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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김수용 감독은 한국영화의 전성기인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왕성하게 현장을 지켜온 분이다. 늘 일기를 쓰는 덕분인지 기억력이 비상하고, 항상 카메라로 사고한 덕분인지 이야기엔 현장을 찍어서 전달하는 듯한 생생함이 있다. 김기덕 감독의 <빈집>에서 받은 감동을, 배우 재희의 연기를 흉내내 전달할 정도로 소년적인 감수성도 책 속에서 반짝인다. 윤정희와 갓 결혼한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촬영현장까지 따라간 일화는 이 책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백건우가 남자 역의 이대근에게 정사신을 어떻게 찍을 거냐고 묻자 이대근은 “정사신이요? 마누라 없이 살던 놈처럼 허기지게, 체면없이 무자비하게 해치워야죠” 하고 답한다. 문학적 감수성과 모더니스트적 실험정신을 결합시키며 100편 넘는 연출을 한 노장의 증언은 충무로 역사의 빈 구석을 매우 영화적인 방식으로 메꾼다. 그만큼 시각적이고 흥미로우며 구석구석 리얼하다.
30년 전의 땀 냄새 물씬, <나의 사랑 씨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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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앙드레 바쟁은 프랑스 국립고등사범학교의 강연장에서 장 르누아르의 1946년작 <어느 하녀의 일기>를 상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참석한 (지식인) 관객 가운데 상당수는 르누아르의 그 ‘미국영화’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예컨대 철학자인 모리스 메를로 퐁티는 르누아르의 그 영화가 르네 클레르의 초기 익살극 영화들과 동일한 범주에 속하는 것이면서도 템포나 연출력면에서 클레르의 것들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런 반격에 맞서서 바쟁은 르누아르의 영화가 어떻게 클레르의 것과는 다르며, 좀더 풍요로운지를 열심히 입증해 보였다.
사실 바쟁도 르누아르가 <게임의 규칙>(1939) 이후 미국으로 가서 만든 영화들에 처음부터 완전히 마음을 열어놓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무한한 애정과 통찰의 시선을 동반한 ‘르누아르 다시 읽기’를 거듭 행하고 확장하면서 그는 자신의 실책들을 하나씩 깨닫는 동시에 르누아르의 심오한 세계, 그 진가에
비평의 아름다움을 증거하는 비평, <장 르느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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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왕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아서 왕 이야기를 제대로 읽은 사람은 많지 않다. 켈트 문화 전문가인 장 마르칼은 40년에 걸친 연구의 결과물로 아서 왕 연대기를, 아서 왕과 그를 둘러싼 켈트의 전설을 흥미진진한 소설로 내놓았다. 8권에 달하는 <아발론 연대기>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책의 만듦새다. 시인이자 교수이며 번역가인 김정란의 번역은 옛날이야기를 듣는 듯 편하게 책을 읽게 해주고, 곳곳에 실린 관련 그림들은 내용의 이해를 돕는다. 주요인물 소개와 권두언(서평과 저자의 말, 편집자의 말 등), 저자가 쓴 권말의 해설 등은 아서 왕 이야기를 신화적으로, 문화적으로 좀더 풍부하게 읽을 수 있는 가이드가 되어준다. 아서 왕 전설은 다른 모든 전설(혹은 신화)이 그렇듯 수많은 예술작품의 원형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다는 예언에서 싹트는 비극이나 근친상간, 국가의 평안을 뒤흔든 연애담과 같은 이야기가 책장을 술술 넘기게 만든다.
아서 왕의 전설 제대로 보기, <아발론 연대기> 1∼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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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만에 그가 나타났다. 여전히 더벅머리에 순한 눈동자. 아직도 열쇠가 잘 맞지 않는 옥탑방에 살고 있으며, 지금도 누군가와 주절대는 버릇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동안 무얼 하고 지냈냐니까 싱긋 웃는다. 변하지 않은 그를 보면서, 변한 우리가 던질 만한 질문이 아니었던 게다. 장경섭도 그의 분신인 <장모씨 이야기>도 그때 그 모습 그대로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가 누군가의 손, 우리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벌레의 손을 잡고 있다는 정도다.
