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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열심히 공부해 동경하던 명문 메이린칸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를 동경한 이유는 오직 하나, 걸어서 3분이면 등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잠이 유독 많은 하나는 등굣길에 반쯤 졸며 걷다가 차에 치인다. 차 뒷좌석에 타고 있던 부잣집 도련님 이즈미는 오히려 고급차가 망가졌다며 하나에게 하키부에 나오라고 명령하고, 하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남자 하키부의 유일한 여자 부원이자 골키퍼가 된다. 시작부터 말이 안 되는 이야기가 제멋대로 펼쳐지는데, 그게 <극락 청춘 하키부>의 가장 큰 매력이다. 하키부라고는 해도 하키를 하는 데 관심이 없는 부잣집 도련님들은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헬키를 타고 놀러가거나 맛있는 음식이나 먹을 뿐이다. 하키부의 홍일점 하나는 그저 맛있는 음식을 먹여준다는 말에 침을 질질 흘리며 녹아내린다(눈에 커다란 별 모양이 그려지는 것은 물론이고 가끔 강아지 꼬리와 귀가 돋아나 살랑거리며 애교도 부린다). 현실적이기를 포기했으니 상상은 끝없이 이어진다.
막무가내 코믹 상상, <극락 청춘 하키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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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처럼 소비되곤 하는 예술작품에 순위를 매긴다면, 구스타프 클림트는 단연 수위를 차지할 것이다. 특정 화풍에 엄격하게 규정되어지지 않은데다가 묘한 매력으로 감상자를 빨아들이는 클림트의 그림은, 그래서 미술사 책보다는 오히려 개인 블로그나 미니홈피에서 만나는 것이 익숙하게 느껴질 정도다. <클림트>는 이름 그대로 그에 관한 소설이다. 책이 따라가는 시선은 가장 오랫동안 그를 곁에서 지켜왔던 에밀리 플뢰게의 것이다. 2차대전을 피해 클림트와 주로 시간을 보냈던 아터 호숫가로 피난 온 에밀리 플뢰게는 인생의 말년을 앞두고 그녀의 인생을 지배했던 클림트를 추억한다. 수많은 여자와 자유로운 연애관계를 이어온 클림트와, 그를 사랑한다고 깨닫는 순간부터 그의 존재가 평생의 마음앓이가 될 것을 예감한 플뢰게의 관계는 시작부터 이루어지기 힘든 것이었다. 열두살 어린 나이에 제자와 스승으로 만난 에밀리 플뢰게와 구스타프 클림트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로뎅-카미유 관계처럼 극적이지도,
여러 색깔로 채색된 그 사랑, 소설 <클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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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간 사라졌던 ‘월가의 전설의 사나이’라고 불리던 남자가 일본에 돌아와, 일본의 재생을 외치며 원대한 계획을 시작한다. 정말 만화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주인공이 거의 슈퍼히어로급의 경제 동물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DAWN>은 대단히 리얼한 경제 전쟁의 실상을 그리고 있다. 경제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냉정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이면에서 어떤 더러운 짓들이 태연히 벌어지는지도 폭로한다.
야하기 타츠히코는 강력하게 외친다. 미국에 복수하겠다고. 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미국의 호경기는 아시아 경제를 날려버린 돈이 흘러들어간 덕이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강요하며 모든 국가를 같은 무대에 올린 채 금융전쟁이 시작되었고, 아시아 국가 대부분이 금융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이익을 위하여 모든 것이 결정되었지만, 일본의 정치가들은 거기에 동조했다. 하지만 일본인은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아야 하고, 반드시 일본의 형태를 바꾸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농업회사를 세우고, 미
경제를 움직이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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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물방울>은 와인 고수들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칸자키 시즈쿠는 국제적인 와인 평론가 칸자키 유타카의 하나뿐인 아들. 그는 와인 고수가 되도록 키워진 인물이지만 단 한번도 와인을 마셔본 적은 없다. 그가 받은 교육은 뜰에 있는 허브에 산딸기에 산사나무, 아카시아 같은 꽃 냄새, 연필과 허리띠, 모닥불 냄새를 맡는 것이었다. 와인을 마시고 양조장의 이름을 외우는 훈련을 제외한 와인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영재교육처럼 받은 것.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은 칸자키는 아버지 집으로 가는데, 아버지의 유언이 특이하다. 아버지가 소장한 20억엔 상당의 와인을 상속받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사망 1주일 전 양자로 입적한 유명한 와인 평론가인 토미네 잇세와 대결을 펼쳐, 아버지가 고른 12병의 위대한 와인과 그 정점에 있는 ‘신의 물방울’이라는 1병의 와인이 묘사된 말만으로 정확히 몇년에 만든 어떤 와인인지 알아맞혀야 하기 때문이다.
