팔려던 이삭은 상상으로 그린 인물이 실존 인물과 닮았다는 말을 듣는다. 배는 안 타봤지만 바다라면 그림이며 옛 문서까지 뭐든 좋아하는 이삭은 그림을 사준 남자가 소개해준 선장의 배를 타게 된다. 며칠 만에 돌아올 수 있을 뿐 아니라 돈도 벌 수 있다는 말에 혹해 배를 탄 이삭은 배가 향하는 곳이 아메리카이며 쉽게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8세기 파리 뒷골목을 무대로 시작한 <해적 이삭>은 이삭의 행로를 따라 거친 바다로 향한다. 동시에 파리에 홀로 남은 알
해적이 된 전직 화가의 기이한 바다 모험, <해적 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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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의 소설 앞에서 나는 곧잘 노안용 돋보기를 갈구하는 노파가 된다. 글자 너머의 욕망이 당최 보이지 않아 버벅거린다. 그러나 원시(遠視)처럼 게슴츠레하던 내 눈은 <핑퐁>을 통해 장난기 어린 다초점렌즈가 된다. 하나의 주제찾기를 포기하고 생뚱맞은 질문들을 던져보는 것이다. <괴물>에서 포름알데히드로 인해 변종된 물고기는 분명 문명의 희생자인데 왜 ‘악의 축’이 되는 걸까. 괴물이 나타난다면, 에일리언이나 프랑켄슈타인 같은 섬뜩한 모습이 아니라 너무나 평범해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모습이 아닐까. <핑퐁>의 왕따소년들처럼, 세계가 “깜박”해버린 존재들이 아닐까. 또는 거울에 비친 우리 자신의 모습은 아닐까. 아니, “모두가 미미하고 모두가 위험한 이 세계”에서 우리는 이미 서로에게 괴물이 아닐까.
왕따소년들은 알고 있다. 삥을 뜯고 린치를 가하는 ‘일진’보다 더 무서운 건 “다수인 척”하는 침묵의 시선임을. 민주주의야말로 피 안 나게 왕따를 제조하
개인의 소중함 깨달은 왕따소년들의 ‘핑퐁’, <핑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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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루헤인은 인간의 어둠을 묘사하는 데 거침이 없는 작가다. 루헤인은 이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영화화한 <미스틱 리버>나 인상적인 반전으로 한국에서도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는 <살인자들의 섬>에서 치유 불가능할 정도로 상처입고 황폐해진 인간의 내면을 동정없이 그려낸 바 있다. ‘사립탐정 켄지 & 제나로 시리즈’인 <가라, 아이야, 가라>와 <비를 바라는 기도> 또한 ‘현대 하드보일드 스릴러의 결정판’이라는 광고 문구가 과하지 않은 수작들로, 정당함이나 규칙에 아랑곳하지 않는 폭력적인 사립탐정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악에 맞서는 이야기들이다. 사립탐정인 패트릭 켄지의 일인칭시점에서 진행되는데 그에게는 앤지 제나로라는 동료 여탐정이 있다. <가라, 아이야, 가라>에서 두 사람의 파트너십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긴밀하다. 30년 만에 나타난 보스턴 연쇄살인범을 잡은 공로로 유명세를 탄 지 2년이 지나, 두 사람은 자기 방 안에서
폭력적인 두 사립탐정, 악에 맞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