1990년대 중반, 대한민국 만화계에는 언더 혹은 인디라는 젊은 기운이 용솟음친 적이 있다. 그중 <화끈>에 연재된 장경섭의 <장모씨 이야기>는 단연 발군의, 적어도 나의 기준으로는 세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의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화면 안에 절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수봉이 형과의 독특한 대화법, 작가의 분신인 주인공을 다시 여러 분신으로 나누어 서로 자조하고 위로하게 만드는 복합적인 연출법 등은 ‘장경섭표
아직도 거기 살고 있었네, <‘그’와의 짧은 동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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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진 적수 위에 앉아서 똥을 싸고, 적수는 죽어가면서 그 똥을 먹고 기뻐 소리치는 경우가 어디 있겠는가? 누가 아무 저항도 못하는 연약한 사람을 매달고 사악한 개처럼 그의 정액을 입으로 받아먹는가? 점잖은 독자들이여, 나는 기꺼이 당신이 이 끔찍한 것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려 했으나, 내 펜이 마치 노수부(老水夫)처럼 자기의 뜻을 세우는구려.” 윌리엄 S. 버로스의 <네이키드 런치>는, 초자아의 장벽이 무너진 인간의 의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독자들의 의식을 발기된 성기처럼 유린한다. 노수부의 최면에 걸려 꼼짝없이 이야기를 듣고 마는 코울리지 시의 청자처럼, 우리, 위선적인 독자들은 버로스의 화려한 언어 향연에 홀려 죽음과 성과 환각을 한데 뒤섞어 시작도 끝도 없이 자아내는 이드(id)의 천일야화를 정신없이 읽어 내려간다. “반문화”의 대표주자이자, 전설적 반항아들의 문파인 “비트 제너레이션”의 일원인 버로스의 매혹은, 언어와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회와 질서를
벌거벗은 글쓰기의 정수, <네이키드 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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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는 사실뿐 아니라, 앞으로도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여기에 그 슬픔이 자손들에게 유전된다는 ‘업보’까지 짊어진 자들이 있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될 때, 그 자리에 있던 그 사람들이 그렇다. 원폭의 피해는 당사자뿐 아니라 그 자손들에게까지 계속된다.
<저녁뜸의 거리>는 10년 전 원폭을 경험한 히로시마의 한 젊은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단편 <저녁뜸의 거리>와 피폭자 엄마를 둔 아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중편 <벚꽃의 나라>로 구성되어 있다. 멀리 떨어져있는 동생을 만나러 가기 위해 한푼 두푼 알뜰하게 살아가는 히라노는 평범한 아가씨처럼 보이지만, 시체가 떠다니던 강가와 죽은 여인에게서 나막신을 벗겨서 신어야 했던 지옥 같은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저녁뜸의 거리>), 나기오는 단순한 천식도 피폭의 영향이라는 오해를 받으며 엄마가 피폭자이기에 사랑하는 사람도 제대로 만나지 못한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저녁뜸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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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같이 찾아오는 빚쟁이를 퇴치하는 가장 훌륭한 대사는? “사장님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는데요.” 부푼 꿈을 안고 사내 견학을 하고 있는 신입사원들이 가장 듣기 싫은 말은? 인사과장의 “나 로또 당첨됐거든. 뼈빠지게 일해봐요.” 일본에서 온 귀빈 야마도라 상을 접대하기 위해 추천하는 가장 한국적인 음식점은? “욕쟁이 할머니 집.” 몸매 8단, 성질 9단의 쭉빵 과격파 처녀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화제를 불러일으킨 웹 만화 <앙칼 처녀 도전기>가 엠파스에 <앙칼 처녀 시즌2>를 이어가며 우리 인생에 전혀 도움되지 않는 교훈들을 더해가고 있다.
<앙칼 처녀 도전기>의 애초 주인공은 대재벌을 목표로 패션그룹 돈타에 지원하지만 지나치게 튀는 패션에 발끈하는 성질머리로 고난을 겪는 유니, 출중한 실력을 지니고 있지만 필살기를 넣기 전에 쓸데없는 세리머니를 하다 역전패당하기 일쑤인 프로레슬러 진경, 딱 보기에 ‘쾌활한 왕따’인 보모 희경 등 세명의 앙칼진 처녀.