<신의 물방울>은 칸자키가 와인
술술 넘어가는 와인 이야기, <신의 물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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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배우만큼 쓰임새가 많은 직업도 없는 것 같다. 좋은 책(대본)을 늘 가까이, 그것도 통째로 외우니 독서량이 풍부하며, 좋은 목소리로 말하는 법을 아니 대화가 되며, 끼가 있으니 술자리가 즐거우며, 의상과 분장까지 직접 해결하니 재주가 있다. 여기에 글재주까지 있다면 그건 참 불공평하다. 벌써 게임 끝이다. 오지혜 얘기다. <한겨레21>에 그미(그녀의 멋스런 표현)의 인터뷰가 나올 때마다 허겁지겁 읽던 기억이 난다.
좋은 인터뷰에는 이런 전제가 따라야 할 것 같다. 사람의 목적지는 사람이라는. 그래서 인터뷰는 까다롭다. 글만 잘 쓴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준비를 철저히 해서 간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통찰력도 있어야 하고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포용력, 자리를 끌고 가는 재치, 무엇보다 그 사람의 역사를 채취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마지막 게 안 돼 인터뷰어는 늘 긴장과 복통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그러니 배우 인터뷰에 관해서라면, 배우의 역사를 두루 꿰고 있는 오지혜와
검색으로도 알 수 없는 딴따라 이야기, <딴따라라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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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원더풀 아메리카’라는 제목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세계의 ‘기준’으로 군림하는 초강대국 미국에 ‘원더풀’이란 수사는 식상할 뿐 아니라, 불쾌하다. 그러나 ‘미 역사상 가장 특별했던 시대에 대한 비공식 기록’이라는 부제가 달린 <원더풀 아메리카>를 읽어가다보면, 1920년대의 미국에 붙일 수사는 바로 그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부터 1929년 주식대폭락까지 20년대 미국은 잘 꾸며진 박람회의 풍경처럼 과거와 미래를 망라하는 미국의 전경을 세밀화로 그려놓은 느낌이다. 에이즈도, 9·11도 없었지만 20년대 미국에는 빨갱이 사냥과 부동산 투기, 대량생산과 과대 소비, 대통령 하딩의 스캔들과 마피아 등 ‘미국적’이라고 부를 만한 모든 것이 이미 존재했다. 아니 바로 20년대에 완성됐다.
1920년대를 다르게 말하자면, ‘현대’의 틀이 잡힌 시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욕망을 원초적으로 억압하는 금주법이 실행되어 마피아가 거대 조직으로
혼돈과 가능성의 20년대 미국 관찰기, <원더풀 아메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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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무라카미는 이 글을 쓴 사람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쿄기담집>은 책 제목만큼이나 사실과 픽션을 혼동하게 만드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 겪었다고 전해 들었을 법한 도시의 전설들을 무라카미 하루키는 단편들로 엮어냈다. <우연한 여행자>는 ‘무라카미’의 시점에서 시작한다. 미국 체류 중 재즈클럽에서 토미 플래너건의 라이브 연주를 듣다가 실망한 ‘나’는, 두곡을 신청한다면, 이라는 상상을 하며 듣고 싶은 곡을 마음속에 그린다. 대중에 잘 알려지지도 않은 두곡을 생각했을 뿐이건만 공교롭게도 플래너건은 그 두곡을 이어 연주한다.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재즈 곡 가운데서, 무대의 마지막에 이 두곡이 잇따라 연주될 확률’이 <도쿄기담집>에 실린 이야기들의 공통점이다. 무의식이 실제 사건으로 벌어지는, 간절함이 낳는 기이한 동시성은 <하나레이 만>에서도 일어난다. 하와이 하나레이 만에서 서핑을 하다가 상어에 오른쪽 다리를
일상에 존재하는 작은 균열, <도쿄기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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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초기 대표작인 <뉴욕 3부작> 중 첫 번째 에피소드 <유리의 도시>가 그래픽 노블로 다시 태어났다. 세상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감추어버린 한 남자가 살아가는, 미로와 같은 도시로서의 뉴욕이 종이 위에서 그림으로 그려지고, (소설에서) 선택된 언어들로 되살아난다. 만화가로서는 처음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쥐>의 아트 슈피겔만이 기획에 참여한 작품이기도 하다.
뉴욕에 사는 소설가 퀸은 아내와 아이를 잃고 윌리엄 윌슨이라는 필명으로 탐정소설을 쓴다. 퀸은 한밤중에 폴 오스터라는 이름의 탐정을 찾는, 잘못 걸린 전화를 받는데, 반복되는 잘못 걸린 전화에 그는 폴 오스터라는 사립탐정인 척하고 의뢰인을 만나 사건을 맡게 된다.
폴 오스터의 원작은 폴 카라식과 데이비드 마추켈리에 의해 해체되고 다시 쌓아올려지는 듯한 변신을 통해 그래픽 노블 <유리의 도시>로 다시 태어났다. 사각형의 프레임은 창문, 감옥의 문, 도시의 구역, 빙고판으로
거대한 도시, 혼란의 신화, <유리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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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트렌드’라고 제목에 썼지만, 일본 대중문화에 관한 책이다. 대부분의 글은 <씨네21>과 웹진 <채널 예스> 등에 실었던 원고를 손본 것이다. 기본적으로 저자의 글은 ‘좋아하는 것에 대한 묘사’이고 즐거움의 공유가 목표다. 문화상품 몇개를 접해보고는 일본 대중문화가 한 덩어리로 뛰어나다거나 형편없다고 단정하는 태도를 경계하는 저자는, 자신이 재미있게 본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를 소개하고 그들이 일본사회의 무엇을 말하는지, 나아가 인간과 세계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해설한다.
선별된 작가들은 익히 알려진 스타들이다. 우라사와 나오키, 이토 준지, 사사키 노리코, 히로카네 겐시, 오토모 가쓰히로, 안노 히데아키, 이누도 잇신, 미야자키 하야오, 오시이 마모루, 후카사쿠 긴지의 작업이 작품론과 작가론을 넘나드는 37편의 글로 다루어졌다. 특히 저자가 직접 인터뷰한 적 있는 이누도 잇신, 구로사와 기요시, 이와이 순지 등의 감독론은 명쾌하고 정확하다
일본 대중 문화랑 놀자, <컬처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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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 아시아 영상문화>는 지난 5년간 다양한 국적의 학자들이 참여했던 국제 심포지엄의 성과물로, 아시아 영상문화를 통해 아시아를 횡단하려는 혹은 횡단 가능성을 찾으려고 시도하는 연구서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 실린 총 18편의 논문들이 관심을 두는 건 하나의 특정한 텍스트에 대한 분석 작업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소통과 관계이다. 이를테면 그간의 아시아영화에 대한 연구는 오리엔탈리즘적 접근 혹은 민족주의적 접근에 한정된 경향이 있었다. 국가 혹은 민족적 정체성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던 기존의 연구들은 최근 증가하고 있는 국가와 민족을 가로지르는 문화현상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 책이 제시하는 것은 제목에서도 암시되었던 바, ‘트랜스’(trans)다. 물론 여기서 ‘트랜스’는 그저 넘어서기의 의미가 아니라 “경계, 균열, 주변부, 이산적인 ‘제3의 공간’을 의미”하며, “존재의 다른 상태로의 전이”를 뜻한다.
이 책은 ‘트랜스 아시아 영상문화’,
아시아적 영상문화 공동체의 발견, <트랜스: 아시아 영상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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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부 기자들 가운데 일부는 정신분열을 겪는다. 만나는 사람이 예술가이다 보니 자신이 기자인지 예술가인지 헤맨다. 뒤늦게 작가가 되려 해도, 작가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수업시대는 길고 혹독하다. 옆에 앉은 동료들도 같이 정신분열을 미약하게나마 겪는 수밖에 없다. 정신분열이라는 수업시대를 마치고 작가로 4년 전에 등장한 조선희의 첫 소설집은 몇 군데서 매우 햇빛 찬란하다. 작가의 삶 또한 분열적인 것인지 그는 서사에의 열망, 에세이스트로서의 정열, 자기 죄를 속죄하고픈 몸부림 사이를(그의 연배들의 배를 가르면 죄의식이 군내를 풍긴다) 진자 운동한다.