웬만하면 발끈하는 성질파 처녀들, 스바르탄의 <앙칼 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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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시를 처음 본 건 8년 전 모로코에서다. <인샬라> 촬영현장 취재로 찾아간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소국이 알코올을 금해서였을까. 담배 한 보루를 들고 길가를 서성이는 청년들은 해시시도 팔았다. 하필 모두들 말보로 담뱃갑을 들고 섰는데 새빨간 브랜드 무늬가 자꾸 호기심을 자극했다. “담배 말고 해시시?”라고 말문을 열긴 했으나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는 상대방 표정에 왠지 겁먹어버렸다. 같은 대마에서 나오기는 했으나 일반 대마초보다 약용효과가 훨씬 강한 해시시(대마수지)의 거무틱틱한 색깔이 이성의 금지명령을 강하게 불러일으켰다고나 할까. 하물며 대마초조차 절대악의 유혹으로 주입받아온 터에 철통 이성의 규율에 익숙해진 몸이 얼마나 일탈할 수 있을까. <해시시 클럽>의 면면은 이런 조건반사를 무안하게 만든다.
한달에 한번, 파리의 피모당 호텔에 모여 정신의학을 공부한 자크 모로가 반죽해 건네는 해시시로 파티를 열었던 이들 중에 천재과에 가까운 예술가들의 이름을 쉽게
해시시를 아시나요, <해시시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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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풍미했던 힙합 그룹 ‘듀스’의 노래 가사 중에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저 멀리서 누군가 부르고 있어∼”라는 대목이 있다. 내 안에 다른 누군가의 인격이 있다는 것이 느껴지면 이 노래 가사가 뼛속 깊이 절절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다중인격탐정 사이코>의 아마미야 카즈히코처럼.
코바야시 요스케는 토막살인을 수사하던 중 택배를 받는다.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은 토막난 채 목숨만 겨우 붙어 있는 여자친구였다. 범인을 찾아 죽이게 되는 코바야시 요스케. 그 과정에서 자신 안에 잠들어 있던 인격체 니시조노 신지와 아마미야 카즈히코의 인격이 드러나고, 코바야시 요스케의 인격은 사라지게 된다. 수사 중 과실치사로 징역을 살고 나온 코바야시, 즉 아마미야 카즈히코는 아소노의 탐정사무소에서 프로파일러로 일하게 된다. 그리고 연속적으로 터지는 살인사건. 그 배후에는 아마미야 카즈히코에 여러 인격을 심어넣은 어떤 조직이 자리해 있다.
<다중인격탐정-사이코>에서 가
다중인격탐정-사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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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을 입 밖에 꺼내는 순간, 흔히 맞닥뜨리는 반응은 대개 한줄을 넘지 않기 일쑤다. “아, 골치 아파” 혹은 “지루해”. 하지만 이렇게 고루하고 화석화된 정전 작가의 죽은 이미지는 이 르네상스 영국 작가의 무한한 얼굴들 중 단 하나에 불과하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은, 모든 경계와 범주를 무색하게 하는 모호하고 유동적인, 그러나 유례없이 강력한 문화적 리바이어던이 되었다. 그는 이제 더이상 영국 16세기에 살았던 한 개인이 아니며,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고 장담한 영국 아니 서구가 독점하는 고가의 상품만도 아니다. 일본에서, 리투아니아에서, 한국에서, 새로운 연출가들과 새로운 작가들이 서구 문화의 꽃을 상징하는 셰익스피어의 이름 속에 자국의 문화를 새겨넣는 작업에 나날이 몰두하고 있는 사실은 이러한 현상을 잘 보여준다. 셰익스피어는 수많은 원형적 내러티브 그 자체이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문화 브랜드며, 사상 최대의 문화적 권위다. 셰익스피어의 이름으로 권위가
가장 유쾌하게 셰익스피어를 읽는 법, <필름 셰익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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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보고에 따르면 도시의 그늘 여기저기에 새로운 ‘도회형 습지’가 형성되고 있어 별종 생명체들의 터전이 되고 있다고 한다. 곰팡이, 쥐며느리, 돈벌레 등이 가장 먼저 떠올릴 만한 생명체들이지만, 우리의 보고자는 더욱 주목해야 할 특이종을 가리킨다. 비가 새는 반지하 셋방에서 라면 한 그릇을 나눠 먹으면서도 방 한구석에 주인처럼 누워 있는 빈대에 수시로 뜯기는, 그러면서도 절대로 펜 마우스를 놓지 않는 지방대학의 그래픽아티스트 지망생들이다. 이들의 궁상맞으면서도 절절한 삶의 장면들이 최규석의 <습지생태보고서>라는 다소 괴팍한 카메라에 걸려들었다.
최규석은 데뷔 직후부터 문제작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쥬>를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만화가가 되어버렸지만, 이로 인해 그를 냉소적이고 암울한 언더 지향 작가의 틀에 가두어버릴 위험도 적지 않았다. 그만큼 그에게 주어진 일간신문 연재면은 여러 시각의 기대와 불안을 만들어내기도 했는데,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
도회형 습지의 궁상맞은 청춘들, 최규석의 <습지생태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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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고 사는 아내들이 종종 ‘아무리 그래도 맞을 만하니까 그랬겠지’ 하는 오해를 사는 것처럼, 우리는 은연중에 왕따를 당하는 아이들은 ‘왕따를 당할 만하니까 왕따를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버리곤 한다. 하지만, ‘맞을 맞한 이유’나 ‘괴롭힘당해도 싼 이유’ 따위는 세상에 없다. <라이프>는 리스트커트(자신의 몸을 커터칼로 긋는 행위)와 이지메, 왕따라는 사회문제와 그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정면돌파한다.
아유무와 시노즈카는 중학 시절 단짝 친구. 아유무는 우등생인 시노즈카를 좇아 같은 고등학교에 원서를 내고 시노즈카에게 많은 도움을 받는다. 하지만 정작 그 학교에 합격한 것은 시노즈카보다 성적이 좋지 않았던 아유무. 이 일로 시노즈카는 아유무에게 심한 말을 하고, 아유무는 죄책감을 느끼며 리스트커트 증후군의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의기소침하던 아유무에게도 새 친구가 생기지만, 왕따 만들기에 함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유무는 오히려 왕따를 당하게 된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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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추억 속을 걷고 싶다. <씨네21> 창간 초 다른 언론사에서 일하는 선배로서 처음 만난 저자는 이따금 먼산 보는 표정으로 내게 권하곤 했다. “미술 공부를 해보지 그래요?” 그리고 정작 본인은 이탈리아 볼로냐로 영화 유학을 갔다. 5년이 흐른 2002년 초가을, 나는 부들부들 떨며 베니스영화제 취재길에 올랐다(그해 여름 월드컵 16강전 이후 이탈리아 국민 정서를 상기하시라). 저자는 기차로 베니스를 찾았다. 영화제를 빌미로 만난 우리가 산책간 곳은 베니스 아카데미아 미술관이었다. 틴토레토와 베로네제를 보았다. 그 그림들은 정말이지 스크린만했다. 귀국을 앞둔 2004년 4월 초 저자는 <씨네21>에 ‘영화와 미술’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씨네21>은 즐겁게 들떴다. ‘영화와 미술’은 영화의 시각적 아름다움에 결코 닿을 수 없는 운명을 지닌 종이 잡지에 그나마 허락된 최고치의 시도처럼 보였다.
<씨네21> 연재가 65회에 이른 지금,
책으로 만나는 ‘영화와 미술’, <영화, 그림 속을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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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이나 잡지의 서평이 대부분 긍정적인 것은 우리나 미국이나 마찬가지다. 비판적인 평가는 지엽적인 오류나 아쉬운 점을 지적하는 정도에 그치며, 갈등을 피하기 위해 대체로 긍정적이고 온건한 서평을 쓴다. 서평이 아니라 사실상 책 소개 글인 경우가 많다. 고백하건대 필자도 이런 문장을 자주 쓴다. ‘옥에 티가 옥의 빛깔을 무색하게 만들지는 못하는 법. 이 책에 대한 아쉬움은 이 책의 미덕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옥의 티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책 <카사노바는 책을 더 사랑했다>는 서평의 대상으로 적합한 책일까? 아니면 소개하는 글을 쓰기에 좋은 책일까? 16, 17세기의 고위 성직자 잠바티스타 팜필리는 다른 추기경이 소장한 귀중본 역사서 한권을 예복 속에 넣어 훔쳤다. 도난 사실을 알아차린 주인이 몸수색을 해야 한다고 우기면서 몸싸움이 벌어지던 순간, 예복 속 책이 바닥에 떨어졌다. 팜필리는 나중에 교황이 돼, 그 추기경의 재산을 몰수하고 로마에서 추방해버렸다.
책
책에 관한 적나라한 이야기들, <카사노바는 책을 더 사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