그를 사석에서 한두번 봤을 뿐이지만, 소설집을 쓴 작가가 누구인지는 정말 알기 어렵다. 작품마다 어조와 문체와 화자의 세계관이 판이하다. 그의 머릿속에선 한타 넘는 개성있는 군상이 기거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 군상의 출처는 조금씩 다른 것 같다. 작가가 서사에의 열망에 전적으로 자기를 던졌을 때, 작가는 놀라운 수확을 거둔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발랄한 발자크, <햇빛 찬란한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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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거나 만화를 보다보면 귓가에 BGM이 흐르는 듯한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야가미 유의 <고-웨스트!>도 그런 작품 중 하나이다. 책을 펼치는 순간 펫 숍 보이즈의 <고 웨스트>가 등 뒤에서 쾅쾅 울려대는 듯한 느낌이 든다. 강약없는 선이 그려내는 시원한 서부의 풍광, 빠른 호흡으로 끊임없이 터지는 사건·사고들 그리고 꼬여 있지 않고 거침없는 캐릭터들이 어우러져 펫 숍 보이즈의 시원한 노래와 함께 한바탕 소동극을 만든다.
주인공 나오미는 영국에서 자란 일본인 고아 소녀. 부모가 신대륙의 서부에 있다는 단서 하나만 가지고 신대륙으로 찾아온다. 하지만 열여덟 소녀가 혼자 여행하기에 서부는 만만한 곳이 아니다. 여기저기서 비정하고 이유없는 총격전이 난무하고, 때로는 사막이 때로는 백인 카우보이를 증오하는 인디언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다. 그런 나오미의 길을 만들어주는 것은 서쪽만을 향해 전진하는 말 ‘레드’, 그리고 나오미의 오빠라고 우기는 흑인이며 현상
서부시대 가족의 탄생, <고-웨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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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우리는 또 다른 히치콕 책을 필요로 하는가? 최근 들어 서구의 영화 관련자들은, 그렇지 않아도 이미 많은 책들로 빼곡이 채워져 있는 히치콕 서가에 또 한권의 책이 추가될 때마다 그렇게 자문하곤 한다. 히치콕은 영화 자체를 정의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혹은 단연코 영화사상 가장 유명한 영화감독이었기 때문에, 영화 서적의 주제로 가장 많이 다뤄진 인물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여전히 영화서적 출판이 활발하다고는 할 수 없는 국내의 경우를 서구의 경우와 비교하는 것이 무리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도 히치콕에 대한 인터뷰집, 전기, 비평서를 몇종 가지고 있기에 <히치콕>이란 제목을 단 책이 새로 나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같은 질문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히치콕 책이 또 필요하단 말인가? 이에 대해 패트릭 맥길리건이 쓴 책은 긍정적인 대답을 마련해놓는다.
오해를 막기 위해서 먼저 지적하자면, 맥길리건의 <히치콕>은 히치콕이 스크린 위에
인간 히치콕에 대하여, <히치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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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파리라는 도시가 이국과 모던함의 대명사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있는 대로 혀를 굴려 에디트 피아프의 샹송을 읊조리고, 대사 하나 없는 프랑스영화를 꼿꼿이 앉아 보는 것이 로맨티스트의 증거였다. 프랑스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우리는 비교적 빨리 털어버린 듯하지만, 일본에서는 아직도 그 기운이 적지 않게 남아 있나보다. 그들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통해 프랑수아즈 사강을 기억하고, 시부야케이의 음악에서 프렌치 팝의 리듬을 되새기고, 하라주쿠 라포레 백화점에서 로코코풍의 프릴 드레스를 쇼핑한다. 나카노 시즈카의 <별을 새기다>는 그렇게 잔존하고 있는 프랑스풍 모던함의 만화 버전이다.
나는 처음 나카노의 만화를 보고 당연히 1980년대의 작품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스타일이 촌스럽다거나 고루한 정서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 날카로운 세련미, 한 획의 허점도 찾을 수 없는 정교함, 쿨한 척하면서도 로맨틱한 정서는 자꾸만
아닌 밤중에 칼로 새긴 별똥별, <별을 새기다>